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은 박진성의 뒤를 따라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숨이 멎었다.차가운 눈빛의 민여진, 그리고 입술이 창백해진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복부를 감싸고 있는 박진성이 보였다.게다가 박진성의 손 사이로 붉은 피가 끊임없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대표님!”서원은 다급히 뛰어갔다.그러나 그 순간 민여진이 손에 쥔 과일칼을 다시 치켜들며 박진성을 향해 돌진했다.“박진성, 넌 이제 지옥 가서 죗값이나 치러!”“민여진 씨!”서원이 외치며 재빨리 그녀를 저지했다. 손에 힘을 주어 칼을 쳐내자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뭘 하냐고요?”민여진은 고개를 젖히고 그를 올려다보았는데 얼굴에 증오와 눈물이 뒤섞여 있었다.“우리 엄마 대신 복수하는 거예요!”“진정하세요...”서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다급히 박진성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깊었고 흰 셔츠의 반이 피로 물들어 있는 데다가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서원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119에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박진성은 이미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고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핏발이 선 채 울고 있는 민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녀가 두 번째로 칼을 휘두를 때, 박진성은 그녀가 자신을 죽이려고 마음먹었다는 것을 확신했다.박진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민여진, 미안해. 내가... 아주머니를 지켜주지 못했어.”민여진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지만 가슴은 오히려 무감각했다. 다만 후회가 온몸을 감쌌다.그녀는 두 눈을 감고 말했다.“박진성... 왜 내가 너와 엮였을까? 왜 하필 네 아내가 되어야 했을까... 난 내 인생만 망친 게 아니야. 우리 엄마까지 죽게 만들었어...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도망쳤을 거야. 다시는... 널 만나지 않을 거야!”그녀의 단호한 말은 박진성의 가슴을 찔렀고 칼에 베인 상처보다 더 깊은 고통이 밀려왔다.
그 말이 떨어지자 서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살인 미수라니요?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경찰은 눈살을 찌푸렸다.“이 심각한 피 냄새를 맡고도 오해라고 하십니까? 그리고 밖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입까지 막을 수 있겠어요? 경고합니다. 경찰 수사를 방해하지 마세요. 민여진 씨는 범죄 혐의자이기 때문에 경찰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셔야 합니다!”그렇게 말하며 경찰은 바닥에 앉아 있는 민여진을 바라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에 생긴 심각한 흉터를 보니 신고자의 진술과 일치했다. 그래서 더 이상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민여진 씨, 저희와 함께 가주시죠.”경찰들이 움직이려 하자 서원이 다급히 앞으로 나섰다.“경찰관님, 오해입니다! 정말 오해예요! 여기서 다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절대 살인 미수 같은 건 아닙니다. 다친 분은 저 여성분의 남편이에요! 두 분은 부부 사이인데 어떻게 그게 살인 미수가 될 수 있겠어요? 믿기 어려우시면 대표님께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설명을 들으시는 게 어떨까요?”하지만 경찰은 짜증이 난 듯 냉랭하게 말했다.“부부 사이에서도 살인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신고가 접수된 이상 조사를 해야 합니다.”서원이 다시 설명하려는 순간 민여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맞아요. 제가 찔렀어요. 데려가 주세요.”“민여진 씨!”서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박진성이 아직도 응급 수술을 받고 있는데 그녀가 경찰서로 가 버리면 거기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알 수 없었다.그러나 민여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사람을 찔렀다면 죗값을 치러야죠. 안 그래요?”경찰은 그녀를 연행했고 서원은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었다.박진성과 연락을 시도하고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수술 중이었다. 그래서 서원은 불에 던져진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그때 소식을 들은 박진성의 어머니가 병원에 도착했다.심장이 약한 이정화는 이미 두 번이나 실신했었는데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녀는 떨리는 손으
이정화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래졌고 서원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갚고 빚을 졌으면 돈으로 갚는 거야!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저 여자가 칼을 휘둘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럼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 내 휴대폰 가져와!”...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지자 민여진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유치장 한쪽에 웅크리고 있었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주변에는 각종 범죄로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차가운 얼굴의 경찰이 앉아 있었다.“민여진, 나와!”그녀는 경찰을 따라 나섰다. 곧바로 딱딱한 책상 위에 얼굴이 짓눌렸고 손목에 채워진 수갑이 찰랑거렸다. 머리 위에서 무겁고도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있어? 