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한 잔만 더 마셔요, 서연 씨.”
최태식이 밀어놓은 술잔은 서연의 눈앞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투명한 액체가 샹들리에 아래에서 잔잔히 흔들릴 때마다 속이 먼저 울렁거렸다. 이미 몇 잔을 비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목구멍은 독한 술에 오래 긁힌 듯 따갑기만 했다.
“제가 술이 조금 약해서요.”
애써 웃으며 잔을 밀어냈지만 최태식은 손등으로 그것을 다시 그녀 앞으로 밀어놓았다.
“약하면 마시면서 늘리면 되지. 이번 역할 그렇게 하고 싶다면서?”
그 말에 서연은 대답 대신 손을 무릎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을 세게 얽어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 정도의 통증이 있어야만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잊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최태식의 웃음은 노골적이었다. 그가 무슨 뜻으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고, 왜 굳이 자신을 불러냈는지 모를 만큼 서연은 어리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는 웃으며 잔을 부딪쳤고, 누군가는 애써 다른 대화를 이어 갔다. 모두가 보고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척했다. 이런 자리에서 누군가의 비참함보다 중요한 것은 분위기를 깨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서연은 천천히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이 역할이 필요했다.
그 사실 하나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한때 박서연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배역을 구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드라마 한 편이 끝나면 다음 작품 이야기가 들어왔고, 기자들은 그녀의 선택을 기사로 썼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고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졌다.
먼저 연락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졌고, 주연 후보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다른 배우들의 이름 앞에 붙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에게 남는 선택지는 줄어들었으며, 이제는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는 것조차 다시 시작하기 위해 감당해야 할 대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까지 왔다.
자존심보다 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높아졌다.
“윤도운 왔대.”
누군가의 말이 귓가를 스치는 순간, 서연의 손에서 술잔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몸은 이미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검은 수트를 입은 채 익숙한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며 안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서연은 오히려 눈을 뗄 수 없었다.
윤도운.
여섯 해 만이었다.
그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렀을 뿐인데, 애써 접어 두었던 시간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한때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불렀던 이름이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고, 힘든 날이면 그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당연히 윤도운이 그 안에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았다.
떠난 뒤에도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떠난 사람만 남은 자리에서 몇 번이고 되돌아가게 된다는 걸, 서연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도운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연의 숨이 멎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윤도운의 얼굴과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은 분명 같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낯설었다. 한때 자신을 바라보며 웃던 사람의 흔적을 찾으려 해도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서연은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도와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눈빛에 스며들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기서 나를 데려가 줘.
무슨 일이 있었든, 네가 나를 얼마나 미워하든.
단 한 번만 예전처럼 내 편이 되어 줘.
그러나 도운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그대로 사람들 사이를 지나 상석으로 향했다.
서연의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래.
자신은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서는 안 됐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그의 외면을 마주하고 나니 생각보다 훨씬 아팠다.
“마침 잘됐네.”
최태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배우도 왔으니까 우리 좀 더 재밌게 놀아 볼까?”
그가 손짓하자 직원들이 술병을 들고 다가왔다. 그리고 서연의 앞에 술잔을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열 번째 잔까지 채워진 뒤에야 최태식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박서연, 너 이 역할 원하잖아.”
주변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쏠렸다.
“이거 다 마시면 역할 줄게.”
서연은 말없이 열 개의 잔을 바라봤다.
그것은 술이 아니라 선택처럼 보였다.
마시고 오늘의 모욕을 견디든지.
아니면 거절하고 다시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든지.
그녀는 천천히 윤도운을 바라봤다.
상석에 앉은 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다음 작품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의 잔을 채워 주고 있었다. 그 화려한 풍경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남자와, 지금 열 잔의 술 앞에 앉아 있는 자신 사이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서연은 기다렸다.
혹시라도 그가 말릴까 봐.
정말 어리석게도.
도운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더 재밌게 해 보자고.”
서연의 얼굴에서 마지막 기대가 사라졌다.
그녀는 첫 번째 잔을 들었다.
술이 목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속이 타들어 갔다. 두 번째 잔을 비웠을 때는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고, 다섯 번째 잔을 내려놓았을 무렵에는 누군가 대단하다며 손뼉을 쳤다.
그러나 서연은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저 잔만 바라봤다.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술이 몸 안으로 쌓일수록 눈앞이 조금씩 흐려졌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여덟 번째 잔을 들었을 때, 윤도운이 자리에서 몸을 조금 움직였다.
서연의 손이 멈췄다.
“그만하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기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최태식이 웃으며 물었다.
“왜, 윤 배우?”
도운의 시선이 서연에게 머물렀다.
“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서연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잔을 들었다.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윤도운은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직접 보러 온 것뿐이었다.
아홉 번째 잔을 비운 뒤에는 제대로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지막 잔을 들자 손등으로 술이 흘러내렸다. 서연은 그것조차 닦지 않은 채 끝까지 잔을 비웠다.
빈 잔이 테이블에 닿는 순간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졌다.
