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우는 목젖이 살짝 떨리면서 차창을 내렸다.창가에 선 신예린은 옷깃을 꼭 움켜쥔 채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동자에는 맑고 깊은 물기가 가득 번져 있었다.신예린은 망설임 끝에 몸을 숙여 창문 안으로 살짝 고개를 들이밀었다.순간, 은은한 향기가 스쳤고 이어 주시우의 입술 위에 가볍고도 짧은 입술이 살포시 내려앉았다.주시우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신예린은 이미 몸을 바로 세우고 있었다.“교수님이 말한 대로 했어요.”신예린이 낮게 속삭인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가득했고 신예린은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재빨리 돌리면서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남겨진 주시우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무심결에 손끝을 입술에 가져갔다.아직도 신예린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잠시 후, 주시우의 단정한 얼굴은 천천히 환해졌고 억눌러 온 미소가 입가에 번졌고 눈빛마저 기쁨으로 물들어 가는 듯했다.운동장 안은 이미 인파로 가득했고 행사에는 열 가지가 넘는 게임이 준비되어 있었다.각 게임을 통과하면 작은 선물을 받을 수 있었고 학생들은 긴장 속에서도 너나없이 몰려들어 참여하고 있었다.신예린은 송지유에게 메시지를 보냈지만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아마 게임에 정신이 팔려 휴대폰 볼 틈조차 없는 모양이었다.송지유는 원래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만 신예린은 몸 상태 때문에 굳이 인파 속으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괜히 같이 다니면 송지유가 마음껏 즐기지도 못할 테니 신예린은 혼자 한적한 구석에 있는 작은 게임 부스를 골라 참여했다.잠시 뒤, 게임을 통과한 신예린은 작은 인형 열쇠고리를 가졌고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여도준은 차갑게 입꼬리를 비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신예린, 이제 네가 웃을 날은 끝이야.’여도준은 험살 궂은 표정으로 미리 준비해 둔 사진을 학교 커뮤니티에 올렸다.순식간에 조회수가 치솟았고 댓글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달리기 시작했다.[어, 이 사람 지난번 해외에서 온 교수님 아니야? 옆에 있는 저
여학생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여도준의 눈빛 속에서 스치듯 번진 음흉한 빛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신예린, 며칠 뒤 기말고사 주간 스트레스 해소 행사에서 네가 무너질 거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전교생 앞에 네가 다른 사람 가정을 파탄 낸 여자라는 사실을 폭로할 거야. 모두 네 진짜 얼굴을 보게 될 테지.’의대에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전통이 하나 있었다. 매 학기 기말고사 주간이 되면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긴장을 풀고 불안을 덜어 주겠다며 ‘스트레스 해소, 불안 거부’라는 주제로 행사를 열고는 했다.형식상으로는 자율 참여였지만 사실상 분위기에 떠밀려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예린은 원래 갈 생각이 없었으나 학생처 담당자가 반강제로 참가자 명단을 채우라며 부탁해 오자 마지못해 참가 명단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하루 오후쯤이야. 별일 있겠어.”신예린도 그렇게 생각하며 수락했다.저녁 식사 자리에서 신예린은 무심코 주시우에게 물었다.“교수님은 학교 행사 같은 거에도 참여하세요?”“행사?”주시우가 눈길을 들어 바라봤다.그제야 신예린은 주시우가 이번 학기에 막 복귀한 걸 떠올렸고 아마 이런 학교의 전통 행사는 잘 모를 것이다.“매 학기 기말고사 직전에 스트레스 해소 행사를 해요. 그거 끝나면 바로 시험 보고 방학 들어가고요.”“교수도 참여해야 하나?”“자율이에요. 교수님도, 학생들도 전부요...”신예린은 속으로 덧붙였다.‘비록 저는 절대 자율 아니지만...’“나는 딱히... 스...”주시우는 스트레스라는 단어를 말하려다 멈추고 신예린을 똑바로 보았다.“너는 참여해?”신예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언제지?”“토요일 오후요.”“사람 많은 자리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내가 학교까지 데려다줄게. 난 그 시간에 연구실에서 일 좀 보다 네 행사 끝나면 같이 저녁 먹자.”“정말요?”신예린의 눈매가 순간 부드럽게 휘어졌다.“교수님은... 역시 너무 좋아요.”주시우는 신예린의 그 무심한 애교 섞인 말투가 사랑스러워 견딜 수
