“그럼 말해보세요. 어떻게 해야 용서해 주실 건데요?”윤하경은 강현우라는 사람은 앙심 품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오늘 일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몰랐다.그런데 강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이래도 아직 화 안 풀리셨어요? 그럼... 한 번 깨물어보시는 건 어때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슬쩍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허, 역시 여자들은 변덕스럽다더니... 오늘 아주 제대로 봤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툭 던졌다.“가자. 나 올라가서 쉴 거니까.”강현우의 말투는 지나치게 차가웠다.윤하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해졌다가 곧 스스로 이해했다.강현우 같은 자존심 강한 남자에게 그런 식으로 퇴짜를 놓았으니 지금쯤 쫓아내지 않는 게 다행일 수도 있었다.강현우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갔다.윤하경은 한참을 서 있다가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천천히 뒤따라 계단을 올랐다.그의 방문은 닫히지 않은 채 열려 있었고 침대는 비어 있었고 욕실에서는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그가 샤워 중인 것 같았다.윤하경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옷을 벗은 후 욕실 문을 열었다.욕실 안은 수증기로 가득했고 강현우는 샤워기 아래에서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물줄기는 조각상 같은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며 은근히 야릇한 분위기를 자아냈다.그는 윤하경이 다가온 걸 눈치채지 못했다.물소리가 커서였고 또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윤하경의 작고 따뜻한 몸이 그를 뒤에서 살짝 안았을 때야 그는 눈을 떴고 그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오빠, 이제 화 좀 푸세요... 네?”윤하경의 말투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보통 남자라면 웬만해선 이겨내기 어려운 일부러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였다.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그녀는 그 앞으로 돌아와 그를 올려다봤다.그보다 어깨 하나는 작은 키로 인해 자
욕망의 전장이 욕실에서 침대로 옮겨졌을 때 윤하경은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그럭저럭 응해주던 그녀였지만 나중엔 완전히 힘이 풀려버려서 강현우가 어떻게 하든 그냥 이불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사실 언제 끝났는지도 잘 몰랐다.다만 기억나는 건 뜨겁고 묵직한 몸이 밤새도록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렇게 지독하게 휘둘린 밤이었지만 오히려 그날 밤 윤하경은 유난히 편안하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강현우보다 먼저 눈을 떴다.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를 돌아보려는 순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남자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아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현우의 몸은 여전히 뜨겁고 묵직했다.딱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그녀는 허리 뒤쪽에서 단단하게 눌려오는 감촉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곧이어, 강현우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움직이지 마.”그러자 윤하경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지금 이 상태에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젯밤의 2차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그럴 기력은커녕 이미 온몸이 뻐근해서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찼다.결국 그녀는 얌전히 강현우 품 안으로 몸을 더 말아 넣었다.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안기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안했다.‘진짜 화가 풀린 걸까?’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강현우가 드디어 깨어났다.몸을 움직이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눈을 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끼자 윤하경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윤하경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그런 그녀를 본 강현우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또 무슨 꿍꿍이야?”윤하경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대표님, 이제는... 화 안 나신 거죠?”그러자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윤하경의 턱을 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턱선을 따라 닿았고 그녀는 조금 아픈 듯 눈을 찌푸렸다.“아야...
