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월백과 거래하면 한주 물량 전부 끊겠습니다.”
강태준의 공문은 원단상 열한 곳에 같은 시각 도착했다.
이경은 새벽부터 전화를 돌렸다. 삼십 년 거래한 업체조차 미안하다는 말 뒤에 주문을 취소했다. 한주 연회장 커튼과 객실 침구 계약은 월백 한 달 매출보다 컸다.
“먹고살아야 해서요, 대표님.”
“이해합니다. 이미 받은 계약금은 오늘 돌려주세요.”
화를 낸다고 천이 생기지는 않았다.
낡은 작업실 한가운데 남은 원단을 펼치자 온전한 롤은 다섯 개뿐이었다. 열두 신부의 드레스를 끝내기에는 절반도 모자랐다.
정 실장이 퇴직서를 들고 들어왔다.
“남겠다는 직원이 여섯 명, 한주로 돌아가겠다는 직원이 네 명입니다.”
“붙잡지 마세요.”
“혜란 이사장이 퇴직금 두 배를 제안했답니다.”
한 직원은 아이가 고등학생이었다. 다른 직원은 전세 대출 갱신을 앞두고 있었다. 이경은 네 사람을 불러 직접 말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받아야 할 급여와 작업 크레디트 목록은 오늘 드릴게요.”
막내 재단사가 울먹였다.
“대표님을 배신하는 것 같아서요.”
“생계를 지키는 건 배신이 아니에요.”
문이 닫힌 뒤 작업실은 더 넓고 조용해졌다. 떠난 자리까지 마음으로 메울 수는 없었다.
선우가 장비 임대 목록과 금융 제안서를 가져왔다.
“로안 명의로 필요한 원단을 전량 사들일 수 있습니다. 결제는 월백 수익이 생긴 뒤로 미루고요.”
“한도를 정하지 않은 지원은 못 받습니다.”
“오늘 납품을 못 하면 고객이 떠납니다.”
“그래서 더 정확히 받아야 해요.”
이경은 계산기를 두드렸다. 확정 이전 고객 네 명의 착수금, 남은 원단, 직원 여섯 명의 근무 가능 시간. 가능한 드레스는 세 벌이었다.
“한 벌은 한 주 미뤄야 합니다.”
그녀는 고객에게 직접 전화했다.
“원단 공급이 끊겼습니다. 비슷한 천으로 예정대로 진행하거나, 원래 원단을 구할 때까지 일주일 미룰 수 있습니다. 둘 다 싫으시면 위약금 없이 취소하겠습니다.”
첫 고객은 취소했다. 두 번째는 국내산 원단을 직접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세 번째는 식이 두 달 남았다며 일주일을 기다렸다.
한 통화가 끝날 때마다 예약표에 빈칸이 생겼다. 그러나 거짓 납기로 그 칸을 채우지는 않았다.
“이틀만 주시겠어요?”
이경은 선우에게 말했다.
“소규모 직조소를 직접 찾아보겠습니다. 로안은 장비 임차 보증만, 계약서에 적힌 한도 안에서 해 주세요.”
이경은 경기 외곽의 직조소 네 곳을 직접 돌았다. 첫 공장은 한주 납품 비중이 팔십 퍼센트라며 문도 열어 주지 않았다.
두 번째 공장은 최소 주문량이 월백이 필요한 양의 열 배였다.
“나머지는 재고가 되겠네요.”
“유명해졌다면서 이 정도도 못 팝니까?”
공장장은 비웃었지만 이경은 무리한 주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팔리지 않은 원단값을 직원 급여로 갚게 될 것이다.
세 번째 작은 공방에서는 색이 조금씩 다른 자투리 롤을 보여 줬다. 대형 업체가 균일하지 않다며 반품한 천이었다.
이경은 흠을 숨기지 않고 샘플을 받아 고객에게 사진과 가격을 보냈다.
“색 차이가 보일 수 있습니다. 대신 층마다 다른 흰색을 의도적으로 배치할 수 있어요.”