형법 제232조, 고의적 살인은 사형, 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해진다. 사안이 가벼운 경우에도 최소 3년 이상의 형을 받아. 지금 솔직하게 답변하면 감형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 인생의 대부분을 여기서 썩히게 될 거야!”경찰은 강압과 회유를 섞어 가며 취조했다. 그러나 민여진은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심문이 끝나고 연행되어 나가는 순간 그녀는 담담하게 물었다.“저 감옥에 얼마나 있어야 하나요?”경찰은 코웃음을 쳤다.“이제 와서 무섭냐? 그럼 애초에 그런 짓은 왜 했어? 이번 사건은 심각해. 게다가 박진성 측에서 최고급 변호사팀을 꾸려 소송을 진행하고 있어. 최소 8년은 각오해야 할 거야.”‘8년...’그녀는 순간 멍해졌다.박씨 가문에서 자신을 처벌하는 데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진성은 실망하게 될 것이다. 3년이든 8년이든 감옥에 갇히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바로 어머니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제가 어떤 죄를 뒤집어쓰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1년 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다시 조사해 주세요.”경찰은 그녀
“미안해.”박진성은 이마를 짚었다.“난 그냥 민여진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어쨌든 민여진의 어머니가 그렇게 되신 건 내 잘못이니까.”“그게 어떻게 진성 씨 잘못이에요?”문채연이 입술을 깨물었다.“그 아줌마가 스스로 투신한 거잖아요. 진성 씨가 24시간 감시하며 막을 수도 없는 일이었어요! 오히려 민여진 씨가 너무한 거죠. 진성 씨가 민여진 씨의 어머니를 얼마나 배려했는데요. 심지어 특별히 묘자리까지...”“그런 건 아무 의미 없어.”박진성은 문채연의 말을 끊고 미간을 더 깊이 찌푸렸다.“내가 너 대신 민여진한테 죄를 뒤집어쓰게 하지 않았다면 아주머니는 죽지 않았을 거야.”“그러니까 지금...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에요?”문채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떨었다.박진성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 순간 서원이 황급히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대표님!”그는 박진성을 보자마자 눈빛이 번쩍였다.“드디어 깨어나셨군요!”“무슨 일이야?”박진성은 갑자기 불안해졌다.“대표님이 수술실로 들어가신 뒤 경찰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민여진 씨를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해 갔습니다.”“뭐?”박진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벌떡 일어나려 했다.“누가 신고했어?”서원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상황이 너무 복잡했다. 박진성이 수술을 받고 있는 동안 딱 맞춰서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어쨌든 경찰은 쉽게 풀어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대표님이나 직계 가족이 직접 나서 주셔야 합니다.”박진성은 망설임 없이 이불을 젖혔다.그러나 그가 침대에서 내려오기도 전에 문 앞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가만히 있어!”이정화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려오려는 거야? 너 지금 네 목숨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거의 죽을 뻔한 거 몰라?”“어머니.”박진성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였고 속은 초조하게 타들어 갔다.“잘 오셨어요. 저 대신 경
박진성은 힘겹게 복부를 감쌌다. 하지만 심장이 너무 아픈 탓인지 몸의 상처는 감각조차 없었다.그는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어머니... 제발 민여진을 데려와 주세요.”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제가 빚진 게 있어서 그래요. 민여진의 어머니를 죽게 만든 건 저예요. 민여진이 칼로 저를 찔러서 죽이지는 않았지만 설령 제가 정말 죽었다 해도 전 죽어 마땅해요.”“너...”이정화는 말을 잇지 못했고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에 휘청이며 뒷걸음질 쳤다.“너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박진성의 손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그리고 곧 의사들이 달려왔다. 봉합선이 터졌으니 출혈을 막기 위해 다시 꿰매야 했다.결국 박진성은 또다시 수술실로 들어갔고 다시 깨어났을 때 그는 힘겹게 정신을 붙잡았다.“서원아. 당장 경찰서로 가서 민여진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줘.”그는 창백한 입술로 간신히 숨을 토해내듯 말했다.“그리고 어머니, 부탁드려요. 경찰에게 설명해 주세요. 이 상처는 민여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요.”이정화는 화가 나기보다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그녀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거절하면 박진성이 또다시 몸을 일으킬 거라는 걸. 그는 언제나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알았어. 내가 갈게.”박진성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이정화는 단호하게 덧붙였다.“하지만 너도 약속해. 나중에 나한테 모두 말해주겠다고. 만약 그 여자가 일부러 널 해친 게 맞고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넘어가려 하면 나는 절대 너희 둘을 용납하지 않겠어!”“알겠어요.”박진성은 순순히 대답했다.그런데 이정화와 서원이 병실을 나서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그리고 경찰들이 신분증을 꺼내며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시선은 곧장 문채연에게 향했다.“문채연 씨, 체포합니다.”문채연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다.방금까지 충격에 얼어 있던 그녀는
