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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오월이
말을 꺼낸 사람은 윤준이었다.

태겸의 오래된 친구였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든 당사자이기도 했다.

윤준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든 오늘만큼은 잠깐 접어 둬. 오늘은 내 여자친구 생일이잖아. 내 체면 좀 세워줘.”

곧바로 맞장구가 이어졌다.

“맞아. 태겸이 마음속엔 늘 해인 씨밖에 없는 거 다들 알잖아. 둘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 해인 씨랑 조금만 삐걱해도, 나중에 태겸이 술 취하면 친구들 붙잡고 난리 나는 거 다들 봤잖아.”

“야, 그런 소리 하지 마. 태겸이 언제 울어. 술병 안고 ‘여보, 사랑해’만 반복하지.”

“...”

룸 안에 웃음이 퍼졌다.

태겸이 그들을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그만해. 해인이 앞에서 그런 얘기는 하지 마. 해인이 성격 알잖아.”

말을 마치고는, 룸 안 남자들을 향해 덧붙였다.

“담배 다 꺼. 피울 거면 나가서 피워. 해인이 담배 냄새 싫어해.”

고씨 가문은 이 지역에서도 손꼽히는 최고의 명문가 집안이었다.

태겸의 말에는 자연히 무게가 실렸고, 룸 안의 남자들은 별말 없이 담배를 껐다.

그 모습만 놓고 보면 태겸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이 타이밍에 해인이 자리를 뜨는 쪽이 오히려 매정해 보일 수도 있었다. 아직 회사 매각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지금 태겸을 자극해 의심을 사는 건, 해인에게도 좋을 게 없었다.

이후 20 몇 분 동안 태겸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해인 곁을 맴돌았다. 포도를 하나하나 까서 건네고, 차가운 손을 잡아 쥐고 숨을 불어넣기도 했다.

예전의 해인이었다면, 이런 모습에 마음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해인에게 태겸의 행동은 어딘가 연출처럼 느껴졌다.

해인은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 마치 한 발짝 떨어진 자리에서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처럼 담담하게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문득 생각했다.

‘고태겸이 변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이 다정함에 안심하고 있었겠지.’

그랬다면 분명, 이 온기에 스스로를 맡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정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잠시 뒤 태겸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해인은 그 틈을 타 조용히 나가려고 했다.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때 예주가 다가왔다.

눈가가 붉게 젖어 있었고, 시선은 해인에게 고정돼 있었다.

“언니가 지금 사는 신혼집, 태겸 오빠가 이미 저 데려간 적이 있어요.”

해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해인이 예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예주는 오늘 하루 동안 쌓인 감정을 더 이상 누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태겸과 해인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걸 지켜보며,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억누르고 있었다.

태겸은 내내 예주 쪽을 보지 않았다.

그런 무시가 예주에게 또 다른 자극이 됐다.

원래라면 예주도 이렇게까지 나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술이 들어가자 예주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예주는 목소리를 낮췄다.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그 집, 아직 공사 중이었어요. 침대만 먼저 들어온 날이었죠. 그날 언니 출장 간 거, 기억 안 나요?”

“그 침대에서... 난... 태겸 오빠랑 밤을 보냈어요.”

예주의 숨이 가빠졌다.

“그 다음 며칠 동안, 집 안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아 있었고요. 태겸 오빠는 저를 끌어안고 계속 이름을 불렀어요.”

예주는 해인을 똑바로 바라봤다.

“언니랑 오빠는 오래 사귀었죠. 지금도 남들 보기엔 한창 좋을 때일 거고요. 근데 언니, 태겸 오빠가 언니한테 그렇게까지 한 적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늘 같이 있었잖아요. 서로 모르는 게 없을 만큼...”

예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서 중요한 건 새로움이래요. 언니를 만지는 건, 오빠한테는 너무 익숙한 일이에요. 오빠가 느끼는 자극, 그건 언니가 아니라 저한테서 나온 거예요.”

예주의 말에 해인은 그 자리에 굳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손바닥을 세게 움켜쥐자 손끝에 힘이 몰렸고, 발밑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 집은 고씨 가문이 해인에게 건넨 혼례 예물이었고, B시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급 단독주택 단지에 자리한 곳이었다.