한 고객은 거절했고 다른 고객은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결정되지 않은 원단을 성공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경은 소량 구매가 가능한 업체, 납기, 선입금 비율을 표로 만들었다. 한주 한 곳에 기대던 방식에서 벗어나려면 바느질보다 먼저 공급망을 배워야 했다.
“차량은 필요합니까?”
“임차 비용표에 넣을 수 있다면요.”
선우는 무료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금액을 적었다.
오후에는 한주가 신청한 영업금지 심문이 열렸다. 태준 측은 혼인 중 만들어진 디자인이 공동재산이라고 주장했다.
이경은 어머니 서명희 명의의 상표 등록증과 혼인 전 원도안 목록을 냈다. 다만 완제품 일부는 사실관계를 더 보겠다며 임시 판매 제한이 걸렸다.
완전한 승리가 아니었다. 새 매장 개장은 열흘 밀렸고 고객 세 명이 실제로 떠났다.
법원을 나오자 태준이 계단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주로 돌아오면 원단도 계좌도 오늘 풀어 줄게.”
“내가 못 살게 막은 다음 살려 주겠다는 거야?”
“네 실력만으로 회사가 굴러가는 건 아니잖아.”
“그걸 이제 배우는 중이야. 당신한테 돌아가는 것 빼고.”
이경은 그를 지나쳤다.
작업실로 돌아오니 정 실장이 대형 화면을 켜 놓고 있었다. 한주호텔의 긴급 발표였다.
백세라가 무대 중앙에 서서 은빛 드레스의 덮개를 벗겼다.
“제 첫 작품, ‘기울어진 달’을 공개합니다.”
이경의 손에서 원단 견본이 떨어졌다.
그것은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어머니의 마지막 도안이었다.
“하객석 맨 앞줄, 바퀴 들어갈 자리 비워 주세요.”평일 아침 여섯 시 사십 분. 구민회관 이 층 강당.경미가 결혼식 시작 이십 분 전에 그 말부터 했다.강당 문이 열릴 때마다 근무복 차림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야간 근무를 막 끝낸 요양보호사들이었다. 회색 조끼, 남색 점퍼, 병원 이름이 박힌 셔츠. 그 위에 하나같이 하얀 코사지를 달고 있었다.“코사지는 신부가 돌렸어요. 근무복 벗고 올 시간이 없을 거라고.”정 실장이 이경 귀에 속삭였다.신랑 오준석은 여섯 시 오십오 분에 뛰어 들어왔다. 택배 조끼를 벗으며.“한 건만 하고 온다는 게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요. 십오 층.”하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경미가 신랑을 위아래로 훑었다.“땀 냄새 나. 식 끝나고 혼날 줄 알아.”“알지.”경미의 드레스는 아이보리 면 혼방이었다. 허리를 조이는 대신 등판에 주름을 잡아 숨 쉴 때마다 천이 따라 늘었다. 치마 양옆으로 주머니 두 개. 입구는 십오 도 기울어 있었다.오른쪽 주머니는 열린 주머니였다. 개인폰이 들어갔다.왼쪽 주머니에는 지퍼가 달려 있었다. 안쪽에 작은 글씨로 수가 놓여 있었다.‘꺼 두는 주머니.’경미가 회색 업무폰을 꺼냈다.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화면이 꺼졌다. 그녀는 그것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올렸다.“육 년 만에 처음 꺼 봐요.”그녀가 주머니를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근데 이거 지퍼 소리 좋네요. 찌익. 퇴근 소리 같아.”지퍼 손잡이는 이경이 일부러 무거운 놋쇠로 골랐다. 장갑 낀 손으로도, 피곤한 새벽 손으로도 한 번에 잡히게.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열리지 않게.일곱 시 정각, 강당 문이 다시 열렸다.휠체어 한 대가 들어왔다. 박 할머니였다. 딸이 휠체어를 밀었다. 할머니는 꽃무늬 블라우스에 브로치까지 달고 있었다.경미가 입을 막았다.할머니는 맨 앞줄 비워 둔 자리에 멈췄다. 경미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이쁘네.”그 한마디였다.할머니는 하객이었다. 담당 보호사를 되찾으러 온 보호자
