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여진이 구급차에 실려 갈 때 박진성은 자신의 화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피가 날 정도로 벽을 세게 내리쳤다.2년 전만 해도 제 주위를 맴돌며 사랑을 갈구하던 민여진이 지금은 도망가고 싶단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렇게 변한 건지 박진성은 혼란스럽기만 했다.“진성 씨, 괜찮아요?”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문채연이 박진성에게로 달려오더니 그의 손을 잡으며 간호사더러 빨리 처치부터 하라고 했다.“괜찮아.”하지만 박진성은 이번에도 잡힌 손을 빼내며 물었다.“넌 어떻게 알고 온 거야?”양경호에게서 듣고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던 문채연이 대충 아무 이유나 찾아 둘러댔다.“친구가 병원에서 검사하다가 우연히 당신을 봤다고 전화해서요.”병실 안에 누워서 링거를 맞고 있는 민여진을 한번 본 문채연은 박진성을 향해 물었다.“저기 누워있는 사람 여진 씨 아니에요?”아직 화가 채 가라앉지 않았던 박진성은 아무리 문채연이라 해도 더 내어줄 인내심이 없어 짤막하게 대꾸했다.“민여진이 좀 다쳐서 내가 병원으로 데리고 왔어.”“여진 씨가 다쳤는데 왜 당신이 병원에 데려와요?”아무리 그런 쪽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써봐도 문채연은 늘 짓고 있던 미소까지 유지할 수는 없었다.“둘이 따로 만났던 거에요?”“응.”남자의 짧고 굵은 대답에 문채연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얼굴까지 저 모양이 돼버렸는데 왜 박진성은 아직도 민여진을 잊지 못하고 있는지 문채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진성 씨, 당신 여진 씨 만난 이후로 나랑 있는 시간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요? 따로 만나기까지 하고 여진 씨 다쳤다고 본인 손은 신경도 안 쓰고... 솔직히 말해요, 아직 여진 씨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죠?”민여진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소리에 제대로 열 받은 박진성은 문채연을 향해 소리 질렀다.“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박진성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아양을 떠는 사람일 뿐인데 박진성이 그런 여자를 마음에 두고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그럼 왜...
“손 부어오르잖아, 움직이지 마!”미간을 찌푸리며 민여진에게로 다가간 박진성이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자 민여진은 또 발작이라도 하듯 발버둥 쳤다.“한 번만 더 움직이면 나도 너한테 무슨 짓 할지 몰라.”그 말에 겁을 집어먹은 민여진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한 채 다 쉬어버린 목소리를 쥐어짜 내고 있었다.“도대체 뭘 원해서 이러는 거야 당신...”이미 저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는데, 유일하게 문채연과 닮은 얼굴까지 망가뜨려 놓고서 뭘 더 원하는지 민여진은 알 수가 없었다.“민여진, 너 거울 볼 줄 몰라? 내가 너 같은 애한테 왜 질척거리겠어? 난 내 아이를 되찾고 싶을 뿐이야. 제 핏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갈 거니까 아이만 주면 다신 네 앞에 얼씬도 안 해.”“아이를... 달라고?”박진성의 어이없는 말에 악몽으로 고달팠던 지난날들이 떠올라 민여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아이는 진작에 감옥에서 1년 전 민여진과 함께 죽어버렸는데, 그 죽음을 사주한 사람이 이제 와서 아이를 집에 데려간다니, 정말 우습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웃음을 터뜨리던 민여진이 눈물까지 흘리자 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리며 물었다.“왜 웃어? 내가 내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게 웃겨?”눈물을 흘리던 민여진은 이 순간 만큼은 눈이 멀어버린 게 참 다행스러웠다.눈이 멀쩡했다면 저 가증스러운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을 텐데 그보다 더 곤욕스러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박진성, 날 괴롭히고 싶은 거면 그냥 솔직하게 말해, 말도 안 되는 이유 들먹이지 말고. 아이가 어떻게 됐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당신이잖아.”“그게 무슨 소리야?”“무슨 소리냐고?”되묻는 박진성에 민여진은 이불을 부여잡으며 목놓아 울었다.“죽었다고! 당신이 바라던 대로 죽었어! 나한테 얼굴 한번 보여주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이제 만족해?!”누군가 제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멍한 느낌에 벙쪄있던 박진성은 애써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죽었다고? 민여진, 내가 그딴
