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뒷좌석에 앉은 윤하연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하연은 도발하듯 턱을 살짝 치켜들며 말했다.“언니, 난 오후에 딱히 할 일도 없고. 아빠가 나더러 같이 가서 언니랑 형부랑 쇼핑 좀 하라고 하셨어. 설마 방해가 되는 건 아니겠지?”윤하경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바라보았더니 눈에 가득한 질투심이, 마치 화면에서 튀어나올 듯 선명하게 보였다.윤하경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방해된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왔네? 역시 얼굴 참 두껍다.”그녀는 한 치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고 가차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순간적으로, 윤하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소처럼 순진한 척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는 뭔가 말하려다가 목이 막힌 듯 침묵했다. 윤하경은 손톱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고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뭐, 그래도 오고 싶으면 따라와. 괜히 정색할 필요 없잖아?”한편, 운전석에 앉은 구지호는 미묘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사실 그도 윤하연이 따라오는 게 거슬렸지만 윤하경이 태연하게 받아들인 이상 그가 딱히 반대할 명분도 없었다. 결국 그는 말없이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차 안에서도 내내 윤하연은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특히나 구지호가 운전하면서도 한 손으로 윤하경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걸 보자 그녀의 눈빛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있었고 쇼핑몰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구지호의 팔을 살며시 끼고 다정한 커플처럼 행동했고 뒤따라오는 윤하연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그녀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윤하경은 거울에 비친 반사된 모습으로 보고 있었다.‘이렇게까지 따라와서 이 꼴을 당하고 싶었나 보네.’오후 내내 쇼핑몰을 돌며 반지를 맞춘 뒤 윤하경은 일부러 지친 듯 구지호의 어깨에 기대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지호야, 나 너무 피곤해. 집에 가고 싶어.”구지호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윤하연에게 보냈다. 그녀가 따라오지만 않았어도 오늘 밤 윤하경과 좀 더
윤하경은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오늘 별일도 없고 해서, 지호가 뭘 하고 있나 궁금해서요.”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주미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윤하경은 구지호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주미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어젯밤에 회사 일이 좀 생겨서, 지호 아빠가 급히 불러서 야근하게 됐어. 그래서 아직 안 들어왔어.”그녀는 다정하게 덧붙였다.“잠깐 기다려 봐. 내가 지호한테 전화해 볼게.”‘야근? 어쩌면 침대 위에서 야근했겠지.’윤하경은 속으로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괜찮아요, 엄마. 지호가 회사 일로 바쁜데 굳이 방해할 필요 없어요.”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는 듯하며 자연스럽게 말했다.“그럼, 저 지호 방에서 기다려도 될까요?”사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구씨 저택에 자주 드나들어서 집 구조는 손바닥 보듯 익숙했다. 그렇기에 주미나도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러렴. 방에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윤하경은 능숙하게 구지호의 방문을 열었다. 이 방에 오는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전과 지금의 감정은 완전히 달랐다. 구지호가 윤하연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니 윤하경도 그들에게 체면 따위 남겨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가방에서 작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그러고는 주위를 살피다가 침대 맞은편 꽃병 위에 그것을 조용히 올려두었다.꽃병에는 꽃이 가득 들어 있어 그 안에 작은 물건 하나쯤 들어가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그녀가 막 휴대폰을 확인하며 침대에 기대었을 때, 구지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윤하경을 본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타이트한 원피스가 그녀의 완벽한 몸매를 더욱 강조하고 있었고 그 모습이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구지호는 순간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윤하연이랑은 비교도 안 돼.’비록 윤하연은 그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외적인 매력에서
