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9화

Author: 귀차니즘
구청에서 나왔을 때 신예린은 그제야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이렇게 결혼을 해버리다니.’

게다가 상대는 교수님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시우를 보니 혼인관계증명서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물론 주시우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SNS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예린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의 SNS를 몰래 염탐했을 때 게시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시우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설명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려고.”

신예린은 멈칫했다.

“그러면 아저씨, 아주머님을 뵈어야...”

주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신예린은 그 순간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바꿨다.

“아버님, 어머님을 뵈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 어색해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급해할 것 없어.”

주시우는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지금 두 분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계셔. 당분간은 귀국하시지 않을 거야.”

“혹시 두 분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신예린이 걱정했다.

주시우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주시우의 부모님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귀엽다고 하셨어.”

“네?”

신예린은 고개를 들어 주시우를 바라보면서 눈을 빛냈다.

주시우가 설명했다.

“네 사진을 보셨거든. 귀여운 아이니까 나더러 잘 챙겨주래.”

신예린은 순간 얼굴을 붉혔다.

주시우는 빨개진 신예린의 귀 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오늘 약속 없으면 나랑 어디 좀 갈래?”

“어디로요?”

“가면 알게 될 거야.”

주시우와 함께 집을 보러 가게 된 신예린은 조금 당황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앞에서 걸으며 소개했다.

“이 집은 남서향이고 베란다에서 노을을 볼 수 있어요. 가장 편리한 점은 인테리어가 다 되어 있어서 바로 입주 가능하다는 점이에요. 가구는 두 분이 원하시는 걸로 구매해서 놓으시면 돼요. 저랑 같이 방을 구경해 보실까요?”

신예린은 주시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주시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

“조심해.”

주시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여긴 어떤 것 같아?”

“네?”

신예린은 멍한 표정이었다.

“이 집 마음에 들어?”

신예린은 더듬댔다.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주시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잘 모르겠다니. 앞으로 우리 집이 될 수도 있는데. 네가 그랬잖아. 집이 필요하다고.”

신예린은 그 순간 한 방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시우는 그녀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감정이 격해져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예린이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자 주시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안방이야. 꽤 넓은 편이고 옷장도 커. 하지만 화장대가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네가 원하는 걸 사면 돼. 그리고 작은 방은 앞으로 아이 방으로 쓰자. 그리고 아이가 좀 크면 여기서 같이 지내면 돼. 가장 작은 방은 서재로 쓰는 게 어때? 너는 그곳에서 공부하는 거야. 나는 저기 안쪽에 있는 서재를 쓸게. 앞으로 둘째가 생긴다면 방이 네 개짜리인 곳으로 이사를 가든가 이 방을 다시 침실로 바꾸든가 하자.”

주시우의 차분한 목소리가 신예린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신예린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주시우와 함께 서재에서 책을 읽고, 함께 아이들과 놀아주고, 함께 베란다에 앉아서 노을을 구경하고... 그런 나날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결국 주시우는 그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집을 구경하고부터 구매하기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뒤 주시우는 신예린을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가구는 작은 건 네가 고르고 큰 건 내가 고를게. 그리고 사기 전에 미리 너한테 의견을 물어볼 거야. 아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곳에서 살게 될 텐데 혹시 마음에 안 든다면 바로 얘기해.”

신예린은 조수석에 앉아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보름 안에 입주하게 될 것 같은데 미리 기숙사에 퇴실 신청하는 거 잊지 마.”

“네?”

신예린은 놀란 얼굴로 주시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주시우와 동거하게 되다니.

주시우는 신예린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넌 지금 임신해서 기숙사에서 지내면 불편할 거야. 나도 널 돌보기 힘들고.”

“저는 제가 알아서 챙기면 돼요.”

신예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봤는데 너희 기숙사 2층 침대라며? 위험할 것 같은데.”

신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시우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걱정되는 점이라도 있어?”

“친구들이 저희가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될까 봐 걱정돼요.”

주시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람들이 알면 안 돼?”

