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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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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포인트 제510화
도지윤은 자리에 앉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키보드를 두드렸다.신예린의 차가운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일부러 그런 거죠?”신예린이 물었다.“뭐가요?” 도지윤이 무심하게 말했다.“11호 환자에 대해선 한 번도 말한 적 없잖아요.”도지윤은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다시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아, 내가 깜빡했나 보네요.”신예린이 수술에 들어가기 전 둘은 한 시간 가까이 같은 연구실에 있었는데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니.게다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도지윤의 태도를 보며 신예린이 믿을 리가 없었다.“도지윤 씨가 나한테 불만이 있는 건 알지만 어떻게 환자 일로 장난을 쳐요? 의사로서 책임감이 있는 거예요?”오만한 이석훈도 처음엔 신예린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어도 업무적으로 방해하진 않았다. 가장 큰 피해자는 환자라는 걸 아니까.“당신이 뭐라고,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비난해요? 내가 책임감이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도지윤이 비아냥거렸다.“그래요. 그쪽만 책임감 있네요. 하루 종일 착한 척하면서 동료들이 진짜 당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요? 위선자.”말을 마친 도지윤은 신예린이 자기를 보며 웃는 게 보였다.어딘가 미묘한 웃음이었다.“뭐가 웃겨요?” 도지윤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알겠네요.” 신예린이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날 질투하는 거네요. 내가 그쪽보다 사람들에게 인기도 많고 뛰어나니까.”그 말이 도지윤의 허를 찌른 듯 표정이 미세하게 바뀌더니 곧바로 다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쪽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게 뭐요? 내 말 한마디면 병원에서 쫓겨날 텐데.”또 삼촌의 신분을 이용해 사람을 압박하고 있었다.신예린이 조롱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그쪽이라면 못나서 삼촌 얼굴에 먹칠할까 봐 걱정할 텐데, 그쪽은 오히려 그분 이름을 내세워 횡포를 부리네요.”도지윤은 분노에 찬 얼굴로 말했다. “당신...”그때 연구실 문이 벌컥 열리며 과장 진해성이 문 앞에 나타났다. 그의 시선이 신예린과 도지윤을 훑더니
터닝포인트 제509화
환자 보호자가 고개를 돌리자 신예린은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겪은 얼굴에 눈물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몇십만 원이 누구에게는 한 끼 밥값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목숨을 구하는 돈이다.보호자는 신예린을 보자 입술을 달싹였다.막상 신예린을 보니 조금 전 하려던 말을 꺼낼 수 없었다.입원한 뒤로 신예린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전부 지켜보았다. 그녀는 집안 사정이 어렵다는 걸 알고 가능한 치료비를 절약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가족이 저단백혈증이라고 하니 신예린은 알부민 수혈을 권했다. 빨리 낫는다는 말에 이를 악물고 동의했다.며칠 수혈하니 확실히 호전되었지만 돈이 문제라 계속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의사에게 분명히 말했는데도 왜 계속 수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병 치료에 정말 필요한 거라면 미리 얘기를 해야 했는데 잠시 외출했다가 병실에 들어서니 이미 알부민이 걸려 있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들어가는 게 모두 돈이었다.오랜 압박감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그녀는 항의하려다 감정이 폭발해 많은 사람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신예린이 보호자에게 다가가 흰 가운 주머니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건넸다.상대가 받지 않았지만 신예린은 개의치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주머니, 돈 버는 게 쉽지 않다는 거 잘 알아요. 그동안 저희가 아주머니를 위해 비용을 아껴왔다는 것도 잘 아실 텐데요. 그러니 저희가 피땀 어린 돈을 뜯어 갈 일은 없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저뿐만 아니라 아주머니를 도왔던 간호사들도 마음이 상할 거예요.”보호자는 눈빛이 흔들리며 간호사 스테이션에 서 있는 몇몇 간호사들을 바라보았다. 죄책감과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그리고 약을 중단하는 것에 대해선 들은 기억이 없는데 저한테 직접 말씀하셨어요?”보호자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다른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분이 전해 주겠다고 하셨거든요.”신예린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어느 의사 선생님이에요?”보호자가 의사의 이름을 몰라 난처해하던 찰나 한 사람이 연구실에서 걸어
