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윤하경은 침대 머리맡에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지만 어딘가 익숙했다.받으려던 찰나,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었고 윤하경은 눈썹을 찌푸렸다.귀찮은 광고 전화인가 싶어 내려놓으려던 순간,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하경 씨, 오늘 오후 두 시까지 안 오시면 제가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겠네요.]그제야 떠올랐다. 지난번,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해 왔던 바로 그 번호, 그때처럼 정체도 밝히지 않고 수상쩍은 말투를 이어가는 그 사람 말이다.윤하경은 입꼬리를 비틀며 속으로 비웃었다.진짜 중요한 사람이면 앞에 당당히 나와야지, 꼭 저렇게 구린 구석이 있는 사람들만 뒤에서 연락 질이다.최근 적도 많아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대놓고 협박하는 사람은 한정돼 있었다.딱히 상대해 줄 마음도 들지 않아, 그대로 핸드폰을 꺼버렸다.이상한 연락에 기분이 상한 그녀는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샤워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강현우가 불러둔 가사도우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배는 고프고 냉장고엔 아무것도 없어 결국 외출해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이 늦어졌지만 막 앉자마자, 어딘가 수상한 기운이 스멀스멀 다가왔다.그녀가 자리 잡고 앉자마자, 어디선가 우르르 몰려든 남자들이 식당을 장악했다.다들 키가 크고 덩치도 좋았으며 검정 슈트를 입고 있었고 등장만으로도 레스토랑 안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윤하경이 있는 테이블은 순식간에 포위됐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여기 앉을 생각이세요?”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제가 먼저 앉았거든요. 자리는 다른 데 많으니까 딴 데 가시죠.”그중 제일 앞에 선 남자가 입을 열었다.“하경 씨, 우리 사모님께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사모님?”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누구죠?”“직접 오시면 아실 겁니다.”그의 말투는 예의 바른 듯하면서도 전혀 협상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릿속을 빠르게
“윤하경 씨, 조용히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러면...”그녀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낮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쏘아보는 눈빛엔 노골적인 위협이 담겨 있었다.“안 그러면 저희도 어떤 일이 생길지 장담 못 합니다.”윤하경은 이를 꽉 깨물고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강현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가라앉았다.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짧은 침묵 속에서 기억을 더듬었고 이내 머릿속에서 그 남자의 정체를 떠올렸다.강현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바로 전화를 끊고 회의실로 돌아와 단호하게 말했다.“오늘 회의는 이쯤 하죠.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가봐야겠습니다.”“강현우, 넌 이제 할아버지도 안 보이나 보지? 아직 자리에 계신데 네 멋대로 일어나겠다는 게 말이 돼? 그리고 오늘 저녁엔 가족 만찬이 있는데 그것도 빠지겠다는 거냐?”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강현석을 바라봤다.차가운 시선 끝에 조용히 코웃음을 흘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강 회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말은 정중했지만 태도는 전혀 물러섬이 없었고 그의 뒷모습에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그가 회의실을 나서자, 안에 남은 사람들 사이로 곧바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아버지, 강현우 저 자식 너무한 거 아닙니까?”강현우의 삼촌 강현민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요즘 회사가 잘 나가긴 해도 그건 우리가 기반을 닦아놓은 덕 아닙니까. 그런데 저렇게 제멋대로 구는 건 정말 도를 넘은 거죠.”“그러게 말이에요.”조금 전 무시당했던 강현석이 비웃으며 맞장구쳤다.“뭐, 그래도 잘난 놈이니까 저럴 수 있겠죠.”“잘난 건 무슨.”강현민도 고개를 저으며 거들었다.“걔가 뭘 이룬 게 있다고. 전부 아버지가 밀어준 덕이지, 제힘으로 이룬 건 없잖아.”강현석은 다시금 냉소를 흘리며 강호석을
선두에 서 있던 남자는 윤하경이 순순히 따라오는 걸 보고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윤하경은 말없이 그들을 따라 대문을 지나고 여러 번 좌회전과 우회전을 거쳐 결국 별장 안의 작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그 순간 그녀는 앞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눈에 익은 얼굴, 다름 아닌 강씨 가문의 안주인 한선아였다.하지만 한선아는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이 정도 소란이라면 누구든 눈치챌 만한데 그녀는 한참을 꽃에 물을 주다 말고서야 고개를 들었다.“꽤 침착하네. 어쩐지, 우리 현우가 관심 가질 만하지.”그녀는 손짓으로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을 물렸다.“다들 나가봐. 단둘이 얘기 좀 해야겠어.”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뜨자, 정원의 작은 테이블엔 한선아와 윤하경, 두 사람만 남았다.한선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짓했다.“앉아요.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해요.”그 말투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느긋했다.윤하경은 이 자리가 왜 마련되었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윤씨 가문이야 상류층이라기엔 부족할지 몰라도, 이쪽 세계에서 얼굴을 비춘 적은 몇 번 있었다.한선아도 그녀를 본 기억이 있는지, 의외라는 듯 눈빛을 스쳤다.“난 윤하경 씨가 나를 좀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윤하경은 가볍게 웃었다.“저도 사람인데요. 사자도 아니고 무서울 이유는 없잖아요.”한선아도 피식 웃으며 찻잔에 차를 따랐다.“현우가 조만간 약혼할 거, 알고 있겠죠? 요즘 둘이 붙어 다니는 거, 안 봐도 알겠네요. 하지만 말이죠. 우리 강씨 집안에는, 윤씨 가문의 딸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말은 부드러웠지만 속뜻은 분명했다.