기말시험이 다가오자 교실 분위기까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신예린은 고개를 숙이고 책 속에 몰두해 있었고 창밖에서는 누군가가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도준아.”한 여학생이 창가에 서 있는 여도준에게 조심스레 다가왔다.잘생긴 데다 공부까지 잘하는 여도준을 좋아하는 여학생은 한둘이 아니었고 눈앞의 이 여학생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성적은 평범하고 외모도 그저 그런 편이라 늘 멀리서만 바라볼 뿐 감히 다가설 용기조차 없었던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뜻밖에도 여도준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여도준은 쑥스러워하는 여학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그 말에 여학생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말만 해.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무조건 도와줄게.”여도준이 몸을 가까이하자 그녀의 얼굴은 점점 붉어졌다. 그리고 여도준이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놀란 눈빛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여도준은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도와줄 거지?”토끼처럼 놀란 눈망울에 얼굴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채 여학생은 겨우 입을 열었다.“응, 응...”한편, 신예린은 여전히 집중해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한 여학생이 책상 옆에 서서 말을 걸었다.“예린아, 나 모르는 게 있는데 좀 알려 줄 수 있어?”평소에도 질문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시험이 임박한 지금은 더더욱 그럴 때였기에 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어디 보자.”여학생은 기쁜 얼굴로 책을 펼쳐 보이며 문제를 짚었고 신예린은 훑어보자마자 금세 이해했고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학생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이내 환한 얼굴로 말했다.“고마워, 예린아. 네가 설명해 주니까 이제야 알겠어. 진짜 대단하네.”신예린은 민망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나도 이제 막 이해한 거야.”여학생은 책을 정리하며 자리를 뜨려다가 그만 옆에 있던 물병을 실수로 쳐버렸다. 병뚜껑이 열리며 물이 쏟아져 책상 위를 흥건히 적시고 물줄기는 신예
누군가가 신예린에게 주시우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신예린은 이미 마음속에 답이 있었다.신예린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주 교수님은 바다 같아요. 저한테 있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두 다 품어 줘요. 교수님의 곁에 있으면 교수님은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거든요.”화려한 말 대신 담백하게 내뱉은 진심이었다.건강한 사랑은 사람을 더 강하게 더 자신감 있게 만들어 주었고 신예린은 주시우와 함께하면서 조금씩 더 용기를 얻고 있었다.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얼굴은 붉게 물들었지만 신예린은 끝내 참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I love him.”그 순간, 주시우의 눈빛이 깊어지며 불길처럼 타올랐고 곁에 있던 앤드루가 장난스럽게 거들었다.“시우야, 신예린 씨가 저렇게 고백했는데 키스라도 해 줘야지.”‘요즘 사람들은 왜 이렇게 우리한테 키스를 부추기는 거지...’신예린은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때, 주시우의 길고 고운 손가락이 신예린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깊고 어두운 눈빛이 마치 영혼을 파고드는 듯 신예린을 향했고 주시우의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Me too.”주시우의 거친 숨결에 실려 전해진 고백은 신예린의 가슴을 단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이윽고 내려온 주시우의 입술은 깊고 단단하게 신예린의 입술을 파고들었다.“와우!”앤드루의 장난스러운 환호가 귓가에 울렸지만 신예린은 오직 주시우의 품과 입맞춤에만 온몸을 맡겼다.손은 본능적으로 주시우의 옷깃을 움켜쥐었고 머릿속엔 폭죽이 터지는 듯 벚꽃 불꽃이 흩날렸다.‘이 순간이라면 영원히 빠져들어도 좋아.’앤드루를 배웅할 때까지 신예린의 얼굴은 여전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타.”주시우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얼굴로 차 문을 열어 주었다.‘아니, 왜 나만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르는 거야...’신예린은 속으로 발끈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차는 조용히 집을 향해 달렸다.“앤드루 교수님은 이번에 학회