신예린은 그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서요.”

주시우는 학교의 유명 인사였다. 만약 다른 학생들이 그녀가 주시우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학교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다.

주시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결국 밝혀지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으니 당분간은 비밀로 하자. 하지만 기숙사에서 지내는 건 안 돼.”

주시우의 말대로 임신한 상태로 2층 침대를 사용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다.

신예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 근처에 도착하게 되자 신예린은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잠깐만.”

주시우가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주시우가 그녀를 향해 카드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신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받아.”

주시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난 네 남편이고 이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야.”

신예린은 도저히 그 카드를 받기 힘들었다.

주시우는 신예린의 불안감을 눈치채고 그녀를 위로했다.

“안에 천만 원밖에 안 들어 있어. 그냥 용돈으로 쓰면 돼. 넌 아직 어리니까 일단은 이걸 쓰고 앞으로 몇 년 더 지나면 네게 월급이 들어오는 카드를 맡길게.”

월급이 들어오는 카드를 맡기겠다니, 신예린은 그런 일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비밀번호는 이거야. 그냥 내 카드를 긁어도 되고 앞으로 여유 있을 때 네 카드로 계좌이체 해서 써도 돼.”

주시우의 다정함에 신예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가봐. 몸조심하고.”

그렇게 신예린은 넋을 놓은 채로 차에서 내린 뒤 주시우의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가 그녀가 살아온 지난 21년보다 훨씬 더 다채로웠다.

신예린은 다시 한번 자신의 손을 꼬집어 보았다.

‘악, 아파.’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카드를 본 신예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둘러 카드를 가방 안에 넣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

“예린아, 왜 화장대를 보고 있어?”

갑자기 다가온 송지유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신예린이 인터넷으로 화장대를 검색하는 걸 보고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하나 사두려고.”

신예린은 얼버무렸다.

“네 그 작은 방에 화장대를 놓겠다고? 책상 하나 놓는 것도 힘들 텐데 거기다가 화장대까지 놓을 거야?”

송지유는 신예린이 보고 있는 화장대를 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예쁜 걸 거기에 놓겠다니, 너무 아깝다.”

신예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어떤 게 더 예쁜 것 같아?”

송지유는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의 화장대를 골랐다.

“이거. 그런데 좀 비싸서 굳이 이걸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신예린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캡처해 두었다. 그녀는 비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예쁜 만큼 값을 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화장대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린아, 너 어제 어디 갔었어?”

송지유가 갑자기 물었다.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터닝포인트   제447화

    “읍...”신예린은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주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신예린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다쳤어? 아까 씻을 때 확인했는데 상처 없었잖아. 다시 봐줄게.”주시우는 말하며 당연하다는 듯 손을 뻗어 신예린의 바지를 잡으려 했다.‘이런 말을 왜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하는 건데...’신예린은 얼굴이 활활 달아올라 이를 악물 듯 말했다.“저 아무렇지도 않아요! 얼른 시트나 갈아요.”주시우는 신예린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천천히 일어섰다.“알았어. 지금 바로 갈아줄게.”그러다 시선이 문 쪽을 스치자,그곳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를 발견했다.“아윤아!”주시우가 놀란 목소리를 냈고 그 순간 신예린도 급히 고개를 돌렸다.잠옷 차림의 주아윤이 인형을 끌어안은 채 문 앞에 서 있었고 두 눈은 동그랗게 커져 있었다.‘끝났다... 들켰어.’신예린은 그 자리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아빠 엄마, 왜 제가 제 방에 있어요?”주아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그게... 에헴...”신예린은 머리끝까지 뻣뻣해져 억지 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홱 돌렸다.마치 수업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하는 학생처럼 혹시라도 주아윤의 질문이 자신을 향할까 두려워서였다.주아윤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이번에는 아빠를 바라봤다.주시우는 잠시 눈빛을 흔들더니 곧 태연하게 설명했다.“아빠가 침대 시트를 갈아야 해서 잠깐 아윤이를 방에 데려다준 거야.”주아윤은 방 안을 둘러보았고 반쯤 갈아진 시트가 눈에 들어오자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또 시트 더럽혔구나?”신예린은 뒷모습으로만 대응하면서 속으로 구멍이라도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었다.주시우는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담담히 대답했다.“응.”“아빠, 제가 도와줄게요!”주아윤은 인형을 꼭 안은 채 총총 달려왔다. 그 모습이 귀엽고 엉뚱해 웃음이 터질 지경이었다.“괜찮아. 넌 엄마 옆에 가 있어.”주시우는 부드럽게 말했다.주아윤은 얌전히 신예린 쪽으로 가서 안겼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 터닝포인트   제446화