박진성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정말로.”하지만 이정화는 그런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문을 세게 닫으며 병실을 나섰다. 경찰서로 향하려고.그렇게 병실에 박진성과 서원만 남았다.서원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넌 바로 경찰서로 가. 그리고 내가 민여진과 통화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봐.”서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그러나 문을 나서기 직전 박진성이 다시 그를 불렀다.“그리고 또 하나. 1년 전 민영미 씨의 상황을 조사해 줘. 집을 빼앗긴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이야.”“알겠습니다.”문채연은 변호사와 함께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녀가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화도 뒤따라 들어왔다.그와 동시에 민여진도 경찰들에 의해 끌려왔다.그녀는 달라져 있었다. 감옥에서 3일 지내서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사람들 앞에 선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은 마치 말라붙은 나뭇가지 같았고 입고 있는 옷조차 헐렁해 보였다. 그리고 아무런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정화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 한쪽이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분명 그녀는 이 여자가 싫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일 뻔한 원망스러운 여자, 완벽했던 박씨 가문을 한순간에 뒤흔든 여자니까.“우선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기다리시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간단한 조사일 뿐이니까요. 만약 문채연 씨가 무죄라면 곧바로 사건을 종결할 겁니다.”경찰의 말에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박진성은 항상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해 왔으니 걱정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상황을 지켜보았다.그런데 변호사와 경찰이 서류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민여진이 폭발했다.“증거가 없다고요? 말도 안 돼요! 문채연은 제가 아니라 저 여자예요! 이게 증거가 아니면 뭐예요!”변호사는 냉
민여진은 힘겹게 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하지만 눈은 이미 핏발이 서 있었다.그녀는 변호사와 경찰들을 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왜 나를 속였어요?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내 사건을 다시 조사해 준다고!”경찰서장은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수사하려면 증거가 있어야 해요. 민여진 씨 혼자서 살인미수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1년 전 결과가 갑자기 바뀔 것 같아요?”“그만해요...”서원이 민여진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그는 알았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것을.그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민여진 씨, 이제 그만해요. 대표님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고 나머지는 대표님께 맡겨요. 그러면 민여진 씨는 무사히 경찰서에서 나갈 수 있어요!”“고소를 취하하라고요?”민여진의 텅 빈 듯한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러나 곧이어 그 눈빛에 뼛속까지 스며든 증오가 서렸다.“내가 감옥에 가게 생겼고 우리 엄마가 처참하게 죽었는데... 이 모든 게 그냥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아요? 서원 씨, 역시 박진성의 부하다운 발상을 하는군요. 박진성한테 전해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다시 감옥에 가는 한이 있어도 난 끝까지 박진성을 고발할 거예요.”그 말에 서원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했다.“민여진 씨...”“날 데려가 줘요.”민여진은 옆에 있는 경찰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표정은 차갑고 결연했다.그녀는 살인미수를 인정한 순간부터 이곳을 멀쩡히 걸어 나갈 생각 따위 하지 않았다. 만약 박진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적어도 그의 통제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뭐?”병실에서 소식을 전해 들은 박진성은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거칠어졌다. 방금 꿰맨 상처에서 다시 통증이 밀려왔다.“민여진이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날 고소하려 했단 말이야?”“네...”서원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경찰서 밖에 서 있었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믿을 수 없었다. 그동안 평온하게 유지되던 관계가 결국 이 지경까지 와 버릴 줄은.“게다가 민여진 씨
