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싫어, 안 해. 귀찮아.”
J의 정식 제안을 듣기도 전에 정하는 J가 전화를 받자마자 거절 의사부터 밝혔다. 그러나 정하의 그런 반응을 예상한 건지, 전혀 당황하지 않은 J였다. “이번에 블루도 앨범에 참여하기로 했는데?” 순간 ‘블루’라는 이름이 정하의 귓가에 꽂혔다. 볼멘소리를 하려던 기색을 감추고 잠자코 J의 말을 들었다. “너 블루 한 번도 본 적 없다며. 심지어 너 블루가 쓴 가사라면 네가 평소에 극혐하는 아이돌 노래라도 다 찾아 듣잖아.” ‘블루’ 두 글자에 정하의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귀찮기만 했던 J의 프로듀싱 제안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런 정하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J가 먼저 승부수를 던졌다. “싫으면 말고. 너 말고도 나랑 작업하고 싶다는 프로듀서 널렸다. 끊어~” “잠깐, 잠깐만 형! 할게, 나 할게!”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오가고, 만족한 J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하는 홈 화면이 떠 있는 휴대전화를 한참이나 응시했다. 현실이 맞나 싶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야” 아팠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정하는 허벅지까지 꼬집었다. 역시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새로운 바람이 부는 느낌이었다. 마치 미니멀한 어쿠스틱 트랙 같던 일상에 처음으로 시티팝이 스며든 기분이었다. - 작업 첫날. 애당초 약속된 시작 시간은 늦은 저녁이었다. 오후 8시 20분. 평소였다면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왔을 정하가 한참이나 먼저 도착했다. 그런 그를 보며 J는 ‘역시 블루의 효과는 대단하구나’라며 감탄했다. “블루 씨는?” “아직 40분이나 남았다, 임마.” 블루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렜고, 초조했다. 작업실 소파에 앉아있는 내내 정하는 다리를 떨기도 했고 손톱을 물어뜯기도 했다. 그런 정하를 보며 오히려 J가 더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가만히 좀 있어, 새끼야. 원래 점잖은 놈이 왜 이렇게 난리야.”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어, 왔니, 블루야!” 작업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J가 그녀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어?” “어? 플랫..님?” 정하를 ‘플랫’이라고 부르는 여자의 눈이 커졌다. 긴 파마머리에, 갈색 정장 원피스 차림이 익숙했다. 여자가 J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꼭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라’는 것 같았다. “뭐야, 둘이 알아?” J가 정하에게 물었다. 정하는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듯이 그저 J와 여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피치님이 왜 여기..” “아, 안녕하세요. 이번 작업 맡아주시기로 한 프로듀서님이신가 봐요. ‘블루’라고 합니다.” 정하보다 조금 먼저 정신을 차린 여자가 본인을 ‘블루’라고 소개하며 명함을 건넸다. 명함에는 블루라는 이름과 함께 그녀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피치님이 블루..님?” “반가워요 프로듀서님.” 블루가 그를 보며 활짝 웃었다. 정하의 가슴 속 플레이리스트가 재생되었다. “칵테일 사랑.. 마로니에..” “네?” 속으로만 되뇌이던 노래 제목을 뱉어버렸다. 뜬금없는 정하의 발언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웃음을 터뜨리는 블루와 J였다. 블루의 미소는 정하의 심장을 또다시 요동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 J가 정하를 알고 지낸 십여 년 동안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깔깔거리며 웃던 J가 한순간 입을 다물며 표정을 굳혔다. “얘 뭐라냐. 인사도 했으면 회의 시작하자. 일단 오늘은 간단하게 레퍼런스 느낌으로?” 한 시간, 두 시간.. 가벼운 레퍼런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진지한 회의가 이어졌다. 설렘에 찼던 정하도, 평소 장난기 넘치는 J마저도. 웃음기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형 저번 타이틀곡이 정통 발라드보단 R&B에 가까웠잖아. 그러니까 이번 앨범은 좀 그쪽으로 가는 게 어때? 그게 형 깔이랑 제일 맞기도 하고.” “최근에 J님 예능 활동이 많아지셨잖아요. 그러면 차라리 정통 발라드 결보다 미니멀 아님 팝 발라드로 가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어요.”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이제 정통 발라드 좀 지겹기도 하고.” 한참 회의가 진행되던 때, 블루가 들고 온 작업 노트가 J의 눈에 들어왔다. J가 기지개를 피며 물었다. “작업노트 또 바뀌었네. 요즘도 아무데서나 아이디어 떠오르면 노트부터 펴? 아직도 전봇대 같은데에 머리 박고 다니는 거 아니지?” 무거웠던 작업실 분위기가 J의 농담에 조금 풀어졌다. 블루도, 정하도 웃었다. 