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ZER LOGIN태윤의 대답은 너무도 빨랐다.마치 자신이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그는 아무 망설임 없이 두 사람의 행복을 단정했다.“태윤 씨.”“응?”“제가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동안…… 당신은 어디 있었어요?”태윤의 시선이 멈췄다.“무슨 뜻이야?”“그냥 궁금해요. 제가 피아노를 그만두고 집에 있었으면 우리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겠죠?”“그랬지.”“그럼 저녁도 자주 같이 먹었겠네요.”태윤은 미간을 찌푸렸다.“당연히 매일은 아니지. 나도 일이 있었으니까.”“그렇겠죠.”재희는 더 묻지 않았다.서유나라는 이름도, 해외 출장이라는 거짓말도, 사고 전 자신이 남긴 편지도 남편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아내가 잃어버린 결혼생활의 기억을 자신만이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당신 요즘 이상한 질문을 많이 해.”태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기억이 안 나면 나한테 물어봐. 괜히 혼자 생각하다 오해하지 말고.”“제가 물으면 전부 말해 줄 거예요?”“그럼.”“정말…… 전부요?”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희미해졌다.“당연하지. 부부 사이에 비밀이 있으면 안 되잖아.”재희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남편은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아내에게 비밀을 만들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잘 자.”태윤이 침실을 나간 뒤에도 재희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복도에서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나서야 악보를 들추어 구겨진 편지를 꺼냈다. 사고 전 자신이 남긴 글씨가 눈앞에 펼쳐지자, 조금 전까지 억누르고 있던 숨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재희야, 이번에는 네가 너를 버리지 마.*재희는 편지를 가슴에 안았다.“……미안해.”그것이 누구를 향한 사과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무대를 포기했던 자신에게인지, 남편의 불륜을 알고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자신에게인지, 아니면 사랑받지 못한 이유를 끝까지 자기 탓으로 돌렸던 여자에게인지.눈물이 편지 위로 떨어질까 봐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젖혔다
침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순간, 재희는 무릎 위에 펼쳐 놓았던 편지를 악보 사이로 밀어 넣었다.서두르는 바람에 종이 모서리가 손톱에 걸려 구겨졌지만, 그것을 다시 펼칠 여유는 없었다. 문틈으로 복도의 불빛이 길게 들어오더니 곧 강태윤이 모습을 드러냈고, 재희는 악보를 덮은 손에 힘을 주며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아직 안 잤어?”태윤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게서는 익숙한 향수 냄새가 났고, 손목시계의 금속 장식이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내일 연습할 곡을 보고 있었어요.”“또 악보야? 공연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그렇게까지 무리해야겠어?”걱정스럽다는 말투였으나 그의 시선은 재희의 얼굴보다 악보에 오래 머물렀다. 태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이마로 손을 뻗었고, 재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재희야?”허공에서 멈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왜 그래? 어디 아파?”“아니요. 조금 피곤해서요.”“그러니까 내가 쉬라고 했잖아.”그는 다시 손을 뻗어 이마를 짚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피부에 닿자 재희의 속에서 무언가가 뒤집혔다.사고 전의 자신도 이 손을 기다렸을 것이다.남편이 늦은 밤 돌아와 이마를 한번 짚어 주거나 어깨를 감싸면, 그날 하루 종일 느꼈던 외로움을 잊으려고 했을 것이다.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남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남겨진 작은 다정함에 매달렸을지도 몰랐다.조금 전 읽었던 편지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오늘도 혼자 저녁을 먹었다.**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피아노를 그만두면 적어도 저녁은 함께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다.*재희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열은 없네.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태윤의 손이 뺨으로 내려오려 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밀어냈다.“괜찮아요. 쉬면 나아질 거예요.”“당신은 늘 괜찮다고만 하지. 그러다 또 쓰러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당신 몸은 이제 당신 혼자