마치 감각을 잃은 듯 가만히 앉아 있던 민여진의 눈동자가 갑자기 미세하게 흔들렸다.오랫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우물처럼 메마른 눈빛에 갑자기 증오가 물들었다.“상관없어.”너무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일까. 그녀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거기에 서늘한 조소까지 섞여 있었다.“감옥에 가는 게 뭐 어때서. 처음도 아닌데, 이미 익숙해. 난 얼마든지 다시 갈 수 있어. 하지만 넌...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야.”그녀의 눈동자 속 깊은 곳에서 타오르는 증오가 박진성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러왔다.“날 무너뜨리려고 네 인생까지 던질 거란 말이야?”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민여진을 바라보았다.“너의 꿈은? 너의 미래는? 그렇게 다 버릴 수 있어?”“미래?”민여진은 순간 피식하고 웃었다.그러나 그 웃음은 너무나 아팠고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그건 네가 이미 망쳐 놓았잖아.”박진성이 어떻게 그녀 앞에서 꿈과 미래를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인가?민여진은 원래 피아노를 치는 사람이었다. 대단한 연주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며 어머니와 함께 평범하게 살 수 있었다.그러나 박진성이 그녀의 두 눈을 앗아갔고 유일한 가족마저 잔인하게 빼앗았다.그런데 그런 놈이 이제 와서 미래를 말한다고?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민여진, 흥분하지 마...”박진성은 배를 감싼 채 깊이 숨을 들이마셨고 입술이 창백해졌다.“진정하고 생각해 봐. 너한테는 아무 증거도 없어. 네가 혼자서 박씨 가문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 네 앞에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어. 감옥에 가든가, 아니면 내 말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든가.”“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라고?”눈물이 민여진의 두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라고?”“나도 많이 놀랐어. 하지만 아주머니는 원래 상태가 불안정했잖아. 최선을 다해 대비했지만 삼 층에서 뛰어내릴 줄은...”“그래서 날 속였어? 다른 여자를 데려와
임재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민여진은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감정 기복이 거의 없던 임재윤이 여자 친구라는 말이 나오기 바쁘게 마치 다른 사람처럼 분위가 달라졌다.그 여자는 임재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 중요한 존재인 것 같았다.민여진이 화제를 바꾸려는데 임재윤이 다시 물었다.“정말 궁금해?”“아니.”민여진은 얼른 부인했다. 처음엔 그냥 할 말이 없어서 꺼냈던 말이었고 더불어 임재윤이 왜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에 민여진은 자신이 선을 넘었음을 알아차렸다.임재윤은 민여진한테 다가가려다 멈춰서더니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했다.“미안해. 많이 놀랐어? 나는 그냥 과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서...”“괜찮아.”민여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남이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함부로 꺼내는 걸 싫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히려 선은 내가 넘었으니까 사과해도 내가 해야지.”임재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더니, 오랜 침묵 끝에 타자했다.“넌 남이 아니야.”민여진은 미소를 지었다.“그래. 알았어. 너무 신경 쓰지 마. 누구나 털어놓기 싫은 비밀과 건드리면 안 되는 선이 있는 법이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돼. 네 선을 알았으니까 두 번 다시 넘지 않을게.”그녀는 급히 소파에서 일어났다.“배 안고파? 간호사에게 음식을 언제 가져오는지 물어볼게.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잠깐만 있어.”병실 문을 나서는 민여진의 표정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정확한 이유가 뭔지도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고 복잡했다.어쩌면 처음 느껴보는 임재윤의 냉담함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여자가 임재윤의 아픔이었다는 진시우의 말 때문일 수도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여자는 임재윤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그럼... 나는 뭐지?’난데없이 튀어나온 생각에 민여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라더니 마음을 다잡으며 중얼
임재윤은 민여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그냥 내가 아프기 때문이야? 만약 너 때문에 아픈 게 아니었다면, 아예 나를 보러 오지도 않았을 거야?”민여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조용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여진아, 인제 그만 돌아가. 진시우더러 돌아갈 차를 준비해달라고 할게. 지금쯤이면 안진 마을까지 가는 길도 뚫렸을 거야. 이모 집에서 편하게 지내. 병원에는 그만 오고.”“싫어.”민여진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임재윤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민여진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이었다.“혼자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니야. 게다가 수술 후 회복 기간도 긴데, 내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면 좋잖아.”민여진의 말에 임재윤은 천천히 타자했다.“괜찮아. 나는 늘 혼자였어. 이젠 익숙해.”늘 혼자였다는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문득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감옥에서, 박진성의 별장에서, 도망치던 차 안에서조차 그녀는 언제나 혼자였다.고독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항상 두려웠고, 언제라도 사라질지 모를 관심에 더욱 불안해했다.‘임재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고백할 때 우리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수술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지금 돌아가도 신경 쓰여서 편하게 못 있어. 어쨌든 네가 아픈 건 나와 연관되어 있잖아. 무엇보다 지금은 네 곁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민여진을 빤히 응시하던 임재윤은 그녀의 걱정과 고집에 표정이 차츰 누그러졌다.“여진아, 너 이렇게 착하면 누군가한테 이용만 당할 거야.”민여진이 웃으며 되물었다.“그럼 넌 나를 이용할 거야?”임재윤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그럴 수도 있지.”예상치 못한 대답에 멈칫하던 민여진은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그때 휴대전화의 기계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나는 지금도 널 이용하고 있잖아. 내가 아픈 건 순전히 내 문제인데도 네 착한 마음을