서연은 그 소리를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에서 무언가가 거세게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고 연회장을 빠져나온 뒤 화장실 문을 닫자마자 세면대 앞으로 몸을 숙였다.
한참 동안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몸이 괴로워서인지, 아니면 조금 전 자신이 윤도운을 바라보며 도움을 기대했던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겨우 몸을 일으킨 서연이 물을 틀었다.
그러나 거울 속에 비친 다른 그림자를 발견하는 순간, 손끝이 그대로 멈췄다.
윤도운이 뒤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에서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서연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을 때도 도운은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고, 그 침묵이 오히려 연회장에서 들었던 어떤 모욕보다 견디기 어려웠다.
“왜 따라왔어?”
그는 대답 대신 문을 닫았다.
서연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지만 좁은 공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등을 벽으로 밀어 넣었다. 도운이 가까워질수록 예전에는 너무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의 존재가 이제는 숨이 막힐 만큼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 네 꼴 좀 봐.”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꼭 뼈다귀 하나 얻으려고 꼬리 치며 구걸하는 개 같네.”
말이 뺨을 때린 것처럼 아렸다.
서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화를 내야 한다는 것도, 밀어내야 한다는 것도 알았지만 정작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가슴 한편에서 먼저 올라온 것은 분노가 아니라 오래된 서러움이었다.
“그렇게까지 말해야 해?”
“내가 틀린 말 했어?”
“네가 뭘 안다고.”
그제야 겨우 입술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생각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도운은 그녀의 턱을 붙잡아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그래. 내가 모르는 게 많겠지.”
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 하나는 알아.”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넌 원래 이런 애 아니었어.”
그 말에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한때의 자신이라면 오늘 같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술잔을 엎어 버렸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웃으며 나왔을 것이고, 기회를 놓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아도 달라졌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기면.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생기면.
어떤 날은 자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무릎을 굽혀야 했다.
그런 사정을 도운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사람은 변해.”
“변했다고?”
“그래.”
도운의 입가에 잠깐 허탈한 기색이 스쳤다.
“아니. 넌 변한 게 아니라 망가졌어.”
그 말은 이상하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서연은 그를 밀어냈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도운의 얼굴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기색이 사라졌다.
“우린 끝났잖아.”
“끝낸 건 너였지.”
그가 내뱉은 말에 서연은 그대로 굳었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것도 너고.”
그녀는 아무것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날 자신이 어떻게 떠났는지.
그가 얼마나 많은 전화를 했는지.
그리고 그 전화들을 보면서도 끝내 받을 수 없었던 이유까지.
모든 것이 떠올랐다.
“미안했어.”
겨우 꺼낸 말이었다.
도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미안?”
그 한마디가 여섯 해 동안 쌓인 시간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 말 하나 하려고 내가 여섯 년을 기다린 줄 알아?”
서연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더 물으면 결국 무너질 것 같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왜 떠났는지.
그리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단 하나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서연의 침묵은 도운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간 듯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훑다가 손으로 내려갔다.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서연은 반사적으로 손을 감췄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도운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전에 서연은 그에게 말했었다.
이 손가락만큼은 정말 결혼할 사람을 위해 남겨 두겠다고.
아무나 이 자리에 반지를 끼울 수는 없다고.
그때 도운은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내가 끼워 주면 되겠네?
그 기억을 떠올린 사람은 서연만이 아니었다.
도운의 시선이 반지 위에 오래 머물렀다.
“이거 누구 거야?”
“놔.”
서연이 손목을 빼려 했지만 도운은 놓지 않았다.
“누구 거냐고.”
“네가 알 필요 없어.”
그 말이 떨어진 뒤, 도운의 손끝이 굳었다.
서연은 그제야 그에게서 손목을 빼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도망치듯 돌아설 수도 없었다.
도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자신이 한때 결혼할 사람을 위해 남겨 두겠다고 했던 자리에 다른 남자가 반지를 끼워 주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을.
그 믿음이 그의 안에서 어떤 상처를 건드렸는지, 서연은 너무 잘 알았다.
그래서 차라리 그가 화를 냈으면 했다.
소리를 지르고, 자신을 비난하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돌아서 버렸다면 조금은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도운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여섯 해 동안 묻어 두었던 것이 그 눈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서연은 숨을 죽였다.
그가 입을 열기 전부터 이미 알았다.
자신이 끝까지 피해 왔던 질문이 결국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을.
“너 결혼했어?”
