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잠시 멍하니 있었다가, 강현우의 눈이 살짝 붉게 충혈된 걸 보고서야 자신이 꿈꿨다는 걸 알아차렸다.강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악몽 꿨어?”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고 익숙하게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열은 내렸네.”그러곤 침대 옆 버튼을 눌렀다. 곧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들어와 윤하경의 상태를 점검했고 진료를 마친 뒤 강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강 대표님, 하경 씨의 열은 다 내렸습니다. 상처 부위만 잘 관리해 주시면 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강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도 마침내 꿈에서 완전히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고 말을 꺼내기도 전, 병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났다.“대표님,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들어오시랍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바쁘다고 전해.”그러자 문밖에서 우지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께서 이번에도 안 오시면 박씨 가문과의 혼인을 본인이 직접 발표하시겠다고 하십니다.”그 말에 강현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고 윤하경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창가에는 햇살이 반짝였고 나뭇잎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강현우는 잠시 시선을 떨구더니 조용히 말했다.“여기서 잘 있어. 금방 올게.”윤하경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강현우는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윤하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박씨 가문과의 혼인이라니 이제 정말 나를 놓아주는 걸까.’강현우가 떠난 병실엔 그녀의 숨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 고요함은 오히려 두려울 정도였다.그때, 병실 문이 살짝 열리며 누군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우지원은 슬쩍 웃었다.“혹시... 배고프실까 봐 주방에 부탁해서 삼계탕 준비했어요.”윤하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우지원은 조심스럽게 트레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 식탁 위에 정성스럽게 놓고는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단지 삼계
윤하경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말끝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명확했다.우지원은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멈칫하다가 결국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더는 붙잡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제가 너무 무례했네요. 솔직히 말해서 저라도 누가 총을 겨눴다면 그렇게 용서 못 했을 거예요. 이건 강 대표님이 직접 주방에 부탁해서 끓인 거예요. 깨어나면 꼭 먹이랬거든요. 그래도... 조금만 드시고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윤하경은 여전히 창밖만 바라봤고 삼계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강씨 저택.강현우가 도착했을 때, 거실 중앙에 앉아 있던 강호석은 지팡이를 손에 짚은 채 무표정하게 그를 맞이했다.거실 한가운데에는 들것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강현석이 누워 있었다.강호석이 입을 떼기도 전에, 강현우가 먼저 능청스럽게 소리를 냈다.“어이쿠, 이게 누구야? 둘째 형님 아니셔? 형, 누워 있는 모습이 아주 예술인데? 얼굴도 안 보여서 못 알아볼 뻔했네.”붕대에 칭칭 감겨 눈만 간신히 드러난 강현석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이를 악물었다.하지만 입을 열 힘조차 없는 상태라, 겨우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으로 강호석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었다.강호석은 무겁게 지팡이로 카펫을 내려치며 단호하게 외쳤다.“닥쳐라.”그러고는 붉어진 눈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네가 이런 소리 할 처지냐? 네 형 저 모양 된 거, 네 짓이지?”강현우는 두 손을 천천히 들며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소파에 털썩 앉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시치미를 뗐다.“아니 무슨 말씀이세요. 전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오히려 형이 어디서 굴러떨어졌나 보죠.”그 얄미운 표정에 강호석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고 수염마저 부들부들 떨렸다.“좋아, 사람 불러와.”곧 거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강현석의 수하로 보이는 그 남자는 긴장한 눈으로 강현우와 강호석 사이를 오갔다.“너, 똑바로 말해. 이 자식이
