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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eur: 오월이
해인은 뒤로 밀리면서 중심을 잃었다.

태겸은 뒤쪽에서 급히 끼어들었고, 그때의 반동으로 깨진 유리컵의 날이 해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통증이 너무나 선명해서 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주 앞을 가로막고 선 태겸이 난처한 표정으로 해인을 바라봤다.

“이게 뭐 하는 거야? 예주는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

그 말을 듣자 해인은 쥐고 있던 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눈가가 젖은 채 태겸을 향해 말했다.

“내가 난리야? 고태겸, 하예주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한 번이라도 들어볼 생각은 있어?”

예주는 겁에 질린 얼굴로 태겸 쪽으로 몸을 붙였다. 눈은 붉게 충혈돼 있었고, 크게 상처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요.”

예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태겸 오빠가 언니한테 너무 잘해 주시는데, 언니는 내내 차갑기만 하시길래요. 마치 오빠가 뭘 잘못한 사람처럼 굴잖아요.”

“그래서 언니한테 지금의 태겸 오빠를 소중히 하시라고 말했을 뿐인데, 갑자기 화를 내시더니 저한테 손을 올리셨어요.”

의지할 곳 없는 예주와 맞서 서 있는 명문가 출신의 해인.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약해 보이는 쪽으로 쏠렸다.

예주는 그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뺨의 부기와 손바닥 자국은, 해인을 몰아붙이기에 충분했다.

예주는 일부러 얼굴을 가리는 듯하면서도 자국이 보이게 손을 댔다.

해인의 시선이 가라앉으면서 눈동자 깊은 곳에서 냉기가 스며 나왔다.

“그래, 내가 눈앞의 사람을 소중히 안 여긴다 치자.”

해인은 예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근데 너랑 고태겸은 무슨 사이인데 네가 나서서 걱정을 해?”

말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고태겸이 나한테 잘하는 거, 네가 불만이면 그냥 참고 있어. 내가 고태겸 아내인 한... 하예주, 너는 절대 떳떳해질 수 없어.”

그 말은 예주뿐 아니라 태겸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체면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배신당한 입장인 해인은 더 이상 태겸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

더 아픈 건, 태겸이 해인이 무엇을 가장 아파하는지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말이 해인의 마음을 찌르는지, 태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같은 지붕 아래서 수년을 보냈고, 서로의 시간을 나눴다.

그런데 태겸은 예주 곁에 섰다.

해인의 마음을 밟고, 새로운 사람을 보호하는 쪽을 택했다.

해인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 공간의 공기마저 숨 막히게 느껴졌다.

해인은 한 발짝 물러섰다.

등이 차가운 벽에 닿았다.

입술 사이로 낮은 말이 흘러나왔다.

“진심을 배신한 사람은... 천 번은 찔려야 해.”

실내는 따뜻했지만, 해인은 몸속까지 서늘하며 속눈썹이 내려앉은 눈가에는 빛이 맺혀 있었다.

그건 분명, 눈물이었다.

그 모습을 본 태겸의 가슴이 이유 없이 조여 왔다.

방금의 말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은 태겸은 손을 뻗어 해인을 붙잡으려 했다.

태겸은 해인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해인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마저 다른 가정을 꾸렸을 때, 커다란 강씨 집안에 해인 혼자 남았을 때도, 해인은 울지 않았다.

태겸이 해인을 데리러 갔던 날, 불이 꺼진 집 안에서 해인은 맨발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도 태겸이 ‘우리 집으로 갈래’라고 물었을 때 해인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난 너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때의 태겸도 알고 있었다.

해인은 태겸의 무엇도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정해진 혼약, 해인의 아버지와 오빠들이 태겸의 집안과 얽혀 세상을 떠난 일,

그 모든 것들이 태겸에게는 빚처럼 남아 있었다.

해인의 어머니가 떠난 일이 해인에게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도, 태겸은 알고 있었다.

해인은 버려진 쪽이었다.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울지 않던 해인이...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태겸의 넓은 손이 해인의 어깨 위에 얹혔다.

태겸은 더 이상 해인을 몰아붙일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해인아, 네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아.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이렇게까지 예주를 몰아세우는 건, 솔직히 보기 좋지 않아. 불만이 있으면 오늘 밤 집에 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이럴 필요는 없잖아.”

해인은 마치 전기가 튄 것처럼 태겸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차갑게 말이 튀어나왔다.

“하예주는 체면도 안 챙기는데, 내가 왜 체면을 챙겨야 해?”

태겸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해인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고태겸, 우리는 이제 같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가 아니야.”

그 말을 남긴 채, 해인은 문을 열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며 복도의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차가운 기운이 얼굴을 스치자 태겸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해인은 뒤돌아보지 않고 멀어지고 있었다.

...

해인은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 다른 룸 앞에 섰다.

문은 열려 있었고, 해인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화장실로 향했다.

사실 강씨 집안과 고씨 집안은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아버지가 이 결혼을 정할 때만 해도 가장 소중한 딸이 이런 모욕을 겪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해인은 세면대 옆에서 휴지를 두 장 뽑아 눈가를 눌렀다.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억지로 진정시켰다.

‘울긴 왜 울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남자 하나 때문에 울면, 내 눈물이 아깝잖아.’

‘내 인생은 누군가의 연인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야.’

‘지금 중요한 건, 회사를 빨리 정리하는 것...’

‘YD그룹 문제만 깔끔하게 끝내면, 고태겸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어.’

해인은 화장실에 10분 가까이 머물며 숨을 고르고 나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룸 안의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소파 위에 아까까지 없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해인은 걸음을 멈췄다.

오늘 만남은 만약을 대비해 약속 시간보다 정확히 한 시간이나 일찍 잡았다.

태겸에게 붙잡혀 시간을 조금 쓰긴 했지만, 아직도 약속 시각까지는 삼십 분 이상 남아 있었다.

이 룸이 맞다는 것도 분명했다.

‘보통은 돈을 내는 쪽이 늦게 오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KH그룹 쪽 사람이 벌써 와 있다고?’

해인은 조심스럽게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는 등을 기대고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대화창이 열린 화면에서 손가락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해인은 남자의 앞으로 돌아가 말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저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멈춰 선 해인의 붉게 충혈된 눈이 휘둥그레졌다.

‘KH그룹 대표... 한, 한유호?’

해인은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놀란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 기척을 느낀 듯, 한유호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맞닿았다.

유호의 검은 눈은 차분하게 해인을 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정제된 분위기, 그런데 왼쪽 눈꼬리 아래 자리한 작은 점 하나가 전체 인상을 묘하게 흔들었다.

단정한 남자의 얼굴에 설명하기 어려운 끌림이 섞여 있었다.

유호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손끝에는 언제 집었는지 모르지만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다.

해인이 맞은편 소파에 앉자, 유호의 시선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해인에게로 돌아왔다.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건네는 말처럼.

“내가 싫어?”

“왜 굳이 그렇게 멀리 앉아. 이쪽으로 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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