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자의 이름은 강이현.
연예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이자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배우였다.유니 역시 과거에 잠시 이현과 엮였던 적이 있었고 그것은 유니 인생의 몇 안 되는 오점 중 하나였다.이현은 유니의 어깨에 자연스레 자신의 팔을 올리며 그녀의 얼굴을 흘깃 내려다보았다.유니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손 치워라.”유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두 사람 사이의 싸늘한 분위기에 주변에 있던 동기들은 마시던 잔을 멈추고 그들의 눈치를 슬슬 보기 시작했다.하지만 이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능글맞게 대꾸했다.“아~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스킨십도 못하나?”“손 치우라고 했다. 이 바람둥이 새끼야.”서희의 손끝이 산소호흡기 호스에 닿아 하얗게 질려가던 그 찰나였다.등 뒤를 파고든 목소리는 비명도 분노 섞인 외침도 아니었다.그것은 마치 서류 결재를 올리는 부하 직원을 대하듯 무미건조하고 지독하리만치 평온한 음절의 나열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강서희 전략기획팀장님.” 서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천천히 고개를 돌린 서희의 시선 끝에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지안이 걸렸다.지안은 방금 복도에서 생수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온 사람답게 입술에 옅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붉게 충혈된 눈동자만이 그가 처절한 밤을 지새웠음을 증명할 뿐,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히지 않았다.무표정하게 서희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분노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천지안.” 서희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지안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서희에게 다가갔다.구두 소리조차 나지 않는 정적 속의 보행이 서희의 숨통을 조였다.지안은 서희가 움켜쥐고 있던 산소호흡기 호스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그리고는 아주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서희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손 떼시죠. 불결하니까.” 지안은 떼어낸 서희의 손을 마치 오물을 털어내듯 허공에 놓아버렸다.그러고는 수건을 꺼내 별이의 호스에 닿았던 자리를 꼼꼼히 닦아내기 시작했다.서희가 옆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한 철저한 무시였다. “너, 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나, 강서희야! 우리 아빠가…!”
병원 복도는 새벽 특유의 가라앉고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기계음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가운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마치 멈추지 않는 상처처럼 복도 바닥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그 붉은 빛이 마침내 꺼졌다.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굳어 있었다.율은 벽에 기대어 수술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고 보롬은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잘게 떨고 있었다. 셋 중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붉은 빛이 사라진 자리엔 서늘한 정적만이 남았고 그 정적이 선고일지 구원일지 몰라 모두가 숨을 멈췄다.잠시 후, 육중한 자동문이 열리며 푸른 수술복 차림의 주치의 김 박사가 걸어 나왔다.땀방울이 맺힌 이마와 퀭한 눈등에서 수술의 난이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지안은 비틀거리며 김 박사에게 달려갔고 율과 보롬 역시 자석에 이끌리듯 뒤따랐다.지안의 입술은 바짝 말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박사님.” 지안이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에 김 박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비는 넘겼습니다, 도련님. 다행히 출혈이 잡혔고,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지안은 버티고 있던 무릎에 힘이 풀려 벽을 짚고 그대로 주저앉았다.안도감은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온몸을 덮쳤고 억눌러왔던 숨이 짐승 같은 신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옆에 서 있던 율이 지안의 어깨를 묵직하게 움켜쥐었다.친구의 손길이 닿자 그제야 지안은 자신이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보롬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지안의 소매를 꼭 쥐어주었다.
