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왜 스물여섯 살 미혼 여성이 이 아이의 엄마가 되려 합니까?”
입양 심사관의 질문에 이경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일곱 해 전이었다. 창밖에는 장맛비가 내렸고, 이경의 손에는 신생아실 출입증과 파리 연수 합격서가 함께 들려 있었다.
봄은 아직 보육기 안에 있었다.
언니 서지안은 이경보다 일곱 살 많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대학을 포기하고 교복 입은 동생을 키웠다. 낮에는 월백 작업실에서 재봉을 하고 밤에는 이경의 입시 원서를 확인했다.
그런 지안이 박도윤에게서 도망쳐 돌아왔을 때, 손목에는 오래된 멍이 겹쳐 있었다.
“이번엔 진짜 끝냈어.”
지안은 웃었지만 대출 독촉장은 매일 작업실로 왔다. 도윤은 지안 명의로 돈을 빌리고 연락을 끊었다.
임신 스물아홉 주에 지안이 쓰러졌다. 아이를 먼저 살리기 위해 응급 수술이 시작됐고, 봄은 1.42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열이틀 뒤 지안은 산후심근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도윤은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한 달 뒤 병원비 분담을 요구하자 변호사를 통해 친권행사 포기 확인서와 입양 동의서를 보내왔다.
‘향후 치료비 및 양육비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서명 아래에는 도박 채무를 독촉하지 말라는 조건까지 적혀 있었다.
법원은 도윤의 폭력과 치료·양육 거부를 심리해 친권상실을 확정하고, 이경을 봄의 임시후견인으로 세웠다. 이경은 그 결정과 동의서를 심사관 앞에 내려놓았다.
“언니한테 빚을 갚으려는 거라면 입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럼 왜 결정했습니까?”
“팔십구 일 동안 저 아이가 제 손가락을 잡았습니다.”
보육기 문이 열리는 시간마다 이경은 캥거루 케어를 배웠다. 체온이 떨어지면 가슴에 안고, 분유 한 밀리리터를 삼킬 때마다 기록했다.
파리 연수는 포기했다. 어머니 작업실 절반을 정리해 치료비를 냈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퇴원하는 날 다른 보호자에게 넘기는 걸 상상해 봤어요. 안 됐습니다.”
이경은 심사관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 아이를 남의 아이로 두고 살 수 없는 사람이 이미 저였습니다.”
퇴원 전 시작된 조사와 가정방문은 봄이 집에 온 뒤에도 이어졌다. 세 달째 되는 날 법원 결정문이 나왔다.
‘청구인 서이경이 사건본인 서봄을 양자로 입양하는 것을 허가한다.’
최종 결정이 나오기 전, 임시후견인으로 봄을 데려온 퇴원 날 아이에게 맞는 옷은 시중에 없었다. 이경은 어머니 작업실에 남은 가장 부드러운 천으로 손바닥만 한 배냇저고리를 만들었다.
첫날 밤 아이가 숨을 쉬는지 두려워 한 시간마다 코 아래 손을 댔다. 분유를 토하면 같이 울었고, 새벽 네 시에 열이 오르면 응급실 가방부터 들었다.
누구의 칭찬도 없었다. 파리 연수 동기는 출국했고, 월백 거래처 둘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납기를 지키겠느냐며 떠났다.
그래도 아침마다 봄이 눈을 뜨면 이경은 같은 대답을 했다.
“엄마 여기 있어.”
엄마라는 말은 법원이 준 상도, 언니에게 갚을 빚도 아니었다. 잠든 아이 옆을 지키기로 매일 다시 하는 선택이었다.
당시 약혼자였던 태준은 꽃다발을 들고 왔다.
“결혼하면 내가 공동 입양할게. 서류는 그때 한 번에 하자.”
이경은 그 말을 믿었다.
결혼 첫해에는 혜란이 승계 심사를 핑계 댔다. 둘째 해에는 태준의 대표 취임이 있었다. 셋째 해부터 태준은 지금도 한집에 사는데 종이가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그렇게 일곱 해가 지났다.