“엄마, 오늘은 눈이 안 빨개.”봄이 식탁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 이경의 얼굴을 들여다봤다.새벽 여섯 시 반. 이경은 집 부엌에서 달걀을 부치고 있었다. 노른자가 터지지 않게 뒤집는 데 세 번 실패했다.“엄마 계란 못 하네.”“엄마는 실은 계란보다 천을 잘 뒤집어.”“그럼 계란에 시접을 넣어.”봄이 진지하게 말했다. 작업실에서 주워들은 단어를 아무 데나 붙이는 게 요즘 봄의 놀이였다.어젯밤 월백에서는 남도은과 직원 둘이 처음으로 수당을 받는 야간 교대를 섰다. 경미의 새벽 피팅도 그 조가 맡았다. 이경은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결과 보고 문자를 읽었다.‘피팅 완료. 주머니 각도 OK. 신부님이 대표님 안부 물음. 대표님 자고 있다고 함. 신부님이 박수 침.’봄은 터진 노른자를 밥에 비비며 말했다.“엄마, 오늘은 나 학교 갈 때까지 있어?”“응. 오늘은 교문까지 갈게.”“그럼 상담 선생님한테 자랑해야지. 엄마가 계란 했다고.”“터진 계란이라고는 말하지 마.”“말할 건데.”이경은 웃으며 봄의 머리를 묶었다. 고무줄이 한 번 튕겨 나갔다. 봄이 자기가 하겠다고 손을 뻗었다.그날 오전, 경미가 노조 조끼를 입은 여자 둘과 함께 왔다.“요양보호사 노조 분들이에요. 저 직접 노동청에 진정 넣을 거예요. 근무표 보복으로요.”경미가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월백한테 부탁할 건 하나예요. 제가 동의할 테니까, 업무폰으로 문자 보낸 날짜랑 시각 기록만 주세요. 그 이상은 하지 마세요. 증언도, 기자회견도, 본부 전화도.”“알겠습니다.”이경은 3인 승인 절차를 거쳐 문자 발송 기록을 뽑았다. 경미의 서면 동의서를 첨부했고, 다른 고객 정보는 한 줄도 섞이지 않았는지 정 실장과 도은이 각각 확인했다.노조 측 활동가가 기록을 넘겨보며 말했다.“발송 다음 날마다 근무표가 바뀌었네요. 이 정도면 진정 요건은 충분합니다. 다만 결론까지는 몇 달 걸려요.”“몇 달이요.”경미가 따라 말했다. 결혼식은 삼 주 뒤였다.이경은 다른 서류를 하나 더
“업무폰으로 문자 보낸 건 제 잘못입니다.”이경은 경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처음 적어 주신 번호를 그대로 썼어요. 어느 번호인지, 누가 그 폰을 관리하는지 묻지 않았어요. 그 문자 한 통 한 통이 회사에 일정표를 넘겨준 거예요.”경미가 손을 저었다.“제가 그 번호를 적었잖아요.”“고객이 번호를 적는 건 실수가 아니에요. 그 번호로 뭘 보낼지 정하는 건 우리 일이었어요.”사과 뒤 이경은 곧바로 움직였다. 한주케어 운영본부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찾았고, 근무표 변경 사유를 서면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오후에는 직접 본부에 찾아갈 생각이었다.경미가 그 사실을 안 건 저녁이었다.“대표님, 본부에 전화하셨어요?”“사유를 요구했어요. 문서로 받아야 나중에…….”“하지 마세요.”경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빠르던 말이 처음으로 끊겨 나왔다.