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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유월영이 물었다.

“뭘 해명하라는 건가요?”

“유진이 왜 해고했어?”

유월영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한아의 계약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수점을 잘못 찍어 단가가 크게 차이 나는 실수가 발생했습니다. 다행히 한아 쪽 관계자는 우리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해프닝으로 넘어갔지만, 회사 이익에 큰 손해를 끼친 신입은 바로 퇴사 처리하는 게 우리 방침이잖아요. 책임을 안 물은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들은 백유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가 원래 덜렁거리는 습관이 좀 있어요. 죄송합니다….”

연재준은 그런 그녀에게 위안의 눈빛을 보내고는 다시 싸늘한 눈빛으로 유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서류 가져와.”

유월영은 가지고 온 서류를 그에게 건넸다.

연재준은 맨 마지막 장을 확인하더니 서류를 도로 책상에 던지며 말했다.

“날짜를 보니 유 비서가 무단결근 한 날짜에 벌어졌네. 유 비서가 무단결근만 안 했어도 이 계약서는 유 비서가 처리해야 할 서류였어. 신입인 백유진이 아니라.”

유월영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이걸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비서실 수석 비서로써 부하 직원이 실수를 저질렀을 때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는 건 유 비서도 잘 알 텐데?”

연재준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했다. 백유진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라는 것!

유월영은 치미는 화를 꾹 참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유진 씨가 입사한 날에 저는 휴가를 내고 회사에 없었고요. 그리고 모르겠으면 다른 동료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그냥 방치해 둬도 되는 서류였어요. 혼자 의욕에 넘쳐 처리한다고 했다가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히 당사자가 책임을 져야죠. 해운 비서실은 원래 전문 학과를 나온 탑클래스만 들어올 수 있는 자리 아니었나요? 아니면 경험이 풍부하거나 전 회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웠으면 모를까, 예술을 전공한 학생이 들어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연재준이 물었다.

“내가 꼭 유진이를 비서실에 둬야겠다면?”

유월영은 어금니를 꽉 악물었다.

“비서실은 지금 있는 인력으로도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더 이상 비서가 필요하지 않아요. 굳이 회사에 남기고 싶으면 다른 자리 알아보세요.”

연재준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저 고집스러운 모습은 3년 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비서실에 인력이 넘쳐난다라… 그럼 유 비서가 자리를 내면 되겠네.”

유월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뒤늦게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유월영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사실 백유진을 해고하면 연재준의 불쾌함을 살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백유진에 대한 연재준의 호기심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예상했던 것처럼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백유진이 다급히 끼어들었다.

“대표님, 저는….”

하지만 연재준은 손을 들어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서류 하나를 꺼내 유월영에게 던지며 말했다.

“안성 지사에서 이번에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야. 유 비서가 내려가서 혼자 이끌어 봐. 이거 끝내기 전에는 본사에 발도 들일 생각하지 마.”

대표 사무실을 나온 유월영은 자리로 돌아가서 짐을 쌌다.

비서실 동료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월영 씨, 어디 가요?”

유월영은 무감각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안성 프로젝트, 대표님이 저한테 가보라고 하네요.”

그건 좌천이었다!

두 동료 비서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대표가 비서실 직원을 지방으로 보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유월영은 수석 비서로써 회산 내의 각종 중요한 업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위치였다.

지방 지사로 가면 당연히 본사보다 대우가 좋지 못할 테고 이번에 내려갔다가 언제 돌아올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짐을 안고 유월영의 자리로 온 백유진이 박스를 그녀의 자리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월영 언니, 제가 정리 도와드릴게요.”

유월영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이 이 자리 앞으로 유진 씨 거라고 했어?”

“그건 아니고… 앞으로 이 자리를 쓰라고 하시긴 했어요. 사무실 나오면 맨 먼저 보이는 자리라고….”

유월영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랬다. 예전에 그녀에게 수석 비서를 맡길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대표실 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자리.

예전에 일에 지칠 때면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고는 했었다.

연재준이 백유진에게 이 자리를 줬다는 건 앞으로 아무도 그녀를 무시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아닐까?

유월영은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유산하고 제대로 요양하지 못한 상황이라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팠다.

백유진은 책상에 있던 달력을 그녀의 박스에 넣어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배워서 더는 그런 실수하지 않을게요. 걱정 마세요, 월영 언니.”

이 여자는 유월영이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새로운 사랑이 나타났으니 옛사랑은 물러나는 게 당연한 이치. 게다가 연재준에게 유월영은 사랑도 아니었다.

단지, 실컷 쓰다가 질려서 버려진 도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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