강현우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는 시선을 돌려 강호석을 바라봤다.“할아버지, 둘째 형은 좀 단단히 가르치셔야 할 것 같네요. 전 바빠서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는 강호석의 반응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출입문 앞에 다다랐을 때, 강현우는 한 발짝 멈춰서더니 고개를 다시 돌렸다.“그리고요, 할아버지. 앞으로 결혼으로 저를 협박하지 마세요. 제 허락 없이는, 아무리 여자를 제 침대에 집어넣는다 해도 전 똑같이 다시 내쫓을 겁니다.”그 말투는 존댓말이었지만 말 속의 단 한 마디도 상대를 존중하는 기색은 없었다.오히려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람 속을 뒤집는 칼날 같았다.강호석은 분노로 떨리는 손을 들어 강현우를 가리켰지만 강현우는 그 손끝조차 외면한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버렸다.“콜록, 콜록!”그가 현관을 나서자마자, 안쪽에서 강호석의 격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강현우는 걸음을 멈칫했지만 이내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강호석의 집을 빠져나오던 길, 멀리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자신의 어머니 한선아였다.한선아는 그를 보자마자 다급히 달려왔다.“너... 너 또 네 할아버지 화나게 한 거 아니지? 아까 하인들 말로는 강현석 돌아왔을 때 어찌나 화가 나 있던지... 너랑 연관돼 있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강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엄마랑은 상관없어요. 별일 없으면 엄마는 그냥 엄마 별장에 계세요. 본가엔 너무 자주 오지 마시고요.”“내가 이 집에 안 오면 누가 널 챙기냐?” 한선아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겉으론 조용해 보여도, 이 집 안에 뭔 속셈 없는 사람이 있겠어? 내가 안 지켜보면 넌 그 인간들한테 뼈도 못 추려. 너희 아버지 때도 그랬고.”“됐어요.”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곧게 바라보았다.“더 하실 말씀 없으면 전 가보겠습니다. 할 일 남았어요.”그 말에 한선아는 말문을 닫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뒤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강현우의 팔을 붙
강현우는 박소희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잔뜩 기대가 담겨 있었지만 그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기대를 박살 냈다.“바빠요.”말을 툭 던지더니 한선아가 뭐라고 불러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뜰을 빠져나갔다.차를 타러 주차장으로 향할 때쯤, 그는 예상치 못하게 박소희가 따라온 걸 보고 잠깐 멈칫했다.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긴 머리가 윤하경과 겹쳐 보이는 순간, 그는 눈을 찌푸렸다.박소희는 숨을 몰아쉬며 조수석 문을 확 열고 들어앉았다.강현우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무표정하게 말했다.“내려.”“싫어.” 박소희는 억지로 입술을 꾹 다물며 버텼다.“강현우, 나도 박씨 가문 딸이야. 널 위해 많이 변했다고!”그녀가 말한 ‘변화’란, 옷차림부터 말투까지 전부 윤하경을 따라 하기 시작한 걸 의미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훑어보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정말 안 내릴 거야?”박소희는 오히려 더 강하게 안전벨트를 매며 버텼다.“안 간다니까? 이모가 오늘은 너랑 꼭 저녁 같이 먹으라고 했어.”강현우는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좋아.”다음 순간, 차는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도로 위를 질주했다.박소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라 안전벨트를 더 세게 움켜잡았다.“좀 천천히 가면 안 돼?”하지만 강현우가 그녀 말을 들을 리 없었다.그는 오히려 더 깊게 액셀을 밟았고 차는 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에 올라타며 시속 200km를 훌쩍 넘어섰다.박소희는 결국 비명을 질렀다.“안 돼! 너무 빨라! 세워! 멈춰!”강현우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빛조차 미동이 없었다.속도는 멈출 기미 없이 계속 올라가고 박소희는 입을 틀어막은 채 얼굴이 창백해졌다.차 안에서 토할 것 같은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이 남자 앞에서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 필사적으로 참았다.강현우는 옆에서 숨죽이는 박소희의 모습을 흘끗 보더니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마침내 도로 한켠에 차를 세우자, 박소희는 그대로 문을 열
