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시장 비서실 쪽 비서네.”권영자는 명함을 한 번 내려다본 뒤, 다시 해인을 돌아보았다.“해인아, 네가 아는 사람이니? 안으로 들이라고 할까?”해인의 출생에 얽힌 일은 아직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한씨 가문 사람들은 그 사정을 알지 못했다.해인의 눈빛은 담담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해인이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 저 집에 없다고 전하고, 돌아가시라고 해주세요.”경비실 직원은 내려갔다. 잠시 뒤, 정갈하게 포장된 오미자편 몇 상자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그분께서 떠나시기 전에 맡기고 가셨습니다. 작은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는 거라며 꼭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해인은 겉포장만 보고도 금세 알아차렸다. 어릴 적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전통과자점의 오미자편이었다.우연일 리 없었다. 차장섭이 곁에 있는 사람에게 해인의 취향을 알아보게 한 게 분명했다.하지만 해인은 이제 고작 오미자편 몇 상자로 달랠 수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권영자는 오미자편 상자를 바라보며 마음속에 작은 의심을 품었다.해인은 시장 비서와 모르는 사이라고 했다. 그런데 상대는 해인이 가장 좋아한다는 과자를 들고 왔다.그 안에는 남들이 모르는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한씨 가문과 차씨 가문은 어느 정도 왕래가 있었다. 한씨 가문은 사업을 하는 집안라서, 정부 쪽 인사들과도 자연스럽게 부딪힐 일이 있었다.하지만 두 집안이 아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오히려 희정이 어릴 때부터 한씨 가문에 자주 드나들었다. 누가 봐도 유호에게 마음이 있는 모습이었다.권영자는 그런 희정을 좋게 보지 않았다. 희정의 집안 배경 때문에 유호가 시장 집안의 힘을 빌려 재계에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씨 가문은 그런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는 집안이었다.그래서 희정이 몇 번이나 은근하게 때로는 대놓고 권영자에게 두 사람을 이어 달라는 뜻을 보였지만, 권영자는 끝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권영자는 희정과 몇 차례 마주친 적이 있어서 희정의 성격도 조금은 알고 있
차를 한참이나 몰던 희정은, 사람 하나 지나갈 것 같지 않은 길가에 멈춰 세웠다.희정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표정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했다.‘주여진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강해인이 벌써 차씨 가문으로 돌아와 내 것을 빼앗으려 해? 어림도 없어.’‘차씨 가문의 유일한 딸은 나 차희정이야. 누구도 내 자리를 대신할 수 없어!’희정은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야 핸드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 눈빛은 더없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일은 성공했어?”수화기 너머에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거의 된 것 같아.”“다행이네.”희정은 입꼬리를 휘어 웃었다. 그제야 가슴에 맺힌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장례가 끝난 뒤, 해인은 심한 감기에 걸렸다.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임신 중이라 함부로 약을 먹을 수도 없었다. 해인은 침대에 누워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해인이 집에서 혼자 지내다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된 권영자가 직접 해인을 한씨 가문 본가로 데려와 쉬게 했다.권영자는 자신의 곁을 오래 지킨 가사도우미를 붙여서, 해인 곁에서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고 보살피게 했다. 해인이 먹는 음식도 따로 조리했고, 식사 전에는 가정의가 먼저 확인하게 했다.권영자의 태도는 한씨 가문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시지였다.해인의 뱃속 아이는 한씨 가문에서 가장 귀하게 지켜야 할 존재였다. 작은 문제도 생기게 둘 수 없었고, 누구도 함부로 손댈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왕단영과 천하솜은 속으로야 달갑지 않았지만, 유호의 보복이 두려웠다. 얼마 전 두 여자의 아들들이 유호에게 이미 ‘경고’를 받은 터였다.두 사람은 본래 한씨 가문에서 이름도 자리도 없는 처지였다. 뒤에서 불평을 늘어놓을 수는 있어도 겉으로 감히 티를 낼 수는 없었다.권영자는 침대에 누워 병색이 완연한 해인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다.“유호도 참... 귀국했으면 집에 와야지, 이게 무슨 막된 짓이야.”해인은 막 가까운 가족을 잃었다. 정신
차장섭은 말문이 막혔다.해인은 인사를 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차장섭은 그런 해인의 모습에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그는 줄곧 희정이 너무 제멋대로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해인은 희정보다 더 달래기 어려운 아이였다.지금의 차장섭은 어디를 가든 수많은 시선이 따라붙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곧 차에 올라 떠났다.차장섭은 며칠 뒤 해인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면, 다시 기회를 찾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었다....“우리 아빠는요?”이른 아침 차장섭의 집무실에 찾아온 희정은, 차장섭이 보이지 않자 이상하게 여겼다.비서가 말했다.“시장님께서는 지인분 장례식에 참석하러 가셨습니다.”“장례식요? 누가 죽었는데요?”