윤하경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시선을 내렸다.솔직히 말해서 처음부터 ‘사모님’ 소리 들으며 그 집안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시당하는 느낌은 묘하게 거슬렸다.“그럼 미리 축하드려요.”윤하경은 다시 고개를 들고 평정심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드문드문 떨어지며 그 빛이 윤하경의 몸에 몇 가닥 스쳤다.그 모습에 한선아도 윤하경의 미모에 눈을 뗄 수 없었다.하지만 아쉽게도, 강씨 가문의 문을 들어가려면 외모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바로 탄탄한 집안 배경이다.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그 웃음은 차갑고도 예의 바른 미소였다.“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받아야 할 건 현우 씨가 이미 주었으니 더 이상 받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만약 다른 일이 없다면 전 이제 가도 될까요?”한선아는 윤하경을 지켜보며 그녀가 끝까지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는 모습에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그 냉정함이 한편으로는 그녀가 강한 심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한선아는 비웃으며 윤하경을 쳐다봤다.“그럼 이 돈을 받지 않으면 나는 편히 잠을 잘 수 없겠군요.”한선아의 시선은 날카로웠다.윤하경이 들어왔을 때부터 그녀는 상냥한 태도를 보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오늘 처음으로 그녀의 표정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수표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이 돈이 한선아가 안심하기 위한 돈임을 이해했다.원치 않지만 이 돈을 받아야만 지금 이 집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잠시 고민한 후, 그녀는 결국 손을 뻗어 수표를 잡았다. 하지만 손이 수표에 닿자,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손목에 얹혔다.그 힘이 꽤 세서 손목이 아프게 느껴졌고 윤하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손을 따라갔고 잠시 멈칫하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내가 40억 값어치밖에 안 돼?”강현우의 입꼬리가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답하려 했지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답을 하지 않았다.그 돈은 본래 받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집을 나가면 그 수표를 찢어버릴 생각이었다.그런데 이렇게 기묘하게도, 강현우가 그때 도착했다.그가 말을 하지 않자, 강현우는 점점 더 강한 힘을 가하며 그녀를 끌고 문밖으로 향했다.한선아는 급히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윤하경은 등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강현우는 무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았고 윤하경은 보조석에 앉아 그의 차가운 표정을 보며 떨고 있었다.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강현우가 이렇게 화가 나 있는 상황에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또 자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차는 시내를 빠져나가, 빠르게 도로를 달렸다.윤하경은 점점 더 불안해지며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상이 떠올랐고 길 한가운데 버려진 시체까지 떠올랐다.윤하경은 목이 마르듯 삼키며 결국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현우 씨, 이 정도는 아니죠?”강현우는 차갑게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말할 줄 아네.”그는 말과 함께 핸들을 돌려 차를 산길로 몰았다. 길은 구불구불하고 숲이 빽빽하게 자라 있어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그 풍경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더욱 두려움을 느꼈다.이 산길은 그녀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다. 강현우가 이렇게 화가 나 있다면 그녀를 아무 곳에나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을 떨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차를 계속 밀어붙였다. 차는 산 정상에 도달했고 강현우는 차에서 내려 몸을 일으켜 차 문에 기대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고 담배 연기는 바람에 휘날리며 금세 사라졌다.윤하경은 차 안에서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차 밖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소리만 들리며 그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차에서 내리면 강현우가 그녀를 절벽으로 밀어버릴 것만 같았다.담배 한 대를 다 핀 강현우는 돌아서서 윤하경을 쳐다보며 손을 차 창문에 걸쳤다.“내려.”윤하경은 입술을 꽉 물고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너무 추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윤하경은 그가 이미 더 이상 참을성이 없다는 걸 알았고 결국 차에서 내려야만 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앞에 펼쳐진 절벽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고 윤하경은 다리가 떨리며 공포를 느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윤하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저는 얼마를 줘도 현우 씨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고 생각해요.”윤하경은 자신의 대답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 자신의 IQ와 EQ가 최고 수준에 달한 것 같았고 강현우도 만족한 듯 눈빛 속의 분노가 많이 가라앉았다.“그래?” 강현우가 웃을 듯 말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그는 분명히 윤하경의 눈 속에 있는 교활함을 봤지만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았다.“네, 아무리 많은 돈도 안 돼요.”남자는 달래야 한다고들 하던데 윤하경은 강현우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보고 주변의 기압도 이제 처음처럼 낮아지지 않았음을 느꼈다.그리고 큰 용기를 내어 강현우의 허리를 감싸며 애교를 부렸다.