‘마음속에 아직도 박진성이 있냐고?’민여진은 단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박진성을 산 채로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고 싶었다.진시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고 분위기가 편안해지자 비로소 웃으며 말을 꺼냈다.“다행이네요. 난 임재윤이 마음에 다른 남자가 있는 여자와 함께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여진 씨가 박진성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임재윤과 잘 시작해 봐요.”다시 임재윤의 이름이 나오자, 민여진은 표정이 달라졌다.“저와 임재윤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어떤 사이인지 여진 씨가 저보다 더 잘 알겠죠.”진시우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을 이었다.“여진 씨가 임재윤의 신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도 알아요. 이해해요. 박진성 일 이후로 경계심을 갖는 건 당연하죠. 하지만 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여진 씨도 잘 알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임재윤은 절대 여진 씨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임재윤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민여진 씨가 아직도 경계를 못 풀겠다면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마음을 꺼내 보여줄 수도 없는 일인데.”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한 뒤, 민여진을 위해 마스크와 모자를 사러 갔다.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민여진은 진시우의 말이 계속 맴돌아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임재윤과 박진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박진성은 차갑고 독단적이며, 항상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며 타인을 해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었다. 반면 임재윤은 부드럽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방면에서 민여진을 먼저 배려해 줬고, 아픈 몸으로도 민여진이 추울까 옷까지 벗어주는 사람이었다.성향이 이렇게나 상반된 두 사람인데, 왜 민여진은 자꾸만 임재윤이 박진성이라는 착각을 하고 의심하는 건지 본인조차 이해되지 않았다.‘나 왜 이러지? 박진성이 같은 병원에 있다는 말만 듣고 이렇게 의심하다니.’민여진은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때 물건을 사
진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민여진 씨를 위해 싫어하는 걸 참고 먹다니,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는 모양이네요.”예전이었다면 진시우의 말을 그저 농담으로 넘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민여진은 한참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돌렸다.“진시우 씨, 임재윤하고 어릴 적부터 함께 지냈죠?”“네? 그렇다고도 할 수 없어요.”진시우는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재윤이가 한동안 독엔에 가 있어서 떨어져 지내다가 나중에야 다시 연락이 닿은 거예요. 왜요?”“궁금해서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별로 없었나요? 아니면...”아니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마음을 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진시우는 웃으며 말했다.“오해하고 있네요. 임재윤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임재윤을 좋아하는 여자도 적지 않았어요. 요즘 여자들은 차가운 이미지를 가진 남자를 좋아하잖아요. 임재윤은 말이 없으니까 딱 그런 이미지였고 성격도 세심하기까지 해서 더 인기가 많았죠.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는...”진시우는 이 주제가 적절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급하게 화제를 바꾸었다.“어쨌든 외로워서 민여진 씨에게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에요. 임재윤은 진심으로 민여진 씨를 좋아하는 거예요.”하지만 민여진은 다른 말이 더 궁금했다.“임재윤에게 여자 친구가 있었어요?”“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요.”“그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어요?”진시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여진 씨, 제가 이 질문에 꼭 대답해야 하나요? 궁금하면 임재윤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요? 친구의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요.”‘아픈 기억? 임재윤의 전 여자 친구는 그에게 아픔으로 남은 건가?’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민여진은 그 안에 수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다.식사를 마치고 민여진은 진시우와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길을 가던 중, 민여진은 어제 박진성을 우연히 마주친 일이 떠올라 걸음을 멈췄다.“진시우 씨, 돈을 좀 빌려주실래요? 모자랑 마스크를 사려고요.