정하는 블루에게서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전히 웃는 모습이 예뻤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벅참이 올라왔다. ‘리버브’에서 본 것과 다른 모습이었다. “오늘은 이만하고, 술이나 마시러 가죠. 첫날이니까 내가 쏠게.” “엇, 그럼 혹시 ‘블루문’ 어때요? 다들 모르시려나.. 근처이긴 한데..” ‘블루문’이란 단어에 블루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블루문 아세요? 저도 거기 좋아하는데.” ‘좋아한다’는 한마디에 괜히 정하의 볼이 빨개졌다. J는 흥미로운 듯 둘을 지켜보았다. 못 볼 꼴을 보면서도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 “어서오세요” 여전히 인자하신 사장님이 셋을 반겼다. 그의 왼쪽 가슴팍엔 여전히 ‘제이 Jay’라는 이름이 빛나고 있었다. 정하와 블루가 사장님께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인사를 했다. J는 블루문의 분위기에 매료된 것처럼 입을 벌리고 주위를 훑었다. “어, 왔어요?” 정하와 블루를 반기는 사장님의 눈빛이 평소와는 달랐다. 마치 두 사람이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 J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가고, 정하와 블루가 테이블에 앉았다. 사장님이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이야기했다. “두 단골이 같이 오니 더 반갑네.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였구나. 근데 왜 저번에 모르는 척 했어요?” “네?” 사장님의 물음에 정하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오늘따라 많이 지친 느낌이시네요. 손님도 그렇고, 저쪽 테이블에 앉아계신 여성분도 그렇고.“ ”아,“ 정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사장님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LP판의 턴테이블 바늘이 돌아가고, 앰프를 통해 《짐노페디 1번》을 흘려 나왔다. “오늘은 단골 두 분이 와주셨으니까 특별한 칵테일을 만들어 드리죠. 괜찮으실까요?” 두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한 칵테일이라니 기대가 됐다. 잠시 뒤 웃으며 진열대 뒤쪽으로 들어갔던 사장님이 나왔다. 보라색 꽃이 떠다니는 푸른색 칵테일 두 잔이 나왔다. ‘나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간다 미안, 나중에 진짜로 맛있는 거 쏠게. 오늘 보라씨랑 재밌게 놀다 들어가라’ 하는 문자가 왔지만 정하는 휴대전화에서 울리는 진동음 따윈 신경쓰지 않았다.“‘문위스퍼’입니다. 조용한 감정을 깨우는 칵테일이죠. 어쩌면 조금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네요”8월 중순. 길고도 숨 가빴던 작업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 마지막까지 수십 번의 수정과 녹음을 반복한 끝에, 비로소 하나의 앨범이 완성됐다. 모두가 지칠 만큼 긴 시간이었지만 누구 하나 포기하지 않았다.J의 타이틀곡 ‘문플라워’는 예상보다 훨씬 큰 사랑을 받았다. 공개직후 각종 음원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더니 결국 3주 연속 1위를 기록했다. 방송국과 잡지사는 물론, 라디오와 유튜브까지 인터뷰 요청을 보내왔고, J의 스케줄 표는 빈칸을 찾기 어려울 만큼 빼곡해졌다.한편 정하와 보라는 조금씩 더 가까워졌다. 예전처럼 괜한 오해로 마음을 숨기지도 않았다. 기쁜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서로를 찾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기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함께 걷는일도, 함께 밥을 먹는 것도 어느새 특별한 약속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뭔가 허전하지 않아요, 오빠?”이상한 건 블루문에 대한 기억을 정하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라는 블루문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잊은 듯 행동했다.손을 잡고 걸어가던 정하와 보라가 어디엔가 멈춰섰다.“왜요 오빠?”정하는 블루문이 있던 자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간판이 걸려있었을 법한 자리에는 빛바랜 별만 남아 있었고, 창문 역시 오래전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처음부터 그런 공간이었던 것처럼 블루문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그냥, 익숙한 느낌이 들어서..”정하는 말을 흐렸다.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보라가 정하에게 물었다.“J님이 이따 조촐하게라도 1위 기념 파티하자는데, 갈거죠?”“음, 가야지.”보라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단체방에 아까부터 계속 사진 올라오고 있어요. J님, 벌써 케이크까지 예약했다는데요?”“형 답네.”정하의 대답에 보라가 싱긋 웃었다.“그런데요, 오빠”“응?”“문플라워 있잖아요.”정하의 시선이 보라에게 향했다.“노..래 말하는 거지?”“네. 이상하게 제가 직접 쓴 가사인데도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가 잘 기억이 안 나요.