“오늘 일은 진짜 제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현우 씨 어머니 데려가져서요. 그 돈, 전 정말 원하지 않아요.” 그녀는 이 말이 진심이었다. 한선아가 준 40억은 꽤 큰 액수였지만 윤하경은 그런 정도로 돈에 구애받을 만큼 가난하지 않았다.게다가 강현우에 대해 잘 알기에, 만약 그 돈을 받았다면 1초 후에 은행에서 돈을 뽑은 뒤, 그다음 순간 강현우가 사람을 보내 돈과 함께 그녀를 묻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돈과 목숨, 무엇이 더 중요한지 윤하경은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40억 때문에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전혀 없었다.윤하경은 애교를 부리면서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만들었고 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그는 손을 들어 윤하경의 얼굴을 가볍게 쳤다. “잘했어.”통증이 사라지자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아직도 살아남았다고 기뻐할 틈도 없이, 강현우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대었다.이 키스는 강하게 밀어붙이는 듯한 압박감이 있었다. 윤하경은 그가 갑자기 미쳐버릴까 두려워서 밀어내지 못했다.그저 조심스럽게 협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정신이 아득해졌다.눈을 크게 뜨며 놀란 윤하경은 자신이 강현우에게 끌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그때 그녀는
민진혁은 강현우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마주 앉아 있었지만 윤하경은 별로 입맛이 없었다.원래는 배가 고팠지만 산 정상에서 느꼈던 그 공포감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무기력해졌다.강현우는 우아하게 식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입맛이 없어?”윤하경은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대답했다.“네, 없어요.”그러고는 자신의 접시에 음식을 한 입 집어넣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그럼 천천히 먹고 다 먹고 나서 빨리 자. 난 할 일이 좀 있어.”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그가 나가자 윤하경은 숨을 내쉬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고개를 들고 강현우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을 따라갔다가, 그가 사라지자 시선을 돌렸다.사실 강현우 같은 남자에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그가 보여주는 완벽한 모습은 누구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윤하경도 예외가 아니었다.그녀는 항상 자제하려고 했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뛰어난 남자가 자기 눈앞에 있고 또 여러 번 깊은 대화를 나누었으니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하지만 지금, 윤하경은 강현우가 무서웠다. 강현우가 미쳐버리면 정말로 두려운 존재였다.오늘 자신은 죽음과 단 몇 센티미터 차이밖에 없었고 윤하경은 진심으로 무서웠다.그래서 무서워지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그날 밤 강현우의 방문을 두드린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이었는지 깨달았다.그녀는 식탁에 앉아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다 하인이 다가와 물었다.“하경 씨, 음식이 다 식었는데 다시 데워 드릴까요?”윤하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하인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괜찮아요, 고마워요.”그녀는 식기를 내려놓고 일어나서 위층으로 올라갔고 간단히 몸을 씻고 나왔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윤하경은 안도하며 침대에 몸을 감쌌고 부드러운 침대의 촉감이 마침내 그녀의 마음을
윤하경은 그 말을 듣자 어이가 없었다.“...”‘왜 아직도 안 자고 있지?’잠시 생각에 잠긴 윤하경은 반쯤 꿈속에 있는 듯한 모습을 연기하며 한마디 중얼거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다행히도, 강현우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줬다.그녀에게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지 않았고 덕분에 그날 밤은 비교적 평온하게 지나갔다.밤중에 언제 비가 내렸는지 모르지만 윤하경이 눈을 떴을 때, 창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아침에 일어나자 머리가 조금 느리게 돌아갔다.윤하경은 폭우를 한동안 바라보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다.하지만 어젯밤 그녀를 감쌌던 뜨거운 체온은 이제 사라져 있었다.윤하경은 잠시 멈칫하고는 몸을 돌려 침대에서 일어났다.오늘은 나갈 일이 있었기에 윤하경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가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강현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그제야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고 그때 하인이 윤하경을 보고 서둘러 물었다.“하경 씨, 아침 뭐 드시고 싶으세요?”“대표님은 일이 있어 먼저 나가셨고 아침은 혼자 드시라고 했어요.”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괜찮아요, 제가 좀 나가야 할 일이 있어서요.”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윤하경은 택시를 타고 잠시 고민하다 강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은 사람을 만나서 일이 있어서 돌아 안 올 거예요.”간단히 메시지를 남긴 후, 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댔다.최근의 일들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집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다시 차를 타고 오건우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원래는 어제 오후에 만날 예정이었지만 여러 가지 일이 생겨서 오늘 아침으로 일정을 변경했다.커피숍 안에서 오건우는 흰색 정장을 입고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길게 뻗은 다리가 서로 엇갈려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윤하경이 들어서자, 많은 여성이 그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그런데 오건우는 차가운 얼굴로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