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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아쉬워?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4 05:57:14
“그럼 적어도 들키는 방식도 네가 정해.”

한유라의 말은 회의실을 나온 뒤에도 윤서하를 오래 따라왔다. 선택도 자기 몫이고, 후회도 자기 몫이라 큰소리쳤지만 막상 청소 카트를 밀고 평소 동선으로 돌아오자 그 말은 선언보다 경고에 가까웠다.

사진 한 장, 녹음 한 번이면 자신이 먼저 근무표에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차이준을 안 만나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이 제일 문제였다.

며칠 뒤 직원 휴게실에서 도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점심 교대 시간이 끝나가던 때라 기사들은 차량 열쇠를 반납하고 있었고, 청소팀은 저녁 근무표를 받아 하나씩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서하는 자판기 커피 뚜껑을 누르며 도현 맞은편에 앉았다.

“나 낮으로 옮겨볼까 해.”

“낮?”

도현이 접어둔 신청서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야간 호출과 임시 배차가 많은 지금보다 주간 고정 근무 쪽이 급여와 일정이 안정적이었다. 최근 이준 전담 운전을 맡으며 평가도 나쁘지 않아 이번 인사 때 신청해볼 수 있다는 설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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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선택해서 나갑니다.”프린터에서 나온 사직서를 집어 든 윤서하는 사유란을 다시 읽지 않았다. 문장을 바꿀 생각도 없었다. 직원 단체방의 사진이 지워지기 전에 이미 선우재를 떠나기로 했고, 독립 일을 시작한 것도 자신의 결정이었다. 이제 소문이 터졌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내쫓기는 모양으로 끝낼 이유가 없었다.서하는 인사 담당 사무실로 걸어갔다.복도 곳곳에서 대화가 끊겼다. 휴대전화를 보던 직원이 화면을 엎었고, 다른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괜히 파일을 넘겼다. 어제까지는 같은 야간조였던 사람들이 오늘은 자신을 구경거리처럼 피했다. 화가 났지만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다.“사직서 제출하러 왔습니다.”담당자는 난처한 얼굴로 종이를 받았다.“윤서하 씨, 지금은 위에서도 상황 확인 중이라 조금 기다리시면—”“그래서 먼저 내는 거예요.”“해고 결정 난 건 아닙니다.”“알아요.”서하는 사직서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결정 나기 전에 제가 먼저 나갑니다. 원래 그만두기로 했고요.”담당자가 입을 다물었다. 서하는 퇴사 희망일과 남은 인수인계 일정을 확인한 뒤 사무실을 나왔다.그런데 본관 계단을 내려가기도 전에 한유라에게 전화가 왔다.“가족 쪽에서 이준 불렀어.”서하의 걸음이 멎었다.“왜요.”“사진 때문에. 내부 단체방에서 끝내려면 사실관계부터 확인하겠대.”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이준의 목소리가 들렸다.“제가 먼저 접근했습니다.”서하는 그대로 돌아섰다.회의실에는 가족 측 실무자와 법무 담당, 홍보 책임자가 앉아 있었다. 이준은 긴 테이블 끝에 혼자 서 있었다. 누군가가 서하를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사직서를 접어 든 채 안으로 들어갔다.“뭘 먼저 했는데.”이준이 돌아봤다.“윤서하.”“묻잖아. 뭘 먼저 했는데.”가족 측 실무자가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내부 확인 중입니다. 윤서하 씨는 밖에서—”“제 얘기잖아요.”서하는 빈 의자에도 앉지 않았다.테이블 위에는 직원 단체방에서 퍼진 실루엣 사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104화. 내가 선택해서 나갑니다