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앤드루 교수는 아직 자리에 앉기도 전에 신예린의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혹시 임신하신 건가요?”신예린은 순간 당황스레 주시우와 눈을 마주쳤고 주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네.”그러자 앤드루 교수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서툰 말투로 외쳤다.“아주... 굿!”그러자 주시우와 신예린의 입가에 동시에 웃음이 번졌다.잠시 뒤 음식이 하나둘씩 차려졌고 앤드루는 젓가락을 들며 연신 감탄했다.“정말 맛있군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이렇게 훌륭한 화국 요리는 처음입니다.”주시우가 옆에서 조용히 덧붙였다.“앤드루 교수님의 부모님께서 요리를 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죠.”신예린은 궁금해졌다.“혹시... 오래전에 아르덴으로 이주하신 건가요?”앤드루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 부모님은 1960년에 아르덴으로 건너가서 거주하셨어요. 하지만 화재 사고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뜻밖의 사연에 신예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고 앤드루는 잠시 추억에 잠긴 듯 눈빛을 내리깔았다.“마지막 순간까지도 부모님은 고향의 음식을 그리워하셨습니다. 그 맛이야말로 집의 향기라고 늘 말씀하셨죠. 어르신들은 줄곧 고향을 그리워하는 거죠.”앤드루 교수는 본래 말솜씨가 좋았다. 오랜 세월 해외에서 지내서인지 성격은 밝고 호탕했고 주시우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사제지간이라기보다는 오래된 친구 같았다.두 사람의 대화 주제도 넓게 뻗어 나갔다. 학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의학의 미래, 그리고 오늘날의 의료 환경까지 두 사람은 거침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옆에서 듣고 있던 신예린은 숨소리조차 줄이며 집중했고 젓가락을 들던 손마저 멈춘 채 귀를 기울였다.주시우는 신예린의 그런 모습을 곁눈질로 보며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이윽고 신예린의 앞에 반찬을 놓아 주고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빨리 음식을 먹으라는 듯 눈짓을 건넸다.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앤드루가 농담 섞인 미소를 지으며
앤드루 교수와 함께 호텔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막 계단을 오르던 앤드루가 두 사람을 발견했다.“드디어 만나네요.”앤드루는 영어로 환하게 인사를 건네며 성큼 다가와 신예린을 끌어안더니 자연스럽게 뺨을 맞대는 인사를 했다.순간 신예린은 굳어 버린 듯 얼어붙었다.그 모습을 본 앤드루는 바로 눈치를 채고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쏘리, 습관이라 그만...”신예린은 얼굴을 붉힌 채 손사래를 치며 연달아 말했다.“아, 괜찮아요. 전혀 괜찮습니다.”신예린은 수줍어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 번졌고 앤드루는 곁에 있던 주시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Your wife is so lovely!”주시우의 입가에도 은은한 웃음이 번졌다.“I agree with you.”뜻밖의 칭찬에 신예린은 더더욱 얼굴이 화끈거렸다.그때 주시우가 정중히 소개했다.“제 아내, 신예린입니다.”“안녕하세요. 신예린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앤드루라고 합니다.”앤드루는 이번엔 서툰 한국어로 자신을 소개하며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신예린이라고 합니다.”“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주시우가 부드럽게 권유했고 세 사람은 함께 안으로 향했다.한편, 여도준은 친구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 도착했다.마침 전화가 걸려 와 여도준은 친구들에게 먼저 들어가 있으라 하고 혼자 밖에 남았다.전화를 끝내고 고개를 돌린 순간, 바로 옆에 있는 고급 호텔 쪽에서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저건... 신예린?’여도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신예린이 낯선 남자와 함께 서 있었고 그 남자가 몸을 숙이며 신예린과 뺨을 맞댔다.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여도준은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고 화면을 향해 찍었다.기둥 때문에 화면 속에는 두 사람의 모습만 어렴풋하게 잡혔지만 여도준의 심장은 심하게 요동쳤다.급히 호텔 안으로 들어가 봤지만 넓고 화려한 로비에는 이미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손님, 예약하셨습니까?”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