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지안의 손이 별이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단순히 제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짓이겨버리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지안의 사나운 안광이 별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었다.
“넌 그냥 우리 집에 끌려온 인간 담보일 뿐이야.”
낮게 울리는 지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한 자 한 자 내뱉을 때마다 별이의 자존심을 낱낱이 짓밟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난 너같이 돈만 밝히는 골 빈 년들 딱 질색이니까.”
“뭐라고요? 골빈 년?”
별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골적인 멸시였다.
수치심이 온몸을 타고 흘렀지만 지안의 표정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
그는 짧게 긍정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무슨 근거로 자신을 이토록 쉬운 여자로 단정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별이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은 이 질식할 것 같은 대치를 끝내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화를 억누르느라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별이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를 밀어냈다.
“아, 됐고요.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뭐?”
“재수 없다고요, 그쪽. 그리고 내 방이니까 당장 나가라고요!”
지안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가소롭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치켜올린 그가 여유롭게 별이를 훑어내렸다.
별이의 말투에도 날 선 가시가 돋쳤다.
“뭐예요? 그 웃음은?”
“당돌하네. 방금 전까진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천 회장이 널 데려온 거구나?”
지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전말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였다.
“브라보. 천 회장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그의 짓궂은 도발에도 별 반응 없는 별이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지 지안은 그녀를 매섭게 응시하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순진한 척이 컨셉인가?”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래요?”
피식.
표정 변화 없이 한마디도 지지 않는 별이의 모습에 지안은 어이없다는 듯 옅은 실소를 내비쳤다.
그는 경고하듯 나직하게 읊조렸다.
“페이스 유지 잘하네. 하긴 그랬으니까 저 늙은이를 꼬셨겠지.”
별이는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지안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냐? 너도 오래가진 않을 거다. 이건 진심으로 네 걱정이 되어서 말해주는 건데, 천 회장 저 늙은이 말이야… 너 말고도 수두룩해. 그러니까 되도록 이 집에서 빨리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뭐, 버틸 수 있으면 힘껏 버텨봐. 그리 오래가진 못할 테니까.”
“…”
별이는 그가 뱉어내는 모욕적인 말들의 진의가 궁금했지만 천 회장과의 거래를 떠올리며 애써 침묵으로 일관했다.
별이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반응하지 않자 지안은 마지막 비아냥을 던지며 몸을 돌렸다.
“그럼, 존버하도록.”
쾅! 문이 부서질 듯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별이는 힘이 풀린 듯 침대 끝에 주저앉았다.
적막해진 방 안에서 별이는 멍하니 지안이 남긴 잔상을 짚어보았다.
“뭐야… 저 빌런 자식…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는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지안의 말을 하나씩 되짚어보던 별이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예감이 스쳤다.
“…뭐야… 설마 천 회장님이랑 내 사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째서?”
잠시 지안의 오해에 당황하던 별이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빌런 자식이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고 임무는 임무니까. 한별, 빌런 자식을 무조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 자식이 뭐라 해도 난 그냥 버틴다!”
별이는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공기를 떨쳐내려 거실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힘껏 열었다.
덜컥, 쾅!
격한 방문 소리에 거실에 있던 시선이 쏠리자 별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 실장이 다가와 물었다.
“아가씨, 필요한 거라도.”
“앗!! 아니요!! 그냥 답답해서요… 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네. 정원에 나가시면 왼편에 테라스가 있습니다. 거기서 쉬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별이는 정원으로 나섰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밤공기가 뺨을 스치자 조금은 냉정해질 수 있었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별이는 다시금 의지를 불태우며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괜찮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그래!! 파이팅 하자고!!!! 아자아자!!! 한별 파이팅!!!”
그때, 등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앗!! 깜짝이야!! 뭐예요!! 사람 놀라게?”
별이가 잔뜩 놀란 얼굴로 뒤돌아서자 그곳엔 달빛을 받은 흑발의 지안이 서 있었다.
“늙은이 기다리냐?”
“아니!! 그쪽이 무슨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요!! 저 천 회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누가 뭐래?”
“아니 그쪽이 계속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내가?”
“네!!”
지안은 시큰둥하게 별이를 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닌데? 뭔가 구린 구석이 있나 봐?”
“진짜 말이 안 통하네요.”
“그런데… 네 이름이 한별이라고?”
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방금 네가 온 정원이 떠나가라 소리쳤잖아.”
”아… 네…”
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가 됐다.
그런 별이를 빤히 보던 지안은 왠지 모르게 머쓱한 기운을 내비치더니 이내 다시 차가운 가면을 썼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하든가.”
지안이 미련 없이 뒤돌아서자 별이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어…어디 가세요!!”
지안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별이를 차갑게 응시했다.
“신경 꺼.”