강현우는 윤하경 눈에 비친 당황한 기색을 보자,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상처 상태 좀 보려는 거야. 의사 말로는 오늘 약을 갈아줘야 한대. 내가 지금 뭘 하려는 줄 알았는데?”“...”‘괜히 머쓱해지는 건 또 뭐지?’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억지를 부리듯 말했다.“나야... 당연히 그거 보려고 그러는 거 알죠.”“그래?”강현우는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렸고 그 눈빛에 윤하경은 괜히 더 불편해졌다.강현우의 표정은 명백했다. 방금 자기가 보여준 반응이 얼마나 오해였는지, 대놓고 비웃는 눈빛.윤하경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그런 건... 원래 의사가 해주는 게 더 낫지 않나요?”“의사?”강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물어봐. 이 병원에서 누가 감히 네 약을 갈아주겠나.”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맞다. 여긴 강현우의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었다.수술까지 직접 시켜놓은 판에, 약 바꾸는 걸 남한테 맡길 리가 없고 게다가 자신이 지금 ‘그의 여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감히 강현우를 거스를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알겠어요.”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작 대답하곤, 체념한 듯 감싸고 있던 담요를 내려놓았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옆눈질로 흘깃 보더니 얌전히 순순히 따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의자에 앉아 셔츠 단추를 풀었다.그의 손끝이 마지막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자, 윤하경은 어깨의 통증에 그대로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물더니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며 낮게 신음이 흘렀다.강현우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봤고손놀림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바꿨다.하지만 피범벅이 되어 살점에 달라붙은 붕대를 떼어내는 순간, 윤하경의 얼굴은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창백해졌다.원래 피부가 하얀 데다, 평소에도 어깨가 드러나는 슬립 원피스를 즐겨 입던 윤하경.하지만 지금은 붉은 핏자국과 상처들로 뒤덮인 어깨가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강현우는 잠시 그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약통을 챙겨왔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강현우의 위압적인 기세에 입을 열었다.강현우는 그제야 미간을 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이고. 착해라.”칭찬처럼 들리지만 꼭 반려동물을 다루듯 한 말투였다.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만하셔도 돼요. 혼자 먹을게요.”하지만 강현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흘깃 보더니 다시 죽을 떠서 그녀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그 한 숟가락으로 그의 대답은 충분했다.이 공간에서 그녀는 그저 보호를 받는 입장이었고 더는 고집부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윤하경은 묵묵히 한입, 또 한입 죽을 삼켰다.속이 좀 채워지자,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고 강현우를 향한 눈빛에 살짝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강현우는 그 시선을 느끼고 죽 그릇을 내려놓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왜 그렇게 봐?”“아, 아니에요.”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강현우 같은 사람에게서 이렇게 정성껏 챙김을 받을 줄은 몰랐다.늘 남을 깔보는 듯한 싸늘한 얼굴, 세상 모든 게 다 귀찮다는 태도, 그런 남자가, 이렇게 다정할 줄이야.하지만 윤하경은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이건 분명 자신을 유람선에 데려간 건 죄책감이고 이 모든 건 그저 ‘미안함’에서 비롯된 거러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은 찰나, 밖에서 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방해하지 말라고.”그의 목소리는 싸늘했고 문 너머, 잠시 침묵이 흘렀다가 다시 누군가의 간절한 음성이 들려왔다.“강 대표님, 제발... 용천수한테 기회를 한 번만 주세요.”노한성의 목소리에 윤하경은 순간 시선을 돌려 강현우를 바라봤다.그는 이를 악물고 있었고 굳게 다문 턱선이 꽤 날카롭게 드러났다.“대표님, 용천수 지금 거의 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대로 두면 정말 죽습니다. 제발... 지난 세월 대표님 곁에서 충성했던 걸 생각해 주세요.”“나가.”강현우의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했다.