건축 비용만 해도 수천억 원에 이르는 집이었다.

해인은 오래전부터 ‘나만의 집’을 갖고 싶었다. 앞으로의 삶을 떠올리며 설렘을 안고, 신혼집 공사를 하나하나 챙겼다.

배관과 전기 동선 같은 큰 구조부터, 소품 색감처럼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해인이 직접 정했다.

마침 회사에서도 일정이 빡빡한 프로젝트가 겹쳐 있었다.

공사는 중요한 단계였고, 해인은 낮에는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퇴근 뒤에는 현장에 들러 도면을 수정했다.

모든 일을 마치고 나면 늘 깊은 밤이었다.

잠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들은 허투루 느껴지지 않았다.

‘고태겸은 내가 이 집에 얼마나 마음을 쏟았는지 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왜, 나 몰래 하예주를 들인 거지?’

해인은 뒤로 물러났다. 해인의 어두운 눈빛에는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지금의 해인은 쉽게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정성껏 피운 꽃이 빛을 잃은 듯했다.

커다란 허탈함이 밀려와 해인을 덮쳤다.

주변의 소리와 풍경이 흐려졌고, 붙들고 있던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해인은 참지 못하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해인의 상태를 본 예주는 마음이 한결 풀리는 듯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예주는 말을 이었다.

“오늘 오후 경매에서 나온 진주 목걸이요. 태겸 오빠가 왜 굳이 특별 응찰까지 써 가며 저한테 주려고 했는지 아세요?”

예주는 숨을 고르고, 또렷하게 말했다.

“저 임신했어요, 언니. 곧 태겸 오빠 아이를 낳게 될 거예요.”

“태겸 오빠 마음속에서는 제가 언니보다 중요해요. 목걸이 하나쯤이야, 당연히 제 뜻대로 해주죠. 오빠는 저랑, 제 아이를 사랑하니까요. 언니는...”

예주의 목소리가 점점 날카로워졌다.

“언니는 그냥 강씨 집안에 남겨진 짐이에요. 고태겸 오빠한테 기대 사는 고아일 뿐이잖아요. 강씨 집안엔 이제 아무도 없는데, 아직도 본인이 아가씨인 줄 아세요? 태겸 오빠 없었으면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을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인의 시선이 치켜올라갔다.

해인은 팔을 들어 올려 예주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예주의 이마가 문틀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혔다.

해인의 분노가 실린 힘에 예주의 몸이 그대로 문 쪽으로 밀렸다.

예주는 해인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해인이 망설임 없이 손을 올릴 줄은 더더욱 몰랐다.

소란이 커지자 주변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충격에 예주의 취기는 빠르게 가셨다.

체면이 상했다는 생각이 들자, 예주는 눈에 핏발을 세우면서 해인에게 따졌다.

“해인 언니,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저를 때려요?!”

해인은 찌릿한 팔을 털면서 천천히 말했다.

“임신했다며. 고태겸이 너한테 큰 선물도 줬잖아. 고태겸 아내인 내가 가만있을 이유는 없지.”

해인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려다보는 위치였다.

“한 대로 부족해, 하예주? 반대쪽도 맞춰 줄까? 좋은 일엔 짝이 있어야지.”

해인이 테이블 위의 와인잔을 집어 들자, 예주는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언니, 미쳤어요?!”

해인은 잔을 벽에 세게 내리쳤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잔이 산산이 갈라졌다.

해인은 깨진 잔의 손잡이를 쥔 채 예주에게 다가갔다.

“남들 앞에서 잘난 척하더니, 지금은 왜 그래. 아까 그 기세는 어디 갔어?”

“내가 고태겸한테 매달린 고아라고? 강씨 집안에 사람이 없다고 누가 말했어?”

해인은 스스로를 가리키듯 말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서 있잖아.”