    신예린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디지 못하고 마치 화풀이하듯 주시우의 어깨를 꾹 깨물었다.“으음...”낮게 신음을 흘린 주시우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물어뜯는 게 좋아?”이런 때 나오는 말은 뭐든 곧장 엉뚱한 쪽으로 연결되기 마련이었다.신예린의 뺨은 금세 불길처럼 달아올랐다.주시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귓가를 울렸다.“입 뗄 생각은 하지 마.”겹치는 그림자와 거칠어지는 호흡이 온몸을 데워 왔다.신예린은 주시우의 목에 매달려 스스로 손등을 물고 목구멍에서는 숨죽인 신음이 흘러나왔다.한바탕이 지나고 난 뒤, 깨끗이 씻은 신예린은 힘이 풀린 채 의자에 늘어져 앉아 주시우가 침대 시트를 갈아엎는 모습을 지켜봤다.방 안에는 아직 달콤하고도 진한 공기가 감돌았다.허리를 굽혀 시트를 팽팽히 펴는 주시우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한결 여유롭고 옆모습에는 은근한 미소까지 번져 있었다.‘이제와서 정상적인 사람 같긴 하네... 아까 짐승처럼 날뛰던 모습은 어디다 숨겼대.’신예린은 속으로 투덜댔다.“창문 좀 열어서 바람 들여요.”신예린은 게으른 투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금방 할 게.”주시우가 대답했지만 신예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불평했다.“보세요. 자기 좋을 때만 바로바로 대답하고 제가 뭐라 하면 말도 안 듣잖아요.”신예린의 새침한 말투에 주시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신예린은 시선을 외면하며 못 본 척했다.입가에 미소를 띤 주시우는 손에 들린 시트를 내려두고 창문을 열었다.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들자 방 안의 후끈한 공기가 한결 가라앉았다.주시우는 곧 신예린 앞으로 다가와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음 섞인 눈길을 보냈다.“이제 만족해요? 우리 작은 공주님.”작은 공주님이라는 호칭에 신예린의 가슴이 간질거리듯 떨렸다.주시우의 다정한 눈빛과 겹치자 금세 시선을 피하며 뻣뻣하게 말했다.“남편이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주시우는 몸을 기울여 의자 등받이에 팔을 짚고 신예린을 가두듯 내려다봤다.“뭐, 뭐