윤하경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거의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조금만 더 있었으면 구지호의 머리를 주먹으로 날려버릴 뻔했네.'사실, 구지호는 어릴 적만 해도 꽤 괜찮은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며 그는 종종 그녀를 보호해 주곤 했었다.그래서였을까? 그녀는 그에게 오랫동안 헌신하며 살아왔다.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점점 낯선 사람처럼 변해갔다.예전에는, 구지호가 그녀를 보호하려고 앞장서서 싸웠던 모습도 있었는데 그때의 구지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그녀는 복도를 지나면서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올 때만 해도 화창했던 날씨가어느새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그녀는 피식 웃었다.“하늘도 변덕스럽지만 사람 마음도 그에 못지않게 변덕스럽지.”거실에 내려오니,주미나가 미리 준비한 과일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주미나는 환한 미소를 띠며윤하경을 다정하게 소파로 이끌었다.“하경아, 네가 마침 잘 왔어. 우리 오늘 예식장에서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가려고 하는 데 같이 가자. 아까 미리 디자이너에게 연락해 놨어. 지호가 내려오면 바로 출발하자.”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오늘은 원래 별다른 일정이 없었지만 연기를 하는 김에 끝까지 제대로 해야 했다.그리고 드레스를 맞추는 것쯤은 그녀에게는 그저 쇼핑에 불과했다. 주미나가 부른 디자이너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었고 명품 브랜드의 고급 맞춤 디자이너였으며 일반적으로 예약을 잡기가 어려운 인물이었다.하지만 구씨 가문은 패션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그와의 친분도 두터웠다.윤하경이 도착했을 때 디자이너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죄송합니다, 구 여사님. 다만 다른 손님이 갑자기 방문하셔서 우선 그쪽을 먼저 응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그러고는 눈치를 보며 덧붙였다.“제가 방금 특별한 커피를 받아놨는데요. 제 친구가 해외에서 직접 공수해 온 겁니다.잠시만 기다리시는 동안, 커피 한잔하시겠어요?”이 디자이너는 오랫동안 상류
한선아도 주미나를 보자 환하게 웃었고 두 사람은 동갑내기라 그런지 몇 마디 나누더니 금세 수다에 빠졌다.주미나는 방금 얼굴에 스쳤던 불쾌감을 털어내고 디자이너에게 말했다.“괜찮아요, 다 아는 사이니까 잠깐 기다릴 수 있어요.”그러고는 윤하경과 구지호를 향해 말했다.“하경아, 너희 먼저 가서 원하는 스타일 좀 골라봐.”한선아는 주미나의 말을 듣고 윤하경을 흘깃 바라본 뒤,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축하해요. 이렇게 예쁜 며느리를 얻다니. 곧 약혼식 한다면서요?”주미나는 흐뭇한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네, 맞아요. 초대장 보내려고 했었어요.”두 사람은 그렇게 웃으며 한쪽으로 가 커피를 마시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윤하경은 그냥 돌아설 수도 없어 구지호에게 이끌려 옷을 고르러 갔다. 다행히 강현우는 언제나처럼 냉담한 태도를 유지한 채, 단 한 번도 윤하경을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녀는 속으로 안도하며 조용히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본래 몸매가 좋은 데다 피부도 하얀 편이라 어떤 옷을 입어도 마치 그녀를 위해 맞춘 듯했다.특히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으면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놓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구지호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넋이 나갔다. 윤하경의 몸매가 좋은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평소와 다른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하경아, 이거 어때? 진짜 예쁘다.”구지호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윤하경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검은색 타이트한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문득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느껴졌다.그리고 바로 뒤에서 강현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책을 들고 있었지만 시선은 분명 윤하경에게 닿아 있었다.늘 무표정하고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몇 번 함께 밤을 보낸 윤하경은 알고 있었다.그가 가장 격정적인 순간에도, 저 눈빛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는 걸.윤하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생각했다.‘이 남자, 정말 이상하게 사람을 자극하네.’