“대표님이 나서면 저 진짜 잘려요. 대표님은 사장님이잖아요. 저는 근무표 한 장에 목숨 거는 사람이고요. 대표님이 본부에 전화한 거, 벌써 팀장이 알아요. 오늘 저한테 ‘월백이랑 무슨 사이냐’고 물었어요.”이경은 휴대전화를 쥔 채 굳었다.구하려던 손이 또 한 번 경미의 목줄을 당긴 셈이었다. 경미의 직장은 이경이 들어가 문을 두드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문을 두드린 대가는 경미가 다음 날 아침 근무표로 받았다.“……찾아가지 않을게요.”그날 밤 열한 시. 이경은 재단대에 엎드려 있었다. 새벽 한 시 피팅 전에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그대로 잠들었다.누군가 어깨를 흔들었다.“대표님. 대표님, 여기서 주무시면 목 돌아가요.”도은이었다. 퇴근했어야 할 시간이었다.“도은 씨가 왜 여기…….”“정 실장님이 불렀어요. 저희 다 있어요.”재단실 문가에 직원 넷이 서 있었다. 맨 앞에 정 실장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대표님, 하나만 물을게요.”“……네.”“혼자 밤새우는 게 원칙 지키는 거예요?”이경이 입을 열기도 전에 정 실장이 말을 이었다.“직원 야근 금지라면서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혼자 야근한
“또 바뀌었어요. 이번 주만 세 번째.”경미가 업무폰을 흔들며 들어왔다. 화요일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월요일엔 화목 새벽이라더니, 수요일엔 수금 새벽이래요. 오늘 아침엔 또 화목이래요. 제가 무슨 택배 상자예요?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게.”“그럼 저도 옮기면 되죠.”이경은 바로 달력을 열었다. 근무표가 바뀔 때마다 피팅 시간을 옮겼다. 새벽 다섯 시에서 여섯 시로, 다시 새벽 한 시로.경미가 화면을 들여다봤다.“대표님, 새벽 한 시에 피팅하고 다섯 시에 또 피팅하면 언제 주무세요?”“세 시간이면 충분해요.”“그 말 하는 사람치고 충분한 사람 못 봤어요. 제가 그런 분들 기저귀도 갈아 드려요, 나중에.”농담이었지만 경미는 웃지 않았다.새벽 다섯 시 반, 문밖에서 트럭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택배 조끼를 입은 남자가 캔커피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오준석이었다. 첫 배송 터미널이 근처라 했다.“신부님 피팅 구경은 반칙이라길래, 커피만 놓고 갑니다.”그는 커피를 재단대 끝에 내려놓고 정말로 돌아섰다. 문 앞에서 한 번 뒤돌아봤다.“대표님. 이 사람 숨 쉬는 옷, 꼭 부탁드려요. 이 사람 숨 참는 거 선수예요.”경미가 커튼 너머에서 소리쳤다.“빨리 가! 늦으면 또 별점 테러 당해!”그 주 이경은 매일 세 시간씩 잤다. 봄의 밤은 등록해 둔 야간 돌봄 선생님이 지켰다. 봄이 잠든 뒤 나왔다가 봄이 깨기 전에 돌아가는 날들이었다.봄은 아침마다 엄마 눈이 왜 토끼 같냐고 물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묻지 않고, 자기 눈을 손가락으로 당겨 빨간 척을 했다. 같이 토끼가 되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이경은 웃었지만, 그 웃음 끝이 조금 아팠다.목요일 오전, 가봉 치수표가 도은에게 넘어갔다. 월백의 이중 치수 확인 절차였다. 대표가 잰 치수도 예외는 없었다.도은이 표를 들고 재단실로 왔다. 조심스러운 얼굴이었다.“대표님, 이 숫자 두 번 다르게 적으셨어요.”진동 둘레. 앞장에는 38, 뒷장에는 83.숫자를 뒤집어 적은 것이었다.