“저기... 어제 말했던 그... 누가 현우 씨를 암살하려 했다는 건 어떻게 됐어요?”민진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 그 일은... 안 묻는 게 좋습니다.”“네...”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머릿속이 복잡해서였을까.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아홉 시 반이나 되었다.입구에서 우지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윤 대표님, 지금 오세요? 회장님께서 찾고 계세요.”“아버지가요?”윤하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이유도 모른 채 짜증부터 치밀었다.“왜요?”우지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하경의 시야에 윤수철이 들어왔다.멀지 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얼굴에는 마치 온 세상을 빚졌다는 듯한 불만이 가득했다.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든 사무실에서 하시죠. 여긴 일하는 곳이에요.”윤하경은 윤수철에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런 모습을 직원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가정사로 사람들 뒷얘기거리 되는 건 질색이었다.그렇게 말하고 윤하경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윤수철도 뒤따라 회장실로 들어왔고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윤하경은 소파에 털썩 앉아 무표정하게 물었다.“뭐 때문에 부르셨어요?”“뭐 때문에 부른 것 같아?”윤수철은 쏘아붙이듯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론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온 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한 걸 보면 회사에 해가 되는 짓밖에 안 했어.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그래서요?”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녀의 얼굴엔 전투태세를 갖춘 고슴도치 같은 기운이 번졌다.“그래서 말인데...”윤수철은 말끝을 흐리며 손짓했다.그러자 한 남자가 들어왔다.브랜드 슈트에 번듯한 외모를 가진 멀쩡해 보이는 남자였다.하지만 사내에서 강현우를 오래 마주친 윤하경 입장에선 그 남자는 마치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가 아닌 그냥 하이에나처럼
하지만 그 표정은 기쁨이 아닌 놀람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믿기지 않는다는 놀람 그 자체였다.“이게 한빛 그룹이랑 오건우 씨의 계약서라고?”“네가 이걸 따냈다고?”윤하경은 그를 스윽 쳐다봤다.“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 나가도 되겠네요.”윤수철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기쁨은커녕 흐린 눈동자엔 의심이 가득했다.한참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던 윤수철은 낮게 물었다.“그래서 이게 네가 밤새 안 들어온 이유라는 거냐?”윤하경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윤수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악의적으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계약을 따낸 딸에게 던진 첫마디가 딸이 잠자리를 해서 따온 거냐는 식의 비아냥이라니...이미 실망은 여러 번 해봤지만 이번엔 아예 달랐고 심장이 꽉 막힌 듯 아팠다.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를 삼킨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일어나 윤수철 앞으로 걸어가면서 비웃듯 말했다.“제가 어떻게 따냈는지 그건 상관없잖아요. 중요한 건 계약서가 제 손에 있다는 거고요. 필요하면 제가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윤 회장님, 저한테 괜히 성질내지 마세요. 저도 성질내면 다 같이 골치 아플 수 있거든요.”그 말에 담긴 조소와 경고는 너무도 분명했기에 자기 딸에게 그런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윤수철은 눈가를 떨며 손을 치켜 올렸지만 이번엔 윤하경이 먼저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막았다.“회장님, 제발 현실을 좀 직시하세요. 제가 계약서를 따낸 방식이 궁금해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임수연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나 생각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들여온 신임 부대표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그녀는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한 시간 안에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제가 직접 내던질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하며 얼굴이 굳었다.“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윤하경은 냉소를 터뜨리며 그 말은 무시하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등이 곧게 펴진 그녀
30분쯤 뒤에 윤하경은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달콤한 카푸치노를 시켰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잠시 후,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하경 씨는 여전히 시간 잘 지키시네요.”“이번엔 뭘 찾으셨어요?”윤하경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사설탐정인 노강훈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이번 의뢰는 정말 죽는 줄 알았네요. 그래도 원하셨던 자료를 찾았습니다.”그는 그녀 앞으로 서류봉투 하나를 던졌고 윤하경은 조용히 받아들여 펼쳐보았다. 예상한 만큼 특별히 놀랄 건 없었고 구씨 일가를 조사했더니 역시 쉽게 드러날 만한 허점은 거의 없었다. 구정수라는 인물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뒤에서는 수단이 꽤 거칠었다.만약 구지호가 무심코 흘린 말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 정보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이건 지금 자신의 유일한 방패였기에 그녀는 서류를 잘 챙겨 가방에 넣었다.“잔금은 오늘 저녁 여섯 시 전에 송금할게요.”“감사합니다.”노강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말끝을 망설이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우린 오래 협력했잖아요. 돈은 충분히 받았고 그래서 한 가지 정보를 더 드리려고요. 공짜로요.”그가 말을 마치고는 몸을 살짝 숙여 윤하경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듯 낮은 목소리로 꽤 오랫동안 무언가를 속삭였다.윤하경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말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노강훈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는 걸 보고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하경 씨, 마음 이해합니다. 이게 가족 얘기다 보니 원래는 말씀드릴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못 믿겠다면 그냥 제가 괜한 말 했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그 말만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커피숍을 떠났다.남겨진 윤하경은 긴 시간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어떤 행동도 없이, 말없이 앉아만 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커피잔을 들었지만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윤수철이
