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지안의 목소리가 낮고 차갑게 깔렸다.
평소보다 훨씬 강한 압박감이 서린 말투였지만 보롬은 굴하지 않고 율을 향해 다그쳤다. “그런데 저 둘이 커플이라고요? 왜 저 여자가 이 파티에 초대된 건데요? 우리 별이 신경 쓰이게!” 신호가 당황하며 급히 끼어들었다. “제가… 초대했어요. 전 전후 사정을 잘 몰라서요!!” 상황이 험악해지자 율이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 “자자!! 우리 이러지 말고 자리로 가자. 지안이 귀국 축하 파티인데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행은 관계자 인맥들만 들어갈 수 있는 VVIP 귀빈실로 향했다. 그곳은 온수 풀 수영장이 내강남 도심의 야경을 등진 문성그룹 전략통제실.본부장 문강륜은 세 개의 대형 모니터가 내뿜는 푸른 광원 속에 파묻혀 있었다.화면에는 실시간으로 폭락 중인 천지호텔의 주가 그래프가 붉은 숫자를 토해내고 있었다.“이번엔 아니지, 천지안.”강륜은 태블릿 위에 무심하게 서명을 갈겼다.천지호텔의 투매 물량을 우회 자금으로 긁어모으라는 최종 승인이었다.별이가 깨어난 지금이야말로 지안이 가장 허술해진 타이밍이었고, 강륜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모니터 속 지안의 파파라치 컷을 훑었다.하지만 강륜의 그 웃음 뒤엔 3년 전, 지안에게 처참하게 밀렸던 기억이 잔상처럼 박혀 있었다.3년 전, 강원도 리조트 입찰장.수영장 사고 직후 지안이 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강륜은 나름대로의 선을 지켰다.지안을 향한 증오와는 별개로, 사경을 헤매는 여자를 둔 남자의 등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당시 강륜의 곁을 지키던 KKM 방송국장 아들 하우진은 그런 강륜의 결정을 묵묵히 지켜봤다. 오랜 친구로서, 강륜이 누구보다 지안을 경계하면서도 왜 지금 끝내지 않는지, 그 오만한 자존심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지안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별이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지안은 무너지는 대신 스스로를 몰아붙였다.다시 눈을 떴을 때, 천지그룹에서 사고만 치던 망나니가 아닌, 그녀를 온전히 지탱할 수 있는 주인이 되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그 절실함은 천 회장의 첫 임무로 이어졌다.흑룡그룹의 석과 시우가 치밀파에게서 되찾아온 설계 경매 건.지안에겐 실패해서는 안 될 테스트였고, 그 문턱에서 맞붙은 상대가 바로 강륜이었다.강륜이 서류에 펜을 대던 순간, 입찰장의 문이 열렸다.서늘한 병원 기운을 풍기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수트 차림의 지안이 걸어 들어왔다.“그 오만한 착각 때문에 오늘 문성이 날아가는 거야. 문강륜 본부장.”지안은 당황한 강륜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무심한 듯 말을 던졌다.“그 땅, 네 손으로 낙찰받는 순간, 문성그룹 재무는 박살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쉰 목소리였지만, 지안에게는 그 어떤 외침보다 크게 박혔다.그 짧은 호칭 하나가 지안이 그간 쌓아 올린 냉정함을 단숨에 무너뜨렸다.지안은 대답 대신 별이의 손등에 이마를 짓눌렀다.뜨겁게 울컥 차오르는 것을 참아내려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떨리는 어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창밖에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병실 안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별이의 눈동자에 그 빛이 담기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지안의 길고 위태로웠던 밤이 가고 비로소 눈부신 아침이 시작되고 있었다.선배라는 그 한마디가 별이가 낼 수 있는 한계였다.다시 눈을 감으려는 듯 별이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으려던 찰나 병실 문이 조심스럽지만 급하게 열렸다. “한 별…!” 보롬이었다.지안의 바로 옆까지 달려온 보롬은 침대 위의 별이를 보자마자 입을 틀어막았다.뒤따라 들어온 율이 그런 보롬의 어깨를 감싸 쥐며 지안과 짧게 눈을 맞췄다.지안은 대답 대신 보롬에게 자리를 비켜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별아, 나 보여? 내 목소리 들려?” 보롬이 별이의 손을 아주 조심스럽게 맞잡았다.별이는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보롬을 한참이나 응시했다.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쉰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별이는 그저 보롬의 손을 아주 미세하게 움켜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그 작은 움직임에 보롬의 참았던 눈물이 별이의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말하지 마. 그냥 듣기만 해. 너 진짜… 나쁜 기집애야.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
대한민국의 아침은 어김없이 천지호텔의 소식으로 시작되었다.전날 밤의 소란은 시작에 불과했다는 듯, TV 뉴스의 앵커는 상기된 목소리로 연신 새로운 속보를 쏟아냈다.주요 포털 메인은 강 의원 가문의 몰락과 천지호텔 강서희 실장의 살인미수 사건으로 빈틈없이 채워졌다.평생 권력을 휘두르던 강 의원의 자택 마당에 검찰의 압수수색 상자들이 쉴 새 없이 실려 나가는 광경은, 지안이 설계한 폭풍이 얼마나 잔인하고 정확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하지만 정작 그 폭풍의 진원지인 별이의 병실은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지안은 어두운 조명 아래, 어제와 같은 자세로 별이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율과 통화하며 차갑게 상황을 설계하던 포식자의 기운은 걷어내고, 이제는 밤새 별이의 미세한 숨소리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는 예민한 남자의 모습만 남았다.진동-탁자 위에 놓인 지안의 휴대폰이 짧게 몸을 떨었다.화면에는 [율]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지안은 별이의 손등을 덮어주던 시선을 거두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목소리는 밤새 잠겨 있었으나, 그 안엔 여전한 냉철함이 박혀 있었다.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 난리도 아니야. 강서희 그 여자, 지금 유치장에서 자기 아빠 찾고 난리 났는데… 정작 강 의원은 자기 코가 석 자라 딸 이름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고 있거든. 네가 원하던 대로 변호인단 섭외? 꿈도 못 꿔. 지금 이 상황에 강 실장 변호 맡겠다고 나설 미친놈은 업계에 없으니까.” 율의 보고가 이어지는 동안 지안은 별이의 창백한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차마 닿지는 못하고, 허공에서 그녀의 얼굴선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손길은 지독히도 애틋했다.
