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2장

Author: 속세
그림마다 버젓이 가격이 매겨져 있었고, 가장 비싼 그림에는 무려 은자 다섯 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을 쥔 한서윤의 손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었다. 날카로운 종이 모서리에 손끝이 베여 핏방울이 맺혔다. 피는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과 눈물에 뒤섞여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그림 위로 뚝뚝 떨어졌다.

"부인, 사실 겁니까? 사지 않을 거면 망가뜨리지 마십시오."

노점상이 짜증스럽게 손을 뻗어 그림을 빼앗으려 했다. 한서윤은 불에 데기라도 한 듯 손을 홱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그림은 비에 젖어 먹물이 번졌고, 그림 속 얼굴도 점점 흐려졌다.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정신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몇 번이나 휘청거리며 넘어질 뻔했는지도 몰랐다.

예전의 그녀라면 절대 그렇게 걷지 않았을 것이다. 어머니는 명문가 아가씨라면 느리고 소리 없이 반듯하게 걸어야 한다고 수없이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가슴이 세게 조여 와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절망의 눈물이 빗물과 섞여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아무리 닦아도 마르지 않았다.

예전에는 강무진이 무장이라 다정함을 모르는 줄만 알았다. 상스러운 말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 요구도 그저 성정이 거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변방에서 오래 지내 주변에 거친 사내들뿐이었으니 부인을 대하는 법을 모른다고 자신을 달랬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사랑하는 여인의 자리를 차지한 그녀에 대한 복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그녀도 한때는 기대를 안고 시집왔으며, 부군의 사랑을 받으며 살고 싶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노부인을 공경하고 집안일을 맡아 장군부를 빈틈없이 관리했다. 그가 출정하면 날마다 향을 피우며 기도하고 밤마다 변방 쪽을 바라보며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를 마음대로 짓밟아도 되는 노리개로만 여겼다. 심지어 그녀의 몸까지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비가 점점 거세졌다. 정신없이 달리던 한서윤은 어느새 강씨 가문의 사당 앞에 서 있었다. 사당 안은 어두웠다. 줄지어 놓인 위패들 사이로 엄숙하고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집온 지 삼 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고 명절마다 사당에 향을 올리며 한 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도 강씨 가문의 사람이고, 잘하면 언젠가는 강무진이 돌아봐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웃음거리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모두 끝낼 거다.'

한서윤은 깊이 숨을 들이쉬고 떨리는 걸음으로 들어가 집안 어른을 만나겠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와 수염이 희끗한 노인이 나왔다. 강무진의 셋째 종조부 강덕수이자 강씨 가문에서 항렬이 가장 높은 어르신이었다.

"서윤아, 이게 무슨 일이냐?"

한서윤은 예를 갖춰 인사했다. 한씨 가문에서 엄격한 가르침을 받고 자란 만큼 여전히 단정하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비에 흠뻑 젖어 엉망인 모습인데도 자세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작은 할아버지, 오늘 청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몸을 바로 세우고 노인의 눈을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는 집을 떠나 장군과 부부의 연을 끊겠습니다."

사당 안은 죽은 듯 고요해졌다. 강덕수는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가 흰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느냐? 이 나라 법에 따르면 여인이 스스로 혼인 관계를 끝내려면 구층탑을 통과해야 한다.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느냐?"

한서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라가 세워진 이래 여인이 먼저 혼인을 끝내 요구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감히 나서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 구층탑은 여인들이 혼인을 끝내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조정이 만들어 놓은 족쇄나 다름없었다.

구층탑은 층마다 끔찍한 형벌이 기다리고 곳이었다. 채찍질부터 손가락을 조이는 형벌, 달군 쇠로 지지는 형벌, 쇠사슬로 어깨뼈를 꿰뚫는 형벌까지… 위로 올라갈수록 형벌은 더욱 잔혹해졌다.

그곳에 들어간 여인은 살아서 혼인을 끝내는 문서를 들고 나와 부군과 모든 인연을 끊거나, 그 안에서 죽어 처참한 시신으로 실려 나오는 것이다.

개국한 지 백여 년 동안 구층탑을 통과한 여인은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차분히 대답하자 강덕수는 눈썹을 더욱 찌푸렸다.

"알면서도 들어가겠다고? 결코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작은 할아버지."

한서윤이 그의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아무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정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강덕수는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은 그녀의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끝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이달 보름에 사당으로 오너라. 가문에서 탑을 열어 주마."

한서윤은 다시 예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한 걸음씩 빗속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늙은 하인이 참지 못하고 낮게 물었다.

