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가면의 집〉의 여파는 예상보다 훨씬 컸다.종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관련 화제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가장 극적인 변화를 맞은 건 송경숙이었다.한동안 이렇다 할 작품이 없어 침체기를 겪던 그녀는, 이번 작품에서 보여 준 노련한 연기로 완전히 재평가받았다.각종 시상식에서 러브콜이 이어졌고, 인터뷰 요청도 끊이지 않았다.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하는 날이 이어졌다.후배들 사이에서는 "역시 연기는 관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놀랍게도 종영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송경숙은 벌써 차기작 촬영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진섭에게도 변화는 마찬가지였다.각종 브랜드의 CF 제안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영화 시나리오까지 몇 편이나 검토 중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무명에 가까웠던 배우가, 이제는 어디를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매니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운 제안서를 들고 진섭을 찾아왔다.정작 본인은 그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직 얼떨떨한 눈치였다.지호에게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여러 제작사에서 차기작 논의를 위한 미팅 요청이 쉴 새 없이 들어왔다.하루에도 몇 통씩 걸려 오는 전화, 쌓여 가는 제안서들. 개중에는 꽤나 매력적인 조건을 내건 곳도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놓칠세라 서둘러 일정을 잡았을 텐데, 이번만큼은 마음이 자꾸만 다른 곳으로 향했다.'조금만, 정말 조금만 쉬고 싶다.'몇 달간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원고와 씨름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던 수정 작업, 촬영장을 오가며 쌓인 피로, 방영 내내 마음을 졸이던 나날들.몸도 마음도 소진될 대로 소진된 상태였다.지호는 당장 다음 작품에 뛰어들기보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휴식을 허락하기로 했다.그런 지호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든 건 그즈음이었다.제작사에서 주요 배우와 작가진을 위한 포상휴가를 준비했다는 연락이었다.행선지는 동남아의 한 휴양지.촬영 내내 고생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라며
〈가면의 집〉 마지막 회가 방영된 날, 시청률은 그해 방영된 드라마 중 최고 기록을 세웠다.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 관련 키워드가 줄줄이 올라왔고, 각종 매체에서는 앞다투어 특집 기사를 쏟아 냈다.배우들의 인터뷰 영상이 곳곳에 걸렸고, 명장면을 편집한 영상들이 SNS를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몇 달간 쌓아 온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종영 다음 날 저녁, 제작사에서는 성대한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배우와 스태프는 물론, 작가진까지 한자리에 모이는 큰 규모였다.넓은 룸을 가득 채운 사람들, 여기저기서 터지는 웃음소리와 건배 소리.오랜만에 다 함께 모인 자리는 시작부터 떠들썩했다.한동안 서로 얼굴 볼 새도 없이 바빴던 사람들이라, 다들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촬영 뒤풀이 이후 처음 다시 모이는 자리이기도 했다.“작가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여기저기서 지호에게 인사와 축하가 쏟아졌다.지호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얼떨떨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순간이었다.처음 이 작품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밤새 원고를 붙잡고 씨름하던 지난 시간들이, 이 순간만큼은 헛되지 않았다는 걸 실감하게 했다.진섭도 촬영 스케줄을 겨우 조율해 참석한 자리였다.오랜만에 화장기 없는 편안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는, 지호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와 활짝 웃었다.“작가님, 정말 축하드려요. 이 작품 하길 잘했다는 생각, 오늘 백 번은 더 들었어요.”“진섭 씨 덕분이죠.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다음 작품도 저 좀 챙겨 주세요.”진섭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지호도 마주 웃으며 잔을 들었다. 별다른 뜻 없는 가벼운 농담이었지만, 그 편안함이 새삼 고마웠다.두 사람이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감독과 다른 배우들도 하나둘 지호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휘웅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인사를 건넬 타이밍을 좀처럼 잡지 못하고 있
속초에서의 이틀이 꿈결처럼 지나가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가면의 집〉 후반부 방영이 시작되면서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시청률 그래프는 방영 때마다 조금씩 우상향을 그렸고, 실시간 검색어에도 심심찮게 이름을 올렸다. 지호에게는 다음 작품 논의를 위한 미팅과 인터뷰 요청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적했던 작업실이, 이제는 걸려 오는 전화와 메일로 하루 종일 분주해졌다.정신없이 바빠진 나날 속에서, 지호는 오히려 마음 한구석이 편했다. 몰두할 일이 있다는 건, 복잡한 생각을 잠시 밀어 둘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속초에서 있었던 일들은 마음 한쪽에 곱게 접어 두고, 지호는 매일 아침 원고와 미팅 자료부터 펼쳐 들었다. 밀려드는 일정을 하나씩 소화해 나가는 동안에는, 적어도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휴대폰이 울린 건 제작사와의 미팅 도중이었다.[강휘웅]발신자를 확인한 지호는 잠시 화면을 바라봤지만, 미팅 중이라 받을 수 없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는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오가는 중이었다. 진동으로 몇 번 더 울리다 이내 조용해지는 화면을, 지호는 테이블 아래에서 슬쩍 내려다봤다. 미팅이 끝난 뒤 확인해 보니, 짧은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아?]지호가 답장을 보내려던 순간, 다음 일정을 알리는 매니저의 연락이 왔다. 자료를 챙기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사이 휴대폰은 다시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결국 답장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보낼 수 있었다.[미안, 미팅이 계속 이어져서. 내일은 어때요?]메시지를 보내 놓고, 지호는 잠시 화면을 들여다봤다. 확인 표시가 뜨는 걸 보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 감정도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인터뷰 촬영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다음 날, 이번엔 반대였다. 지호가 시간을 비워 뒀지만, 휘웅 쪽에서 급하게 잡힌 투자 관련 일정으로 연락이 왔다. 지호는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춰 일부러 일정을 앞당겨