정원의 공기는 밤이 깊어질수록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온도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별이가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돌아가려던 찰나 지안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녀린 팔목을 낚아챘다.“가지 마.”그녀의 귓가에 지안의 목소리가 낮고 뜨겁게 울려 퍼졌다.평소의 서늘한 명령조가 아닌 어딘가 애원하는 듯한 떨림이 섞인 목소리였다.예상치 못한 붙잡음과 고백 같은 그 한마디에 별이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지안은 대답 대신 별이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갑작스러운 포옹에 별이의 고개가 지안의 단단한 가슴팍에 파묻혔다.지안은 말없이 별이를 안은 채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전해지는 은은한 샴푸 향과 기분 좋은 온기를 느꼈다.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있었지만 지안은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마른침을 삼킨 그가 품에서 별이를 살짝 떼어내어 그녀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선배, 무슨 일 있어요?”별이가 순수한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묻자 지안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별이의 하얀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차가운 밤공기와 대비되는 그의 손바닥 온기가 별이의 피부에 닿았다.지안은 단숨에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었다.별이의 숨결이 멎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달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고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정원을 가득 채웠다.짧지만 강렬했던 첫 입맞춤 끝에 지안이 수줍은 듯 입을 열었다.
지안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제안에 율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살폈다.“이열~ 천 지안 뭐야!! 며칠 사이에 여자 기분도 생각할 줄 아는 스윗남이 다 되셨네?”“있잖아, 율아. 넌 진짜 그 입이 문제야.”“내 입이 왜? 내 입술이 상당히 치명적이야?”“… 됐고, 초롬이랑 보롬이도 우리 집으로 오라 해.”지안의 뺨에 붉게 그어진 생채기를 발견한 율이 짓궂게 물었다.“그런데 네 얼굴은 왜 이러냐? 설마~ 유하나한테 맞았냐?”“… 시끄러워.”“천하의 천 지안 얼굴에 상처를 입히다니… 유 하나 대범하긴 하다.”“… 지랄~”“넌 맨날 할 말 없으면 지랄, 지랄하더라?”“알면 눈치껏 닥치고 있어.”지안의 짜증 섞인 말투에도 율은 그저 옅은 미소를 지었다.친구의 눈빛이 전보다 훨씬 맑아진 것이 반가웠기 때문이다.율은 초롬과 보롬을 부르기 위해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아~ 곧 회장님 오실 때 됐는데 왜 안 들어와~”생각지도 못한 지안의 늦은 귀가에 별이는 대문 앞을 서성이며 중얼거렸다.상처 난 얼굴로 나간 그가 혹여 또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그때, 가로등 불빛 사이로 지안의 실루엣이 보였다.저만치 서 있는 별이를 발견한 지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왜 나와 있
지안과 율은 세련된 대리석 복도를 지나 블랙드래곤으로 향했다.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은은한 매립등이 켜지며 그들의 길을 안내했다.이곳은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대한민국 상위 0.1%의 자제들만이 모여금기된 유흥과 정보를 나누는 은밀한 아지트였다.벽면에는 이름만 대면 알법한 거장들의 현대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공기마저 갤러리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정갈하고 고급스러웠다.평소 지안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뒷문을 선호하곤 했지만 오늘은 보란 듯이 정문의 묵직한 황금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조명이 쏟아지는 로비에서 이곳의 실질적인 운영이자 정신적 지주인 석이가 그들을 반겼다.“어~ 어서오… 왔냐?”석이는 평소와 달리 날이 서 있는 지안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짐짓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지안은 인사조차 생략한 채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네. 유 하나는요? 어디에 있어요?"“4번 룸.”“다녀올게요.”이제는 정말 다 끝내야 했다.억지로 이어온 인연의 끈을 끊어내기 위해 지안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하나의 방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까칠하고 히스테릭한 하나에게 시달릴 친구의 모습이 눈에 선했던 율이 뒤에서 작게 외쳤다.“명복을 빈다. 친구.”“제발… 넌, 그 입 좀 다물어….”날이 잔뜩 선 지안의 목소리가 복도 끝에 차갑게 박혔다.석이는 그런 지안의 뒷모습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지안이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석이는 옆에서 구경하듯 서 있는 율에게 시선을 옮겼다.석이가 턱끝으로 지안이 사라진 방향을 가리키며 넌지시 물었다.“지안이는 그렇다 치고. 넌 왜 왔냐?”“와, 형. 섭섭하게. 전 여기 오면 안 돼요?”율이 억울하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으며 능청을 떨었다.하지만 석이는 속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율의 화려한 재킷을 위아래로 훑었다.“너 평소에 뒤풀이 없으면 발도 안 붙이잖아. 무슨 바람이 불어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냐고.”“아니
