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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빌런의 오해

작가: 연화령
last update 게시일: 2026-03-13 16:20:49

​지안의 손이 별이의 턱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단순히 제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짓이겨버리겠다는 듯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지안의 사나운 안광이 별이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꿰뚫었다.

​“넌 그냥 우리 집에 끌려온 인간 담보일 뿐이야.”

​낮게 울리는 지안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한 자 한 자 내뱉을 때마다 별이의 자존심을 낱낱이 짓밟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난 너같이 돈만 밝히는 골 빈 년들 딱 질색이니까.”

​“뭐라고요? 골빈 년?”

​별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골적인 멸시였다.

수치심이 온몸을 타고 흘렀지만 지안의 표정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

​그는 짧게 긍정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무슨 근거로 자신을 이토록 쉬운 여자로 단정 짓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별이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은 이 질식할 것 같은 대치를 끝내는 게 우선이라는 것을.

화를 억누르느라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별이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를 밀어냈다.

​“아, 됐고요.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뭐?”

​“재수 없다고요, 그쪽. 그리고 내 방이니까 당장 나가라고요!”

​지안의 한쪽 눈썹이 까딱였다.

가소롭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치켜올린 그가 여유롭게 별이를 훑어내렸다.

별이의 말투에도 날 선 가시가 돋쳤다.

​“뭐예요? 그 웃음은?”

​“당돌하네. 방금 전까진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천 회장이 널 데려온 거구나?”

​지안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마치 모든 전말을 다 꿰뚫고 있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였다.

​“브라보. 천 회장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네?”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그의 짓궂은 도발에도 별 반응 없는 별이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지 지안은 그녀를 매섭게 응시하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아니면 순진한 척이 컨셉인가?”

​“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줄래요?”

피식.

표정 변화 없이 한마디도 지지 않는 별이의 모습에 지안은 어이없다는 듯 옅은 실소를 내비쳤다.

그는 경고하듯 나직하게 읊조렸다.

​“페이스 유지 잘하네. 하긴 그랬으니까 저 늙은이를 꼬셨겠지.”

​별이는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지안의 독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냐? 너도 오래가진 않을 거다. 이건 진심으로 네 걱정이 되어서 말해주는 건데, 천 회장 저 늙은이 말이야… 너 말고도 수두룩해. 그러니까 되도록 이 집에서 빨리 꺼지는 게 좋을 거야. 뭐, 버틸 수 있으면 힘껏 버텨봐. 그리 오래가진 못할 테니까.”

“…”

​별이는 그가 뱉어내는 모욕적인 말들의 진의가 궁금했지만 천 회장과의 거래를 떠올리며 애써 침묵으로 일관했다.

별이가 입술을 꾹 다문 채 반응하지 않자 지안은 마지막 비아냥을 던지며 몸을 돌렸다.

​“그럼, 존버하도록.”

​쾅! 문이 부서질 듯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별이는 힘이 풀린 듯 침대 끝에 주저앉았다.

적막해진 방 안에서 별이는 멍하니 지안이 남긴 잔상을 짚어보았다.

“뭐야… 저 빌런 자식… 뭔가 오해를 단단히 하는 것 같은데.”

​생각에 잠겨 지안의 말을 하나씩 되짚어보던 별이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예감이 스쳤다.

“…뭐야… 설마 천 회장님이랑 내 사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어째서?”

​잠시 지안의 오해에 당황하던 별이는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빌런 자식이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고 임무는 임무니까. 한별, 빌런 자식을 무조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해. 그 자식이 뭐라 해도 난 그냥 버틴다!”

​별이는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공기를 떨쳐내려 거실로 나가기 위해 방문을 힘껏 열었다.

덜컥, 쾅!

격한 방문 소리에 거실에 있던 시선이 쏠리자 별이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김 실장이 다가와 물었다.

​“아가씨, 필요한 거라도.”

“앗!! 아니요!! 그냥 답답해서요… 저…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네. 정원에 나가시면 왼편에 테라스가 있습니다. 거기서 쉬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별이는 정원으로 나섰다.

낯선 환경이었지만 밤공기가 뺨을 스치자 조금은 냉정해질 수 있었다.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별이는 다시금 의지를 불태우며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괜찮아… 다시 되돌릴 수 없다면 최대한 빨리 끝내는 편이 나을지도 몰라. 그래!! 파이팅 하자고!!!! 아자아자!!! 한별 파이팅!!!”

​그때, 등 뒤에서 오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냐?”

​“앗!! 깜짝이야!! 뭐예요!! 사람 놀라게?”

​별이가 잔뜩 놀란 얼굴로 뒤돌아서자 그곳엔 달빛을 받은 흑발의 지안이 서 있었다.

​“늙은이 기다리냐?”

​“아니!! 그쪽이 무슨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요!! 저 천 회장님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누가 뭐래?”

​“아니 그쪽이 계속 그런 방향으로 이야기를 하시잖아요.”

​“내가?”

​“네!!”

​지안은 시큰둥하게 별이를 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닌데? 뭔가 구린 구석이 있나 봐?”

​“진짜 말이 안 통하네요.”

“그런데… 네 이름이 한별이라고?”

​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어떻게…”

​“방금 네가 온 정원이 떠나가라 소리쳤잖아.”

”아… 네…”

​별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가 됐다.

그런 별이를 빤히 보던 지안은 왠지 모르게 머쓱한 기운을 내비치더니 이내 다시 차가운 가면을 썼다.

​“그럼 하던 거 마저 하든가.”

​지안이 미련 없이 뒤돌아서자 별이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어…어디 가세요!!”

​지안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별이를 차갑게 응시했다.

​“신경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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