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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귀차니즘
주시우는 신예린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결정한 거야?”

“네.”

신예린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했어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얘기해.”

“저 결혼한다는 거, 저희 부모님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고 싶어요.”

주시우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야. 결혼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야. 비록 나는 한동안 해외에서 지냈지만 우리나라에서 결혼하려면 먼저 양가 부모님을 뵙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 그리고 언제 결혼할지, 예물은 어떻게 할지도 부모님과 다 상의해야 해. 그게 일반적이야.”

신예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만약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아시면 저희 부모님께서는 무조건 아이를 지우라고 하실 거예요.”

신경무는 체면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온갖 비난을 견뎌야 할 것이다.

주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예린은 주시우가 마음을 바꿀까 봐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전 그냥 당장 결혼하고 싶어요.”

신예린은 결국 울먹거리며 말했다.

“교수님, 제게 필요한 건 집이에요.”

신예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주시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신예린이 홀로 외롭게 어둠 속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주시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신예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주시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단 내 카톡 추가하고 네 기본적인 개인정보들 나한테 보내줘. 일단은 시간부터 정한 뒤에 다시 얘기하자.”

주시우가 동의하자 신예린은 기쁘게 웃어 보였다.

“네.”

“저녁이라서 밖은 좀 추울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

주시우는 그녀가 밖에 있다는 것도 알아맞혔다.

신예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일찍 쉬고 좋은 꿈 꿔.”

그녀의 착각일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주시우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했다.

그 뒤로 신예린은 그날 그에게 전화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신예린은 용기를 내어 주시우의 손을 잡았고 주시우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녀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

월요일 오전, 신예린은 휴가를 신청한 뒤 주민등록증을 챙겨서 나섰다.

신예린의 주민등록증은 임정희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어제 신예린은 학교로 돌아가기 전 임정희에게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했다. 학교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이다. 당시 신예린은 임정희가 무슨 일로 그러냐고 물을까 봐, 혹시라도 거짓말인 걸 들킬까 봐 매우 긴장했다.

검은색 차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길가에 멈춰 섰다. 주시우는 거울을 통해 신예린을 보더니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신예린은 주시우를 본 순간 흠칫했고, 그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시우는 조수석 옆에 서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그를 더욱 늘씬해 보이게 했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눈빛이 유독 매력적이었다.

주시우는 한껏 차려입었는데 그와 반대로 신예린은 누가 봐도 대학생 같아 보였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제대로 꾸미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주시우도 두 사람의 차이를 의식한 건지 신예린과 자신의 옷차림을 번갈아 보다가 싱긋 웃어 보였다.

“내가 너무 차려입었네.”

신예린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뇨. 제, 제가 차려입었어야 하는 건데... 지금 바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말을 마친 뒤 신예린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주시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에 신예린은 흠칫 놀라면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주시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주시우가 말했다.

“지금 가야 제때 도착할 수 있어.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늦을걸.”

신예린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건 해결하기 쉬운 문제야.”

주시우는 그렇게 말한 뒤 정장을 벗었다. 그는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두 개 정도 풀었다.

그러니 엄숙함이 줄어들고 섹시함이 더해졌다.

살짝 튀어나온 목젖, 쇄골, 그리고 그 아래...

신예린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뜨렸다.

“어때? 이제 덜 늙어 보이지?”

주시우는 신예린이 긴장한 걸 알아채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예린은 주시우가 매우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가 이런 농담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살짝 멈칫했다가 이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다고 해서 나이 차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이 있는 남자들은 모두 나이 얘기에 민감하다고 하니 말이다.

“늦겠다. 얼른 타.”

주시우는 신사처럼 차 문을 열었고 신예린은 감사 인사를 한 뒤 조수석에 탔다.

곧이어 주시우도 차에 올랐다. 그는 신예린에게 종이백을 하나 건넸다.

“아침이야.”

신예린은 주시우가 아침까지 준비해 줄 줄은 몰랐다. 오늘 그녀는 룸메이트가 다 외출한 뒤에야 외출할 수 있었고 그 탓에 학식도 먹지 못했다.

사실 학식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감히 가지 못한 것뿐이다.

“감사해요.”

신예린은 조심스럽게 종이백을 받았다.

“식기 전에 먹어.”

주시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신예린은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있다가 뭔가 떠올리고는 물었다.

“교수님은 아침 드셨어요?”

“응.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주시우는 핸들을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네.”

신예린은 짧게 대답한 뒤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다.

에그마요 샌드위치라서 느끼하지 않고 맛있었다.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 신예린은 우유를 마셨다. 그런데 빨대를 꽂는 순간 우유가 흘러나왔다.

‘티슈, 티슈...’

신예린은 차를 더럽히게 될까 봐 황급히 움직였다.

“티슈는 앞에 있는 수납함에 들어 있어.”

옆에서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하고 있는데 그녀가 티슈를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신예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납함을 열어 티슈로 손을 닦았다.

구청에 도착했을 때 신예린은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주시우는 신예린이 샌드위치가 들어있던 종이백을 구청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결론을 내렸다.

‘음, 입맛은 있나 보네. 아직 입덧이 심하지 않은가 봐.’

구청에 들어간 신예린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 멍해졌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주시우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사진을 찍을 때 웃으라고 하면 웃고, 개인 정보를 적으라고 하면 개인 정보를 적었다.

반대로 주시우는 모든 것이 익숙해 보였고 결국 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교수님, 혹시 전에 결혼하신 적 있으세요?”

당시 주시우는 두 사람의 서류를 구청 직원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신예린의 질문에 주시우뿐만 아니라 직원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

신예린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눈치채고 뻘쭘해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주시우의 질문에 신예린은 얼굴이 빨개진 채 말했다.

“굉장히 익숙해 보여서요.”

주시우는 웃었다.

“여기 직원분이 증명해 주실 수 있어. 나는 오늘 인생 처음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거야.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그렇게 보였나 보네. 나는 뭐든 미리 준비해야 하는 성격이거든.”

주시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예린을 힐끔 보았다.

“너는 예외지만.”

신예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교수님. 그런 말은 위험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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