윤하경의 말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지금... 너, 용천수를 위해서 나서는 거야?”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그 사람 상태가 어떤지, 제가 직접 보고 싶어요.”그녀는 조심스레 강현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가도 될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한참 바라보더니 꽤 오랜 침묵 끝에 입술을 누르고 말했다.“정말?”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는 입꼬리를 얕게 누르며 말했다.“좋아. 하지만 나중에 울어도, 책임은 못 져.”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그 순간엔 이해하지 못했다.하지만 곧, 예전에 구지호가 끌려 들어갔던 그 방에 발을 들이고서야 강현우의 말뜻을 완전히 깨달았다.이미 최악의 상황을 마음속으로 그려왔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 상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피투성이가 된 채 고문당한 용천수의 모습은 구지호와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고 무의식적으로 강현우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엔, 어느새 두려움이 번지고 있었다.그녀는 사실 노한성이 말한 고통이 어느 정도는 과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래도 용천수는 강현우의 직속 아니었나, 설마 여기까지 했을까 했는데 지금 보니 노한성의 말엔 과장이 없었다.온몸엔 성한 곳이 하나도 없고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상태였고 윤하경과 강현우가 방에 들어왔는데도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만약 가슴이 미세하게나마 오르내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문득, 강현우가 예전에 배신하면 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땐 그냥 으름장인 줄 알았지만 지금은 농담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만약 자신이 그를 배신한다면 이렇게 될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걸.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에 얹은 손끝으로 그 떨림을 느꼈고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래서 내가 오지 말랬잖아.”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조용히 숨을 들
“넌 참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을 살리더라.”강현우가 말하자 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내리깔고 단호하게 말했다.“전, 사람 살린 적 없어요. 그냥 복수했을 뿐이에요.”그녀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용천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한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윤하경은 원수를 반드시 갚는 사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은혜 역시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노한성이 끝까지 자신이 숨은 위치를 말하지 않고 죽을 각오까지 했던 일은 분명 윤하경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오늘,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서서 용천수를 위해 부탁했다면 그녀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녀는 쉽게 마음이 약해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우는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돌아서려던 강현우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저기...”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저...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지내면 안 될까요?”몸이 다친 상태라서인지 이번엔 강현우가 유난히 인내심이 있었다.“그래? 그럼 어디서 지내고 싶은데?”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제... 원래 살던 아파트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어깨를 흘긋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몸 상태로 거기 가겠다고? 죽고 싶은 거야?”말은 안 했지만 뉘앙스는 절대 안 된다는 뜻이었다.다친 몸으로 혼자 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질 사람도 없으니까.강현우의 거절에 윤하경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그런 모습을 본 강현우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꼭 여기 아니어도 되긴 해.”그 말에 윤하경의 눈이 반짝이며 되살아났다.“정말요?”“응.”강현우는 짧게 대답한 뒤, 말도 없이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서 들어 올렸다.갑작스러운 행동에 윤하경은 깜짝 놀라 그의 목을 급히 감싸며 물었다.“어디 가는 거예요?”“여기 싫다고 했잖아.”말을 마친 강현우는 그녀를 안고 차고로 내려갔고 차에 태워 어딘가로 향했다.윤하경은 그가 아파트로 데려다주는 줄 알고 기대했지만 도착한 곳은 예전에 잠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
“내리면 알게 돼.”강현우가 먼저 차에서 내려 한 손으로 문을 잡아주며 윤하경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윤하경은 잠깐 망설였다. 오늘의 강현우는 뭔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도 부드럽게 느껴지고 말투도 평소보다 훨씬 여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강현우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함께 산장 안으로 들어섰다. 겉으로 보기엔 딱 연인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조용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산장 안은 이미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기사에서나 보던 유명 인사들도 눈에 띄었고 명실상부한 상류층의 모임이었다. 강현우는 윤하경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으며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했고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아무도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둘은 준비된 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그제야 윤하경은 이곳이 경매장이란 걸 알게 됐다.