"어르신, 부인께서 얼마나 큰 억울함을 당하셨기에 저런 결심을..."

"묻지 말거라."

강덕수가 손을 내저으며 빗속으로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더 물어봐야 그 아이 가슴에 상처만 더 남길 뿐이다."

한서윤은 어떻게 처소까지 돌아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문을 열자 그녀의 모습을 본 단아가 놀라 소리쳤다.

"아가씨! 어쩌다 이렇게 비를 맞으셨습니까! 어서, 어서 옷부터 갈아입으십시오!"

단아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시녀이고 정이 각별했다. 허둥지둥 머리를 말리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힌 뒤, 뜨거운 물을 넣은 주머니를 이불 속에 밀어 넣었다.

한서윤은 침상에 누웠다. 머리는 돌덩이라도 얹은 듯 무거웠고, 목이 너무 아파 침조차 삼키기 힘들었다. 온몸의 마디마디가 쑤셔 왔다.

그날 밤, 그녀는 정신을 잃을 만큼 심한 열에 시달렸다. 열이 올라 온몸에 땀이 흐르다가도 이가 떨릴 만큼 오한이 들었다.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마구간에서 무릎이 멍들도록 꿇어앉아 있던 일, 연회장에서 수많은 손님들 앞에서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앉혔던 일, 그리고 경성의 사내들이 모조리 돌려봤다는 그림들까지…

머릿속을 스치는 장면들은 갈수록 뒤엉키고 흐릿해지더니 끝내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천 번의 눈물 끝에 피어난 꽃   제18장

    강무진은 문밖에 서서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한서윤은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울음소리를 참고 있었다.그는 피투성이가 된 채 문에 기대어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옷을 흠뻑 적셨지만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서진욱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사람이 떠나면 후회해도 늦다."그때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는 믿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모든 것이 너무 늦었다.그는 문밖에 앉아 밤을 보냈다. 날이 밝을 무렵 문이 열렸다.한서윤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다."떠나겠습니다."그녀는 차분하게 말했다. 눈은 부어 있었지만 더는 울지 않았다."어디로 가느냐?"강무진이 벌떡 일어났다. 다리가 저려 휘청이더니 어깨와 가슴의 상처가 동시에 벌어져 피가 다시 쏟아졌지만 개의치 않았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모릅니다. 장군이 찾지 못할 곳으로 갈 겁니다.""너...""장군."한서윤은 강무진의 말을 끊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또렷하게 말했다."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은 장군과 혼인한 것입니다. 장군이 제게 준 것은 모욕과 상처뿐입니다. 그러니 장군의 마음 따위 필요 없습니다. 경성으로 돌아가 대장군으로 살아가십시오.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늙고 병들어 죽는 그날까지 서로 남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한서윤은 몸을 돌려 작은 길을 따라 걸어갔다. 걸음은 느렸지만 흔들림이 없었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강무진은 그 자리에 서서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녀를 쫓아가 붙잡고 싶었다.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뒤따라가면 한서윤이 더 괴로워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강무진은 직접 그녀를 끔찍한 고통에 빠뜨렸고 이제서야 구하려 했지만, 한서윤은 그의 도움을 원하지 않았다.그녀는 홀로 고통을 견딜지언정 다시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강무진은 텅 빈 길에 서서 그녀의 모습이

  • 천 번의 눈물 끝에 피어난 꽃   제17장

    한서윤은 오랫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돌아가십시오.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그녀는 문을 닫았다.강무진은 또 하루를 서 있었다. 사흘째도, 나흘째도, 닷새째도 마찬가지였다.그는 날마다 문밖에 서서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은 채 그저 서 있기만 했다.한서윤이 채소를 사러 나가면 강무진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따르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행인들을 비켜 세웠다.그녀가 돌아보면 그는 걸음을 멈추고 잘못한 아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엿새째 날, 한서윤은 끝내 참지 못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힌 채 문 앞에 서 있었다."대체 무엇을 하려는 겁니까?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강무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의미 없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으면 살아도 아무 의미가 없다."한서윤은 갑자기 손을 꽉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또 목숨으로 저를 협박하는 겁니까?"강무진이 단호한 눈빛으로 한 걸음씩 그녀에게 다가갔다."협박이 아니라 사실이다. 내 평생 가장 큰 잘못은 널 밀어낸 것이다. 후회한다. 죽을 만큼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후회가 무슨 소용이겠나? 네가 기회를 주지 않으면 잘못을 만회할 수도 없으니...""어떻게 만회하려는 겁니까?"한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강무진은 허리에서 비수를 뽑아 그녀 앞에 내밀며 말했다."나를 찌르거라. 몇 번이고 찔러도 좋다. 네가 겪은 고통의 열 배, 네가 입은 상처의 백 배를 내가 감당하겠다. 네가 분이 풀리고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미쳤습니까!"한서윤이 한 걸음 물러났다."그래, 미쳤다."강무진은 한서윤의 손을 붙잡아 비수를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움켜쥔 채 칼끝을 자신의 가슴에 겨누었다."네가 그 거지들에게 욕보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느냐.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가슴이 계속 아팠고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한서윤, 나를 찌르거라. 그러면 내 마음