윤하경은 잠시 말이 막혔으나 곧이어 살짝 웃으며 강현우를 바라보는 눈빛에 조심스러운 애교가 섞였다.“강 대표님, 혹시 저...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강현우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컵라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말해.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온 거야?”그의 말은 까칠했지만 이미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넥타이를 느슨히 푸는 모습은 어지간히 피곤해 보였다.윤하경은 손에 든 컵라면을 들고 주방으로 가 남은 것들을 정리했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단지 머물 자리를 구하러 온 건 아니었고 지금 그녀에게는 강현우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의 사람 중 몇 명만 빌릴 수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윤하경은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설프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손에 힘은 별로 없었지만 강현우는 뜻밖에 그걸 즐기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봐선 일이 꽤 복잡하겠네.”“강 대표님한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이잖아요.”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혹시 사람 몇 명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강현우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사람?”윤하경은 소파 뒤로 돌아가 강현우 앞에 앉았다.“요즘 좀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요. 위험한 건 아니고 그냥 좀 분위기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강현우는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말을 아꼈고 표정만으로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점점 불안해졌다. 사실 외부에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강현우 쪽이 훨씬 믿을 수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부탁하고 있는 거였다.“뭔 일인지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할게.”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강의 상황을 말해주었다.“지난번 구씨 가문의 일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이번엔 주미나 씨랑 얘기를 좀 해보려고요.”“주미나랑 얘기하겠다고 이사까지 오냐?”강현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놓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윤하경은 딱히
여전히 어젯밤과 같은 방이었다. 윤하경이 들어섰을 때 방 안은 천장의 메인 조명이 꺼져 있었고 침대 옆에 놓인 노란빛 스탠드 두 개만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덕분에 넓은 방 안은 흐릿하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침대가 정갈하게 정리된 걸 본 순간 윤하경은 무의식적으로 어젯밤 강현우의 광기를 떠올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허리를 슬쩍 짚는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생각은 좀 정리됐어?”놀라 돌아본 그녀의 눈앞엔 막 샤워를 마친 강현우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허리엔 흰색 타월 하나만 간신히 두른 채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일부러 유혹하려는 듯했다.윤하경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그게... 어제는 제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괜한 말한 거였어요. 화내지 마세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하...”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윤하경의 턱을 집고 낮게 쏘아붙였다.“네가 거짓말할 땐 너무 티 나거든? 적어도 내 앞에선 제대로 연기라도 해.”윤하경은 억지로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살며시 감았다.“그래도 현우 씨 눈은 못 속이죠. 제가 뭘 꾸미겠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아양에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눈빛에 마음이 불안해진 윤하경은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그게... 오건우 씨가 그러는데 어젯밤에 다른 여자랑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현우 씨가 부정도 안 하시길래 저도 그냥 그렇게 믿었고...”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려 강현우를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그런데 진짜로 질투한 건 아니에요. 그냥... 좀 껄끄럽고 기분이 그랬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강현우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껄끄러워?”차가운 말투에 윤하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아, 아니에요. 이제 안 그래요.”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수습하려 했지만 강현우는 말도 없이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던졌고 몸을
“사과할 거면 최소한 진심은 보여야지. 안 그래?”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번엔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았고 그는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집요할 땐 뭔가로 분풀이해야만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그게... 다른 방법은... 안 될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의 비웃음이 돌아왔다.“안 되진 않아. 내 앞에서 입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든가.”윤하경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전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뇌리를 스치며 본능적으로 판단이 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종이봉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그가 건넨 옷을 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선 윤하경은 얼굴이 금세 토마토처럼 빨개졌다.워낙 체격이 좋았던 터라 뭘 입어도 잘 어울렸지만 이런 종류의 옷은 평생 처음이었다. 지난번 헤븐 클럽에서 입었던 의상이 순진한 교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이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수위였다. 딱히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부끄러워서 사람 앞에 못 나가겠다는 딱 하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윤하경은 욕실 안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 쪽 거울에 비친 강현우의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고 깜짝 놀란 윤하경은 뒤돌아보다가 머뭇거렸다.“그... 그냥 이거 벗을게요...”그녀가 욕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강현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벽에 몰리게 된 윤하경은 당황해 두 팔로 본능적으로 앞을 가리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손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모르는 척하긴. 네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 땐 이러지 않았잖아.”그의 말엔 조롱이 묻어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지만 그 내용은 귀에 거슬렸다.아무리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 말에 윤하경은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눈을 들고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턱을 틀어잡았다.“그러니까 우리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