“하경아, 네 작은 회사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냥 취미로 하는 거잖아? 너무 애쓰지 말고. 안 되겠다 싶으면 나중에 지호랑 결혼하고 구성 그룹에서 자리 하나 마련하면 되지. 어차피 가족끼리 도와주면서 사는 거잖아.”주미나의 말이 들려왔지만 윤하경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구성 그룹에서 일할 일은 절대 없을 거란 걸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오늘은 차를 가져오지 않아 택시를 잡고 서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도착했을 때, 강현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려던 순간, 갑자기 누군가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고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놀라야 할 상황이었지만 익숙한 담배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강현우임을 알았다.그는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를 침대 위로 눕혔지만 막상 사랑을 나누려 하자 갑자기 몸을 살짝 일으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강현우의 깊고 강렬한 눈빛에 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 불편하게 느껴졌다.“왜 그렇게 봐요?”참다못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가가 살짝 떨리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고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물었다.“구지호랑 정말 약혼할 거야?”윤하경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미 봤잖아요.”강현우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고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쳤다.그는 아무 말 없이 협탁 위에 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르고 그는 그 너머로 윤하경을 바라보았다.“약혼하지 않는다면 얼마면 돼?”순간, 윤하경은 멍해졌다.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을 짓자, 강현우는 다시 입을 열었다.“얼마면 돼? 아니면 원하는 조건을 말해 봐.”그의 말은 여전히 간결하고 직설적이었다. 윤하경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지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사실 그녀와 강현우는 그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을 뿐 원
윤하경은 침대에 앉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강현우 같은 사람은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자신을 쉽게 놓아버리는 사람을 만나게 된 건 처음이겠지.그녀는 그냥 권력 있는 남자들이 흔히 가지는 소유욕이라 생각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택시를 잡으려고 길가로 걸어 나가던 중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화면을 내려다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가방끈이 점점 조여들고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아 곧장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휴일이라 가족들이 모두 집에 있었고 심지어 윤하연까지 집에 와 있었다.윤하경이 문을 열고 다급하게 들어서자, 윤수철이 먼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여자가 왜 그렇게 부산스럽게 구는 거야?”그는 눈살을 찌푸렸다.“이러다가 구씨 집안에 시집가서도 그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이 네가 버릇없다고 할 거야.”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버릇?”윤하경이 비웃듯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우리 집안의‘버릇’이란 게 뭔데요? 남의 물건 훔치는 법이라도 가르쳐 주는 거예요?”윤수철의 얼굴이 굳었다.“윤하경! 아버지한테 그런 말투가 뭐야?”옆에 있던 임수연과 윤하연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차가움이 가득 배어 있었다.“그럼, 아버지. 제발 좀 설명해 주세요.”그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가라앉았다.“성남 별장이 왜 윤하연 명의로 바뀐 거죠?”“뭐?”윤수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고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임수연이 조심스럽게 찻잔을 내려놓고 부드럽게 말했다.“하경아, 집안의 재산 문제는 원래 아버지가 알아서 결정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잖니?”임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윤하경이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윤하경은 머릿속이 새하
