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이혼 합의서]
눈앞의 글자가 좀처럼 읽히지 않았다.
지호는 손에 들린 종이를 멍하니 내려다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웃고 있었는데, 현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거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넘어져 있는 액자와 어지럽게 널린 사진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엄마 박은주가 넋이 나간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엄마…….”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지만, 은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호는 급히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아래에는 너무도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윤용석.
지호의 아버지였다.
“이게 뭐야? 엄마, 이게 왜 여기 있어?”
은주는 입술만 몇 번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 한쪽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르르. 부르르.
은주가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향해 팔을 뻗었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지호가 먼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
[남편]
지호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예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곧이어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갑고, 지나치게 담담한 목소리였다.
“은주 씨,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렸잖아요.”
지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빨리 서명해서 내일 변호사 편으로 보내요.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순간, 숨이 막혔다.
지호는 말문이 막힌 채 휴대폰만 붙잡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았다. 수십 년을 함께 산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게 아니라, 마치 회사 서류 하나를 처리하는 것처럼 건조했다.
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
“……아빠?”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지호냐.”
놀랍게도 윤용석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게 뭐야?”
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한테 왜 이래?”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갑기만 했다.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야.”
지호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이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윤용석은 마치 지호의 말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짧게 말을 이었다.
“엄마한테 전해.”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일 변호사한테 꼭 넘기라고.”
뚝.
그 한마디를 끝으로 통화는 끊겼다.
너무 허무했다.
지호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빠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변명하지도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서류를 처리하라고 말했다. 마치 이미 모든 게 끝난 사람처럼.
지호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을 때, 은주의 상태는 더욱 심각해져 있었다.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엄마?”
지호가 다급히 곁으로 다가갔다.
“엄마, 괜찮아? 엄마, 나 좀 봐.”
하지만 은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만 파르르 떨릴 뿐이었다.
“엄마!”
다음 순간이었다.
은주의 몸이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지호는 반사적으로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 정신 차려 봐!”
손끝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에는 이미 힘이 빠져 있었다.
지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엄마의 어깨를 흔들었다.
“엄마, 눈 떠 봐. 엄마!”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지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숫자 세 개를 누르는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주소를 설명하는 동안에도 목소리가 자꾸 갈라졌다.
구급대가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몇 분이었지만, 지호에게는 끝없이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삐걱거리는 들것 소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희미한 소독약 냄새.
정신을 차려 보니 은주는 이미 구급차 안에 실려 있었다.
지호는 제대로 신발도 갈아 신지 못한 채 그 뒤를 따라 올라탔다.
그날 이후, 지호의 시간은 병원 안에 멈춰 버렸다.
의사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쇼크 상태라고 말했다. 당분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지만 지호는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다.
병실 안에서 시간은 이상하게 흘렀다. 엄마가 잠들면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인기척이 들리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상태를 확인했다. 물 한 잔 마실 여유도 없이, 머릿속에는 온통 엄마 생각뿐이었다.
그 사이 휴대폰 배터리는 바닥났다. 휘웅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이틀째 밤이 지나서야, 지호는 겨우 집에 들를 수 있었다.
집에서 옷가지와 필요한 물건을 챙겨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병원 문을 나선 순간,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깨달았다.
머리는 멍했고,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가로등 아래, 누군가가 집 앞에 서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다가가는 순간,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큰 키. 검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
강휘웅이었다.
지호의 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걸까.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틀 동안 억지로 붙들고 있던 감정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휘웅도 지호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멀리서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지호야!”
휘웅이 곧장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눈앞이 흐려졌다.
휘웅의 얼굴도, 가로등 불빛도, 전부 희미하게 번졌다.
지호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휘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너 어디 있었어?”
걱정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지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끝내 참지 못하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오빠.”
크리스마스이브의 명동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화려했다.거리 곳곳에 걸린 전구들이 반짝였고, 쇼윈도마다 커다란 리본과 금빛 장식들이 빼곡했다.광장 한가운데에는 사람 키의 몇 배는 되는 거대한 트리가 세워져 있었고, 캐럴 소리가 겨울 공기를 타고 천천히 번져 나갔다.지호는 명동성당 앞 난간에 기대 선 채 목도리를 코끝까지 끌어올렸다.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원래는 네 사람이 함께하기로 한 자리였다.
캠핑장에서 돌아온 날 밤, 지호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침대에 누웠다.며칠째 이어진 병간호와 낯선 환경 때문이었는지,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따뜻한 이불을 끌어당겼는데도 어딘가 으슬으슬했다.눈을 감자마자 잠은 금세 쏟아졌다.그런데 이상했다.분명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들었는데, 꿈속은 이상할 만큼 선명했다.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지호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지끈거리는 숙취와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었다.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아니, 정확히는 낯설지 않은 천장이었다. 어젯밤 유진과 함께 텐트에 들어와 잠들었던 기억은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뒤의 기억이 통째로 잘려 나간 것처럼 흐릿했다.지호는 눈을 감은 채 이마를 꾹 눌렀다.머리가 무거웠다.텐트 천 사이로 스며드는 겨울 아침 공기가 차갑게 뺨을 스쳤다. 멀리서 새 우는 소리와 누군가 장작을 정리하
퇴원 수속을 마친 은주를 부축해 병원을 나서는 길은 유난히 무거웠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던 병원 복도는 어느새 평온을 되찾아 있었다. 하지만 지호의 마음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엄마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차창 밖으로 겨울 초입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지만, 은주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지호는 몇 번이고 말을 걸어 보려다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집에 도착하자, 오랫동안 비어 있던 거실 특유의 냉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엄마, 정신 차려. 우리 아빠는 이제 잊어버리자.”지호는 병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은주를 보며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눈물은 이미 오래전에 말라 버린 뒤였다. 며칠 동안 울 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는 여전히 무겁고 차가운 감정이 남아 있었다.분노였다.아빠와의 이혼 서류는 이미 법원에 접수됐고, 남은 건 조정 절차뿐이었다. 하지만 지호에게 그 사실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었다.가족이 무너진 뒤에 남은 건 상처와 배신뿐이었
지호는 휘웅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복받쳐 오르는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뜨거운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며칠 동안 억지로 눌러 두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병실의 차가운 공기, 새벽마다 울리던 심전도 소리, 정신을 잃은 듯 누워 있는 엄마의 얼굴,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이혼 서류를 들먹이던 아빠의 목소리까지.모든 것이 뒤엉켜 지호를 짓눌렀다.휘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도 않았고, 괜찮냐고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