급히 집으로 돌아온 정하와 보라는 문플라워부터 찾았다. 문플라워가 시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시들게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제이의 반응이 가장 신경 쓰였다.“다행히 우리 꽃은 시들진 않았네.”정하가 창틀에 올려놓은 문플라워를 보며 안심했다.“그런데 블루문의 문플라워는 왜 다 시들었을까요?”“일단 가봐야지.”둘은 블루문으로 향했다.-“사장님 저희 왔어요.”“아, 오셨어요!”정하와 보라가 블루문 안으로 들어왔다. 제이는 시든 꽃가지들을 정리 중이었다.“저희가 가지고 있는 문플라워는 문제가 없었어요. 왜 이곳의 꽃만 시들게 된 걸까요?”“아무래도 이곳의 시간이 다해가는 모양입니다. 블루문의 영업도 곧 끝을 맞이하니, 문플라워도 함께 생을 마친 것이 아닐까.. 저도 그렇게 짐작만 하고 있습니다.”“그렇군요..”“사실 오늘 두 분을 뵙고 싶었던 이유는, 두 분이 거울 속에서 무엇을 봤는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제이의 물음에 정하와 보라는 입을 다물었다. 제이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어디부터 궁금한 걸까. 알 수가 없었다.“음악 작업은 다행히 잘되고 있는 것 같더군요.”“그걸 어떻게..”“꽃과 거울은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거든요.”“두 분이 무엇을 보셨는지는 몰라도,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제이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잔 하나를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늘 그래왔듯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잔 표면을 스치는 부드러운 천의 소리만이 조용한 블루문 안을 채웠다.보라는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마지막을 암시하듯 공간은 무언가로 차 있으면서도 공허함을 감추지 못했다.“꽃들도.. 마지막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요?”보라의 작은 중얼거림에 제이가 방긋 웃었다.“사람은 늘 끝을 두려워하지만, 모든 끝이 불행한 것은 아닙니다.”그는 시든 문플라워 하나를 집어 들었다.“꽃은 필 때를 알고 질 때를 압니다. 억지로 붙잡는다고 다시 피어나는 법은
진행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됐다.“지금 그렇게 부르면 사비랑 벌스랑 차이가 별로 없어요. 다시.”“발음이 계속 씹히네. 자음이 좀 더 들렸으면 좋겠는데.”정하의 디렉팅은 여전히 정확했고,“야, 형 목 나가겠다. 이 정도 했으면 좀 봐줘.”J의 엄살은 심해졌다.-“지금도 충분히 좋은데요?”보라가 조심스럽게 거들자 정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좋은 거랑 완벽한 결과물인 건 달라요.”“들었지 보라야? 저 새끼는 눈물도 없는 새끼야.”J가 마이크 너머로 투덜거리자 정하가 피식 웃었다.“편의 봐주다가 망하는 것보다 낫지 않아? 형 대중들의 무관심 한 번 받아볼래?”“..한다, 해! 말을 저렇게 재수 없게 해요.”녹음실 안에는 웃음이 번졌다. 며칠 전의 무거운 분위기가 무색할 만큼 편안한 공기가 흘렀다.그때 정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을 보자 정하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어요. 문플라워.”제이의 미소가 아주 천천히 번졌다.“예상보다 빨리 오셨네요. 이번에는 시들지 않았나 봐요. 다행입니다.”제이의 안도 섞인 말에 정하와 보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문플라워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제이는 그런 둘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이 태연하게 위스키 글라스의 물기를 닦으며 물었다.“안 그래도 인터넷에 검색해봤어요. 아무 정보도 안 나오던데요.”보라가 대답했다. 보라는 이미 처음 문플라워를 받았을 때부터 그것이 그냥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제이가 작게 웃었다.“당연합니다. 인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꽃이니까요.”“....”“그래서 꽃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겁니다.”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제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하지만 블루문에서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의미로 불려왔죠.”“그게..
집 안은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은은한 조명이 거실을 비추고 있었고, 식탁 위에는 보라가 마시다 만 차 한 잔이 아직 김을 내뿜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경찰서에서 마주했던 것과는 다른 공기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가벼워져야 할 마음은 쉽게 가벼워지지 않았다. 가사를 훔친 범인이자 오랜 시간 보라를 괴롭힌 스토커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무슨 반응을 할까.아무것도 모르는 보라가 정하를 반겼다. 조금 전에 J와 함께 민석을 경찰서에 넘기고 온 정하가 애써 웃으며 보라 옆에 앉았다.“무슨 일 있어요? 표정이 안 좋은데..”보라의 물음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잡혔어, 가사 훔친 놈. 그리고, 너를 여태 괴롭힌 스토커까지.”“....”꽤나 놀랄만한 이야기였지만 보라는 의외로 담담했다.“그래요?”그녀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마치 알고 있었던 것처럼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알고 있었어?”“대충.. 제가 대학 다닐 때 잃어버린 오르골을 민석 씨가 가지고 있더라고요.”“근데 왜 말 안 했어?”“확실하지 않으니까..”