  • 천 번의 눈물 끝에 피어난 꽃   제16장

    문이 열렸다. 한서윤은 빨아서 색이 바랜 옷을 걸치고 나무 비녀로 머리를 올린 채 수수한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강무진을 본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놀라지도, 화내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할 뿐이었다.한서윤은 강무진을 낯선 사람처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습니까?"강무진은 그녀를 바라보며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나..."그가 몹시 잠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너를 데리러 왔다."한서윤은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웃음을 터뜨렸지만 금세 사라졌다. “돌아가라고요? 어디로 돌아가라는 말입니까?”그녀가 되묻자 강무진이 다급하게 한 걸음 다가가며 말했다."장군부로. 집으로. 내가 잘못했다. 이제 모두 알았다. 그 일은 내가 한 게..."한서윤이 그의 말을 끊었다."장군이 하지 않았다는 것도, 모두 윤채령이 한 짓이라는 것도 압니다.강무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알고 있었느냐?"한서윤은 문틀에 기대어 차분하게 말했다."누군가 와서 알려 주었습니다. 윤채령이 지하 감옥에 갇혔고 장군이 저를 찾고 있다는 것도 모두 들었습니다.""그렇다면..."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래서 무엇이 달라집니까? 그 일은 장군과 무관할지 몰라도, 장군께서 저지른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장군은 많은 사람 앞에서 저를 모욕하고, 제 몸을 그리게 해 노점에 내다 팔았으며, 저를 거지들에게 내던졌습니다! 윤채령이 아니라 장군이 한 일입니다. 모두 장군이 직접 한 일입니다."강무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입술만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한서윤은 남의 일을 말하듯 말을 이었다."구층탑을 오를 때마다 제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했습니다. 첫째 층에서 채찍을 맞을 때는 제가 부족해서 장군이 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 생각했습니다. 둘째 층에서 손가락을 조이는 형벌을 받을 때는 제가 충분히 잘하지 못해서 장군이 저를 좋게 보지 않는 것인지 생각했습니다.셋째 층에서

  • 천 번의 눈물 끝에 피어난 꽃   제15장

    강무진은 큰 충격에 온몸을 떨었다.그날 밤 한서윤이 무릎을 꿇고 바짓자락을 붙잡으며 빌던 모습이 떠올랐다."제발 이러지 마십시오."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했다."내 여인이니 감히 손대지 못할 거다."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억지로 떼어 냈다.그리고 떠났다.그는 힘없는 한서윤을 거지들에게 내던졌고 자기 손으로 그녀를 지옥에 밀어 넣었다.강무진은 홱 돌아서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벽돌이 부서지고 손가락 마디가 찢어져 피투성이가 됐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누구 없느냐!"강무진은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윤채령을 지하 감옥에 가둬라! 경성의 거지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잡아들여 그 감옥에 가둬라! 윤채령을 범하게 하고, 죽는 것보다 못하게 만들어라!"호위들이 달려 들어와 윤채령을 끌고 나갔다.윤채령은 끌려가는 내내 웃으며 눈물을 마구 흘렸다."강무진, 너는 한서윤을 찾지 못할 거다. 그녀는 이제 너를 원하지 않아. 죽어도 다시는 너를 만나지 않을 거다. 후회해! 평생 후회하라고!"웃음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더니 끝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강무진은 텅 빈 방에 서서 온몸을 떨었다.그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이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억지로 떼어 냈다.그는 천천히 몸을 낮춰 바닥에 웅크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렀다.강무진은 경성에 사흘 동안 머물며 윤채령의 처리를 끝낸 뒤 다시 남쪽으로 떠났다.그는 꼬박 한 달을 뒤쫓은 끝에 한서윤이 고소성 밖의 작은 마을에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한서윤은 작은 집을 빌려 마당에 꽃과 풀을 심고 평소에는 수를 놓아 푼돈을 벌었다. 궁핍하지만 조용한 삶이었다.강무진이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는 해 질 무렵이었다.석양이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밥 짓는 연기가 천천히 피어올랐다. 공기에는 음식 냄새가 감돌았다.강무진은 한서윤의 작은 집 밖에 서서 울타리 너머로 처마 아래 앉아 수놓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몹시 야위어 있었다. 광대뼈