민여진의 얼굴을 본 문채연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여기 왜 나타난 거지? 누구 때문에 이 병원까지 온 거야?’답은 너무 뻔했다. 이제 겨우 박진성과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는 시점에 민여진이 나타나자, 화가 치밀어 오른 문채연은 이를 악물었다.‘쓰레기 같은 년! 죽은 척 도망쳐놓고 이제 와서 후회라도 하는 거야? 다시 박진성 앞에 나타나서 그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라면 꿈 깨! 일 초도 못 나타나게 할 거니까.’문채연의 눈에는 독기가 서렸다....민여진은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임재윤이 어떻게 나를 좋아할 수 있지? 내가 뭐라고? 말을 못 하는 그와 같이 나도 앞을 못 보는 장애인이라서? 그런 거라면 너무 경솔한 결정 아닌가? 그리고 시각장애인도 많이 봤을 텐데 왜 하필...’어찌 되었든 민여진은 갑작스러운 그의 마음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조현준도 그렇고 이제 민여진은 누구한테 마음을 줄 용기가 없었다.박진성이라는 사람 때문에 받았던 그 수많은 상처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무너지게 했다.민여진은 억지로 눈을 감고 겨우 잠에 들었지만, 악몽을 꾸었다.병원에서 박진성을 마주치는 꿈이었다. 박진성은 그녀의 저항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시켜 그녀를 묶은 채 양성으로 끌고 갔다.잠에서 깬 민여진은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박진성의 강압적인 태도와 차가운 얼굴이 오랫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정신을 차리자,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민여진이 문을 열자, 이번에는 직원이 아니라 진시우였다. 그는 웃으며 물었다.“민여진 씨, 혹시 제가 휴식을 방해한 건 아니죠?”“아니요. 방금 막 일어났는데, 마침 잘 왔어요.”“다행이네요.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병원도 가야 하고. 그런데 임재윤은 오늘 이상하게 문자를 여러 번 보내네요. 민여진 씨 상태를 계속 물어보던데, 혹시 싸우셨어요?”싸운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어색한 상황이었다. 민여진은 설명하기 어려워 웃으며
임재윤의 말에 민여진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지만, 임재윤은 단호하게 대답했다.“너를 좋아해. 첫눈에 반했어.”임재윤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사실 병이 발작하지 않았다면 엊그제쯤에 이미 말했을 거야. 그때 너랑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유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거든.”“나를 왜?”민여진은 머리가 멍해졌다.‘임재윤이 나를 좋아한다고? 어떻게? 이게 말이 돼?’“왜라니?”임재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반문했다.“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여야만 한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건 지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야. 아마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겠지?”민여진은 주체할 수 없이 빨리 뛰는 심장에 호흡이 거칠어졌다.‘임재윤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잖아.’“이런 내 모습에 반했다고? 너 같은 조건이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잖아.”“외모만으로 첫눈에 반했다면, 그건 첫눈에 반했다는 말을 모욕하는 거야.”임재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타자를 이었다.“널 처음 본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어. 어쩌면 우린 같은 종류의 사람이겠구나. 교회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줄곧 너를 지켜봤거든. 주변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네 모습이 좋았고 그럼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네가 예뻐 보였어.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온통 너한테 가 있더라. 여진아, 만약 네가 앞이 안 보이고 내가 말을 못하는 게 하늘이 정해준 거라면, 하늘은 아마도 나를 네 눈이 되게 하고 너를 내 목소리가 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우린 아마 천생연분일지도 몰라.”차가운 기계음이 내뱉은 그 말은 왠지 모르게 뜨겁게 전해져 민여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임재윤, 농담하지 마.”임재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민여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 앞에 다가갔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넌 안 피곤해?”“아까 푹 쉬어서 괜찮아.”임재윤은 무언가 말하려다 멈추고는 간단히 알겠다고 답한 뒤 침대에 누웠다.이어서 민여진은 불을 껐고 깊은 밤이 되자,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민여진은 임재윤의 호흡이 평온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소파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방 안은 캄캄했지만, 그녀에게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던지라 호흡소리만으로도 임재윤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은 민여진은 임재윤한테 다가가 조용히 손을 뻗어 손끝으로 천천히 그의 눈썹과 눈을 쓰다듬었다.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만져봤다. 넓은 이마, 높고 곧은 코.민여진이 눈을 뜬 채 손가락을 입술 근처까지 가져가려던 찰나 임재윤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어둠 속에서 민여진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임재윤의 시선이 느껴졌다.손에 힘을 주던 임재윤은 민여진임을 알아차리고는 이내 힘을 풀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다.[뭐 하는 거야?]민여진은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임재윤, 너 도대체 누구야?”