“하,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윤하연의 손목을 잡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다행이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당장 같이 가서 성남 별장 명의를 내 이름으로 다시 돌려놓자.”윤하연은 순간 입술을 꼭 다문 채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그런데 오늘은 공휴일이잖아...”윤하경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그러면 지금 계약서라도 써. 우리가 평일에 가서 처리하면 되잖아.”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윤하연은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결국 윤수철을 애처롭게 쳐다봤고 윤수철은 그런 그녀를 외면하지 않았다.그는 한걸음에 다가와 윤하경과 윤하연 사이를 갈라놓으며 윤하경을 거칠게 밀어내며 싸늘한 목소리로 외쳤다.“윤하경! 그 집은 하연이한테 가는 게 맞아!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야!”목소리에 담긴 강한 위압감, 평생을 사업가로 살아온 남자의 기세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자신이 내린 결정이 옳다고 믿었다.윤하경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눈물이 흐를까 봐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좋아요.”‘어차피 내가 이 집에서 늘 쓸모없는 존재였으니까. 다들 이제 나한테서 가족 대접 받을 생각하지도 마.’윤수철은 그녀를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지금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네 꼴도 보기 싫으니까.”윤하경은 목소리에 섞여 나올 듯한 울음을 꾹 눌러 삼키고 최대한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 채, 고개를 높이 들고 윤수철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등을 곧게 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그녀가 문을 나서는 순간 임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휴, 여보! 너무 화내지 마요. 나까지 놀랐잖아요.”임수연이 과장된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하연아, 빨리! 어서 가서 약 좀 가져와.”윤하경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결국 뒤돌아보지 않은 채 그대로 집을 나섰다.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직접 구매한 아파트로 돌아왔고 하루 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침대
순식간에 클럽 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술병을 맞은 남자의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그는 비명을 지르며 윤하경을 노려보았다.“이 미친년이 감히 나를 쳤어?”윤하경은 그를 흘끗 쳐다보더니,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아 무대를 내려가려 했지만 남자가 끈질기게 그녀를 붙잡았다.“X발, 사람을 때려놓고 그냥 가려고? 내가 호구로 보여?”중년 남자들은 대체로 이상한 자존심이란 게 있다. 남의 몸을 함부로 더듬을 땐 당연한 듯 굴더니, 정작 맞을 각오는 전혀 하지 않았다.윤하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술에 취한 탓인지 눈이 약간 흐려졌지만 혼자라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본 뒤, 그녀는 최대한 차분한 척하며 말했다.“이제 놓지 않으면 내 친구가 오면 네가 더 곤란해질 텐데?”사실, 그녀는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손에 묻은 피를 쓱 문지르더니 비웃었다.“웃기시네, 허세는.”“나, 너 처음 들어올 때부터 보고 있었어. 혼자였잖아.”그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그러니까, 오늘 밤 나랑 잘 놀아보자고?”순간, 그녀는 도망칠 방법을 고민했다.그때 2층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이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비록 클럽 조명이 어두웠지만 그녀는 이곳에서도 강현우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그는 2층 VIP석 난간에 기대어 있었고 윤하경은 주저 없이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내 남친이 저기 있는데?”남자는 그녀가 가리킨 곳을 힐끗 돌아보고 이내 비웃음을 터뜨렸다.“하! 내가 바보야? 내가 강현우를 몰라? 네가 감히 그 남자를 걸고 넘어가?”그 말에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제발, 나 좀 살려줘.’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보고도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심지어 그녀를 보지도 않은 채 자리로 들어가 버렸다.윤하경은 순간 얼어붙었다.‘아 맞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지.’게다가, 얼마 전 그를 화나게 했으니,