통화를 마친 양경호는 자책 어린 표정으로 손톱을 짓이겼다.문채연은 그런 양경호를 보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양경호 씨, 이젠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예요,비밀 제대로 지켜요. 만에 하나라도 진성 씨가 알게 되는 날엔 당신도 나도 모두 다 죽는 거예요.”문채연의 명령이라면 다 따르라던 박진성의 지시 때문에 그녀가 시키는 일을 해왔었는데 그게 이렇게 큰일로 번질 줄 양경호도 미처 몰랐었다.민여진이 얼굴을 버리고 아이도 잃은 데다가 눈까지 멀어버렸으니 이 모든 일을 시킨 게 저라는 걸 박진성이 알게 되면 양경호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민여진, 걔는 그런 얼굴을 하고 눈까지 병신이 됐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왜 또 진성 씨 앞에 나타나는 거야 정말!”하지만 이 와중에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버린 문채연은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민여진을 원망하고 있었다.“지금은 불쌍한 척하며 진성 씨를 흔들어놓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도 얼마 못 갈 거야, 두고 봐 진짜.”...밖에서 새 핸드폰을 산 뒤 담배를 피우던 박진성은 한참 만에 병실로 돌아갔다.“죄송한데 혹시 제 핸드폰 좀 가져다주실 수 있으세요?”“핸드폰이요? 실려 오실 때 핸드폰은 없었는데요?”“아... 그럼 혹시 간호사님 핸드폰 좀 빌릴 수 있을까요?”약을 바르는 중이라 조용히 있었는데 거듭해서 핸드폰을 요구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은 간호사가 대답도 하기 전에 화를 참으며 물었다.“눈도 멀어버린 게 핸드폰은 왜 찾아?”그 목소리에 더욱더 다급해진 민여진은 계속해서 간호사에게 부탁했다.“핸드폰 한 번만 빌려주세요...”제 말은 깡그리 무시하는 민여진에 화가 난 박진성은 눈짓 한 번으로 간호사를 내보내고 민여진에게로 다가갔다.“핸드폰은 왜 찾냐고, 뭐 설마 방현수한테 전화하려고 그러는 거야? 걔랑은 한시도 못 떨어지겠어?”그에 고개를 떨궈버린 민여진은 이불깃을 여며 쥐며 말했다.“걱정할까 봐 연락만 해주려는 거야.”정말 방현수에게 연락하려 했다는 말에 박진성은 제가 조금
“역겨운 당신 피를 물려받은 애라서 걔가 내 배 속에 있으니까 구역질이 나더라. 너랑 함께했던 내 과거가 너무 후회스러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난 그냥 당신이랑은 모르는 사람으로 사는 걸 택할 거야.”박진성도 조금 아파봤으면 해서 한 말인데 민여진의 바람대로 박진성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느낌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오름을 느꼈다.제가 없으면 죽을 사람처럼 굴며 모든 사랑을 내어주던 민여진이 이젠 울부짖으며 저한테 역겹다고 하는 건 눈으로 보고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박진성은 이 모든 게 방현수 때문인 것 같았다.“민여진,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뭐 정말 착한 사람 같아 보여?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시 상기시켜줘야겠네.”박진성은 민여진의 턱을 잡아 올리며 이를 갈았다.“네가 방금 한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내가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줄게.”말을 마친 그가 문을 세게 열며 나가버리자 민여진은 가빠오는 숨에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았다.그런데 박진성의 마지막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좀처럼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화가 나면 제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조리 치워버리는 게 박진성이었기에 그녀는 혹시라도 방현수가 위험해질까 봐 당장 이불을 걷어내고 맨발 바람으로 뛰쳐나가 다른 사람에게 핸드폰을 빌려보려 했다.하지만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저기 문채연이다! 차로 사람을 치어서 죽인 살인범이야!”“십 년형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형 적게 받으려고 얼굴까지 망가뜨린 거 좀 봐, 사람 죽인 년이 자기는 살겠다고 병원엘 와? 더러운 년!”“이제야 얼굴이랑 마음이 좀 같아 보이네, 똑같이 못생겼잖아. 얼른 찍어서 저 못생긴 얼굴로 인터넷에 뿌려버려, 감옥에서는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저에게로 달려오는 사람들의 인파가 점점 몰려 앞이 보이지 않았던 민여진은 속수무책으로 그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었다.옆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부축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고만 있었다.“이게 살인범이 받아야 할 벌
