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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월이
하지만 이내 나윤서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자신을 목숨보다 아끼던 이헌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거듭된 의심과 상처 속에서, 한때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사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의심이 많고 새로운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긴 황제일 뿐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윤서는 익숙한 봉의궁 침상에 누워 있었다.

등과 엉덩이는 불에 덴 듯 화끈거리는 것이,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가 당겨 절로 숨을 들이켰다.

“마마! 정신이 드셨습니까?”

곁을 지키던 가을이가 곧장 침상으로 달려왔다. 가을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몸은 어떠십니까? 아직도 많이 아프십니까? 태의께서 방금 다녀가셨는데, 상처가 깊으니, 잘 돌보며 휴식을 취하라 하셨습니다...”

나윤서는 가을이를 보며 안심시키려 웃어 보였지만, 입꼬리를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가을이는 조심스레 물을 먹이다가 끝내 울먹였다.

“마마, 어찌하여 폐하께 해명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폐하께 해명 한마디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폐하께서 냉궁에서 벗어나실 때 마마께서 얼마나 애쓰셨사옵니까. 폐하를 지키려고 칼날도 대신 막으시고, 독이 들었는지 몸소 시험하기까지 하셨지요. 눈보라 치던 밤에는 폐하를 업고 수십 리 길을 걸어 의원을 찾아가시지 않았사옵니까...”

가을이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그 모든 일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도 궁에 숱하게 남아 있사옵니다. 누구라도 마마께서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아실 텐데... 어찌하여 억울하다는 말씀 한마디 없이 모든 죄를 인정하셨사옵니까?”

나윤서는 따뜻한 물을 삼켰다. 목구멍은 불에 타는 듯 쓰라렸다.

‘해명한들 뭐가 달라질까?’

이찬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가시로 박혔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이헌의 마음에 자리 잡은 의심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와서 해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는 입을 열 필요조차 없었다.

어차피 머지않아 이 세계를 떠날 것이니까.

그렇게 되면 이헌은 천 년 전의 세상에, 자신은 천 년 후의 세상에 남게 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누구도 넘어설 수 없는 천 년의 세월이 가로놓일 테고, 다시는 서로 마주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 후 며칠 동안 나윤서는 봉의궁에 머물며 상처를 치료했다.

가을이는 가끔 궁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낯빛이 어두웠다. 굳이 묻지 않아도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헌이 강설희를 얼마나 끔찍이 아끼는지 또다시 듣고 왔을 터였다.

심지어 황후를 폐위하고 강 귀비를 새 황후로 세울지도 모른다는 소문까지 은밀히 돌고 있었다.

궁녀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예전에는 폐하께서 황후마마를 얼마나 애지중지하셨는데. 행여 다치기라도 하실까 노심초사하시던 분이 어쩌다 이렇게 변하신 걸까?”

그런 말을 들어도 나윤서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모든 감정이 식어 버린 듯, 그저 고요할 뿐이었다.

근거 없는 모함 한마디에 칠 년 동안 생사를 함께해 온 두 사람의 정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줄은 나윤서도 몰랐다.

며칠 뒤, 이헌의 곁을 모시는 어린 태감이 봉의궁을 찾아왔다. 황후마마께 조련장으로 와 달라는 전갈이었다.

나윤서는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몸을 이끌고 조련장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그곳에 도착해서야, 나윤서는 이헌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알았다.

그가 강설희를 데리고 황실 사냥터로 가을 사냥을 떠나려는데, 강설희가 조련장에서 기르는 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준마를 탐낸 것이었다.

온몸이 눈처럼 새하얀 백야였다.

백야는 나윤서가 처음 승마를 배우던 무렵, 이헌이 서역에서 어렵게 구해 생일 선물로 준 말이었다.

어린 망아지였던 백야가 이토록 크고 늠름하게 자라기까지, 두 사람에게는 수많은 추억이 쌓였다.

함께 백야의 등에 올라 도성 밖 산과 들을 누비며 봄과 가을의 풍경을 즐겼고, 해가 뜨고 지는 모습도 수없이 바라보았다.

나윤서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이헌에게 향했다.

강설희의 곁에 선 이헌은 사냥복 차림으로 더욱 늠름해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헌도 고개를 돌려 잠시 나윤서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깊은 눈빛이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때 강설희가 이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신첩은 이 말이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은 처음 봅니다. 혹...”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윤서는 눈을 내리깔아 마음속에 일었던 마지막 동요마저 감췄다. 그리고 담담히 입을 열었다.

“이 천하가 모두 폐하의 것이온데, 말 한 필인들 뭐가 다르겠사옵니까. 누구에게 하사하시든 신첩에게 물으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강설희는 기다렸다는 듯 기뻐하며 인사를 올렸다.

“황후마마, 그토록 아끼시던 말을 내어 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하옵니다!”

그러고는 곧장 백야에게 다가가 갈기를 쓰다듬으려 했다.

“잠깐.”

그때 이헌이 불쑥 강설희를 제지하더니, 곁에 있던 금군 수장에게 눈짓을 보냈다.

뜻을 알아챈 금군 수장은 즉시 앞으로 나서서 백야를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발굽부터 안장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더니, 급기야 말의 입까지 벌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윤서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찬의 반란 이후, 이헌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온전히 믿어 준 적이 없었다.

동침할 때마다 상궁이 찾아와 흉기나 독을 지녔는지 몸을 살폈고, 일을 치른 뒤면 이헌은 곧장 자리를 떴다.

그녀가 양심전(養心殿)으로 보낸 탕이나 다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태감이 은침으로 독이 들었는지 살피고,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맛보게 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앞에 올릴 수 있었다.

손수 지어 보낸 옷도 바늘을 숨겼을까 봐 궁녀들이 솔기마다 꼼꼼히 살폈다.

처음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차츰 무뎌지더니, 이제는 무뎌졌다는 사실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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