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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eur: 오월이
말을 꺼낸 사람은 윤준이었다.

태겸의 오래된 친구였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했다.

윤준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든 오늘만큼은 잠깐 접어 둬. 오늘은 내 여자친구 생일이잖아. 내 체면 좀 세워줘.”

곧바로 맞장구가 이어졌다.

“맞아. 태겸이 마음속엔 늘 해인 씨밖에 없는 거 다들 알잖아. 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해인 씨랑 조금만 삐걱해도, 나중에 태겸이 술 취하면 친구들 붙잡고 난리 나는 거 다들 봤잖아.”

“야, 그런 소리 하지 마. 태겸이 언제 울어. 술병 안고 ‘여보, 사랑해’만 반복하지.”

“...”

룸 안에 웃음이 퍼졌다.

태겸이 그들을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그만해. 해인이 앞에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마. 해인이 성격 알잖아.”

말을 마치고는, 룸 안 남자들을 향해 덧붙였다.

“담배 다 꺼. 피울 거면 나가서 피워. 해인이 담배 냄새 싫어해.”

고씨 가문은 이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의 명문가 집안이었다.

태겸의 말에는 자연히 무게가 실렸고, 룸 안의 남자들은 별말 없이 담배를 껐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태겸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 타이밍에 해인이 자리를 뜨는 쪽이 오히려 매정해 보일 수도 있었다. 아직 회사 매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지금 태겸을 자극해 의심을 사는 건, 해인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이후 20 몇 분 동안 태겸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해인 곁을 맴돌았다. 포도를 하나하나 까서 건네고, 차가운 손을 잡아 쥐고 숨을 불어넣기도 했다.

예전의 해인이었다면, 이런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해인에게 태겸의 행동은 어딘가 연출처럼 느껴졌다.

해인은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생각했다.

‘고태겸이 변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이 다정함에 안심하고 있었겠지.’

그랬다면 분명, 이 온기에 스스로를 맡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잠시 뒤 태겸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해인은 그 틈을 타 조용히 나가려고 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예주가 다가왔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고, 시선은 해인에게 고정돼 있었다.

“언니가 지금 사는 신혼집, 태겸 오빠가 이미 저 데려간 적이 있어요.”

해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해인이 예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예주는 오늘 하루 동안 쌓인 감정을 더 이상 누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태겸과 해인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걸 지켜보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태겸은 내내 예주 쪽을 보지 않았다.

그런 무시가 예주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됐다.

원래라면 예주도 이렇게까지 나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자 예주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예주는 목소리를 낮췄다.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그 집, 아직 공사 중이었어요. 침대만 먼저 들어온 날이었죠. 그날 언니 출장 간 거, 기억 안 나요?”

“그 침대에서... 난... 태겸 오빠랑 밤을 보냈어요.”

예주의 숨이 가빠졌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집 안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었고요. 태겸 오빠는 저를 끌어안고 계속 이름을 불렀어요.”

예주는 해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언니랑 오빠는 오래 사귀었죠. 지금도 남들 보기엔 한창 좋을 때일 거고요. 근데 언니, 태겸 오빠가 언니한테 그렇게까지 한 적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늘 같이 있었잖아요. 서로 모르는 게 없을 만큼...”

예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서 중요한 건 새로움이래요. 언니를 만지는 건, 오빠한테는 너무 익숙한 일이에요. 오빠가 느끼는 자극, 그건 언니가 아니라 저한테서 나온 거예요.”

예주의 말에 해인은 그 자리에 굳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손바닥을 세게 움켜쥐자 손끝에 힘이 몰렸고, 발밑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 집은 고씨 가문이 해인에게 건넨 혼례 예물이었고, B시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급 단독주택 단지에 자리한 곳이었다.

건축 비용만 해도 수천억 원에 이르는 집이었다.

해인은 오래전부터 ‘나만의 집’을 갖고 싶었다. 앞으로의 삶을 떠올리며 설렘을 안고, 신혼집 공사를 하나하나 챙겼다.

배관과 전기 동선 같은 큰 구조부터, 소품 색감처럼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해인이 직접 정했다.

마침 회사에서도 일정이 빡빡한 프로젝트가 겹쳐 있었다.

공사는 중요한 단계였고, 해인은 낮에는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퇴근 뒤에는 현장에 들러 도면을 수정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늘 깊은 밤이었다.

잠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들은 허투루 느껴지지 않았다.

‘고태겸은 내가 이 집에 얼마나 마음을 쏟았는지 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왜, 나 몰래 하예주를 들인 거지?’

해인은 뒤로 물러났다. 해인의 어두운 눈빛에는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해인은 쉽게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정성껏 피운 꽃이 빛을 잃은 듯했다.

커다란 허탈함이 밀려와 해인을 덮쳤다.

주변의 소리와 풍경이 흐려졌고, 붙들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해인은 참지 못하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해인의 상태를 본 예주는 마음이 한결 풀리는 듯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예주는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 경매에서 나온 진주 목걸이요. 태겸 오빠가 왜 굳이 특별 응찰까지 써 가며 저한테 주려고 했는지 아세요?”

예주는 숨을 고르고, 또렷하게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언니. 곧 태겸 오빠 아이를 낳게 될 거예요.”

“태겸 오빠 마음속에서는 제가 언니보다 중요해요. 목걸이 하나쯤이야, 당연히 제 뜻대로 해주죠. 오빠는 저랑, 제 아이를 사랑하니까요. 언니는...”

예주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언니는 그냥 강씨 집안에 남겨진 짐이에요. 고태겸 오빠한테 기대 사는 고아일 뿐이잖아요. 강씨 집안엔 이제 아무도 없는데, 아직도 본인이 아가씨인 줄 아세요? 태겸 오빠 없었으면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을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의 시선이 치켜올라갔다.

해인은 팔을 들어 올려 예주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예주의 이마가 문틀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혔다.

해인의 분노가 실린 힘에 예주의 몸이 그대로 문 쪽으로 밀렸다.

예주는 해인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해인이 망설임 없이 손을 올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소란이 커지자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충격에 예주의 취기는 빠르게 가셨다.

체면이 상했다는 생각이 들자, 예주는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해인에게 따졌다.

“해인 언니,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저를 때려요?!”

해인은 찌릿한 팔을 털면서 천천히 말했다.

“임신했다며. 고태겸이 너한테 큰 선물도 줬잖아. 고태겸 아내인 내가 가만있을 이유는 없지.”

해인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한 대로 부족해, 하예주? 반대쪽도 맞춰 줄까? 좋은 일엔 짝이 있어야지.”

해인이 테이블 위의 와인잔을 집어 들자, 예주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언니, 미쳤어요?!”

해인은 잔을 벽에 세게 내리쳤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산산이 갈라졌다.

해인은 깨진 잔의 손잡이를 쥔 채 예주에게 다가갔다.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더니, 지금은 왜 그래. 아까 그 기세는 어디 갔어?”

“내가 고태겸한테 매달린 고아라고? 강씨 집안에 사람이 없다고 누가 말했어?”

해인은 스스로를 가리키듯 말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서 있잖아.”

예주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뒤로 물러나려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태겸이 급히 다가와 해인을 거칠게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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