하지만 방현수는 그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민여진의 얼굴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그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이런 식으로 촬영하는 게 불법이라는 건 알아요. 나갈 거니까 다들 비키세요.”“둘 다 똑같은 연놈들이네!”그때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치자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주먹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수액 걸이로 민여진의 등을 내려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걸 본 방현수가 빠르게 그녀를 잡아당겼지만 민여진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말았다.“여진아! 괜찮아? 어디 다쳤어? 봐봐!”“나 괜찮아요.”“거짓말 말고!”“얼른 가요, 나 찾아온 사람들이니까 현수 씨는 이런데 엮이지 말고 빨리 가라고요. 현수 씨가 나 대신 다치는 거 싫어요.”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민여진에 방현수는 그녀를 더욱더 꼭 껴안았다.“널 혼자 두고 가는 그런 나약한 남자 아니야 나.”그때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박진성은 방현수와 민여진이 서로를 꼭 안고 있는 걸 보자 또 혈압이 치솟았다.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그가 바로 달려가 그 둘을 떼어놓으려 하자 문채연이 나서서 박진성을 말렸다.“진성 씨, 당신이 민여진이랑 어떤 사이였는지 잊었어요? 지금 저기 끼어들면 대영그룹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거예요. 저 사람들 다 반쯤 돌아있는데 당신까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요!”아무리 화가 나도 이성이 남아있는 이상 박진성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는 또 주먹으로 벽을 내려쳤다.“대체 누가 저 사람들을 불러온 거야? 얼굴도 다 망가져 버렸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큰 죄를 지었으니까 병원에서 알아본 사람이 있었겠죠.”분노를 삭이던 박진성은 바로 경호원들을 불러 사람들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시켜 방현수와 민여진을 뒷문 쪽으로 불러내게 했다.모든 일이 해결되고 민여진과 방현수가 제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박진성은 이를 갈며 곧바로 민여진을 품에 안았다.“뭐 하는 짓입니까!”방현수가 이번에도 박진성을 향해 주먹을
“진성 씨!”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문채연이 초조한 얼굴로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며 다가왔다.“기자들이 왔어요. 빨리 나가야 해요! 병원에 있는 거 걸리면 큰일난다고요!”그 소리를 들은 박진성의 눈빛에 짜증스럽게 변했다.‘대체 어떻게 알고 기자들까지 찾아온 거야...’다급해진 그는 시선을 민여진에게로 향했다.“민여진, 지금이라도 나랑 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박진성 씨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방현수는 온몸이 아프고 등이 욱신거렸지만,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민여진을 품에 끌어안았고, 박진성을 바라보는 눈빛 또한 날카롭게 빛났다.“여진이는 내가 지킵니다. 박진성 씨가 신경 쓸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방현수 씨가 뭔데, 지금 감히 나한테 도발하는 겁니까?”순간 박진성의 분노가 폭발했다.그때, 대포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후문까지 몰려와 출입구를 틀어막기 시작했다.그의 전처에 관련된 소식은 언제나 뜨거운 화젯거리였다.문채연은 불안하게 박진성의 소매를 잡아당겼고 박진성은 마지막으로 경고하듯 말했다.“민여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지금 나를 따라가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어!”박진성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최대로 양보한듯해 보였지만, 민여진에게는 그저 또 한 번의 상처가 됐을 뿐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박진성은 한마디 덧붙였다.“민여진, 네가 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야?”하지만 박진성을 바라보는 민여진의 동공에는 아무런 기대도 없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진성 씨, 제발 가요! 대영 그룹을 위해서라도 가야 해요!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요... 기자들 앞에서 제 얼굴이 알려지면 어떡하라고요?”그녀는 얼마 전 얼굴을 성형한 참이었다.박진성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고, 뒤이어 민여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민여진은 그를 보는 체조차도 않았다.“민여진, 넌 결국 무릎 꿇고 나한테 빌게 될 거야.”그 말을 남기고 박진성은 문채연과 함께 떠났다.보이지는 않았지만,