그게 무서웠어.그 사람이 나를 속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직 그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어.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기다리는 내가 너무 불쌍하더라.피아노도 안 치고, 좋아하던 일도 안 하고, 집에서 그 사람 눈치만 보면서 기다리는 내가.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재희는 편지지를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그 문장을 읽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오래 숨을 참고 있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사고 전의 자신은 남편의 불륜을 알고도 매일 같은 집에서 살았다.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그가 웃어 주기를 바랐고, 다시 사랑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재희는 그 시간을 기억하지 못했다.그러나 편지에 적힌 말들은 낯설지 않았다.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자신의 마음을 뒤로 미루는 일이 얼마나 쉽게 반복될 수 있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았다.그녀는 다시 편지를 들었다.‘나는 강태윤이 서유나와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어.처음 알았을 때는 내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어. 설명을 들으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했어.그런데 거짓말은 없어지지 않았어.나는 계속 기다렸고, 계속 참았고, 계속 나를 바꿨어.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아내가 되려고.하지만 내가 더 참고, 더 조용히 살고, 피아노까지 그만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더라.’재희는 종이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폈다.구겨질까 봐 손끝에 힘을 빼는 순간, 편지 한쪽에 남아 있는 희미한 눌림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글씨를 쓰다가 펜을 세게 누른 흔적이었다.‘이혼하기로 했어.아직 무서워. 내가 정말 혼자 살아갈 수 있을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모르겠어.그래도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어.상담도 예약했고, 내 서류도 정리하고 있어. 이번에는 미루지 않으려고 해.혹시 내가 또 마음이 약해져서 이 결심을 번복하고 싶어지면, 이 편지를 다시 읽으려고 해.그 사람이 한때 나를 사랑했을지도
아니면 자신을 위해 피아노를 내려놓고, 웃으라고 하면 웃고, 집안의 요구에 따르던 아내였을까.***밤이 깊어지자 재희는 다시 악보 상자를 꺼냈다.오래된 공연 제목이 적힌 상자 안에는 결혼 전부터 사용하던 악보와 연습 메모가 들어 있었다. 종이 가장자리는 손때가 묻어 부드럽게 닳아 있었고, 음표 위에는 호흡과 손가락 번호를 표시한 글씨가 빼곡했다.재희는 악보를 넘기다가 손을 멈췄다.결혼 전의 자신은 곡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을까. 어떤 음을 더 깊게 눌러야 하는지, 어느 순간 숨을 늦춰야 하는지까지 세심하게 적어 놓은 흔적이 종이마다 남아 있었다.그녀는 그 글씨를 따라가며 손끝으로 건반을 누르듯 무릎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음악은 여전히 익숙했다.그러나 그 음악을 지키려고 애썼던 지난 3년의 자신은 기억나지 않았다.재희는 마지막 악보를 들어 올리다가 아래에 놓인 얇은 봉투를 발견했다.봉투 겉면에는 익숙한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윤재희에게.’재희는 봉투를 뒤집었다.뒷면에는 사고가 나기 전의 날짜가 적혀 있었고, 접착한 부분은 아직 뜯어지지 않은 상태였다.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봉인을 열었다.안에는 여러 번 접힌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첫 줄에는 짧은 인사가 적혀 있었다.‘재희야.’자신이 자신에게 쓴 편지였다.재희는 종이를 조금 더 펼쳤다.‘오늘도 태윤에게 아무 말 못 했어. 그 사람이 또 거짓말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내가 알고 있다는 걸 말하는 순간 정말 끝날 것 같았어. 그 사람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면 우리 결혼이 돌이킬 수 없게 된다는 게 더 무서웠던 것 같아.이런 말을 쓰고 있는 나도 참 답답하지.그런데 재희야, 너도 알잖아. 우리가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니잖아. 내가 얼마나 좋아해서 결혼했는지, 그 사람하고 평생 같이 살고 싶다고 얼마나 많이 생각했는지.그래서 자꾸 예전 일을