터닝포인트 제508화
“신 선생님, 4호 환자가 찾아요.”연구실 호출기에 간호사의 목소리가 울리자 신예린은 일어나서 연구실을 나섰다.그녀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되었다.“신 선생님, 같이 구내식당에서 식사하죠.” 이정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요.” 신예린이 대답했다.“밀크티 마실래요? 갑자기 마시고 싶어서요. 제가 사 드릴게요.”“지난번에 다이어트한다고 하지 않았어요?”“에이,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그들은 나란히 걸어 나갔다. 연구실의 다른 사람들도 짝을 지어 하나둘씩 식사하러 갔다.오직 도지윤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배경 때문에 먼저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을 터놓고 지내지는 않았다.그러나 신예린은 의사들도 좋아하고 간호사들도 같이 일하고 싶어 하며 함께 다니길 좋아했다.분명 먼저 온 사람은 도지윤이고 사람들과 함께 지낸 시간도 더 길었다.다만 신예린이 자신보다 가식을 잘 떨고 너그러운 척, 배려 깊은 척 굴어 환자들마저 칭찬이 자자한 거라고 생각했다.도지윤이 콧방귀를 뀌었다.“선생님.”이때 문에서 한 목소리가 들리며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무슨 일이에요?” 도지윤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신 선생님 계세요?”‘있는지 없는지 보면 모르나.’도지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당연히 입 밖에 꺼내지는 않았다.“없어요.”“아, 죄송해요.” 여자가 가려 하자 도지윤이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잠깐만요.”여자가 고개를 돌렸다.도지윤은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일로 찾으세요? 식사하러 가셨는데 돌아오시면 전해 드릴게요.”여자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우리 집 영감 알부민 주사 좀 끊어줄 수 없을까요? 저희 집 사정이 어려워서 한 병에 몇십만 원 하는 걸 좀 아끼고 싶어서요.”“몇 호죠?”“11호 환자요.”“알겠어요. 신 선생님이 돌아오시면 중단하라고 전할게요.”“네, 수고하세요.”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터닝포인트 제507화
신예린의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주혁재가 최근 낚시에 푹 빠져 장비를 사려 하니 주시우와 신예린은 며칠 동안 알아본 끝에 생일 선물로 낚시 도구를 준비했다.주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주아윤은 참지 못하고 초인종을 눌렀다.역시나 주혁재가 문을 열었고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주아윤의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할아버지 생신 축하해요. 늘 건강하시고 모든 일이 잘 풀리며 소원 성취하시고 삶이 웃음과 기쁨으로 가득하길 바라요.”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그림과 꽃다발도 함께 건넸다.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련의 행동에 신예린은 멍하니 보기만 했다.그녀는 생일 축하 노래만 가르쳐줬는데 이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주시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윤이가 올해 세뱃돈을 더 많이 받겠네.”역시나 주혁재는 표정이 환해지며 그림과 꽃을 받아 들고 한참을 살펴본 뒤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었다.“할아버지가 여자에게서 꽃을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네.”그러면서 주아윤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고마워, 아윤아. 할아버지 마음에 쏙 들어.”주아윤도 쪽 할아버지 볼에 입 맞추자 주혁재는 환하게 웃었다.“쩝, 세뱃돈 또 올랐네.”신예린은 자꾸만 투덜거리는 주시우의 모습이 웃겨서 그를 툭 건드렸다.그때 김수희가 걸어 나왔다. “그러면서 은근히 날 저격하네요. 내가 꽃 선물한 적 없어요?”그 말을 들은 주혁재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브로콜리가 꽃이야? 게다가 직접 산 것도 아니잖아. 너희들이 얘기 좀 해봐.”주혁재는 신예린과 주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10, 20년 전쯤에 내가 농담으로 네 엄마는 나한테 꽃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다고 했어. 그때 우리가 밥을 먹고 있었는데 브로콜리를 접시에 가득 펼쳐놓고는 나보고 꽃이라면서 나한테 꽃을 줬대. 이게 말이 되니?”“왜 안 돼요? 보기에도 좋고 먹을 수도 있으니 얼마나 실용적이에요.”김수희가 당당하게 말했다.“너희 둘도 그렇게 생각하지?”신예린과 주시우는 이