정하가 긴장이 되는 듯 숨을 골랐다. 미친 짓이라고도 생각했다. 꽃을 들고 거울 앞에 서면 진실을 알게 된다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세상에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일도 많으니까..”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문플라워를 든 채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디스토션님이 정말 보라에게 위험한 사람일까?”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이었다.꽃잎이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꽃잎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주변 공기가 무거워졌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정하는 선뜻 거울을 바라보지 못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만약 제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부터 보게 될 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보라가 감춰왔을 진실일지도 몰랐다.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천천히 시선을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순간적으로 거울을 바라본 정하는 믿을 수 없었다.거울 속에는 불안에 떨며 자취방으로 들어가는 보라의 모습이 비쳤다. 익숙한 대학가 골목이었다. 우편함에 꽂힌 편지를 발견한 보라는 잔뜩 굳은 얼굴로 주변을 몇 번이고 살핀 뒤 조심스레 편지를 꺼냈다.정하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보라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편지 한 장을 꺼내는 짧은 순간에도 주변을 몇번이고 살피던 모습이 가슴을 짓눌렀다.장면이 바뀌었다.이번에는 ‘타임캡슐’이라고 적힌 편지를 들고 경찰서를 찾은 보라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건네는 장면이었다.경찰은 무언가를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보라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또다시 장면이 바뀌었다.결국 학교를 떠나 본가로 돌아가는 보라. 작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어가는 뒷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그런데 세 장면에는 모두 보라 말고 또 다른 존재가 있었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검은 그림자. 모든 장면이 테이프를 거꾸로 되감
“안녕하세요, 우정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은 자기소개 후 박수가 이어졌다. 정하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하 씨, 우리는 여기서 본명 안 써요.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잔 의미에서? 그러니까 우리 플랫님 이름은 잊어줄게요? 콜?” “아, 네!” 낯선 분위기 속 누군가 정하에게 설명했다. “그럼, 우리 이름도 알아야겠죠? 전 디스토션이에요.” “저는 4분의 4박자.” “피아노맨입니다.” 모두가 웃으며 본인의 닉네임을 소개했다. 디스토션, 4분의 4박자, 피아노맨.. 각각
“쌤, 내일 수업 없죠?” “네. 확실히 학교 시험 기간이라 그런가, 토요일 수업이 다 캔슬이네요.” “좋겠다, 그럼 정하 쌤 내일 쉬겠네.” 부러움이 섞인 원장선생님의 말에 정하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인사를 하는 정하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작은 배낭을 멘 그가 학원을 나왔다. 학원 문 위쪽엔 ‘리버브 음악학원’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열댓 발자국을 걸으니 엘리베이터 앞이었다. 그제서야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 “안녕하세요 사장님” 정하가 익숙한 듯 바 안쪽 끄트머
셰이커에진 30ml, 블루큐라소 15ml, 엘더플라워 시럽 20ml, 레몬즙 10ml. 라벤더 시럽 5ml, 얼음을 넣고 가볍게 흔든다.미리 칠링해 둔 마티니 글라스에 탄산수 50ml를 천천히 부어 층이 퍼지게 만든다.월진분(月塵粉)을 소량 넣어준다문 플라워로 마무리 “‘문위스퍼’입니다. 조용한 감정을 깨우는 칵테일이죠. 어쩌면 조금 시끄러워질지도 모르겠네요.”크레센도 : 설렘의 울림 “달의 속삭임이라.. 무슨 뜻이죠?” “글쎄요, 받아들이기 나름이죠. 사랑 혹은 저주일수도요.” 칵테일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마치
6월의 어느 목요일 밤. 70 lux(룩스, 조명의 단위) 정도의 아주 어둡지 않은 조명이 번지는 곳. 바 안쪽엔 턴테이블 두 개와 그 위에서 돌아가는 LP가 보였다. 스피커를 통해 빈티지한 질감의 클래식이 잔잔하게 공간을 물들였다. 낮게 깔리는 첼로 선율 위로 피아노 음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중간중간 노이즈가 들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공간 특유의 결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잘 다려진 흰색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은 남성. 그의 흰 머리카락은 헤어스프레이로 잘 고정되어 있었다. “문 룰러바이 (Moon Lullab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