예주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고, 뒤로 물러나려다 균형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태겸이 급히 다가와 해인을 거칠게 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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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30화

    전화를 끊고 난 뒤, 유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해인이 아직 떠나지 않은 채, 유호와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잠시 멈칫하던 유호는 해인에게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그대로 길가에 세워 둔 검은 세단으로 급히 향했다.문을 열고 차에 오르는 유호의 동작에는 전혀 여유가 없었다.차가 곧장 시야에서 사라지자, 해인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였다.‘여자친구한테 연락이라도 온 걸까?’오늘 밤 인수 얘기는 아무래도 물 건너간 듯했다.해인은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다가, 손목에 찬 팔찌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그제야 실감이 났다.‘나... 이미 결혼했지.’해인은 팔찌를 조심스럽게 풀어서 작은 보석함에 넣었다.고씨 가문 본가에서 가져온 아버지와 오빠들의 유품과 함께 정리해 두었다.이 팔찌는 너무 귀했다.이렇게 차고 다닐 물건이 아니었다.언젠가 이혼하게 되면, 반드시 돌려줘야 할 물건이기도 했다.생각해 보니, 태겸은 이미 그녀가 묵는 호텔까지 알아냈다.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해인은 권영자가 건네준 키를 꺼냈다.새 신랑의 집 주소와 동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 집이 있는 주택단지는 B시에서도 손꼽히는 고급 주거지였다.조용하고 사생활이 잘 지켜지는 곳으로, 거주자들 대부분이 사회적 위치가 분명한 사람들이었다.‘군에 오래 있으면, 집은 비어 있을 테고...’그렇다면 내일 가서 잠시 지내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해인의 짐도 많지 않아서 갈아입을 옷 몇 벌뿐이었다.그렇게 생각한 해인은 바로 옷을 캐리어에 넣기 시작했다.‘내일 퇴근하고 바로 옮기면 되겠다. 괜히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이.’...같은 시각, 유호는 집에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사람은커녕 인기척조차 없었다.유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그는 한씨 가문 본가에서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권영자는 혼인관계증명서를 숨겨 둔 채, 화가 난 손주가 찢어 버릴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권영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29화

    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눈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았다.“너... 그렇게까지 그 사람을 좋아해?”“네?”해인은 잠시 멈칫했다.유호의 마지막 말은 너무 작게 속삭여서, 마침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천천히 시선을 든 유호가 웃는 듯 아닌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인수 얘기는 오늘은 별로 할 기분이 아니다. 다음에 하지.”유호는 그대로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해인은 인상을 찌푸렸다.‘이 사람은 뭐야... 여기까지 불러서 이런 분위기까지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안 한다고?’그때 유호의 핸드폰이 울렸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유호의 표정이 굳었다.권영자였다.전화를 받자마자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또 목 매달겠다고 협박하려는 거면 그만하세요. 귀에 딱지가 앉았어요. 매번 그 소리, 안 질리세요?”한씨 가문 본가의 거실 소파에 앉아서 따끈따끈한 혼인관계증명서를 품에 안은 권영자는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유호야, 축하해! 너 결혼했다!]“무슨 말씀이세요?”유호의 눈썹이 단번에 올라갔다.“꿈이라도 꾸셨어요? 아니면 제가 집에 안 들어온다고 망상이라도 생기셨어요?”해인은 무의식적으로 유호를 바라봤다.‘이 말투... 친한 여성 친구? 아니면 가족?’권영자는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오늘 운시사에 가서 네 결혼을 좀 빌어봤는데 말이야, 진짜로 나타났어. 피부도 하얗고, 인물도 단정한 아가씨야. 내가 바로 결정했어. 너 장가간 거야!]유호에게 이건 축하가 아니라 재난에 가까웠다.“장가? 농담도 정도껏 하세요!”그는 반사적으로 해인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곧바로 몇 걸음 떨어졌다.해인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해인은 유호의 등을 바라봤다.‘이 사람... 진짜 여자가 있었네.’‘그럼 그날은 뭐였어?’‘장난이었나?’해인이 서서히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녀는 유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설마... 원래 이런 사람인가?’권영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장난 아니야. 직접 보면 너도 마음에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28화