  • 터닝포인트   제445화

    “내려놔요!”신예린이 다급히 주시우의 손목을 붙잡았다.주시우는 여전히 주아윤을 안은 채 조심스럽게 신예린을 바라보았고 두 사람 모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 채 상황을 지켜봤다.다행히 주아윤은 눈꺼풀만 살짝 파르르 떨더니 다시 천천히 감아버렸다.그러자 부부는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아윤아...”신예린이 손으로 살짝 흔들며 불러봤지만 주아윤은 꼼짝도 하지 않았고 고른 숨결만 이어졌다.주시우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딸을 안고 방으로 나갔다.잠시 후 빈손으로 돌아온 주시우에게 신예린이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정말 안 깬 거 맞아요?”“응. 안 깼어.”두 사람이 마주 보는 순간, 괜히 공기만 뜨거워졌다.주시우가 낮게 웃으며 중얼거렸다.“내가 내 아내랑 같이 자는 게... 왜 이렇게 몰래 바람피우는 것 같지?”신예린은 얼굴이 달아올라 손으로 주시우의 팔을 가볍게 쳤다.그러자 주시우가 신예린의 손가락을 단단히 잡아 얽어쥐며 몸 가까이 끌어당겼다. 숨결이 엉켜 서로의 숨이 그대로 전해졌다.술기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신예린의 볼은 복숭아꽃처럼 붉었다.“저는 이석훈 씨랑 아무 일도 없어요.”신예린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시우가 오늘 밤 보여준 행동이 전부 그 사람 때문임을 알기에 오해는 풀어야 했다.주시우는 잠시 신예린을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대답했다.“알아. 넌 빛나는 사람이야. 누가 좋아해도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넌 보석이고 내가 운 좋은 건... 그 보석을 내가 먼저 손에 넣었다는 거야.”‘자신이 운이 좋다고 말하다니...’신예린은 눈시울이 살짝 젖으며 주시우의 이마에 이마를 대었다.“아니에요. 운이 좋은 건 저예요. 제가 당신에게 선택받았기에 그 순간 보석이 된 거예요.”서로가 서로를 행운이라 믿는 순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졌다.“오늘 당신이 나타났을 때 제가 무슨 생각 했는지 알아요?”“뭐?”“와, 이 남자 진짜 멋있네... 이 잘생긴 남자가 내 남편이라니. 저는 정말 세상에서 제

  • 터닝포인트   제444화

    밤하늘은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듯 짙게 내려앉아 있었고 자동차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차 안에서 신예린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운전대를 잡은 주시우가 옆눈으로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주아윤이 의자를 붙잡고 엄마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엄마, 뭐가 그렇게 웃겨?”그건 당연히 오늘 밤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처음에는 단지 주시우를 불러내 이석훈에게 현실을 보여주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의도였을 뿐인데 뜻밖에도 상황이 훨씬 더 잘 풀렸고 신예린은 그 여운을 곱씹다 보니 차 안에서까지 웃음이 새어 나왔고 마음까지 시원하게 뚫린 듯했다.신예린은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는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아윤아, 이 원피스는 네가 고른 거야?”주아윤은 고개를 저으며 옆자리의 주시우를 가리켰다.“아니에요. 아빠가 입으래서 입었어요.”“응?” 신예린은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으며 주시우를 바라봤다.“아빠가 왜 이 옷을 입히고 싶으셨을까?”“아빠가 자기 체면이 걸린 문제라 그랬어요.”“에헴.”운전석의 주시우가 헛기침했다.신예린의 눈웃음과 마주친 순간, 주시우는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렸다.“나... 그냥 한 말이야.”신예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주아윤이 잽싸게 덧붙였다.“엄마, 그런 게 아니에요. 아빠는 옷도 여러 번 갈아입었어요. 그리고 저한테 아빠 잘생겼냐고 계속 물어봤어.”“콜록, 에헴.”주시우의 기침은 점점 심해졌고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으며 그는 이를 악문 채 낮게 말했다.“아윤아, 넌 정말 입이 무겁구나.”하지만 주아윤은 그 반어법을 알 리 없었다.“아빠, 저 하나도 안 무거워요. 진짜 가볍거든요?”순진한 대답에 신예린은 결국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제가 아직 전화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고 나타났어요? 그것도 그렇게 멋지게 차려입고...”신예린은 식당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기울였다.“혹시... 오늘 소지훈 씨가 무슨 말을 한 거예요