현재의 작업실에서 이경은 입양 결정문을 다시 펼쳤다. 밖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한주 측 기사는 이미 ‘입양아를 앞세운 재산 요구’라고 쓰고 있었다.
선우가 연락해 왔다.
‘공개 범위는 서 대표가 정하십시오. 로안 법무팀은 선택지만 준비하겠습니다.’
이경은 결정문 첫 장과 이혼 합의서의 해외 위탁 조항만 화면에 올렸다. 지안의 진료기록과 봄의 출생기록은 가렸다.
“봄이는 제가 결혼 전에 적법하게 입양한 제 딸입니다.”
카메라 앞에서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강태준 씨는 법적 부모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이혼 대가로 아이를 시설에 보내겠다고 서명했습니다.”
기자가 물었다.
“생부는 어디 있습니까?”
“아이의 사생활입니다. 그 질문에 답하지 않겠습니다.”
“친모의 사망 원인은요?”
“제 언니의 죽음도 한주를 무너뜨릴 재료로 쓰지 않겠습니다.”
이경은 화면을 내렸다. 모든 상처를 보여 주지 않아도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실시간 댓글에는 더 자극적인 증거를 내놓으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지안의 마지막 사진, 도윤의 폭력 기록, 미숙아였던 봄의 몸무게까지 공개하라고 했다.
이경은 기자회견을 끝냈다.
기사 하나를 뒤집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랐다. 그러나 봄은 평생 검색되는 숫자와 사진을 떠안게 될 것이다. 이경은 여론의 승리보다 아이에게 남을 것을 먼저 골랐다.
그때 한주 홍보실에서 새 입장이 나왔다.
‘강태준 대표는 혼인 기간 서봄 양을 친딸처럼 보호해 왔습니다.’
바로 아래에는 태준이 공동입양을 일곱 번 보류한 문서가 익명 계정에 올라왔다.
이경이 공개하지 않은 서류였다.
누가 갖고 있는지 생각할 틈도 없이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차선우가 서류 가방을 든 채 서 있었다.
“서 대표님께 돌려드릴 이름이 있습니다.”
그가 내민 계약서 첫 장에는 처음부터 이렇게 적혀 있었다.
‘월백 대표 디자이너 서이경.’
“하객석 맨 앞줄, 바퀴 들어갈 자리 비워 주세요.”평일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구민회관 이 층 강당.경미가 결혼식 시작 이십 분 전에 그 말부터 했다.강당 문이 열릴 때마다 근무복 차림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야간 근무를 막 끝낸 요양보호사들이었다. 회색 조끼, 남색 점퍼, 병원 이름이 박힌 셔츠. 그 위에 하나같이 하얀 코사지를 달고 있었다.“코사지는 신부가 돌렸어요. 근무복 벗고 올 시간이 없을 거라고.”정 실장이 이경 귀에 속삭였다.신랑 오준석은 여섯 시 오십오 분에 뛰어 들어왔다. 택배 조끼를 벗으며.“한 건만 하고 온다는 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요. 십오 층.”하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경미가 신랑을 위아래로 훑었다.“땀 냄새 나. 식 끝나고 혼날 줄 알아.”“알지.”경미의 드레스는 아이보리 면 혼방이었다. 허리를 조이는 대신 등판에 주름을 잡아 숨 쉴 때마다 천이 따라 늘었다. 치마 양옆으로 주머니 두 개. 입구는 십오 도 기울어 있었다.오른쪽 주머니는 열린 주머니였다. 개인폰이 들어갔다.왼쪽 주머니에는 지퍼가 달려 있었다. 안쪽에 작은 글씨로 수가 놓여 있었다.‘꺼 두는 주머니.’경미가 회색 업무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꺼졌다. 그녀는 그것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육 년 만에 처음 꺼 봐요.”그녀가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근데 이거 지퍼 소리 좋네요. 