    “이제 그 핑계도 얼마 안 남았어.”윤서하가 현관문을 닫은 다음 날, 선우재 직원 단체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처음에는 누가 찍은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늦은 밤 직원 출입구 바깥, 조명이 닿지 않는 벽 쪽에 남녀 두 사람의 실루엣이 겹쳐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의 키와 옷차림, 여자의 작업복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흐리지 않았다.사진 아래에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이거 차이준 팀장 맞지? 옆에 야간 청소하는 사람 같은데.]누군가 화면 밝기를 올려 다시 올렸고, 다른 사람은 두 사람 윤곽에 동그라미까지 그었다. 얼굴 확인도 안 된 사진 한 장이 부서별 단체방을 몇 번 건너는 동안 신분부터 붙었다. ‘아카이브 팀장’과 ‘야간 청소 직원’. 이름보다 직급과 일이 먼저였다.서하는 새벽 작업 견적을 정리하다 김미자의 전화를 받고 사진을 봤다. 단체방 알림은 이미 수십 개가 쌓여 있었다. 처음에는 “아닌 것 같다”, “뒤에서 찍어서 모르겠다” 정도였던 말이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방향을 바꿨다.[그 유부녀 직원 아냐?][둘이 전부터 이상했다던데.][청소부가 재벌 손자 제대로 잡았네.]서하는 마지막 문장에서 손을 멈췄다.불륜이라고 욕하는 말보다 그 문장이 더 화가 났다.자기가 잘못한 부분은 분명했다. 결혼한 상태에서 이준과 키스했고, 거짓말도 했다. 그 책임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직원 단체방에서 자신이 지워지는 방식은 달랐다. 선택한 사람도, 욕망을 가진 사람도 아닌 ‘청소부’ 하나가 재벌 손자를 꼬셔 올라가려 한 사람으로 정리되고 있었다.이준은 처음부터 ‘재벌 손자’였고, 자신은 끝까지 ‘청소부’였다.서하는 작업용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선우재로 갔다.가면서도 알림은 계속 늘었다. 박물관 준비팀에서는 ‘업무상 접촉 아니냐’고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관리팀 방에서는 이미 누가 먼저 접근했는지까지 결론이 난 뒤였다. 실제로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가장 빨리 만들어진 이야기는 가장 낮은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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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메라 들고 일하라고, 미친놈아.”윤서하가 쏘아붙이자 차이준은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걸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홈페이지용 사진 촬영은 끝났고, 파일도 전부 서하 노트북으로 옮겨졌다. 투자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남은 건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그런데 이준은 자연스럽게 서하 원룸까지 따라왔다.“왜 따라와.”“짐 들어준다며.”“노트북 하나랑 작업 가방 하나인데?”“무거워 보여서.”“개수작.”“맞아.”너무 태연해서 서하는 더 말하지 않았다.늦은 밤 골목은 조용했다. 낮 동안 내린 비가 그쳐 보도블록 사이에 물기가 남아 있었고, 원룸 건물 현관등은 사람이 가까워질 때마다 한 층씩 켜졌다. 서하는 앞서 계단을 올랐고 이준은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예전 같았으면 그 거리가 자꾸 신경 쓰였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편했다.자기 집이었다.누가 따라 들어올지, 어디까지 들어오게 할지도 자기가 정할 수 있는 곳.현관문을 열자 세제 냄새와 냉장고 소리가 먼저 맞았다. 이사를 온 첫날에는 텅 빈 방이 크게 느껴졌는데, 며칠 사이 식탁 한쪽에 견적서가 쌓이고 벽에는 작업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침대 옆 작은 수납장에는 청소용 장갑과 계약서 파일이 나란히 놓였다. 누군가의 아내로 살던 집도, 선우재 직원 숙소도 아닌 윤서하 이름으로 굴러가는 생활이 조금씩 모양을 갖추는 중이었다.이준은 가방만 문 안쪽에 내려놓았다. 신발은 벗지 않았다. 처음 이 방에 왔던 날과 달리, 허락받지 않은 한 걸음을 더 들이지 않으려는 게 보였다. 서하는 그걸 알아차리고도 손을 내밀었다.“수고했어.”이준이 그 손을 내려다봤다.“끝?”“응.”“물도 안 줘?”“마시고 싶으면 편의점.”“사진을 몇 장을 찍었는데.”“아까 사진값 줬잖아.”서하가 입술을 가리키자 이준이 웃었다.“그건 선금 아니었어?”“욕도 같이 먹고 싶어?”이준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알겠습니다.”그는 문턱을 넘지 않았다. 카메라 가방 끈을 다시 당겨 메고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102화. 사진값은 키스로

    첫 독립 의뢰 주소를 확인한 날보다 윤서하를 더 어이없게 만든 건 차이준의 첫마디였다.“얼마 필요해?”서하는 휴대전화 화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경쟁 재벌 저택의 야간 정리 의뢰를 설명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았다. 작업 인원도, 견적도, 계약 조건도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이준은 너무 자연스럽게 지갑부터 꺼내는 사람처럼 말했다.“뭐가요.”“장비 사고, 사람 더 쓰고, 홈페이지도 만들 거면 초기비용 들잖아. 내가 투자할게.”서하는 테이블 위 견적서를 접었다. 첫 의뢰지는 선우가와 경쟁하는 재벌 저택이었지만, 그녀에게 중요한 건 어느 집안이냐가 아니었다. 작업 범위는 창고 2곳과 손님방 3곳, 새벽까지 끝내야 하는 정리와 청소였다. 김미자가 알려준 대로 야간 할증과 폐기물 처리비까지 직접 계산했고, 고객에게 보낼 계약서도 자기 이름으로 만들었다. 겨우 첫 장을 시작했는데 누군가의 돈이 뒤에 붙는 순간 다시 ‘차이준이 도와준 일’이 될 것 같았다.“싫어.”“조건도 안 들었는데?”“당신 돈이라는 조건이면 끝났어.”이준이 웃으려다 서하 표정을 보고 멈췄다.선우재를 나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거였다. 이준과 가까워지는 것과 먹고사는 일을 다시 한 묶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원룸도 자기 돈으로 구했고, 첫 의뢰도 자기 이름으로 받았다. 여기서 이준 돈을 받으면 잘되든 망하든 결과에 그의 몫이 생긴다.“나 투자 받아서 당신 사업 하나 얹고 싶은 거 아니야.”“그렇게까지 생각 안 했어.”“근데 돈부터 말했잖아.”이준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알겠어. 취소.”서하는 그제야 다시 서류를 펼쳤다.“대신 시킬 건 있어.”“뭔데.”“사진 찍어줘.”“뭐?”“홈페이지에 올릴 작업 사진. 공간 정리 전후랑 청소 도구, 작업복 입은 것도 몇 장. 당신 사진은 잘 찍잖아.”이준의 눈썹이 올라갔다.“나를 공짜 사진기사로 쓰겠다고?”“투자하고 싶다며. 몸으로 해.”“말 되게 위험하게 한다.”“카메라 들라는 뜻이야.”첫 의뢰를 무사히 마친 뒤,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101화. 첫 의뢰

