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칫하는 민여진에 박진성이 얼른 차갑고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어차피 여기까지 왔으니 너도 이것저것 따지지 마. 지나간 네 소원을 기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너에게 보상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나라고 이렇게 추운 곳에 오고 싶었겠어?”“보상?”“그래. 보상.”박진성이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오늘로 어머님 일은 끝난 거야.”민여진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렸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민여진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몸을 떨었다.민여진에게는 너무했던 그 일들이, 한 사람의 목숨이 박진성의 몇 마디 말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들이었을까?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만 더 있었다간 박진성의 따귀를 때릴 것만 같았다.입구로 달려갔지만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한 채 따라온 박진성에게 손목을 잡혔다. 미간을 찌푸린 박진성이 화를 참으며 입을 열었다.“갑자기 왜 이래?”“갑자기?”민여진의 마음은 차갑게 식어갔고 두 눈은 빨갛게 열이 올랐다.“내가 갑자기 미쳐서 그래. 그러니까 너한테 미친 짓 하기 전에 이거 놔. 잠깐 화장실에서 진정 좀 해야겠으니까.”“... 화장실만 다녀오는 거 맞아?”박진성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민여진이 냉소적인 얼굴로 박진성을 쳐다보았다.“박진성 씨. 걱정하지 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킬 거니까. 당신이 이혼을 허락할 수 있게 반드시 데이트 잘 해볼게. 당신이 만족할 수 있게.”당신이라는 호칭에 가득 담긴 비아냥은 마치 솜에 숨겨졌던 바늘처럼 박진성을 꾹 찔렀다.얼굴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아팠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박진성이 민여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종업원에게 같이 가달라고 할게.”박진성은 종업원에게 함께 화장실에 가달라고 부탁했다. 종업원이 화장실 문밖에서 민여진을 기다리는 사이, 그녀는 차가운 물로 얼굴을 적셨다.고개를 들어 본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이 흐릿했다. 민여진의 몸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우습게도 민여진은 여전히 박진성 때문
박진성이 민여진이 싫어하는 음식과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종업원에게 적어줬다니...“그럴 리가요.”종업원이 웃으며 대답했다.“사실이에요. 남편분께서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숨기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분이세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떨 땐 다정하게 챙겨주시는 분 같아요.”“그리고 정말 손님 말씀처럼 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요.”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지만 종업원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분명 알 수 있었다.박진성은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스타일이었다.항상 시간이 부족한 박진성은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무리 앞에서 무릎 꿇고 통곡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든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며 최선을 다했다.하지만 문제는 민여진은 문채연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박진성이 민여진을 이렇게까지 챙겨줄 이유가 없었다. ‘설마 이게 그 보상이라는 건가?’민여진이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자리로 돌아온 박진성은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시선을 올렸다.“왜 그러시죠?”“아무것도 아녜요. 손님께 디저트가 입맛에 맞는지 여쭤보고 있었어요.”박진성이 말했다.“저의 아내는 블루베리를 좋아해요. 하지만 지금은 됐어요. 많이 먹으면 느끼해할 거예요.”종업원이 아까보다 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민여진을 쳐다보았다.“네, 알겠어요.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 부르시면 돼요.”종업원이 걸음을 옮기자 박진성이 자리에 앉았다. 박진성이 막 의자에 앉는 그 순간, 민여진이 갑자기 입을 열어 그에게 물었다.“여긴 왜 온 거야?”멈칫한 박진성이 되물었다.“그건 왜?”“겨울이잖아. 여긴 해변가라 춥고 여기까지 오려면 시간도 꽤 걸리잖아. 더 좋은 곳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인태원을 선택한 거냐고.”분명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민여진의 눈빛은 확고하게 박진성을 향해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민여진도 이 상황이 우습게만 느껴졌다.“억지로 붙여놓은 사이이니 그럴 수밖에.”손을 잡고 있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조금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잠시 침묵하던 박진성이 결국 민여진에게 물었다.“만약 너와 그 사람이 왔으면 어땠을 것 같아? 그러면 남들도 당연히 연인으로 봤을까?”민여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자꾸 그 사람 얘기 꺼내지 마.”박진성이 기운이 빠진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와 있는 넌 한 번도 웃은 적이 없거든.”멍한 표정을 짓던 민여진이 깊은숨을 들이켰다.“내가 웃고 안 웃고의 문제인 거야?”박진성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을 때의 민여진은 박진성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는 했다. 그럼에도 지금과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그들의 결혼 생활은 애초부터 억지로 이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었고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종업원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박진성이 몸을 일으켰다.“화장실 좀 다녀올게.”종업원이 디저트를 가져와 말했다.“손님, 디저트 한 번 드셔보세요. 입맛에 안 맞으시면 제가 주방에 다시 준비하라고 할게요.”“감사합니다.”입맛은 없었지만 여전히 감사의 인사를 전한 민여진이 디저트를 한 입 먹었다.조금 전 자신의 실수로 박진성과 민여진이 싸운 것을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리를 떠나지 못한 종업원이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엔 죄송해요.”미안해하는 종업원을 눈치챈 민여진이 대답했다.“괜찮아요. 저희가 싸운 건 그쪽 탓이 아녜요. 어차피 진작 갈등을 겪고 있었고 곧 이혼할 거거든요.”종업원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오히려 종업원이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혼이요? 왜요?”잠시 생각하던 민여진이 대답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성격 차이가 있었고 이제 더는 사랑하지 않거든요.”“하지만...”종업원이 박