“이 시간에 문 연 웨딩숍 처음 봐요. 사기 아니죠?”새벽 네 시. 월백 유리문 앞에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회색 근무 조끼에 운동화, 어깨에는 커다란 천 가방. 목에 건 끈에는 휴대전화가 두 대 매달려 있었다.이경은 재단대에서 고개를 들었다. 설치 요청서를 본 뒤로 잠이 오지 않았다.요청서는 그날 오후 진술서와 함께 수사기관에 냈다. 서명은 내 손이 했지만 무엇이 깔리는지는 몰랐다고, 그리고 몰랐다는 것도 책임이라고 적었다. 그 뒤로 사흘째, 그녀는 새벽마다 작업실에 나와 앉아 있었다. 집에서는 눈을 감으면 새벽 2시 7분이 떠올랐다.“사기면 이 시간에 불 켜고 있겠어요? 전기세 아깝게.”여자가 피식 웃었다.“그 말이 더 사기꾼 같은데요.”이경미. 서른여덟. 한주케어 소속 방문요양보호사. 방금 야간 근무를 마치고 첫차를 기다리다 불 켜진 간판을 봤다고 했다.“제가요, 말이 빨라요. 시간이 없어서요. 육 주 뒤에 결혼해요. 신랑은 택배기사고요. 그 사람도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둘 다 말이 빨라요.”“드레스는 어떤 걸 원하세요?”“숨 쉬어지는 거요.”경미가 조끼 단추를 풀었다.“한복 대여점 갔더니 허리를 졸라매요. 제가 하루에 어르신 몸을 몇 번 일으키는지 알아요? 허리 졸리면 저 식장에서 쓰러져요. 그리고 주머니. 두 개요.”그녀가 목에 건 휴대전화 두 대를 들어 보였다.“하나는 회사 폰, 하나는 내 폰. 결혼식 날도 둘 다 울릴 거예요.”경미의 눈이 벽에 붙은 가격표로 갔다. 원단비, 부자재비, 재단 시간, 봉제 시간, 인건비. 줄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다.“와. 인건비를 이렇게 써 붙인 데 처음 봐요.”“숨기면 누군가 그만큼 공짜로 일하게 되니까요.”“우리 회사는 제 시급을 저한테도 잘 안 알려 줘요. 월급날 맞혀 보는 재미가 있죠.”건조한 말투였다. 농담인지 아닌지 한 박자 늦게 알 수 있는 종류의.“예산은 얼마예요?”“준석 씨랑 둘이 모은 게 있어요. 드레스는 이백 넘으면 안 돼요. 넘으면 신혼여행이 제주도에서
“계약서 돌려드리러 왔어요.”다온은 봉투를 라운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세라가 펜 뚜껑을 열던 손을 멈췄다.월백 직원들은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본 건 십오 분 뒤 다온이 빈손으로 길을 건너오는 모습뿐이었다.다온은 월백 문을 열자마자 보리차부터 달라고 했다.“거기 물에서 소독약 냄새 나요.”남도은이 컵을 건네자 다온은 단숨에 비웠다. 그리고 안에서 있었던 일을 짧게 옮겼다.“합성으로 복원해 주겠다길래 물었어요. 그 향 왜 만들었는지 아냐고.”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했다.‘알 필요 없어요. 팔리는 건 냄새지 사연이 아니니까.’“그래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못 팔아요, 내 건.”정 실장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박수를 치려던 손이었다.다온은 웃지 않았다.“통쾌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 사람 말이 반은 맞아서 그래요. 팔리는 건 냄새 맞아요. 근데 나는 팔려고만 만든 게 아니라서.”그녀가 이경을 봤다.“그리고 대표님한테도 할 말 있어요.”“네.”“수출 안 해요. 일본도 대만도. 국내에서, 제 이름으로만 내요. ‘DAON’ 하나만요.”다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덧붙였다.“공동 라벨도 빼 주세요. 월백 이름이 붙은 순간부터 제 향이 남의 싸움 한복판에 들어갔어요. 미안해요.”미안할 사람은 다온이 아니었다.이경은 아팠다. 월백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줄 첫 협업이었다. 그 이름을 스스로 지워 달라는 말을 듣는 건 생각보다 아팠다.“빼겠습니다. 오늘 안에 라벨 파일 넘겨 드릴게요.”“드레스는요?”“드레스는 끝까지 만듭니다. 그건 다온 씨 옷이니까요.”결혼식은 원래 날짜 그대로 연남동 조향공방에서 열렸다. 로안의 연회장 대신 다온이 고른 장소였다.하객은 마흔 명. 증류기와 유리병이 늘어선 선반 사이에 접이식 의자가 놓였다. 신랑 남한결은 긴장하면 말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다.“여러분, 지금 이 공기 중 에탄올 농도가요, 아마 결혼식장 역사상 최고일 겁니다. 불은 피우지 마세요.”하객들이 웃었다.서약 순서에서 한결은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