찌익. 퇴근 소리 같아.”지퍼 손잡이는 이경이 일부러 무거운 놋쇠로 골랐다. 장갑 낀 손으로도, 피곤한 새벽 손으로도 한 번에 잡히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열리지 않게.일곱 시 정각, 강당 문이 다시 열렸다.휠체어 한 대가 들어왔다. 박 할머니였다. 딸이 휠체어를 밀었다. 할머니는 꽃무늬 블라우스에 브로치까지 달고 있었다.경미가 입을 막았다.할머니는 맨 앞줄 비워 둔 자리에 멈췄다. 경미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이쁘네.”그 한마디였다.할머니는 하객이었다. 담당 보호사를 되찾으러 온 보호자
“엄마, 오늘은 눈이 안 빨개.”봄이 식탁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경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새벽 여섯 시 반. 이경은 집 부엌에서 달걀을 부치고 있었다.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뒤집는 데 세 번 실패했다.“엄마 계란 못 하네.”“엄마는 실은 계란보다 천을 잘 뒤집어.”“그럼 계란에 시접을 넣어.”봄이 진지하게 말했다. 작업실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요즘 봄의 놀이였다.어젯밤 월백에서는 남도은과 직원 둘이 처음으로 수당을 받는 야간 교대를 섰다. 경미의 새벽 피팅도 그 조가 맡았다. 이경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결과 보고 문자를 읽었다.‘피팅 완료. 주머니 각도 OK. 신부님이 대표님 안부 물음. 대표님 자고 있다고 함. 신부님이 박수 침.’봄은 터진 노른자를 밥에 비비며 말했다.“엄마, 오늘은 나 학교 갈 때까지 있어?”“응. 오늘은 교문까지 갈게.”“그럼 상담 선생님한테 자랑해야지. 엄마가 계란 했다고.”“터진 계란이라고는 말하지 마.”“말할 건데.”이경은 웃으며 봄의 머리를 묶었다. 고무줄이 한 번 튕겨 나갔다. 봄이 자기가 하겠다고 손을 뻗었다.그날 오전, 경미가 노조 조끼를 입은 여자 둘과 함께 왔다.“요양보호사 노조 분들이에요. 저 직접 노동청에 진정 넣을 거예요. 근무표 보복으로요.”경미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월백한테 부탁할 건 하나예요. 제가 동의할 테니까, 업무폰으로 문자 보낸 날짜랑 시각 기록만 주세요. 그 이상은 하지 마세요. 증언도, 기자회견도, 본부 전화도.”“알겠습니다.”이경은 3인 승인 절차를 거쳐 문자 발송 기록을 뽑았다. 경미의 서면 동의서를 첨부했고, 다른 고객 정보는 한 줄도 섞이지 않았는지 정 실장과 도은이 각각 확인했다.노조 측 활동가가 기록을 넘겨보며 말했다.“발송 다음 날마다 근무표가 바뀌었네요. 이 정도면 진정 요건은 충분합니다. 다만 결론까지는 몇 달 걸려요.”“몇 달이요.”경미가 따라 말했다. 결혼식은 삼 주 뒤였다.이경은 다른 서류를 하나 더
“업무폰으로 문자 보낸 건 제 잘못입니다.”이경은 경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처음 적어 주신 번호를 그대로 썼어요. 어느 번호인지, 누가 그 폰을 관리하는지 묻지 않았어요. 그 문자 한 통 한 통이 회사에 일정표를 넘겨준 거예요.”경미가 손을 저었다.“제가 그 번호를 적었잖아요.”“고객이 번호를 적는 건 실수가 아니에요. 그 번호로 뭘 보낼지 정하는 건 우리 일이었어요.”사과 뒤 이경은 곧바로 움직였다. 한주케어 운영본부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찾았고, 근무표 변경 사유를 서면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오후에는 직접 본부에 찾아갈 생각이었다.경미가 그 사실을 안 건 저녁이었다.“대표님, 본부에 전화하셨어요?”“사유를 요구했어요. 문서로 받아야 나중에…….”“하지 마세요.”경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빠르던 말이 처음으로 끊겨 나왔다.