피식-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지안이 답답한지 율은 성큼성큼 다가와 다시 물었다.“응?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래? 내 머리로는 지금 저 방 안에서 벌어지는 게 최고의 구경거리거든.”율의 물음에도 지안은 시종일관 여유로웠다.그는 손목에 감긴 고가의 시계를 한 번 슥 훑고는 사냥을 끝낸 포식자의 눈빛으로 율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한마디로 쟤네 X됐다는 말씀. 내가 집에서 나올 때 저 새끼들 부모한테 연락했거든. 천지 호텔 스위트룸으로 오라고.”지안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액정의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서늘한 얼굴을 비추었다.“ 정확히 10분 뒤면 도착할 거야.”지안의 목소리에는 그들이 맞이할 파멸을 확신하는 지독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지안의 말에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한 율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감탄을 터뜨렸다.지안의 복수는 단순히 그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회성 유흥이 아니었다.창민과 태리의 집안은 대대로 앙숙이었다.사업상 라이벌이자 서로의 사생활을 헐뜯지 못해 안달 난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이 가장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뒤엉켜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면?그것은 두 사람의 파멸이자 두 가문의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이 될 터였다.“진짜? 대박!!! 천 지안 제대론데? 저 새끼들 이제 빼박이네? 쟤네 둘이 저러고 다니는 거 보면 두 집안 사람들 중에 어느 한 명 쓰러지겠네? 특히 이태리네 아빠, 뒷목 잡고 쓰러지는 거 아니냐?”“에이~ 또 모르지. 이 기회로 사이가 더 좋아질지?”지안이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며 툭 던졌다.앙숙인 두 집안이 자식들 사고 덕분에 사돈이라도 맺게 될 끔찍한 시나리오를 떠올린 듯 그의 눈엔 서늘한 유머 감각이 스쳤다.“와우! 생각할수록 대박이네!”율은 전율이 돋는 듯 제 팔을 감싸 쥐며 복도가 울리도록 낄낄거렸다.하지만 지안은 이미 흥미가 다 식어버린 표정으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한바탕
천지 호텔 최상층,두터운 정적이 감도는 스위트룸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거웠다.화려한 샹들리에 불빛이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번쩍였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서늘한 냉기만을 머금고 있었다.그 차가운 바닥 위로 학교에서는 기세등등하던 창민과 태리가 사시나무 떨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있지? 얘들아? 내가 너희를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지안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지만 그 울림은 방 안의 모든 가구 위로 날카롭게 박혔다.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그들을 내려다보는 지안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그 옆을 지키는 율 역시 평소의 장난기 어린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마치 사형 집행관처럼 무거운 침묵을 유지했다.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창민은 이대로 맥없이 당하는 것이 억울했는지 파르르 떨리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리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 우리를 잡아 와서 어쩌려고…?”지안의 눈동자가 서서히 창민을 향해 구르며 멈췄다.“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궁금하냐?”“…때릴 거면 빨리 때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하. 요것 봐라.창민의 영혼 없는 헛소리에 지안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지안의 기분이 극도로 언짢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창민은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싶어 급하게 다시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지안은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딱,딱하고 불길하게 울릴 때마다 창민의 어깨가 움찔거렸다.지안이 저에게 다가올까 봐 노심초사하는 창민의 예상과는 다르게 지안은 두 걸음 정도 천천히 떼더니 태리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공포심에 젖은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태리에게 지안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이름을 불렀다.“이태리.”“어…?”“네가 잘하는 게 있다며?”잘하는 것? 태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그 눈동자 안에는 지안을 향한 오랜 집착과 뒤틀린 동경, 그리고 지금 마주한 거대한 공
석이는 능수능란하게 그녀들을 VIP 전용 구역으로 안내했다.블랙드래곤은 지안과 율, 초롬같은 트리니티가 자리에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날의 공기가 달라질 만큼, 그들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공간이었다.지안을 찾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낮은 대화 속에 섞여드는 블랙드래곤의 밤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소란스러웠다.한편, 지안의 호출에 율이 나가고 집안에 단둘이 남은 초롬과 보롬은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운 기묘한 정적 속에서 서로 눈치만 살폈다.TV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어색하게 교차했다.“뭐. 할 말 있냐?”머쓱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뗀 초롬이 삐딱하게 앉아 있는 보롬을 바라보며 물었다.보롬은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평소의 장난기를 지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였냐?”“뭐가?”초롬은 짐짓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지만 이미 굳어진 그의 어깨가 긴장을 드러내고 있었다.“별이 좋아한 거.”“알아서 뭐 하게?”“아~ 진짜 재수 없어~ 강 초롬.”입술을 쭉 내민 보롬을 보고 초롬은 헛웃음을 삼켰다.그는 이내 시선을 거실 유리창 너머 어두운 먼 곳으로 던지며 아주 오래된 비밀을 꺼내놓듯 낮게 중얼거렸다.“10년.”“뭐? 10년이라고? 그럼 몇 살이야… 9살? 대박! 첫사랑이나 다름없네.”보롬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열 손가락을 다 접어가며 날짜를 계산하자 초롬은 대답 대신 무거운 침묵으로 긍정했다.그의 눈동자엔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켜켜이 쌓인 별이에 대한 연심이 일렁였다.“그동안 왜 숨겼어?”“숨긴 게 아니라 네가 궁금해하지 않으니까 말 안 한 건데?”“그래서 별이 일이라면 매번 발 벗고 나섰구나? 진짜 강초롬 대박이다~~”“대박은 무슨… 나 들어간다?”쑥스러움이 한계치에 다다른 초롬이 서둘러 방으로 몸을 돌렸다.그 순간, 보롬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나도!! 고… 고마웠어!!! 어릴 적에 나 놀리던 애들 다 혼내줘서…”초롬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