    “왜 여기 있어?”태겸은 갑자기 차에 올라탄 예주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태겸의 눈길에는 불쾌함이 스쳤다.“나 따라온 거야?”“그럴 리가요.”하예주는 창가 쪽을 등지고 앉아 말했다.“하영 언니한테 전화했더니, 계속 일하느라 저녁도 못 드셨다고 해서요. 위장도 안 좋으신데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제가 음식 좀 가져왔어요.”비닐 봉투 안에는 군만두가 들어 있었다.태겸이 가장 좋아하던 식당인데, 마침 이 근처에 있었다.예주가 포장을 풀었다.하지만 평소라면 반가웠을 냄새가 지금은 묘하게 거북했다.기분 탓인지, 식욕도 함께 가라앉아 있었다.태겸은 도시락을 옆으로 밀어냈다.“안 먹어. 치워.”말을 마치고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태겸은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예주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가슴 쪽으로 몸을 기댔다.태겸이 특별히 밀어내지 않자, 그녀는 더 용기를 내 허리에 팔을 둘렀고, 뺨도 살짝 붙였다.태겸에게서 풍기는 향이 예주를 사로잡았다.그 냄새는 예주에게 치명적이었다.예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실제로 후원해 준 사람은 해인이고, 태겸은 이름만 빌려준 존재였다는 걸.그 사실을 모르는 척할 생각도 없었다.그래도 멈출 수가 없었다.‘배은망덕하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아.’그렇게라도 태겸에게 가까워지고 싶었다.태겸을 좋아하는 예주는 이 방법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믿었다.예주의 체온이 전해지는 순간, 태겸이 눈을 떴다.태겸의 눈빛이 단번에 차가워졌다.“고 비서님.”앞좌석에서 운전하던 정하영을 불렀다.“앞 교차로에서 내려 주세요.”백미러로 상황을 확인한 정하영이 짧게 대답했다.“알겠습니다.”예주는 얼어붙은 얼굴로 태겸을 봤다.“오빠... 오늘 밤만이라도 제가...”태겸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목소리는 단호했다.“하예주, 집에 도착했어.”차가 갈림길에서 멈추자, 예주는 그렇게 차에서 내렸다.태겸이 탄 차는 예주를 남겨둔 채 곧바로 멀어졌다.시야에서 차가 사라지자, 예주는 발을 굴렀다.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27화

    해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차로는 30분쯤 걸리는 거리였지만, 도로가 한산해 20분 만에 호텔 앞에 도착했다.해인은 차에서 내리며 허재준을 향해 웃었다.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별말씀을요.”해인은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재준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돌아서선 해인은 호텔 로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고개를 돌리는 순간, 너무도 익숙한 시선과 마주쳤다.태겸이었다.태겸은 해인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모든 걸 들춰낸 듯한, 차갑게 냉소하는 눈빛이었다.천천히 다가온 태겸이 해인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나랑 그렇게 빨리 끝내고 싶더니, 밖에 사람이 있었던 거야?”해인은 태겸이 이렇게 빨리 자신이 묵는 호텔을 알아낼 줄은 몰랐다.하지만 곧 납득했다.고씨 가문이라면, B시에서 사람 하나 찾는 건 어렵지도 않을 것이다.호텔에 묵는 이상... 더 숨길 수도 없었다.태겸이 물었다.“아까 그 남자, 이름 뭐야? 둘이 얼마나 만난 거야?”해인은 그를 한 번 보고는 시선을 거두었다.설명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이제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강해인.”태겸이 뒤따라오며 말했다.“거기 서.”그는 앞을 막아섰다.눈빛이 싸늘해졌다.“아무 말도 안 하고 가는 건... 찔리는 게 있어서야?”해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웃음이 나올 뻔했다.‘이런 식의 적반하장이라니.’이 관계를 배신한 건 태겸이었다.그런데 지금은 마치 자신이 도덕적 우위에 선 사람처럼 그녀를 몰아붙이고 있었다.해인의 눈에 쓸쓸함이 스쳤다.“내가 뭐가 찔려? 우리 끝난 사이야. 내가 남자랑 밥 한 끼 먹는 것도, 너한테 보고해야 돼?”태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누가 끝났대? 그건 너 혼자 정한 거지, 나는 동의한 적 없어.”해인은 웃으며 그를 봤다.“그래서? 고씨 가문의 대단하신 태겸 도련님께서 이제 와서 나한테 매달리겠다는 거야?”담담한 말투였지만, 그게 더 태겸을 자극했다.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26화