    “아니. 줄 서는 1번 정도?”차이준의 대답이 어이없어서 윤서하는 한동안 그를 노려봤다.그러다 결국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저런 식으로 한마디씩 빠져나오는 버릇은 여전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서하는 그 웃음 때문에 자기 결정을 흐리지 않았다.이혼 절차는 이혼 절차였고, 이준은 이준이었다.그리고 선우재는 또 다른 문제였다.서하는 며칠 뒤 김미자를 찾아갔다.“저 여기 그만두려고요.”김미자는 휴게실 한쪽에서 수건 수량을 적다가 펜을 멈췄다.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서하를 위아래로 한 번 보고 의자를 당겼다.“완전히?”“네.”“차이준 때문에?”서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 때문이면 더 여기 있어야죠.”김미자의 눈썹이 올라갔다.“말은 잘하네.”“저도 이제 선우재 아닌 데서 먹고살아야 할 것 같아서요.”그 말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선우재는 서하에게 돈을 벌게 해준 곳이었고, 이준을 만난 곳이었으며, 도현의 근무지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빚 때문에 들어왔고 나중에는 아카이브 일까지 맡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 하루 대부분이 이 집 안에서 돌아갔다.이제는 그 고리를 하나씩 끊을 때였다.서하는 새 근무지에서 일하면서 생각해둔 걸 김미자에게 말했다.“야간 정리랑 청소만 따로 받아볼까 해요.”“회사 들어가는 거 말고?”“네. 작은 사무실이나 전시 끝난 공간, 이사 나간 집 같은 데요. 밤에 사람 없을 때 정리 필요한 곳들.”김미자는 이번에는 펜을 완전히 내려놓았다.“혼자?”“처음엔요.”“쉽게 생각하지 마.”반대부터 나왔지만 서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김미자는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았다.“청소만 잘한다고 되는 일 아니야. 계약서 써야 하고, 파손 책임도 정해야 하고, 야간이면 출입권한 누가 주는지도 확인해야 돼. 쓰레기 버리는 것까지 포함인지, 물건 분류만 하는 건지 처음부터 선 그어야 하고.”서하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했다.“더요.”김미자가 피식 웃었

  •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유부녀씨   100화. 자동 당첨 아니야

    “내가 더는 거짓말하기 싫어서.”도현에게 그 말을 하고 돌아온 뒤, 윤서하는 하루를 꼬박 혼자 보냈다.이혼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말했지만 집이 갑자기 가벼워진 건 아니었다. 서랍 안에는 아직 결혼반지가 있었고, 공동계좌 정산표도 끝나지 않았다. 도현과 주고받아야 할 서류도 남아 있었다. 결혼 8년이 한 문장으로 끊기는 일이 아니라는 걸 서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차이준에게는 바로 알리지 않았다.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이나 켰지만 메시지 창을 열지 않았다. 이준에게 먼저 알려주는 순간, 이혼이 둘의 관계를 위한 결정처럼 바뀌는 게 싫었다. 도현과의 결혼을 끝내는 이유도, 그 뒤 어디로 갈지도 자기 입으로 정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거나 기다림의 보상을 주는 방식으로는 이번 일을 끝내고 싶지 않았다.다음 날 선우재에 들어갔을 때도 먼저 찾지 않았다. 직원 기록 동의서 확인을 마치고, 복원실에 남은 자료를 정리하고, 유라에게 수정된 전시 목록을 넘겼다. 그제야 복도 끝에서 이준과 마주쳤다.이준은 서하의 왼손을 먼저 봤다.반지가 없었다.시선이 손가락에 머문 건 잠깐이었지만 서하는 바로 알아챘다.“왜.”“아무것도.”“봤잖아.”“봤지.”이준은 숨길 생각도 없었다.서하는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지나가려 했다. 이준이 따라붙지는 않았지만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둘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충분히 지나갈 거리만 남았다.“도현 씨랑 얘기했어?”서하가 걸음을 멈췄다.“어떻게 알았어.”“네가 반지 뺀 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아.”“그건 맞네.”“그래서?”서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복도 끝 창문 밖으로 늦은 오후 빛이 기울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준에게 이 말을 하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했었다. 좋아할지, 기다렸다는 듯 다가올지. 그런데 막상 실제로 말하려니 그 반응이 중요하지 않았다.“이혼 절차 시작하기로 했어.”이준의 걸음이 멎었다.평소 같으면 농담부터 나왔을 텐데 몇 초 동안 아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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