  • 터닝포인트   제443화

    “얼굴이 밥 먹여줄 수도 있죠. 지금처럼요. 우리 예린이가 지금 기꺼이 저를 먹여 살리잖아요.”주시우는 태연한 듯 그렇게 말했고 그 말은 오히려 당당함이 묻어났다.‘뭐야, 남자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빌붙는 걸 대놓고 말하다니...’이석훈은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주... 주 교수님?”화장실에서 급히 달려 나온 소정이 말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주시우를 보고는 두 눈을 비비며 거듭 확인했다.‘교수님?’신예린의 동료들도 그 말에 모두 놀라 고개를 돌렸다.분명 예린이가 선생님이라고만 했는데 어쩌다 교수라는 말이 나온 걸까. 게다가 저렇게 젊은데 벌써 교수라니 믿기지 않았다.옆에서 듣던 이석훈의 가슴 속에는 서서히 불길 같은 불안이 피어올랐다.주시우의 시선이 소정을 향했다.“저를... 아세요?”“알죠. 알죠!”소정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주 교수님, 전 주경 의대 출신이에요. 교수님 강의 들은 적 있어요.”주시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답했다.“그래요. 반가워요.”황이슬은 그제야 주시우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점점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정 씨, 혹시... 소정 씨가 말하던 그 교수님이...”소정은 흥분을 주체 못한 듯 황이슬의 팔을 붙잡고 크게 외쳤다.“맞아요. 바로 그분이에요. 제가 말했던 교수님 말이죠. 잘생기고, 학력도 최고고, 우리 학교 역사상 최연소로 교수직에 오른 전설적인 분입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다시 술렁였다.주경 의대 최연소 교수라니, 그 무게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여기 앉아 있는 이들 중에도 주경 의대 출신이 많았고 아무리 의술이 뛰어나도 학교로 돌아가면 선생님이라 부르며 존경해야 할 존재였다.“세상에... 신 선생님이 바로 우리 사모님이었네요. 같이 근무하는 동료였다니 감격스러워서 울고 싶네요.”“...”“...”신예린과 주시우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며 난감하게 웃었고 분위기는 마치 팬 미팅 현장 같았다.모든 시

  • 터닝포인트   제442화

    남자의 체격은 길고 곧게 뻗어 있었고 선이 잘 드러나는 얼굴에 도드라진 눈썹뼈, 깊고 맑은 눈매가 더해져 마치 난초처럼 고결하고 옥처럼 단정한 기품을 풍겼다.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안정감이 느껴졌고 급할 것 없는 태도 속에서 검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신예린의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그 손을 잡은 아이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주아윤이었다. 까르르 뛰어다니는 발걸음에 피부는 마치 조각한 듯 고왔고 또렷한 이목구비에는 아빠와 엄마의 장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특히 까만 눈망울은 보는 이마다 어쩜 이렇게 귀여워’하는 탄성을 먼저 터뜨리게 할정도였다.신예린은 주시우와 주아윤이 올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모습으로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차려입었다고 하기에는 주시우의 옷차림은 편안해서 한 다섯 살쯤은 더 어려 보였고 그렇다고 가볍다고 하기에는 주아윤이 마치 파티에 갈 듯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아니, 이 옷은 그때 교수 이미지랑 안 맞는다며 못 입게 하더니... 왜 지금은 당당히 입고 나온 거야.’그 모습은 꼭 화려한 왕자님 같았다.순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주시우는 이미 주아윤과 함께 신예린 앞에 다다랐다.가까이에서 보니 주시우의 인상은 더 또렷했고 시선이 저절로 끌렸다.“와, 진짜 잘생겼다.”누군가 무심결에 내뱉었다.“신 선생님, 남편 잘생겼다고 해도 못 믿었는데... 진짜였네요.”“이런 남편이랑 같이 자면 매일 웃다가 깰 듯하겠네요.”“세상에, 따님도 너무 예쁘네.”농담 섞인 말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석훈은 주시우를 보는 순간 얼굴빛이 확 굳었다.그제야 신예린이 말한 잘생겼다는 기준이 어떤 건지 알았다. 남자인 자기 눈으로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도저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 외모였다.신예린은 동료들의 놀림을 받으며 가볍게 웃고는 주시우 팔을 끌어당겨 소개했다.“제 남편 주시우예요. 그리고 이쪽은 제 딸, 아윤이에요.”주시우의 시선이 자연스레 사람들을 훑고 지나갔다가 이석훈 앞에서 잠시 멈췄다.상대의 눈빛에는 뭔가 억눌린 불만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