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눈앞의 장면에 잠시 갈등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척 고개를 돌렸다.소지연은 당황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저 신인아라는 애, 강현우랑 무슨 사이야?”윤하경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몰라. 나도.”“그럼 너랑 강현우는...”“가자.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윤하경은 짧게 말한 뒤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현우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민진혁에게 말했다.“신인아 데려다줘.”신인아는 고개를 들고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세요?”강현우는 그녀를 보며 차분하게 답했다.“괜찮아. 너 먼저 가. 시간 나면 갈게.”신인아는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그럼 조심히 오세요.”그렇게 말하고는 민진혁에게 출발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윤하경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려던 찰나, 갑자기 조수석 문이 열렸다.놀라서 발을 브레이크에 올린 윤하경이 고개를 돌리자, 강현우가 몸을 살짝 숙인 채 소지연에게 말했다.“미안. 윤하경한테 할 말이 좀 있어서.”소지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랑 저, 가는 길 다르잖아요.”명백한 거절의 뉘앙스를 담았지만 강현우는 개의치 않았다.그는 긴 다리를 자연스럽게 차 안으로 뻗고 앉더니 느긋하게 몸을 기대며 말했다.“운전해.”윤하경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저...”“아니면 내가 운전할까?”강현우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예전에 강현우가 몰았던 미친 듯한 속도가 생각나 윤하경은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차가 조용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후, 강현우가 물었다.“신인아, 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말투. 마치 자신이 신인아에게 일부러 접근이라도 한 것처럼 들렸고 윤하경은 속으로 혀를 찼다.“그 말, 제가 신인아한테 일부러 접근한 거라고 들리는데요?”강현우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창밖을 보
소녀는 말끝마다 볼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부끄러운 건지, 숨결 때문인지 얼굴이 희미하게 물들어 있었다.그제야 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고 조용히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고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정말 고맙습니다.”“별말씀을요.”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서도, 윤하경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서 있었다.‘대체 저 애는 누구지? 송시안이 말했던, 강현우에게 중요한 여자라는 게... 설마?’“야, 너 왜 그래?”소지연이 옆에서 그녀 어깨를 툭 치며 말했고 윤하경은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아니야, 가자.”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옮겼지만 윤하경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기만 했다.그런데 보석 매장 안에서 윤하경은 또다시 휠체어를 탄 소녀를 마주쳤다.진열대 앞에 앉은 그녀는 턱을 괴고 귀걸이들을 보고 있었고 표정은 어딘가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모른 척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이번엔 신인아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어머, 그 언니다! 또 보네요?”“그러게요.”윤하경은 억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쇼핑하러 오신 거예요?”소녀는 여전히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그냥 좀 둘러보는 중이에요.” 윤하경이 대답하고는 소지연의 팔을 끌어 매장을 나가려 했지만 소녀는 다시 윤하경을 불러세웠다.“잠깐만요! 혹시 시간 되세요? 제가 얼마 전에 귀국해서 친구도 없고... 혹시 이 두 개 중에 어떤 커프스링크가 더 나은지 좀 봐주실 수 있을까요? 도저히 못 고르겠어요.”윤하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걸음을 멈췄다.하지만 그녀의 목에 걸린 곤륜 부적이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윤하경은 결국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그때 소지연이 윤하경의 귀에 속삭였다.“너 원래 이렇게 남 일에 잘 끼어들었나?”윤하경은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어떤 두 개요?”신인아는 바로 점원에게 자신이 고른 두 가지를 꺼내달라고 했다.“이거랑 이거요.”윤하경은 커프스를 들여다
윤하경은 다시 한번 오건우가 보냈던 사진을 꺼내 봤다.흐릿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윤하경은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내가 왜 이렇게 지질하게 굴지...’강현우와 자신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명분 없는 사이이고 떳떳할 것도, 묻고 따질 자격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신이 이렇게 사진 하나에 마음을 흔들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윤하경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배경빈 씨 오늘 안 나왔어?”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우슬기를 바라봤고 우슬기는 책상에 기대앉아 어깨를 으쓱였다.“안 왔어요. 앞으로도 안 올 거 같은데요? 