경매라면 몇 번 참석해 본 적 있지만 이 정도 규모는 흔치 않았다. 강현우처럼 평소 시끌벅적한 자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굳이 참석할 정도면 오늘은 정말 뭔가 중요한 물건이 나오는 날이겠구나 싶었다.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고 옆에 앉은 강현우도 특별히 말을 거는 건 아니어서 윤하경은 조금 지루해졌다.그러던 중, 강현우가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숨결이 귀를 스치며 속삭이듯 말했다.“맘에 드는 거 있으면 그냥 불러. 내가 다 사줄게.”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젯밤 일을 사과하려는 걸까? 오늘따라 이 사람, 지나치게 다정하네.’“알겠어요.” 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강현우의 기분을 굳이 망칠 필요는 없었다.“여자 달래는 데 돈 쓰는 게 제일 편하시겠어요. 역시 돈 많은 남자답네요.”강현우는 웃으며 그녀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그런 쓸데없는 질투는 그만해.”그 말은 다정하게 들리면서도, 왠지 모르게 선을 긋는 느낌도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이 사람에게 사랑을 바란다는 건 애초에 무리라는 걸 알았다.그는 착각하게 만들 만큼 다정할 뿐, 진심은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다.윤하경은 그 어깨에 살짝 기대며 웃었다.“그러게요,
[네.]윤하경은 글자만 툭 보내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오늘따라 강현우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의아한 마음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자, 순간적으로 눈앞이 아찔해졌다.[어젯밤 수고했어.]“...”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마치 아무것도 못 본 척 내려놨다.한 대 때리고 나서 사탕 하나 쥐여주는 짓은, 강현우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수법이었다.손목에 남은 붉은 자국이 시야에 들어오자 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시선을 피했다.‘강현우가 정말 박소희랑 약혼하게 된다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답은 하나였다. 이제는 더 이상 이 관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그런 고민들 때문에 하루 종일 마음이 복잡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퇴근 시간이 됐다.사무실을 나서는데 어김없이 배경빈이 나타났고 언제나처럼 해맑은 얼굴이었다.“퇴근하세요? 오늘 저녁 시간 있으세요?”윤하경은 단칼에 대답했다.“없어요.”배경빈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요즘 대표님, 기분 안 좋아 보이셔서요.”윤하경은 배경빈이 그저 말 많은 동생처럼 느껴져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는데 그가 또 따라 내려왔다.“그렇게 차갑게 굴지 마시고요. 오늘 괜찮은 파티 하나 있는데 같이 가요. 기분 전환도 할 겸.”하이힐 소리가 주차장 바닥을 울리는 가운데 윤하경은 말없이 걸었다.그러다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검은차 옆에 기대선 남자, 담배를 손에 들고 무심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강현우는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윤하경과 배경빈을 보자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윤하경은 곧장 다가가 물었다.“여긴 어떻게 오셨어요?”강현우는 낮게, 무심히 말했다.“네 퇴근 기다리러.”차가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지만 그 안엔 알 수 없는 따뜻함이 섞여 있었다. 만약 그가
전화기 너머에서 한선아는 부드럽게 웃었다.“그래, 잘했어. 소희는 정말 착해. 시간 나면 집에 들러서 나랑 차 한잔하자꾸나.”전화를 끊은 뒤, 한선아는 꺼진 휴대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집사가 조용히 다가와 물뿌리개를 건넸다.“사모님, 소희 아가씨는 솔직히 너무 순하고 단순하신 것 같아요. 윤하경 씨 같은 애한테는 상대도 안 될 텐데요.”속내를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집사의 말투엔 이미 머리가 나쁘다는 뜻이 묻어 있었다.한선아 역시 그 뜻을 알아차린 듯 조심스럽게 재스민 화분에 물을 주며 가볍게 웃었다.“우리 집안엔 똑똑한 사람 많아. 박소희 같은 애도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말을 멈추고 손에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내려놓은 뒤, 가위를 들어 시든 꽃 한 송이를 조용히 자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나름 귀한 구경거리지. 나중에 혹시라도 집안에 싸움이 일어날 일도 없고 조용하게 있어 주기만 하면 더할 나위 없지.”한참 생각하던 한선아는 이 집사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근데 말이야, 요즘 현우가 해외에 갔다 왔다며? 혹시 그 사람... 다시 데려온 거니?”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가볍게 웃었고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얼굴이 살짝 굳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사람 좀 붙여봐. 윤하경이야, 그 사람에 비하면 별로 신경 쓸 것도 없어.”한편, 윤하경은 어제 배경빈이 배지훈에게 질질 끌려 나가는 걸 보고 오늘은 안 나오겠거니 했지만 막상 출근해 보니 그는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그것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에서 앉아 있었다.윤하경은 입술을 다물고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를 지나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의자에 앉기도 전에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고개를 들자, 여전히 해맑은 얼굴의 배경빈이 활짝 웃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그는 손에 뭔가를 감추고 있다가 천천히 책상 앞에 다가와 그걸 내밀었다.“짜잔. 요즘 대표님 컨디션이 안 좋아 보여서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윤