휘웅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지호는 잠시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정확히는,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마지막 데이트의 그 밤으로. 불꽃놀이가 터지던 밤하늘 아래, 휘웅이 나직하게 불러 주던 그 노래. 그때 느꼈던 몽글몽글한 감정,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던 그 느낌까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아, 이 노래.'전주만 듣고도 알았다. 가사를 직접 쓴 자신이 모를 리 없었다. 그날의 공기, 그날의 온도, 그날 휘웅의 표정까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했다. 손끝에 닿았던 밤바람의 서늘함까지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하지만 그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순간, 지호의 눈에서 흘러나온 건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었다.방금 전까지 애틋했던 마음이, 어느새 스스로에게 향한 헛웃음으로 바뀌어 있었다.'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가.'지호는 속으로 자조했다. 아직도 이렇게, 몇 년이나 지난 추억에 젖어 감성팔이를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이 나이에, 이 마당에, 겨우 노래 한 곡에 무너지려는 스스로가 한심하기까지 했다. 웃음이 나왔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그런데 웃으면 웃을수록, 오히려 눈물이 차올랐다.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아니…… 이거, 울음을 웃음으로 막고 있는 건가.'무엇이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자신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건, 이 감정을 더는 이 자리에서 주체할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지호는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은데, 돌아볼 새도 없이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신발이 벗겨질 뻔한 것도, 골목을 몇 번이나 꺾어 돌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이 감정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얼마나 뛰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엔 바다가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지만, 지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온 참이었다.발이 젖는 것도 모른 채, 지호는 그대로 모래사장
술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무르익어 갔다.다섯 사람 모두 마음속에 저마다 하나씩 꿍꿍이를 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누구도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술의 힘을 빌려 분위기는 한층 더 뜨거워졌다. 웃음소리가 잦아들 만하면 누군가 다시 잔을 채웠고, 그때마다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동학이 안주를 더 시켜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유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음 술을 골랐다. 진섭은 낯선 자리임에도 제법 잘 어울려 들었고, 지호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계속 휘웅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노래방 기계 있는데, 한 곡씩 어때요?”유진이 눈을 반짝이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곧 텔레비전 화면에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첫 곡은 동학이 골랐다. 오래된 댄스곡이었다. 몸치인 걸 숨기지 않고 신나게 팔을 휘두르는 동학의 모습에 다들 배를 잡고 웃었다. 진섭도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이내 박수를 치며 분위기에 스며들었다.“동학 오빠, 그거 완전 아저씨 춤이야!”유진이 깔깔거리며 놀리자 동학은 더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마이크를 놓지 않으려는 동학과 억지로 빼앗으려는 유진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결국 노래는 절반쯤에서 흐지부지 끊겼다.뒤이어 유진이 마이크를 낚아채더니 왕년의 인기가요를 목청껏 불러 젖혔다. 음정은 반쯤 나가 있었지만, 그 열창에 다들 박수를 보냈다. 시끄럽고 신나는 노래들이 연달아 이어지며 거실 안의 열기는 점점 더 올라갔다.“다음, 진섭 씨 차례!”유진이 마이크를 진섭에게 떠넘겼다. 진섭도 못 이기는 척 마이크를 받아 들고 최신 가요를 한 곡 불렀다. 프로답게 음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 노래에 다들 박수를 쳤다.“와, 진짜 노래도 잘하시네요.”동학이 감탄하며 엄지를 치켜세우자, 진섭이 겸연쩍게 웃었다.한바탕 흥이 지나가고, 이번엔 휘웅 차례였다.“오빠도 한 곡 해.”유진이 마이크를 건네자, 휘웅은 잠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 곡을 선택했다.전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시끄럽던 분
워크숍 첫날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흘러갔다.낮 동안은 다 함께 바닷가를 걷고, 조별로 나뉘어 간단한 레크리에이션도 했다. 오랜만에 여유를 되찾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지호도 그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섞여, 오랜만에 마음 편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저녁 여덟 시쯤, 지호는 숙소 앞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낮 동안의 레크리에이션으로 몸은 피곤했지만, 기분 좋은 피로였다. 옆자리에는 진섭이 캔커피를 손에 든 채 앉아 있었다. 촬영장 밖에서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내일 일정도 빡빡하대요?”진섭이 캔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그런가 봐요. 오전에 조별 활동 하나 더 있다던데.”그때, 지호의 휴대폰이 울렸다. 유진이었다.“여보세요?”“지호야, 뭐 해?”“어? 나 워크숍 왔어.”“워크숍? 어디로?”“속초.”전화기 너머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뭐어?! 어머, 우리도 속촌데!”“진짜?”지호도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높아졌다.“완전 대박이다. 우리 지금 펜션인데, 여기로 와! 동학이 오빠도 여기 있어.”“진짜 가도 돼?”“당연하지! 뭐 좀 사서 와, 우리 술 좀 부족해.”전화를 끊은 지호의 얼굴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져 있었다. 오랜만에 유진을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섭이 물었다.“무슨 일이에요? 표정이 갑자기 확 밝아지셨는데.”“아…. 친구들이 이 근처에 휴가 와 있대요. 몇 년 만에 만나는 건지 모르겠네요. 맥주 한잔 마시러 가려고요.”지호가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자, 진섭이 눈을 반짝였다.“저도 가면 안 돼요?”“네?”“낯선 사람 껴도 괜찮으면요. 오늘 워크숍 끝나고 딱히 할 것도 없어서.”지호는 잠시 머뭇거렸다. 거절할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음…. 그럼 같이 가실래요? 제 친구들이 좀 놀라긴 하겠지만.”“그 정도쯤이야 괜찮죠.”진섭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사람은 나란히 밤길을 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