아까 어떤 남자가 와서 자기가 경빈 씨네 집 가사 도우미라며 대신 사직서 냈다더라고요.”“대표님, 경빈 씨 진짜 어디 대단한 집 도련님 아니죠?”윤하경은 우슬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잠시 바라보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경 꺼.”그렇게 말은 했지만 책상에 앉아 커피잔을 집어 드는 순간, 윤하경 머릿속엔 어제 강현우가 툭 던졌던 질문이 스쳐 지나갔다.‘배경빈, 왜 자꾸 네 주변에 맴돌지?’강현우와 이 일이 무관할 리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론 잘된 일이기도 했다. 배경빈이 나간 덕에 그녀의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으니까 말이다.윤하경은 서류를 정리하며 정신을 다잡았고 겨우 집중하기 시작했을 무렵 오랜만에 소지연에게서 카톡이 왔다.[하경아, 오늘 시간 돼? 잠깐 얼굴 좀 보자.]지난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지연이었다.회사는 부하직원들에게 잠시 맡기고 있었다고 했지만 그 뒤로 소식이 없었기에 더는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이제야 겨우 마음을 추스른 듯했다. 윤하경은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약속을 잡았고 근처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카페에 도착했을 땐, 소지연이 먼저 와 있었다. 얼굴에 살짝 피곤기가 보였지만 화장은 또렷했고 입술에는 진한 레드 컬러가 눈에 띄
윤하경은 박소희와 다를 게 없이 놀랐다. 그녀 역시, 강현우가 다시 돌아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강현우는 아무렇지 않게 윤하경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비죽 웃으며 박소희를 바라봤고 겉으론 웃고 있지만 눈빛만은 싸늘했다. 박소희는 그 눈빛에 순간 굳어버렸지만 이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경 씨 말에 너무 화가 나서 잠깐 이성을 잃었어. 현우야, 그런 뜻은 아니었어. 나 진짜...”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고는, 낮고 느린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다시 묻을게. 도대체 누가 누구 약혼자를 유혹했다는 거지?”박소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윤하경 쪽을 힐끔 보더니 결국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에 기가 죽은 듯 고개를 숙였다.“우리 곧 약혼하잖아. 약혼자로서 적어도 사람들 앞에서는 나한테 체면은 세워줘야 하는 거 아니야...?”강현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그렇지? 근데 말이야...”“내가 언제 약혼했는데?”그 한마디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폭탄처럼 박소희에게 직격했고 윤하경도 순간 숨을 멈췄다.그 말은, 눈앞에서 공개적으로 뺨이라도 맞은 듯한 충격을 안겨줬다.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수모를 겪어본 적 없는 박소희는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누구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없었는데 강현우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더 괴로운 건, 그런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현우야... 그건 네 어머님이랑 우리 아빠가...”“그래서?” 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럼 그 사람들이랑 따져.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그 말에 박소희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버렸고 윤하경은 강현우 품 안에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무슨 뜻이지? 그럼 진짜 약혼한 건 아니었던 거야? 그 곤륜 부적은?’윤하경의 시선이 무심코 박소희 쪽으로 옮겨졌고 그제야 깨달았다.박소희의 목에는 어젯밤 그 값비싼 곤륜 부적이 없었다.그녀의 성격상, 만약 강현우가 그걸 준 거라면 분명 자랑하듯 걸고 나왔을 텐데
윤하경은 아직 마음이 복잡해, 강현우가 탄 차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그런 그녀를 누군가가 부르자, 화들짝 놀라 돌아봤다.박소희를 보자 윤하경은 잠깐 당황한 표정이 스쳤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소희 씨.”박소희는 턱을 살짝 들고 도도하게 물었다.“하경 씨, 시간 좀 있으세요? 아침이라도 대접하고 싶어서요.”“없어요.”윤하경은 단호하게 거절했고 박소희와는 굳이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박소희는 물러서지 않았다.윤하경이 거절하자, 아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숲길 안쪽의 레스토랑으로 끌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박소희는 두 팔을 끼고 앉아 윤하경을 노골적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윤하경은 시계를 슬쩍 확인하곤 무표정하게 말했다.“하실 말씀 있으면 빨리하세요. 회사에 회의 있어서요.”박소희는 윤하경의 여유로운 태도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분명히 자신은 정식 약혼자임에도, 눈앞의 여자는 전혀 죄책감도 없어 보였다.“참 뻔뻔하시네요.”박소희가 냉소를 머금고 말했다.“하경 씨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정식 약혼자가 있는 남자랑 엮여 있으면서.”