“지안이가 그러더라. 쥐새끼도 도망갈 구멍은 있어야 재밌다고.” 율이 한 걸음 다가서자 서희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율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지만 창고 전체를 압도하는 무게감이 있었다. “대신 오늘부터 똑똑히 지켜봐. 네가 가진 그 알량한 권력들이 어떻게 하나씩 썩어 문드러지는지. 그리고 한 비서가 깨어나는 날.” 율의 입술 끝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날이 네가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될 거야.” 율은 그대로 뒤를 돌아 창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서희는 차가운 창고 바닥에 주저앉아 멀어지는 율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하지만 전신을 휘감는 원초적인 공포에 몸은 이미 덜덜 떨리고 있었다. ***병원 복도는 새벽 특유의 가라앉고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기계음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가운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마치 멈추지 않는 상처처럼 복도 바닥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복도 끝에서 급박한 구두 소리가 정적을 깼다.율에게 연락을 받고 한달음에 달려온 보롬이 지안의 앞에 멈춰 섰다. “선배… 지안 선배! 별이는요? 수술 들어갔다는 말만 듣고 왔는데, 별이 지금 어때요?” 보롬의 목소리는 이미 눈물에 젖어 있었다.지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뿐이었다.별이가 그 끊어진 사원증을 쥐고 나타났을 때의 그 참혹한 모습이 자꾸만 눈앞을 가려 지안은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말 좀 해봐요, 선배… 별이, 괜찮은 거죠? 별이 그렇게 강한 애니까… 금방 털고
준휘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준휘를 쏘아보았다.서희가 그토록 갈구했던 남자, 그리고 그 집착 때문에 별이가 피를 흘리게 만든 장본인.지안의 눈에 서린 건 혐오에 가까운 증오였다. “형이 수습하려고 들지 마. 이번엔 절대 그냥 안 넘어가. 강서희가 저지른 짓, 내가 내 방식대로 되돌려줄 거니까.” 지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선언은 명확했다.후계 싸움이고 뭐고 이번 일을 빌미로 준휘를 아예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위협이었다. “한 번만 더 내 눈앞에 나타나서 상황 덮으려고 들면… 내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 형부터 무너뜨려 버릴 거야.” 지안의 서늘한 눈동자가 준휘의 시선을 짓눌렀다. “그동안은 돌아가신 큰아버지 봐서라도 선은 안 넘으려고 했어. 형이 형편없이 굴어도 그게 내 마지막 예우였으니까. 근데 이제 그딴 거 없어. 내 눈엔 형도 그냥 강서희랑 똑같은 공범일 뿐이야.” 준휘는 반박할 수 없었다.중학교 시절부터 지안을 발밑에 두려 했던 오만함도, 천지그룹의 적통이라는 자부심도, 자신과 한배를 탔던 강서희가 별이를 사지로 몰았다는 사실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결국 서희의 폭주를 방치한 건 자신의 방심이었고 그것이 자신이 연모하던 별이의 생명을 갉아먹었다는 자책감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준휘를 베어냈다.준휘는 벽에 몸을 기댄 채, 처음으로 지안 앞에서 처참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아. 수습하러 온 거 아니야. 수습할 수도 없는 일이고.” 준휘가 억지로 마른 침을 삼키며 비릿한 갈증을 삼켰다.
“안 돼!!” 지안의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6년 전처럼 또다시 눈앞에서 소중한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지안이 제 몸이 부서지는 것조차 잊은 채 바닥을 박차고 서희를 향해 몸을 날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챙그랑—!정적을 찢어발기는 굉음과 함께 머리 위 환기구 창문이 박살 났다.깨진 유리 파편들이 달빛을 머금고 사방으로 흩날렸고 그 파편의 비를 뚫고 검은 그림자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지안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창고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차가운 살기로 치환되었다. “강서희, 멈춰!” 낮게 깔리는 단호한 명령과 함께 별이의 숨통을 조이려던 서희의 손목을 억센 손길이 낚아챘다. 율의 조직원들이었다.그들은 지안의 신호 따위는 기다리지 않았다.오직 제 주인의 명령에 따라 상황이 임계점에 도달하자마자 기계적으로 개입해 판을 짓눌러버렸다. “아악! 놓으라고! 이거 놔!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라고!” 서희가 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이미 건장한 사내들이 그녀의 팔다리를 무자비하게 꺾어 시멘트 바닥에 메친 뒤였다.바닥에 처박힌 서희의 얼굴 위로 먼지가 내려앉았고 광기에 번들거리던 눈동자는 경악과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그 난장판 속에서 지안은 구르듯 별이에게 달려갔다.지안의 시야는 온통 결박된 채 창백하게 질린 별이로 가득 찼다.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별이를 의자째로 감싸 안았다. “별아, 한별...!” 지안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지안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서렸다. 준휘였다.그 역시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은 간데없이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친 채 창고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지안을 발견한 준휘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천지안, 네가 왜 여길…” “별이 어디 있어. 형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지안이 쏘아붙이며 다가갔다.준휘는 서희가 저지른 미친 짓을 수습하기 위해 혹은 그 뒤틀린 집착의 끝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듯했다.준휘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서희가 기어이 사고를 쳤더군. 강 회장 쪽 라인으로 위치 따서 온 거니까 넌 나서지마. 내가 알아서 수습할 테니까.” 준휘의 말에 지안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빗줄기보다 더 서늘한 냉소가 지안의 입가에 머물렀다. “수습? 별이가 저 안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형한테 맡기라고?” 지안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그는 준휘를 벌레 보듯 밀쳐내며 창고 문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준휘 역시 지안을 막아서는 대신, 죄책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콰앙—!철문이 비명 같은 굉음을 내며 열리고 지안이 창고 안으로 들이닥쳤다.그런데 지안의 바로 뒤, 서늘한 그림자 하나가 더 따라붙었다.칼날을 만지작거리며 지안의 절망을 감상할 준비를 하던 서희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준휘 오빠?” 칼을 쥔 서희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지안에게 분명 혼자 오라고 못 박았고 이 장소는 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