‘진성 씨를 남편으로 대하라고?’몇 년 전 민여진에게 이런 기회가 있었다면 그녀는 아마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은 지금의 민여진에게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한마디일 뿐이었다. 심지어 상당한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만약 못 하겠다고 하면?”박진성의 눈빛이 쓸쓸하게 가라앉았다. 민여진에게 한 발 다가가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박진성의 입에서는 얼음처럼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그러면 난 너도 우리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거라고 생각할 거야. 일이 마무리되면 같이 양성으로 가자.”“안 돼!”박진성이 장난감 놀리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럼 한 번 더 말해줄게. 민여진, 지금 나에게 부탁하는 입장은 너야. 이혼은 네가 원하는 거잖아. 내가 너에게 이혼하자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고.”“아니면 지금 다시 돌아가도 돼. 오늘의 모든 일은 일어난 적도 없었던 것처럼.”‘돌아가?’민여진은 가슴이 꽉 막혀 숨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지금 집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이다.“난 안 돌아가.”민여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이혼할 거야.”민여진을 바라보는 박진성의 검은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잠시 후, 박진성이 민여진의 손을 꼭 잡았다.“그러면 아내 노릇 똑바로 해.”박진성은 민여진의 손을 잡고 조수석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민여진이 차에 타자 박진성을 그녀의 손을 놓아주고 운전석으로 가 천천히 출발했다.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선을 넘는 말과 스킨쉽은 전혀 없었다.민여진이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잠자는 사자의 코털은 건드리지 말아야 하듯이 박진성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박진성은 꼭민여진과 손을 잡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누군가 자기 뜻을 거스르는 것이 싫었던 걸지도 몰랐다.민여진의 마음이 안정을 찾아갈 때쯤, 차가 멈춰 섰다.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도착했어.”“응.”민여진이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지만 어
“뭐?”“조건이 데이트하는 것뿐이냐고.”박진성은 예민하게 구는 민여진을 비웃기라도 하듯 웃음을 터뜨렸다.“아니면? 또 뭐가 있는데.”“진성 씨와 같이 자는 일은 없을 거야.”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박진성은 곧이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그 남자 때문에 지조라도 지키려고?”민여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박진성과 이 문제로 끈질긴 말다툼은 피하고 싶었다.“그냥 당신 같은 인간이 날 만지는 게 싫을 뿐이야.”멈칫한 박진성이 냉소 지었다.“나 같은 인간? 나 같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데?”민여진이 말이 없자 박진성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 너보다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는 얼마든지 봤어. 그런 여자들이 들러붙어도 넘어가지 않았던 내가 너한테? 우린 그저 데이트만 하는 거야. 데이트만.”시큰둥한 말투였지만 민여진을 안심시키기엔 충분했다. “언제 데이트할 거야?”박진성이 말했다.“네가 연락이 올 줄은 몰라서 아직 양성이야. 내일 데리러 갈게.”“그래.”민여진이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박진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민여진은 겨우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이혼하기 위해 박진성과 데이트를 할 수는 있었지만 임재윤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데이트가 끝나면 모든 것이 일단락될 수 있었다. 박진성과 민여진은 더 이상 아무런 사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다음 날 오후, 박진성은 약속대로 별장 앞에 나타났다.음식 준비를 하다가 전화를 받은 민여진은 앞치마에 물기를 닦은 후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조금은 습한 공기가 민여진을 마주했다.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남자의 향수 냄새가 바람을 타고 선명히 느껴졌다.차가운 표정을 지은 민여진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물었다.“어디 갈 거야?”“남들은 어떻게 데이트하는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이미 저녁이 되어가니까 일단 인태원에서 밥부터 먹자.”박진성이 민여진의 손목을 잡았다. “차 있는 데까지 같이 가.”박진성을 민여진을
예전의 민여진이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재윤이 그녀를 의지할 곳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임재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재윤은 한참이 지나서야 전화를 받았다.“여진아.”잔뜩 허스키해진 목소리는 마치 밤새 담배를 피운 것 같았다.순간 멍한 표정을 짓던 민여진이 걱정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재윤아, 너... 괜찮아?”“...괜찮아. 왜 그렇게 묻는 거야?”민여진이 말했다.“목소리가 피곤해 보여서. 밤새 잠도 못 잔 사람 같아.”호흡을 가다듬은 임재윤이 대답했다.“밤새 못 잔 건 맞아.”“왜? 아저씨 상황이 안 좋으셔? 아니면 일 때문에 그래?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일이 생긴 거야?”민여진은 후회되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가 임재윤과 함께 독엔으로 갔다면 임재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최소한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집에서 조바심만 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다급한 민여진의 목소리에 임재윤이 씩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진정해. 난 괜찮아. 그냥 보호자 침대가 불편해서, 그래서 밤새 못 잔 것뿐이야.”민여진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내가 네 곁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나라도 너 대신 병원에 잠깐 있으면 네가 쉴 수라도 있잖아.”“그건 내가 싫어.”옅은 미소를 짓던 임재윤이 조용히 말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여진아, 너무 보고 싶어. 보고 싶지 않은 순간이 없었어.”민여진이 코를 훌쩍였다. 눈가가 붉어지며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행복하기만 한 기분이었다.“나도. 나도... 너무 보고 싶어. 순간마다 네 생각이 나. 어떨 때는 꿈을 꿔도 온통 너야. 하루라도 더 빨리 널 만났으면 좋겠어.”만약 예전이었다면 민여진은 부끄러워 이런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진성 때문인지 그녀는 임재윤과 함께 할 시간이 점점 더 사라질까 봐 두렵기만 했다. 그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