윤하경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늘 우아하던 박소희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윤하경! 너 윤씨 가문 딸 아니야? 경성에서 그 정도면 그럭저럭 이름 있는 가문인데 그런 여자가 감히 남의 약혼자랑 그렇게 엮여? 이런 자리에서 들키고도 창피한 줄도 몰라요? 양심 없어?”.아침 시간이라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커져가는 박소희의 목소리 때문에 레스토랑 안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고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을 힐끔거렸다.윤하경은 그녀의 격앙된 모습을 지켜보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분한 그녀의 태도는 분노에 휩싸인 박소희와 극명하게 대비됐다.원래부터 윤하경은, 누가 위에서 내려다보듯 가르치려 들면 질색이었다.더군다나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애초에 좋지 않았고 지금 이 상황은 한 번쯤 터뜨릴 좋은 기회였다.“소희 씨.”윤하경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
윤하경은 조용히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정하게 말했다.“현우 씨 바쁘시면 저 혼자 아침 먹을게요.”강현우는 그 말에 휴대폰을 거두며 그녀를 돌아봤다. 또렷하고 깊은 이목구비는 한 번 마주치면 쉽게 눈을 뗄 수 없는 인상이었다.“같이 먹기로 했잖아.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그는 단호하게 말한 뒤, 더 이상 휴대폰을 건드리지 않았다.윤하경은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고 사실 그녀는 그렇게까지 바라진 않았다.차는 숲길 끝에 도착했고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는지 둘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식탁 위에 아침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고 여러 가지 다과와 차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강현우가 이렇게 신경 써서 아침 식사를 챙겨주는 상황이라면윤하경은 기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상하게도 입맛이 없었다.그래도 강현우가 옆에서 지켜보니 억지로라도 몇 입 먹었고 따뜻한 차가 목으로 넘어가자, 몸도 점점 따뜻해졌다.그런 둘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안현주가 급히 옆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소희야! 강현우한테 아침밥을 차릴 그럴 때 아니야.”조심스럽게 아침 식사를 도시락에 담고 있던 박소희의 손이 멈췄고 고개를 돌려 안현주를 흘겨봤다.“잔소리 좀 그만해. 너야말로 괜한 걱정은 하지 마. 회사 갈 때 내가 직접 들고 올라가면 되니까, 너는 밑에서 기다려.”안현주가 혀를 찼다.“너는 정식 약혼자랍시고 정성 다해서 도시락 싸고 있는데 지금 강현우랑 윤하경이랑 둘이서 다정하게 아침 먹고 있다니까?”안현주는 말하면서도 억울한 듯 코웃음을 쳤다.“진짜 강현우란 남자, 너 같은 사람 좋은 여자는 안 보이고 그 윤하경 같은 요상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나 봐.”박소희의 손이 살짝 떨렸다.“뭐라고?”안현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풀이했다.“네가 그렇게 마음 써주는 약혼자는 지금 윤하경이랑 사이좋게 조식 데이트 중이라고. 근데 너는 그 사람이 배고플까 봐 도시락까지 싸고 있고. 뭐, 아침 입맛 돋워줄 애피타이저는 이미 먹었을지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휴대폰 화면을 꺼버리고 조용히 욕실로 들어갔다.양치질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멍한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입안의 거품을 헹구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그녀를 안았고 보지 않아도 강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막 자라난 까칠한 수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그러나 강현우는 세면대 양옆에 팔을 짚어 그녀를 가둬버렸고 한 발짝도 도망갈 수 없는 거리였다.“왜, 어젯밤 내가 안 들어와서 화났어?”강현우는 손끝으로 윤하경의 콧등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봐라, 또 이렇게 새침하게 굴고.”윤하경은 잠시 멈칫하다가 가볍게 웃어 보였다.“아니요, 안 화났어요.”강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윤하경은 그를 끌어안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현우 씨, 저 여기서 꽤 오래 지낸 것 같아요. 이제는 슬슬 나가서 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괜히 사진이라도 찍혀서 기사 나면 현우 씨 이미지에 안 좋잖아요.”강현우는 윤하경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쳤다.“도망치고 싶은 거야?”그의 눈동자에 잠깐 스치는 날카로움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윤하경은 그를 진정시키듯 그의 셔츠 단추를 매만지며 말랬다.“아니요, 진심으로 현우 씨 걱정해서 하는 말이에요. 강한 그룹 같은 대기업이면 주가에도 영향 줄 수 있는 문제니까요.”이 비슷한 말은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말투에는 미묘한 날이 서 있었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처럼 보여?”윤하경은 잠깐 손을 멈췄다가, 이내 한껏 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현우 씨는 안 신경 쓰시더라도... 전 해야죠.”그 말에 강현우는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나지막이 묻는다.“진심이야?”윤하경은 고개를 끄덕였다.“네.”강현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