“대표님이 나서면 저 진짜 잘려요. 대표님은 사장님이잖아요. 저는 근무표 한 장에 목숨 거는 사람이고요. 대표님이 본부에 전화한 거, 벌써 팀장이 알아요. 오늘 저한테 ‘월백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었어요.”이경은 휴대전화를 쥔 채 굳었다.구하려던 손이 또 한 번 경미의 목줄을 당긴 셈이었다. 경미의 직장은 이경이 들어가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을 두드린 대가는 경미가 다음 날 아침 근무표로 받았다.“……찾아가지 않을게요.”그날 밤 열한 시. 이경은 재단대에 엎드려 있었다. 새벽 한 시 피팅 전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대로 잠들었다.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대표님. 대표님, 여기서 주무시면 목 돌아가요.”도은이었다. 퇴근했어야 할 시간이었다.“도은 씨가 왜 여기…….”“정 실장님이 불렀어요. 저희 다 있어요.”재단실 문가에 직원 넷이 서 있었다. 맨 앞에 정 실장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대표님, 하나만 물을게요.”“……네.”“혼자 밤새우는 게 원칙 지키는 거예요?”이경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 실장이 말을 이었다.“직원 야근 금지라면서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혼자 야근한
“또 바뀌었어요. 이번 주만 세 번째.”경미가 업무폰을 흔들며 들어왔다. 화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월요일엔 화목 새벽이라더니, 수요일엔 수금 새벽이래요. 오늘 아침엔 또 화목이래요. 제가 무슨 택배 상자예요?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게.”“그럼 저도 옮기면 되죠.”이경은 바로 달력을 열었다. 근무표가 바뀔 때마다 피팅 시간을 옮겼다. 새벽 다섯 시에서 여섯 시로, 다시 새벽 한 시로.경미가 화면을 들여다봤다.“대표님, 새벽 한 시에 피팅하고 다섯 시에 또 피팅하면 언제 주무세요?”“세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 하는 사람치고 충분한 사람 못 봤어요. 제가 그런 분들 기저귀도 갈아 드려요, 나중에.”농담이었지만 경미는 웃지 않았다.새벽 다섯 시 반, 문밖에서 트럭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택배 조끼를 입은 남자가 캔커피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오준석이었다. 첫 배송 터미널이 근처라 했다.“신부님 피팅 구경은 반칙이라길래, 커피만 놓고 갑니다.”그는 커피를 재단대 끝에 내려놓고 정말로 돌아섰다. 문 앞에서 한 번 뒤돌아봤다.“대표님. 이 사람 숨 쉬는 옷, 꼭 부탁드려요. 이 사람 숨 참는 거 선수예요.”경미가 커튼 너머에서 소리쳤다.“빨리 가! 늦으면 또 별점 테러 당해!”그 주 이경은 매일 세 시간씩 잤다. 봄의 밤은 등록해 둔 야간 돌봄 선생님이 지켰다. 봄이 잠든 뒤 나왔다가 봄이 깨기 전에 돌아가는 날들이었다.봄은 아침마다 엄마 눈이 왜 토끼 같냐고 물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묻지 않고, 자기 눈을 손가락으로 당겨 빨간 척을 했다. 같이 토끼가 되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이경은 웃었지만, 그 웃음 끝이 조금 아팠다.목요일 오전, 가봉 치수표가 도은에게 넘어갔다. 월백의 이중 치수 확인 절차였다. 대표가 잰 치수도 예외는 없었다.도은이 표를 들고 재단실로 왔다.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대표님, 이 숫자 두 번 다르게 적으셨어요.”진동 둘레. 앞장에는 38, 뒷장에는 83.숫자를 뒤집어 적은 것이었다.