말을 끝낸 희정은 문득 뭔가를 떠올리면서 표정이 확 굳어졌다.주여진의 죽음은 비밀이 아니었다.‘아빠가... 설마 주여진을 조문하러 간 걸까?’차갑게 굳은 얼굴로 시장실을 나선 희정은 곧장 시청 청사 안뜰에 세워 둔 차에 올라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색 대형 의전 차량 한 대가 들어와 희정의 차 옆에 멈춰 섰다.차 문이 열리고, 차장섭이 내렸다.희정의 차는 선명한 붉은색이라 눈에 잘 띄었다. 희정의 생일에 차장섭이 선물해 준 차이기도 했다.그런데 차장섭은 바로 옆에 세워진 희정의 차를 보지 못했다.희정은 차 안에서 차장섭이 곁에 있던 비서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해인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봐. 좋은 걸로 골라서 네가 직접 보내고. 해인이가 받지 않으면... 더 귀찮게 하지 말고, 억지로 권하지도 마.”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청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희정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아빠... 방금 정말 강해인을 만나러 갔어!’‘게다가 비서에게 강해인의 취향까지 알아보라고 했어!’‘...’지난 세월 동안 해인은 차장섭 곁에서 살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교류도 쌓인 정도 없었다. 그런데도 차장섭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해인이 있었던 것이다.그 사실을
해인이 떠나는 모습을 태겸은 눈으로 붙잡고 있었다. 시선은 오래도록 해인의 뒷모습을 따라갔다.문승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득 태겸 앞을 막아섰다. 태겸의 시야를 가로막듯 막아 버렸다.문승의 경계를 모를 리 없는 태겸이 차갑게 비웃었다.“이름도 명분도 없는 가사도우미 아들 주제에 한유호를 그렇게 도와? 한유호가 고마워하기는 하냐?”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원랑은 왕단영의 신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문승의 처지도 자연히 애매할 수밖에 없었다.이번에도 문승은 김 집사의 후임이라는 명목으로 해인의 장례 일을 돕고 있었다. 한원랑이 왕단영을 정식 아내 자리에 올릴 생각이 없다는 뜻이 너무도 분명했다. 바깥에서 왕단영은 여전히 한씨 가문의 가사도우미였고, 문승은 결국 가사도우미의 아들이었다.문승은 웃기만 할 뿐 조금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는 듯했다.“존귀하신 고 대표님. 깨진 거울은 다시 붙여도 금이 남고,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잖아.” “나 같은 가사도우미 아들도 아는 걸, 왜 고 대표님은 우리 제수씨한테 차인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아직도 몰라?”말을 마친 문승은 더 머물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떠났다.태겸의 안색이 시퍼렇게 굳어졌다.‘한씨 가문에서 제대로 대접받지도 못하는 놈 따위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해인은 차씨 가문에서 조문객이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생물학적 아버지를 바라보는 해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을 마주한 듯했다.반면 차장섭의 마음은 복잡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곁에서 키워 보지 못한 딸이었다. 출생을 지켜보지도 못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늘 해인을 떠올리고 있었다.해인은 예를 갖춰 조문 온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차장섭은 분향을 마친 뒤, 애틋한 눈으로 해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해인은 고개도 들지 않았고, 차장섭과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차장섭은 더 말하지 않았다. 잠시 뒤, 차장섭의 비서가 해인 쪽으로 다가와 작은 목
한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유호가 가만히 있지 않는 왕단영에게 경고하기 위해, 몰래 사람을 시켜 왕단영의 아들 문승에게 손을 썼다는 사실을.그래도 문승은 한원랑이 맡긴 일을 제법 빈틈없이 처리했기에, 장례 절차는 체면을 잃지 않을 만큼 잘 갖춰졌다.해인은 눈을 내리깐 채 말했다.“유호 씨가 어디 있는지 저도 몰라요.”“아니, 그 녀석이 어떻게...”이소정이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고민건이 옆에서 이소정의 팔을 잡아당겼다.지금은 그런 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고민건은 아내가 이런 자리에서 괜한 말을 꺼내 문제를 만들지 않길 바랐다.어쨌든 해인은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지금은 한씨 가문 사람이었고, 예전처럼 고씨 가문에서 의지할 곳 없이 지내던 고아 소녀가 아니었다. 고민건과 이소정이 한때 해인을 거둬 키웠다고 해도, 지금의 해인은 한씨 가문의 사모님이었다. 아무 말이나 꺼내기에는 부적절한 자리였다.고민건이 눈짓을 보내자, 이소정은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해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소정은 예전에 해인을 두고 뒤에서 수군댔던 일도 잠시 잊은 채 가슴 한쪽이 짠해졌다.어쨌든 해인은 이소정이 지켜보며 자란 아이였다.“태겸이도 우리랑 같이 왔어. 필요한 일 있으면 태겸이한테 시켜. 내가 태겸이는 여기 두고 갈게.”예전에 해인 아버지 장례는 고씨 가문이 도와 치렀다. 당시 태겸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례식 내내 꽤 많은 일을 거들었다.고민건은 이소정이 태겸을 남겨 두는 일이 마뜩잖았다. 그래도 태겸과 해인은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다. 예전의 남녀 감정이야 지금 같은 생사의 문제 앞에서는 따질 일이 아니었다. 고민건은 더 말하지 않기로 했다....“아들, 이건 네 아버지 앞에서 제대로 보일 좋은 기회야. 유호가 이렇게 책임감 없이 굴잖아. 자기 장모 장례에도 안 나타나다니.” “네 아버지가 집에서 얼마나 유호 욕을 했는지 몰라. 네가 이번에 잘하면, 어쩌면 KH그룹에 들어가 일할