아직 어린 듯 앳된 목소리였지만 무슨 일인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민여진은 순간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했다.“누구신데 그러세요?”“누구냐고요? 그걸 물어볼 자격은 있다고 생각해요?”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자는 윤소정이었고 그녀는 불꽃 같은 눈빛으로 민여진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민여진 씨 같은 눈먼 여자 하나 때문에 현수 오빠가 인생을 통째로 쳤다는 거 알아요?”민여진의 손이 옷자락을 단단히 쥐었다.“현수 씨가... 어떻게 됐는데요?”“어떻게 됐냐고?”윤소정의 목소리가 떨렸다.“현수 오빠는 민여진 씨를 지키려다 얼굴 하나 제대로 팔렸죠! 사진이 인터넷에 퍼졌고 사진 아래에는 전부 오빠를 향한 비난뿐이에요! 오빠는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인데 그쪽 때문에 병원에는 발도 못 붙이게 생겼다고요!”윤소정은 숨을 몰아쉬며 이어갔다.“그리고 민여진 씨의 전남편이 박진성이라면서요? 그사람은 지금 방씨 가문을 완전히 몰락시키려고 작정했어요! 모든 계약을 해지한 것도 모자라, 누구도 방씨 가문과 손잡지 못하게 막아버렸어요. 방씨 가문과 거래하면 대영 그룹을 적으로 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선포했다고요!”윤소정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민여진 씨! 민여진 씨는 진짜 재앙이나 다름없어요! 본인은 얼굴 하나 안 드러내놓고, 민여진 씨를 지키려던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렸다고요!”민여진은 온몸이 굳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세상에 버림받은 듯한 차가운 절망이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다.“현수 씨... 현수 씨는 지금 어디 있나요? 제가 만날 수 있을까요?”“절대 안 돼요!”윤소정은 눈물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이를 악물었다.“또 만나면 무슨 말을 하려고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아요? 그리고... 이제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요. 방씨 가문에서 데려갔거든요. 애초에 방씨 가문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였던 오빠인데... 방씨 가문에서 가만둘 리가 없잖아요!”민여진은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윤소정은 잠시 울
방 안에서 들려오는 무심한 목소리에 민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몸을 떨었다.이는 틀림없이 경험에서 나온 두려움이었다.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문을 밀어 열었다.박진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듯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시선이 민여진의 여행 가방을 스치자, 검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그는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더니 비아냥대기 시작했다.“짐까지 챙겼네? 방현수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둘이 함께 도망이라도 갈 참이었어?”민여진은 무의식적으로 여행 가방을 뒤로 보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현수 씨를... 놓아줄 수는 없어?”“현수 씨?”그 호칭에 박진성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손가락으로 애꿎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천천히 비틀었다. 그리고 눈동자에 분노가 불길처럼 번졌다.“내가 왜 그 자식을 봐줘야 하지? 감히 나에게 도발하는 걸 보고 대단한 놈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고작 방씨 가문에서 내다 버린 자식이었더라고! 그딴 놈이 네 눈에는 그리도 멋져 보였어?”박진성의 비아냥에 민여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더니, 대뜸 무릎을 꿇고 앉았다.그러자 박진성의 눈빛이 흔들렸다.“진성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원하는 대로 내가 무릎꿇고 빌게... 그러니까 제발 그만해. 현수 씨를 놔줘...”말이 끝나자, 그녀는 머리를 숙였고, 곧이어 이마가 바닥에 닿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그 모습에 박진성은 의자 팔걸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민여진, 네 꼴을 좀 봐. 정말 비굴해 보여...”“맞아. 네 말이 다 맞아. 그러니까... 제발 현수 씨만은 살려줘. 하라는 대로 뭐든 할게...”박진성의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번지고 있었다.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뭐? 뭐든 할 수 있다고?”박진성은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자세를 바꿔 몸을 기대며 민여진을 내려다봤다.“그렇다면... 벗어 봐.”순간, 민여진의 표정이 굳었다.박진성은 담배에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