윤하경은 대답하지 않았다.그 모습을 본 강현우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왜, 마음에 안 들어?”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모았다가, 속으로 맴도는 의문을 억누른 채 다시 환한 미소를 띠었다.“마음에 들어요.”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렷한 콧대 아래 옅은 미소가 스쳤고 그는 곧 민진혁에게 지시했다.“가자. 집으로.”그날 강현우는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침실로 들어간 그는 윤하경의 입술을 조심스레 물었다.윤하경은 살짝 그를 밀치고 그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변명을 꺼냈다.“저기... 오늘 좀 더워서요. 샤워 좀 하고 올게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가두며 낮게 속삭였다.“난 안 덥던데.”그 말을 마치기 무섭게 다시 입을 맞췄고 윤하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사실 강현우는 이런 쪽에 능숙했다. 지쳐도 어쩌면 즐길 수도 있는 관계, 적어도 몸만 놓고 보면 말이다.하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새도 없이, 강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었다.몸이 미세하게 떨릴 무렵, 갑자기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진동 소리는 조용한 방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윤하경은 조심스레 말했다.“전화 왔어요.”강현우는 이를 악물며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지만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그런데 전화를 받지는 않고 오히려 윤하경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남겼다.“얌전히 집에서 기다려. 금방 올게.”말투는 부드러웠고 어딘가 아이 달래듯 느껴졌다. 그 말에서 ‘집’이라는 단어가 나온 순간, 윤하경은 잠깐 멍해졌다.‘집?’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임수연과 윤하연이 집에 들어온 이후 그곳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그런데 강현우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강현우가 나간 후, 윤하경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역시 강현우 같은
오건우는 그 남자가 다가오는 걸 보더니 더욱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하 대표님, 막 서울 오셨다고 들었는데요. 제가 소개 좀 드릴게요. 이쪽은 강현우 대표님이에요.”하 대표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젠틀한 인상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현우를 향해 손을 내밀며 정중히 웃었다.“반갑습니다. 평소 익히 들었습니다. 저는 하석호입니다. ”강현우는 무표정한 눈으로 하석호를 한번 쓱 훑어보고는, 그 손을 외면한 채 고개만 돌렸다.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이번엔 윤하경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리고 이쪽은 윤하경 씨입니다.”평소엔 권력자 곁에 있는 여자엔 별 관심 없는 하석호였지만 윤하경의 얼굴을 보자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윤하경 씨?”윤하경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처럼 무시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오건우와도 협업 중이었기에 말이다.“하 대표님, 반갑습니다.”말을 막 끝내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톡 건드렸다.“윤하경 씨, 혹시 예전에 모성에 가본 적 있으신가요?”모성은 국경 근처 외딴 도시였다.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가본 적 없어요.”하석호는 뭔가 더 묻고 싶은 듯했지만 강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를 노려보듯 쳐다봤다.“하 대표님, 질문이 좀 많은 거 아닌가요?”하석호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금세 웃으며 넘겼다.“그러네요, 제가 좀 지나쳤나 봅니다.”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드디어 윤하경의 귀가 조용해졌지만 여전히 하 대표의 시선이 자기에게 꽂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이윽고 본격적으로 경매가 시작됐고 초반엔 관심 가는 물건이 딱히 없었다. 그러다 한 쌍의 사파이어 귀걸이가 등장하자 강현우가 고개를 돌려 윤하경을 바라봤다.“어때, 마음에 들어?”강현우는 윤하경 같은 예쁜 여자는 당연히 장신구를 좋아할 거라 생각했지만 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그래요.”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더 묻진 않았다.그때 사회자의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