  • 천 번의 눈물 끝에 피어난 꽃   제14장

    늙은 마부는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장, 장군. 어느 여인을 말씀하십니까?""온몸에 상처를 입고 남쪽 성문으로 나간 여인 말이다."늙은 마부는 그제야 알아듣고 말했다."아, 그 부인을 말씀하시는군요. 나루터에 데려다드렸더니 배를 타고 가셨습니다.""배를 탔다고? 어디로 가는 배였느냐?""남쪽으로 가는 배였습니다. 정확한 행선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 부인은 어느 배든 좋으니 남쪽으로만 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강무진은 늙은 마부를 놓고 말에 올라 나루터로 달렸다.서둘러 말을 몰아 두 시진 만에 나루터에 닿았다. 나루터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었다. 십여 척의 배를 하나씩 찾아가 물어본 끝에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을 찾았다."온몸에 상처를 입은 아가씨 말입니까? 아주 아름다웠는데 얼굴이 너무 창백했습니다."선장은 담뱃대를 피우며 말했다."배에서 이틀을 지내다가 청강포(清江浦)에서 내렸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말하지 않았고, 가족이 있느냐고 하니 없다고 했습니다. 가엾은 사람이었습니다."강무진은 다시 청강포로 향했다.청강포에 도착하자 한서윤이 마차로 갈아타고 남쪽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다음 마을에 도착하자 그녀가 산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강무진은 한 달 내내 경성에서 강남으로, 강남에서 영남(嶺南)까지 뒤쫓았다. 가는 곳마다 묻고 또 쫓았지만 매번 한발 늦었다.한서윤은 두려움에 계속 달아났고 조금도 멈추려 하지 않았다.어느 날 작은 마을에서 쉬던 중 서진욱이 사람을 보내 급한 편지를 전했다. 편지는 몇 줄뿐이었다."그날 밤 일을 알아냈다. 거지들이 스스로 벌인 짓이 아니라 누군가 은자를 주며 네 부인을 욕보이라고 했다. 누가 시켰는지 짐작해 보거라."강무진은 편지를 바라보며 손가락이 떨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그는 말에 올라 밤낮없이 달렸고 사흘 밤낮 한숨도 자지 않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강무진이 장군부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온몸에 흙이 묻고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두 눈은 시뻘겋게

  • 천 번의 눈물 끝에 피어난 꽃   제13장

    서진욱은 그를 바라보다 잠시 침묵한 뒤 장소를 알려 주었다.강무진은 몸을 돌려 성난 짐승처럼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성 동쪽의 허름한 사당에서는 거지 몇 명이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강무진이 들이닥쳤고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칼날을 휘둘렀다. 한 사람이 쓰러지자 나머지는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강무진은 한 사람씩 칼로 베었다. 칼날이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피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누가 그 여인에게 손대라고 했느냐?"강무진은 마지막 거지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짓누르며 다시 물었다."누가 그 여인에게 손대라고 했느냐?"거지는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울부짖으며 빌었다."장군, 살려 주십시오! 장군, 제발 살려 주십시오! 누군가 은자를 주며 저희에게 그 여인을 범하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멋대로 벌인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시킨 일입니다!""누구냐?""모, 모릅니다. 얼굴을 가린 여인이 은자 오백 냥을 주며 장군께서 그 여인을 버렸으니 저희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장군, 저희는 정말 모릅니다."칼날이 목을 스치는 순간, 거지의 목소리가 그대로 끊어졌다.강무진은 온몸이 피로 젖은 채 시신이 널린 사당 안에 서 있었다. 손에 든 칼에서는 피가 떨어졌다.그는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바로 이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억지로 떼어 냈고, 바로 그녀를 지옥에 밀어 넣었다.강무진은 갑자기 허리를 굽혀 헛구역질했다. 아무것도 토해 내지 못한 채, 신물이 코끝까지 치밀어 올랐고 쓰고도 떫은 맛이 입안에 남았다.그는 바닥에 고인 피 속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떨었다. 눈물이 얼굴의 피와 섞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그녀가 겪은 고통은 열 배로도 갚을 수 없었다.그녀가 입은 상처는 백 배로도 보상할 수 없었다.강무진은 한서윤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도, 자신의 여인이니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할 거라며 큰소리쳤다.그는 그녀를 속였고, 자신조차 속였다.강무진은 무릎을 꿇은 채 허름한 사당 지붕 틈으로 스며드는 차갑고 창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