‘확인한 것들.’짧은 제목 아래에는 날짜와 장소, 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들이 적혀 있었다.태윤이 해외에 있다고 말한 날.서유나가 참석한 국내 행사.연락이 닿지 않았던 시간.그리고 법률사무소 예약 날짜.재희는 메모를 읽으며 이미 확인한 자료를 차례로 대조했다. 확실한 사실과 아직 이유를 알 수 없는 정황을 구분하고, 자신이 추측한 내용은 별도로 표시했다.사고 전의 재희도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남편을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 반복되자, 감정만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기록을 남긴 듯했다.재희는 법률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직원은 이전 예약 기록이 남아 있다고 안내했다. 다만 당시 상담 내용은 본인 확인과 별도의 절차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재희는 잠시 생각하다가 새 상담 일정을 잡겠다고 말했다.“혼인관계에 관한 문제로 상담받고 싶어요.”직원이 가능한 날짜를 안내했다.재희는 공연 연습 일정과 겹치지 않는 시간을 골랐다. 준비해야 할 서류를 확인한 뒤 통화를 마쳤다.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나서도 한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남편에게 당장 사진을 보여 주고 왜 거짓말했는지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태윤이 어떤 설명을 내놓든, 그 말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판단할 준비부터 필요했다.재희는 자료를 다시 정리했다.확인된 사실과 의심스러운 정황을 구분하고, 법률 상담에서 물어볼 내용을 적었다.남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기로 했다.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남편의 설명에 맡기고 싶지 않았다.***그날 저녁, 명숙은 재희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태윤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고, 직원이 막 국을 가져온 참이었다. 음식에서 따뜻한 김이 피어올랐지만 명숙은 며느리가 의자를 당기기도 전에 손짓했다.“태윤이 국부터 떠 줘.”재희는 직원이 들고 있던 국그릇을 바라보았다.직원이 바로 옆에 서 있었지만 명숙은 굳이 재희에게 그릇을 내밀었다.“결혼한 여자가 매일 연습실에만 가 있으면 남편은 누가 챙기니? 이런 건 말
재희는 프로그램 아래에 놓인 일정표를 꺼냈다.취소된 연습 날짜들이 눈에 들어왔다. 몇몇 칸에는 붉은 펜으로 표시가 돼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다음에는 꼭 가겠다고 약속했는데.’재희는 그 문장을 읽고 손을 멈췄다.누구에게 한 약속이었을까. 함께 연주할 사람에게였을 수도 있고, 공연을 준비하던 관계자에게였을 수도 있었다.아니면 자신에게 한 약속이었을지도 몰랐다.다른 종이에는 발송하지 못한 편지처럼 보이는 문장들이 남아 있었다.‘오늘만은 내 말을 들어 줬으면 좋겠어.’‘나는 당신이 싫어서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야.’‘내가 피아노를 치는 게 왜 당신에게 상처가 되는지 모르겠어.’재희는 종이를 무릎 위에 펼쳐 놓았다.자신은 피아노를 사랑했다. 그 사실은 사고 전에도, 사고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그런데 과거의 재희는 남편에게 음악을 사랑하는 일이 남편을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고 설명해야 했다.그 문장을 적던 순간 얼마나 답답했을까.좋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말조차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고 들었다면, 자신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아들였을까.재희는 오래된 종이들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상자 아래에는 국내 음악 후원 행사 사진도 있었다.태윤과 서유나가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공식 행사 자료에서 이미 확인했던 것이지만, 이번 사진의 뒷면에는 자신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출장이라고 했던 날.’재희는 사진을 뒤집어 놓았다.사고 전의 자신도 남편의 거짓말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사진에 날짜를 적어 두었고, 공연 자료와 함께 보관했다.이제 그 사진은 단순히 남편의 거짓말을 보여 주는 자료가 아니었다.과거의 자신이 이미 그 거짓말 때문에 상처받았다는 흔적이었다.재희는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그때의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왜 이런 기록을 남겼는지 조금씩 궁금해졌다.***그날 밤, 재희는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거실 테이블 위에서 울리는 휴대전화를 보았다.태윤의 것이었다.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