    하루 종일 업무를 마친 유호는 보온통에 죽을 담아 병원으로 향했다.하지만 병실 문을 열어 보니, 해인이 있던 침대에는 이미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어젯밤 유호를 봤던 간호사가 알아보고 말했다.“어? 보호자분, 여자친구분은 아침에 퇴원하셨어요. 모르셨어요?”유호는 미간을 좁혔다.‘퇴원했다고?’유호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한편, 사랑채 안.해인의 핸드폰이 테이블 위에서 울렸다.낯선 번호였다.해인은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는 편이라,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곧 메시지 한 통이 들어왔다.해인은 고개를 숙여 화면을 봤다.아까와 같은 번호였다.[왜 그렇게 차가워?]해인은 짧게 답했다.[누구세요?][한유호. 두 번이나 네 목숨 구해 준 은인.]해인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어젯밤 유호가 자신을 안고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던 장면이 떠올랐다.병실에서 하룻밤 내내 곁을 지켰다는 말도...그녀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유호가 이미 자리에 없어서 ‘다신 못 보겠구나’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병원에 다시 왔다는 뜻이었다.해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보냈다.[퇴원했어요. 말씀을 못 드렸네요.]곧바로 답장이 왔다.[못 한 거야, 아니면 내 번호를 안 저장한 거야?]사실이었다.해인은 본능적으로 유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지난번 만남에서의 그 돌발적인 키스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너무 가벼운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하지만 어젯밤의 유호는 전혀 달랐다.차분하고 조심스러웠고, 지나치게 신사적이기까지 했다.해인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그때 또 한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다.이번엔 사진이었다.병원 복도에서 찍은 듯한 사진.유호의 길고 단정한 손에 보온통을 들고 있었다.둥글게 잘 정리된 손톱은 깔끔했다.[병원 앞 길고양이들이 호강하겠네.]‘보온통 안의 죽은... 원래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아파도 돌봐 주는 사람 하나 없던 해인이었다.그런데 거의 모르는 사람인 유호가 이

  • 키워온 장미를 숙적에게 빼앗긴 밤   제25화

    해인의 손목을 본 순간, 승아의 눈이 반짝였다.“이것도 그 할머니가 준 거야?”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전해 내려오는 집안 물건이라고 하셨어. 내가 그동안 문화재 쪽 일을 해 왔잖아. 내가 보기에, 이 팔찌는 분명 여러 대를 거친 물건이야.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그 말에 승아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사실 해인이 말한 조건만 놓고 보면, 상대는 아직 현역 군인이라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또 각방을 쓰는 데다가, 성적 취향 문제로 형식적인 결혼을 원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이 결혼은 생각보다 훨씬 ‘안전한 선택’이었다.어차피 1년 뒤 이혼.그동안 얼굴 볼 일도 거의 없을 테고, 그렇게 결혼이 끝나면 해인에게는 아무 흠도 남지 않는다.무엇보다 시댁 쪽이 이렇게 통 큰 집안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었다.이 정도 가치의 팔찌를, 망설임 없이 내줄 정도라면 말이다.승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운시사 부처님이 진짜 이렇게 영험한 거야? 원하는 대로 다 떨어지다니... 나도 시간 내서 한 번 가 봐야겠어.”해인이 웃으며 물었다.“근데 네 사촌 오빠는 아직 안 와?”원래 오늘 저녁은 승아의 사촌오빠와 얼굴을 트고 다음 날 바로 구청에 가기로 한 자리였다.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그렇다고 약속을 없던 일로 하긴 애매했다.처음엔 거절했다가 설득 끝에 겨우 응해 준 사람인데, 이쪽에서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이 자리는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그냥 사람 하나 알아 간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나도 잘 모르겠어.”승아가 말했다.“곧 오지 않을까?”그때, 목까지 오는 폴라 티를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이름처럼 단정하고 차분한 인상의 허재준은 첫인상부터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겼다.재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안녕하세요. 허재준입니다.”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받았다.“강해인이에요.”“길이 막혀서 조금 늦었습니다.”재준이 말했다.“뭐 드시고 싶으세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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