터닝포인트 제506화
주시우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은 조용했다. 거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탁자 위에는 그림 한 점이 놓여 있었는데 솔직히 사람이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을 뿐 누구를 그린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주시우는 그것이 주아윤이 그린 할아버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옆에는 색종이로 만든 꽃도 있었는데 솜씨는 투박했지만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느껴졌다.주시우는 미소 지으며 방으로 가서 살며시 문을 열었다. 침대 위의 두 사람은 눈을 감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그는 살금살금 옷장을 열어 잠옷을 꺼낸 뒤 방을 나서기 전에 문을 살짝 닫아두었다.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주시우는 침대 곁에 서서 한동안 모녀를 바라보았다.예전에는 모든 에너지를 공부와 일에 쏟았고 그걸로 충분했기에 당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건 딱히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이제 아내와 아이가 생기고 나서야 다르다는 걸 느꼈다.늘 걱정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생겼다. 일하는 중 틈틈이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주시우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 신예린의 등 뒤에 있는 틈새에 누웠다.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으려던 순간 나른하게 잠긴 신예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요?”말하며 신예린이 주시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주시우는 이렇듯 무의식적인 신예린의 행동이 좋았다. 친근하고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온전히 그에게 의지하는 모습이.주시우가 신예린을 안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내가 깨웠네.”신예린이 반쯤 눈을 뜨며 물었다. “몇 시에요?”“12시 다 되어가.”“이렇게 늦게 돌아오다니, 고생했어요.”신예린은 몽롱한 상태로 눈을 감은 채 주시우를 토닥거렸다.“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아윤이 재우다가 나도 잠들었어요.”주시우가 가볍게 웃었다. “그럴 수 있어. 나도 예전에 자주 그랬어.”“네.”나지막이 들리는 신예린의 목소리는 무척 졸린 듯했다.“자.” 주시우가 부드럽게 말했다.그의 중저음 목소리는 최고의 자장가였다.신예린은 더 이상 말
터닝포인트 제505화
“그럼 오늘 저녁 뭐 먹어요?”“아윤이는 뭐 먹고 싶어?”주아윤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감자튀김이요. 햄버거도 먹고 싶어요.”신예린이 아이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콜라도 한잔?”주아윤이 환호했다.“좋아요. 엄마 최고!”음식을 포장해 집에 돌아와 신예린과 주아윤이 한창 먹고 있을 때 주시우가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아빠.”신예린이 전화받자 주아윤이 재빨리 다가왔다.주시우는 사무실에 있었고 안경을 쓴 채 렌즈 너머로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아윤아, 밥 먹었어?”주시우가 물었다.“먹고 있어요.” 주아윤이 말하며 손에 든 햄버거를 카메라 앞에 내밀었다.주시우는 주아윤이 이런 패스트 푸드를 먹는 걸 딱히 말리지는 않았다. 아이의 천성을 억압하지 않듯이.“햄버거네. 맛있어?”“맛있어요.”주아윤이 대답하며 말했다. “아빠도 한 입 먹어요.”주시우는 아주 협조적으로 카메라를 향해 한 입 베어 무는 동작을 취하더니 씹는 척하며 말했다.“정말 맛있네.”옆에 있던 신예린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은 먹었어요?”“방금 먹었어.”“언제 돌아와요?”주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왜? 나 보고 싶어?”“보고 싶어요. 너무너무 보고 싶어요.”주아윤이 옆에서 소리쳤다. “아빠, 나도 보고 싶어요.”주시우가 웃으며 말했다. “1시간 정도 더 걸릴 거야. 내가 너무 늦으면 먼저 자.”“그래요.” 신예린이 대답했다.“아빠, 엄마가 저녁 먹고 나면 할아버지 생신 선물 같이 만들자고 했어요.”“아윤이는 무슨 선물 만드는데?”“그림이랑 꽃이요.”“그래, 아윤이 파이팅. 할아버지가 네 선물 받으면 분명히 기뻐하실 거야.”주아윤은 그 장면을 떠올린 듯 얼굴에 더 찬란한 미소를 지었다.“됐어요. 이제 얘기 그만하고 얼른 일 마친 다음 일찍 집에 와요.”“그래.”주시우는 신예린이 영상 통화를 끊으려는 걸 보고 덧붙였다. “뽀뽀.”신예린이 퉁명스럽게 주시우를 흘겨보며 말했다. “며칠 만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