박소희는 오늘 아침 일찍 전화를 받고 사무실로 찾아왔다.그동안 강현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아서 그가 직접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원래 외모를 중시하던 그녀는, 정면에 앉아 있는 강현우의 깊고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의 불쾌했던 기억 따위는 다 잊어버렸다.강현우는 손가락 끝으로 턱선을 천천히 훑으며 입을 열었다.“이번 약혼 기사, 박 회장 쪽에서 낸 거지.”강현우의 차가운 말투에 박소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강현우는 원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고 얼굴에 감정 하나 없었으며 목소리 또한 무미건조했다.박소희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그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두 사람 일이 언젠가는 정리돼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랑 상의해서 먼저 언론 쪽에 알린 거야.”강현우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그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지만 어제 기사가 올라왔을 때 자신은 전혀 몰랐다.이건 단순히 박소희 쪽만이 아니라, 사 집안, 아니 어쩌면 아버지까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었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기사가 나갔을 리 없으니까.박소희는 강현우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괜히 마음이 불안해졌다.박소희는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나도 알아요. 남자들이야 원래 좀 그런 거잖아. 지금은 나를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분명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박소희는 원래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그런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니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였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무심하게 바라보았고 박소희는 또다시 용기 내어 말했다.“윤하경을 좋아한다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남자 주변에 여자 하나 없는 게 이상한 거지, 누가 뭐라겠어. 나는 괜찮아. 너랑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거 아무 상관 없어.”그녀는 자신감 있게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억지웃음은 지우지 못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윤하경은 마침내 조금 겁이 났다.“현우 씨... 지금 뭐 하려는 거예요?”그가 평소에도 제정신 아닌 짓을 할 때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필 지금 그녀는 어깨에 상처까지 있는 상태였는데 손목에 수갑까지 채워지고 침대 머리맡에 묶여버리니 진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방에는 은은한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져 있었다. 노란 불빛 아래, 강현우의 눈빛은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시선에, 온몸이 살짝 떨릴 만큼 진심으로 무서워졌다.강현우가 몸을 숙였고 거칠고도 긴 손끝이 그녀의 입술을 스치더니 가느다란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저... 잘못했어요.”윤하경은 눈치 빠르게 바로 항복을 선언했다.하지만 문제는, 이 남자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거였다.“이제 와서 잘못했다고? 좀 늦은 거 아니야?”그의 말은 평온했지만 뜨거운 숨결이 그녀 목덜미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짧지 않다 보니 강현우는 윤하경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가 손을 뻗는 곳마다, 그녀는 마치 어딘가 맥이 끊긴 듯 힘이 빠졌고 금세 거부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돼버렸다.최후의 자존심이라도 지키고 싶어 그녀는 입술을 꽉 물고 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강현우는 어째서인지 그런 부분까지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결국, 억눌러온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그럼에도 강현우는 본격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사냥감을 손에 넣고도 당장 삼키지 않는 맹수처럼, 그저 길게, 천천히 그녀를 가지고 놀았고 윤하경은 수치심에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올 정도였다.“제발... 그만 좀 해요...”윤하경의 목소리는 원래도 부드러웠지만 지금은 훨씬 더 유혹적이었다.울음이 섞인 듯한 떨림은 듣는 사람의 신경을 단단히 자극할 만큼 말이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리더니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뭘 그만 해?”“...”윤하경은 말없이 그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제 위치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어요.”윤하경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입꼬리에 맺힌 쓴웃음은 감추기 어려웠다.아무리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그런 씁쓸한 미소였다.“강 대표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면 이제 약혼하실 거라면 저도 그만 놓아주세요. 이쯤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끝내죠.”그 말은 단호했고 동시에 진심이었다.이 얼마간 강현우와 함께한 시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고 그의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반응하는 자신을 느꼈다.강현우 같은 남자는, 어느 여자라도 쉽게 마음을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왔다.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기에, 자신과 강현우는 애초에 시작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지금,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있다면 더는 이 관계를 이어갈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오히려 지금이, 서로에게 가장 덜 상처 줄 수 있는 시점이었다.자신이 그런 말을 꺼내는 순간, 강현우의 눈빛이 얼마나 짙게 가라앉았는지 윤하경은 몰랐다.