“이 시간에 문 연 웨딩숍 처음 봐요. 사기 아니죠?”새벽 네 시. 월백 유리문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회색 근무 조끼에 운동화, 어깨에는 커다란 천 가방. 목에 건 끈에는 휴대전화가 두 대 매달려 있었다.이경은 재단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설치 요청서를 본 뒤로 잠이 오지 않았다.요청서는 그날 오후 진술서와 함께 수사기관에 냈다. 서명은 내 손이 했지만 무엇이 깔리는지는 몰랐다고, 그리고 몰랐다는 것도 책임이라고 적었다. 그 뒤로 사흘째, 그녀는 새벽마다 작업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집에서는 눈을 감으면 새벽 2시 7분이 떠올랐다.“사기면 이 시간에 불 켜고 있겠어요? 전기세 아깝게.”여자가 피식 웃었다.“그 말이 더 사기꾼 같은데요.”이경미. 서른여덟. 한주케어 소속 방문요양보호사. 방금 야간 근무를 마치고 첫차를 기다리다 불 켜진 간판을 봤다고 했다.“제가요, 말이 빨라요. 시간이 없어서요. 육 주 뒤에 결혼해요. 신랑은 택배기사고요. 그 사람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둘 다 말이 빨라요.”“드레스는 어떤 걸 원하세요?”“숨 쉬어지는 거요.”경미가 조끼 단추를 풀었다.“한복 대여점 갔더니 허리를 졸라매요. 제가 하루에 어르신 몸을 몇 번 일으키는지 알아요? 허리 졸리면 저 식장에서 쓰러져요. 그리고 주머니. 두 개요.”그녀가 목에 건 휴대전화 두 대를 들어 보였다.“하나는 회사 폰, 하나는 내 폰. 결혼식 날도 둘 다 울릴 거예요.”경미의 눈이 벽에 붙은 가격표로 갔다. 원단비, 부자재비, 재단 시간, 봉제 시간, 인건비. 줄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와. 인건비를 이렇게 써 붙인 데 처음 봐요.”“숨기면 누군가 그만큼 공짜로 일하게 되니까요.”“우리 회사는 제 시급을 저한테도 잘 안 알려 줘요. 월급날 맞혀 보는 재미가 있죠.”건조한 말투였다. 농담인지 아닌지 한 박자 늦게 알 수 있는 종류의.“예산은 얼마예요?”“준석 씨랑 둘이 모은 게 있어요. 드레스는 이백 넘으면 안 돼요. 넘으면 신혼여행이 제주도에서
“계약서 돌려드리러 왔어요.”다온은 봉투를 라운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세라가 펜 뚜껑을 열던 손을 멈췄다.월백 직원들은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건 십오 분 뒤 다온이 빈손으로 길을 건너오는 모습뿐이었다.다온은 월백 문을 열자마자 보리차부터 달라고 했다.“거기 물에서 소독약 냄새 나요.”남도은이 컵을 건네자 다온은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옮겼다.“합성으로 복원해 주겠다길래 물었어요. 그 향 왜 만들었는지 아냐고.”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다.‘알 필요 없어요. 팔리는 건 냄새지 사연이 아니니까.’“그래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못 팔아요, 내 건.”정 실장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박수를 치려던 손이었다.다온은 웃지 않았다.“통쾌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 말이 반은 맞아서 그래요. 팔리는 건 냄새 맞아요. 근데 나는 팔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서.”그녀가 이경을 봤다.“그리고 대표님한테도 할 말 있어요.”“네.”“수출 안 해요. 일본도 대만도. 국내에서, 제 이름으로만 내요. ‘DAON’ 하나만요.”다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덧붙였다.“공동 라벨도 빼 주세요. 월백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제 향이 남의 싸움 한복판에 들어갔어요. 미안해요.”미안할 사람은 다온이 아니었다.이경은 아팠다. 월백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줄 첫 협업이었다. 그 이름을 스스로 지워 달라는 말을 듣는 건 생각보다 아팠다.“빼겠습니다. 오늘 안에 라벨 파일 넘겨 드릴게요.”“드레스는요?”“드레스는 끝까지 만듭니다. 그건 다온 씨 옷이니까요.”결혼식은 원래 날짜 그대로 연남동 조향공방에서 열렸다. 로안의 연회장 대신 다온이 고른 장소였다.하객은 마흔 명. 증류기와 유리병이 늘어선 선반 사이에 접이식 의자가 놓였다. 신랑 남한결은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다.“여러분, 지금 이 공기 중 에탄올 농도가요, 아마 결혼식장 역사상 최고일 겁니다. 불은 피우지 마세요.”하객들이 웃었다.서약 순서에서 한결은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