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임재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휴대전화를 꺼내 물었다.“여진아, 그게 지금 무슨 말이야?”민여진은 더 이상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는 듯 마음을 다잡으며 차분하게 말했다.“현준 오빠가 지금 동진에 있어. 오빠한테 너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었거든. 그런데 동진에는 임재윤이라는 사람이 없대. 그러니까 너 대체 누구냐고.”임재윤은 한참 침묵하다 다시 타자를 했다.“조현준의 말은 믿으면서 나는 안 믿는구나.”“너를 어떻게 믿어?”민여진은 혼란스러웠다.“임재윤, 난 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 신분이 뭔지, 집은 어디인지, 가족은 몇 명인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라.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건, 나 같은 여자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그들한테 친구는 서로 사탕을 나눠 먹으면서 웃어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어날 때부터 인맥을 쌓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수단이지. 만약 임재윤이 아무런 신분도 없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진시우와 함께 할 수 있겠어? 네가 말한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진씨 가문 막내아들과 어울리는 사람은 재력가 아니면 권력가일 텐데, 둘이 함께 다닌다면 절대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 너, 혹시 속은 거 아니야?”조현준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러고 무엇보다 동진에는 임씨 성을 가진 재력가가 없어.”순간 머릿속이 하얘진 민여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섰다.분명 진시우는 임재윤이 어릴 때부터 함께 해오던 친구라고 했는데, 조현준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런 사람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니. 그는 마치 공중에서 나타난 사람 같았다.도대체 임재윤은 어떤 신분을 가진 사람인지 그의 모든 것이 민여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한참 생각하던 민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물었다.“그런데 현준 오빠, 만약 저를 속인 거라면 도대체 진시우와 임재윤은 왜 저를 속이는 걸까요?”조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이해가 안 가. 네게서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그들이 가짜 신분까지 만들어가며 속이려 드는지. 아니면 무슨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현준 오빠, 일단 쉬세요.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게요.”“그래.”조현준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무슨 일이 있든 나와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민여진은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은 돌덩이가 내려앉은 것처럼 무거웠다. 전화를 끊고 병실로 들어간 그녀의 모습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져 있었다.이상함을 눈치챈 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복잡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렸다.“무슨 일이에요? 왜 매번 조현준이랑 통화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는 거예요? 조현준이 무슨 말을 했어요?”“아니요.”민여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의자
임재윤이 헐떡거리며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민여진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며 물었다.“검사 다 끝났어요?”임재윤은 말없이 다가와 있는 힘껏 그녀를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그의 옷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지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그의 숨결에 왠지 마음이 안정된 민여진은 농담을 건넸다.“전면 검사가 원래 이렇게 오래 걸려요? 혹시 잠들었던 거 아니에요?”그제야 임재윤은 민여진을 품에서 놓고 휴대전화를 꺼냈다.“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좀 기다리느라 시간이 걸렸어요. 진시우 한테서 민여진 씨가 병실에 와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왔는데.”민여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던 임재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망설임 없이 자기 외투를 벗어 민여진에게 걸쳐주었다.민여진은 깜짝 놀라 외투를 밀어내며 말했다.“안 돼요. 임재윤 씨! 지난번에도 나한테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감기까지 걸리고 이제는 수술까지 하게 생겼잖아요. 이번에 또 이러다가 몸이 더 나빠지면 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해요.”임재윤은 저항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두드렸다.“저는 방금 뛰어오느라 땀나서 괜찮아요. 민여진 씨는 계속 소파에만 있었을 거 아니에요. 민여진 씨까지 감기 걸리면 머리 아픈 건 진시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걸치고 있어요.”타자를 끝낸 뒤 임재윤은 휴대전화를 침대에 던지고 민여진에게 옷을 걸쳐준 뒤 창문을 꼭 닫았다.따뜻하게 전해지는 온기에 민여진은 가만히 있다가, 문득 뭔가 생각나 소파에서 일어섰다.“아, 맞다. 식사는 했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레스토랑에서 포장해 온 디저트가 있는데 이거라도 드세요.”임재윤이 소파에서 봉투를 집어 들자, 포장이 찌그러져 크림이 새어 나와 있었다.민여진은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황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아마도 아까 박진성을 피해 사람들 속으로 파고들면서 케이크가 망가진 모양이었다.“혹시 케이크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