“정리하고 끝내자고?”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아까까지 가라앉았던 냉기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윤하경은 그 말투에 본능적으로 움찔했지만 애써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네, 정리하고 끝내요.”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강현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쳤다. 그녀는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졌고 몸이 이불에 파묻히기도 전, 강현우는 그대로 그녀 위로 몸을 덮쳤다.그의 숨결은 뜨겁고도 날카로웠고 숨 쉴 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머리 위로 고정해 버렸다.입고 있던 얇은 재킷은 흘러내렸고 속의 슬립 원피스는 그녀의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그녀 입장에서 바라본 강현우의 얼굴은 위압적일 만큼 가까웠고 그 상황 자체가 모욕적이었다.윤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윤하경은 끝까지 강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강현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갑자기 액셀을 밟자 차가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리며 쏜살같이 도로를 질주했다.윤하경은 강현우가 일부러 이러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안전벨트를 꼭 쥐었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입술은 다문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달린 후에야 강현우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고 차는 결국 그들의 집 강현우의 별장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강현우는 먼저 내렸다가, 따라오지 않는 윤하경을 돌아봤다.그 눈빛이 꽤 날카로워서 윤하경은 움찔했지만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오늘 밤은 제집으로 돌아갈 예요.”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다물며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말끝이 어쩐지 자신 없어졌다.왜 이렇게 말하는 게 미안한 느낌이 드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강현우는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하루 안 본 사이에 말이 좀 세졌네?”그러더니 성큼 다가와 그녀를 차 문에 가둬 세웠고 차가운 눈빛이 바로 코앞에서 쏟아져 내렸다.그의 존재감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숨이 막히도록 강했고 윤하경은 자연스레 뒤로 물러섰다.“아니에요. 그냥... 너무 오래 신세를 졌으니까요. 폐 끼치기도 했고...”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고 표정이 냉랭하게 바뀌었다.“윤하경,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지금 무슨 일인데 이렇게 피하는 건데.”무슨 일이냐고 묻는 그 말에, 윤하경의 속이 울컥해졌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한가득인데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전부 무너질 것 같았다.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말했다.“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그녀의 거짓말에 강현우의 눈빛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그는 원래 참을성이 부족한 사람이었다.“그래, 말을 안 하겠다면 몸으로 말하게 해야겠네.”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는 몸을 낮춰 윤하경을 번쩍 들
강현우랑 자석처럼 서로 끌리는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거지?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그녀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굳었다.하지만 이내 차 안에서 봤던 뉴스가 뇌리를 스쳤고 그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눈 녹듯 사라졌다.다시 웃음을 띠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배경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윤하경의 그런 표정 변화는 강현우의 눈에도 그대로 포착됐고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꼬리를 억눌렀다.곁에 서 있던 배지훈이 강현우가 움직이지 않자 눈길을 따라가다 물었다.“뭐야, 뭘 그렇게 봐?”그러곤 시선을 따라가며 윤하경과 배경빈을 본 순간, 얼굴이 확 굳었다.배지훈은 강현우의 표정을 한번 보고 바로 알 수 있었다.‘아... 또 일이 커지겠구나.’강현우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윤하경과 배경빈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멈춰 섰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고 목소리는 더했다.“어머. 자리 없던데 마침 한 자리 비었네.”배경빈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며 반갑게 인사했다.“강 대표님, 정말 우연이네요.”그때 배지훈도 도착했고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배경빈을 쳐다봤다.“요즘 집엔 왜 안 들어가? 또 어디 돌아다닌 거냐?”배경빈은 웃으며 손을 툭툭 털었고 표정은 예전만큼 밝지 않았다.“하경 씨, 밥 다 먹었죠?”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 먹었어요.”“그럼 우리 먼저 갈까?”“좋아요.”윤하경은 정말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와 배지훈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그 미소는 공손했지만 확실히 선을 그은 표정이었다.“자리가 없다고 하니 이 자리는 두 분께 드릴게요.”그러고는 곧장 계단을 내려갔고 강현우는 윤하경의 그런 태도에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강현우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가 지금 분명 화가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배지훈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서둘러 배경빈을 붙잡았다.“다들 너 찾고 있어. 아버지도 너 못 찾아서 난리야. 지금 당장 집에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