주여진의 사망 소식을 듣고 승아가 병원으로 달려왔다.승아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해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울음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승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흔들리는 해인을 급히 붙잡았다.“해인아...”애리가 승아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애리는 이런 때일수록 해인 곁에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겸에게 승아의 번호를 물어 연락했다.해인은 승아의 어깨에 기대어 말했다.“승아야, 나 이제 엄마 없어.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엄마가 나랑 이야기했단 말이야... 내 잘못이야.” “엄마가 겨우 조금 괜찮아졌는데, 내가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고 옆에서 지켰어야 했어.”해인이 주여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는 승아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모녀는 지난 세월 자주 연락하지 못했지만, 서로를 놓은 적은 없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 서운함을 붙잡고 버텼을 뿐이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친모녀보다 더 깊은 정이 있었다. 한때 강정국과 주여진, 오빠들이 살아 있던 시절의 웃음소리는 모두 진짜였고, 해인은 가족들의 세심한 사랑 속에서 자랐다.승아는 해인을 꼭 끌어안았다.“해인아, 너 임신 중이야. 너무 흥분하면 안 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임산부고, 네 몸 챙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상태야.”“전부 네 탓으로 돌리지 마. 어머니도 네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습 바라지 않으실 거야. 정말 나쁜 건 가해자야. 벌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어.”해인은 멍한 눈으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주여진의 죽음이 너무 아파서 지금은 예철진에게 따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해인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은 걸 보고, 승아가 해인을 부축해 복도 의자에 앉혔다.“네 남편은?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왜 안 왔어?”해인이 낮게 말했다.“F국으로 출장 갔어.”생각해 보면, 해인은 어젯밤부터 유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해인은 유호가 이미 귀국 비행기에 오른 것 같다고 짐작했다.
해인은 서류 위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고,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퇴사 사유: 조직에서의 역할이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 않은 구조 속에 머무는 상황에 대한 우려로 인해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조진규의 표정이 굳어졌다.“회사 망하라는 저주야?”“굳이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제가 더 드릴 말은 없습니다.”“이렇게 감정적으로 사표 던지는데, 네 지도교수는 알고 계셔?”“전 이미 졸업했습니다. 지도교수님도 제 커리어까지 간섭하실 위치는 아니시죠.”조진규는 목소리를 낮췄다.“나가는 건 좋아. 하지만 강해인 씨가
유호는 담담하게 말했다.“끊을게.”...클럽.핸드폰에서 통화 종료음이 울렸지만, 대현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누군가 옆에서 놀리듯 말했다.“대현아, 왜 그래? 전화 한 번 하더니 혼이 다 나간 것 같네. 혹시 네 애인이 도망이라도 갔냐?”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말을 꺼낸 사람을 노려보던 대현이 웃으면서 욕을 했다.“지랄하지 마. 내 명예에 먹칠을 할 소리 하지 말고. 무슨 애인이야. 유호야, 유호. 그 자식한테 와이프가 생겼어.”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이 일제히 조용해졌다.그 충격은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오늘 저녁, 해인은 승아와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승아는 연예와 재계 쪽을 오래 파온 기자였다. 한씨 가문에 대해, 해인이 몰랐던 이야기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승아의 말에 따르면, 당시 유호가 한씨 가문을 떠나게 된 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다.유호의 아버지가 직접 보냈기 때문이다.유호가 모터사이클 대회에 참가한 뒤였다.아들이 자신의 뜻을 거슬렀다고 여긴 유호의 아버지는 분노한 끝에 유호를 군대로 보내 버렸다.그 군부대에는 유호 아버지의 지인이 있어서, 유호를 혹독하게 굴리도록 했다.거의 8년 가까이 유호는 집에 돌아
예주는 잠시 멍해졌다.태겸이 무의식적으로 해인을 감싸는 말을 했다는 사실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예주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억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가가 토끼처럼 붉어졌다.태겸은 휴지를 두 장 뽑아 예주에게 건넸다.위로라고 하기엔 애매한 행동이었다.“괜히 생각 많이 하지 마. 해인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그날 너랑 내가 키스한 영상 있잖아. 그걸 우리 아버지 핸드폰으로 보내 버렸어.”그날의 키스는 충동이었다.태겸은 해인에게 자극을 받아서 사람들 앞에서 예주에게 입을 맞췄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