창밖의 어둠이 걷히기도 전부터 세상은 지안이 예고한 대로 뒤집혀 있었다.오전 7시, 주요 일간지와 포털 사이트 메인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같은 소식을 쏟아냈다. [강 의원, 수백억대 비자금 조성 정황 포착], [천지그룹 전략기획팀장 강서희, 납치 및 살인미수 혐의 피소]. 강 의원의 자택 앞은 이른 아침부터 들이닥친 검찰 수사관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평생을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던 그가 포토라인에 서기도 전, 압수수색 상자들이 쉴 새 없이 실려 나갔다.수술실 복도에서 준휘가 지안에게 건넸던 마지막 패가 강 의원의 숨통을 단숨에 끊어놓은 결과였다. 같은 시각, 별이의 병실.본사 홍보팀과 법무팀은 지안의 지휘 아래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지안은 병실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올린 채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보고를 처리했다. “현재 천지호텔 주가 8% 급락 중입니다. 강서희 실장 리스크로 외측 물량이 쏟아지고 있어요.” 비서실의 긴박한 유선 보고에도 지안은 흔들림 없이 서류를 넘겼다.지안은 한 손으로 별이의 수액 속도를 체크하며 무심하게 화면을 넘겼다.밤새 별이를 지키다 찬물로 세수만 마친 얼굴엔 피로감이 서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예상했던 범위야. 지금 바로 공식 입장문 배포해.” 지안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천지그룹의 공식 발표가 배포되었다.이번 사건을 강 서희 실장 개인의 일탈로 규정함과 동시에 천지호텔을 그녀의 권한 남용에 의한 최대 피해자로 못 박는 프레임 전환이었다.결정타는 그다지 길지 않은 단독 기
서희의 손끝이 산소호흡기 호스에 닿아 하얗게 질려가던 그 찰나였다.등 뒤를 파고든 목소리는 비명도 분노 섞인 외침도 아니었다.그것은 마치 서류 결재를 올리는 부하 직원을 대하듯 무미건조하고 지독하리만치 평온한 음절의 나열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강서희 전략기획팀장님.” 서희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천천히 고개를 돌린 서희의 시선 끝에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지안이 걸렸다.지안은 방금 복도에서 생수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온 사람답게 입술에 옅은 물기가 맺혀 있었다.붉게 충혈된 눈동자만이 그가 처절한 밤을 지새웠음을 증명할 뿐, 얼굴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읽히지 않았다.무표정하게 서희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은 분노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천지안.” 서희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지안은 대답 대신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서희에게 다가갔다.구두 소리조차 나지 않는 정적 속의 보행이 서희의 숨통을 조였다.지안은 서희가 움켜쥐고 있던 산소호흡기 호스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그리고는 아주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서희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다. “손 떼시죠. 불결하니까.” 지안은 떼어낸 서희의 손을 마치 오물을 털어내듯 허공에 놓아버렸다.그러고는 수건을 꺼내 별이의 호스에 닿았던 자리를 꼼꼼히 닦아내기 시작했다.서희가 옆에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한 철저한 무시였다. “너, 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나, 강서희야! 우리 아빠가…!”
병원 복도는 새벽 특유의 가라앉고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기계음만이 정적을 깨뜨리는 가운데 수술실의 붉은 등은 마치 멈추지 않는 상처처럼 복도 바닥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그 붉은 빛이 마침내 꺼졌다.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조차 못한 채 굳어 있었다.율은 벽에 기대어 수술실 문을 응시하고 있었고 보롬은 남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잘게 떨고 있었다. 셋 중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못했다.붉은 빛이 사라진 자리엔 서늘한 정적만이 남았고 그 정적이 선고일지 구원일지 몰라 모두가 숨을 멈췄다.잠시 후, 육중한 자동문이 열리며 푸른 수술복 차림의 주치의 김 박사가 걸어 나왔다.땀방울이 맺힌 이마와 퀭한 눈등에서 수술의 난이도가 고스란히 느껴졌다.지안은 비틀거리며 김 박사에게 달려갔고 율과 보롬 역시 자석에 이끌리듯 뒤따랐다.지안의 입술은 바짝 말라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박사님.” 지안이 간신히 내뱉은 한마디에 김 박사가 마스크를 벗으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비는 넘겼습니다, 도련님. 다행히 출혈이 잡혔고, 수술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 한마디가 떨어지는 순간 지안은 버티고 있던 무릎에 힘이 풀려 벽을 짚고 그대로 주저앉았다.안도감은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온몸을 덮쳤고 억눌러왔던 숨이 짐승 같은 신음이 되어 터져 나왔다.옆에 서 있던 율이 지안의 어깨를 묵직하게 움켜쥐었다.친구의 손길이 닿자 그제야 지안은 자신이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보롬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지안의 소매를 꼭 쥐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