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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인간 담보 한별

Author: 연화령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3-11 22:06:19

​​“그 애라니? 여자를 그렇게 증오하면서 그 애는 안 그렇다? 도대체 누군데 그래?”

​율의 집요한 물음에도 지안은 대답 대신 얼음물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동그란 얼음이 잔벽에 부딪히며 서늘한 소리를 냈다.

지안의 시선은 어느새 제 새끼손가락에 끼워진 낡고 빛바랜 묵주반지에 고정되었다.

블랙 드래곤의 어지러운 조명조차 그 낡은 반지의 아우라를 가리지는 못했다.

​“있다, 그런 애가.”

​지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여자들을 장난감처럼 휘두르던 평소의 냉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사뭇 진지해진 그의 표정에 율은 낯선 기운을 느꼈다.

지안은 반지의 거친 표면을 엄지로 조심스레 매만지며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존나 그리워하는 년.”

​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하의 천지안 입에서 그리워한다는 감성적인 단어가 나올 줄이야.

하지만 지안은 이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며 다시금 차가운 가면을 썼다.

​“아~ 몰라. 사실 얼굴도 기억 안 나.”

“이열, 뭐냐 천지안? 생마초인 줄 알았더니 순정마초였네?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2년째 그리워한다니, 이거 완전 특종인데!”

“닥쳐라.”

“부끄러워하긴….”

​지안은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럼 간다.”

“그래, 수고했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고.”

​새벽이 다 되어서야 블랙 드래곤을 나선 지안은 피곤한 얼굴로 바이크에 올라탔다.

헬멧 너머로 긴 한숨을 내뱉은 그는 이내 거칠게 시동을 걸었다.

굉음과 함께 지안은 잠들지 않는 도시의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바람이 뺨을 때릴수록 기억 속 노란 우산을 쓴 소녀의 잔상은 더욱 짙게 달라붙었다.

​같은 시각, 별이는 지독한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별들이 쏟아질 듯 가득 찬 몽환적인 섬에 홀로 서 있는 꿈.

주변은 온통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별이의 가슴엔 구멍이 뚫린 듯 찬 바람이 몰아쳤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고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흐흑…흐흐흑…”

​그때, 한 남자의 그림자가 별이를 덮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지만 역광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키와 귀티가 흐르는 흑발의 실루엣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남자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별이는 구원이라도 만난 듯 그 손을 잡았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남자는 갑자기 별이의 손을 꽉 맞잡더니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몽환적이던 풍경은 순식간에 기괴한 흑백으로 변해갔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별이가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그만!! 제발 그만해! 여기가 어딘데 이래?”

​별이가 겁에 질려 묻자 남자가 서늘한 미소와 함께 의미심장하게 뱉었다.

​“지. 옥.”

​그 말과 동시에 남자가 별이를 낭떠러지로 거세게 밀어버렸다.

​“악!!!”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땐 이미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꿈의 잔상이 너무 생생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별로 좋지 않은 꿈이야. 담보 때문에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봐.”

​별이는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거실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실랑이에 귀를 기울였다.

“여보, 정말 우리 별이를 이렇게 보내야 해요?”

“어쩌겠어! 부도를 막는 방법이 이것뿐인데…”

​절망적인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별이는 마른세수를 했다.

곧이어 초인종이 울리고 천지그룹의 김 실장이 들어섰다.

김 실장에 거실 소파에 앉자, 윤 정아는 차를 내오기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윤 정아의 모습이 사라지자 김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나눌까요?”

“네. 저희 별이는 어디로 가는 거죠?”

쟈스민 차를 내온 윤 정아의 손이 가냘프게 떨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한별 양은 오늘부터 천 회장님 댁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서류를 검토하던 아빠의 눈이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이 서류대로라면 저희 쪽에선 아쉬울 게 없는데… 이 비밀리에 진행한다는 조항은 대체 뭡니까?”

“그건 회장님과 별이 양이 직접 논의할 문제입니다.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별이는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왔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아빠, 엄마. 걱정 마. 도착해서 꼭 전화할게!”

***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김 실장의 말에 별이의 시선이 천 회장의 저택으로 향했다.

천 회장의 저택은 거대하고 차가운 성 같았다.

웅장한 대문을 들어서니 야외 수영장 그리고 끝도 없이 펼쳐진 정원은 별이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도우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지만 그 환대는 오히려 별이를 멋쩍게 만들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죠.”

​소파에 앉아 긴장하고 있을 때 천 회장이 서재에서 걸어 나왔다. 별이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많이 컸구나. 어린 나이에 이런 곳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다만 계약은 계약이지.”

​천 회장은 인자한 미소 뒤에 서늘한 눈빛을 감춘 채 본론을 꺼냈다.

“별이 양에게 임무를 하나 주려고 해. 이걸 성공하면 별푸드에 투자된 50억을 탕감해주지.”

“50억이요? 무슨 임무기에…”

“우리 집의 빌런인 내 아들, 지안이를 인간으로 만드는 임무다.”

​별이는 당황했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라니?

“그걸 제가 어떻게…”

“그건 별이 양이 알아서 할 문제야. 성공하면 50억이지만 실패한다면… 투자금은 당장 회수해야겠지.”

“투…투자금을요? 해… 해볼게요! 해보겠습니다!”

​별이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50억이면 아빠를 살릴 수 있다.

“대신 아드님 정보를 다 주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사람 만들게요.”

별이의 대답에 천 회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내일부터는 지안이가 다니는 천지고등학교로 전학이다. 그리고 이 임무는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로 하지. 괜히 빌런이 알아봤자 좋을 건 없으니까. 그냥 별이 양은 담보로 잡혀서 이 집에 거주하는 걸로 하자고.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아! 네…”

천 회장과 대화를 마치고 김 실장 안내에 따라 ​방으로 향했다.

“이곳이 아가씨 방입니다. 우선 짐 좀 풀고 쉬고 계세요. 저는 도련님 정보 좀 추려서 전달하겠습니다.”

“아, 네 감사해요.”

쾅!

김 실장이 방을 나가자 그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진짜 온 거지?”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계속해서 중얼거렸고 이내 정신이 드는지 저의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한 별. 50원도 아니고 50억이야. 50억!! 난 그냥 이 집 빌런을 인간으로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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