오디션장 문을 열자 서연은 가장 먼저 자기 이름을 확인했다.박서연.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아이 엄마도 아닌 이름 세 글자.서연은 접수대에 대본을 내밀었다.“박서연입니다.”직원이 명단을 확인하다가 잠깐 멈췄다.“아… 네. 알고 있습니다.”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서연은 모르는 척 의자에 앉았다.대기실에는 이미 배우 여섯 명이 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누군가는 대본을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거울을 보며 표정을 고쳤다.서연도 대본을 펼쳤다.이번 배역은 아이를 잃은 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였다.감정을 터뜨리는 장면보다 참는 장면이 더 많았다.서연이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다.오디션 전날에도 도윤은 딱 한 번 물었다.“제작사 대표 이름은 알아도 돼?”서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알아도 되는데 연락은 하지 마.”“안 해.”“비서한테 확인시키는 것도 안 돼.”“그것도 안 해.”“내가 떨어져도.”그때 도윤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건 내가 제일 싫겠지만, 그래도 안 해.”서연은 그 대답을 믿고 왔다.그래서 더 예민해졌다.도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그의 그림자를 먼저 보고 있었다.자기 실력으로 들어온 자리인지, 누군가가 미리 깔아둔 자리인지 남들이 의심하는 순간부터 증명할 몫은 전부 서연에게 돌아왔다.그녀는 대본 모서리를 엄지로 눌렀다.오늘만큼은 단 한 장면이라도 박서연으로 기억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렸다.도윤이었다.-도착했어?서연은 짧게 답했다.-응.곧바로 답장이 왔다.-끝나면 연락해.그게 전부였다.누구를 만나겠다는 말도, 제작사에 확인하겠다는 말도 없었다.서연은 화면을 끄고 다시 대본을 봤다.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우 둘의 대화가 들렸다.“쟤 맞지?”“누구?”“윤도윤.”목소리는 작았지만 이름만큼은 정확히 들렸다.서연의 손끝이 멈췄다.“진짜 여기 오디션을 보네.”“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서연은 고
일요일 저녁.식탁에는 다섯 사람 몫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찌개를 퍼 담았고, 서미란은 밥그릇을 하나씩 밀어줬다.도윤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웃었다.“왜.”서연이 물었다.“그냥.”“뭐가 그냥이야.”도윤은 식탁을 한번 둘러봤다.처음에는 이 집에 자기 칫솔 하나 두는 것도 조심스러웠다.이제는 장모가 살고, 어머니가 거의 매일 드나들고, 유나는 두 할머니 사이에서 반찬을 골라 먹고 있었다.“사람 많아졌네.”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싫어?”“아닙니다.”서미란도 물었다.“불편하니?”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익숙해요.”유나가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아빠 이제 안 도망가.”도윤의 얼굴이 굳었다.“아빠가 언제 도망갔어.”서연이 웃었다.“시장 갈 때 회사 간다고 했잖아.”“회의 있었어.”“욕실 순서 정할 때도 회사 가고 싶다고 했고.”“그건 말만 한 거야.”서미란이 피식 웃었다.“이사회가 제일 편하다고도 했지.”도윤은 어머니를 봤다.“그걸 아직 기억하세요?”“네가 얼마나 억울한 얼굴이었는데.”서연의 어머니까지 웃었다.“사위가 밖에서는 그렇게 무섭다는데 여기서는 제일 약해.”“제가 약한 게 아니라 두 분이 강하신 겁니다.”“말은 잘해.”식탁에 웃음이 번졌다.식사가 끝나자 유나는 그림책을 들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할머니 둘 다 여기 앉아.”서미란이 소파를 가리켰다.“할머니는 여기 앉으면 안 돼?”“안 돼. 바닥.”“왜?”“가족은 같이 앉아야 돼.”서연의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바닥에 앉았다.서미란도 잠깐 망설이다 그 옆에 앉았다.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이젠 자연스럽네.”서연이 그의 팔을 툭 쳤다.“당신도 앉아.”“나까지?”“가족이라며.”도윤도 결국 바닥에 앉았다.유나는 다섯 사람을 한 줄로 앉혀놓고 만족스럽게 웃었다.“됐다.”“뭐가?”“우리 집.”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유나를 봤다.“할머니도?”“응.”“외할머니도?”“응.”
“도우미 아주머니예요?”거실 공기가 한순간 멎었다.앞치마를 두른 서연의 어머니는 과일 접시를 들고 있었고, 현관에는 서미란의 지인인 최명희가 서 있었다.서미란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아니.”짧은 한마디였다.최명희가 당황해 웃었다.“아, 내가 실수했나 봐. 집안일을 하고 계셔서.”서미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우리 사돈이야.”도윤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멈췄다.서연도 대본을 내려놓았다.서연의 어머니는 잠시 최명희를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과일 접시를 식탁에 놓았다.“앉으세요. 차 드릴게요.”“죄송해요. 제가 정말 몰라서.”“모를 수도 있죠.”대답은 담담했지만 도윤은 장모의 입가가 조금 굳은 걸 봤다.최명희는 자리에 앉고도 계속 주변을 둘러봤다.“미란이가 요즘 여기 자주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소박하게 사시네요.”도윤의 눈썹이 움직였다.서연의 어머니는 차를 따르며 물었다.“소박하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아니, 좋은 뜻이에요. 요즘은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집도 드물잖아요.”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거슬렸다.서미란이 컵을 내려놓았다.“명희야.”“응?”“말 이상하게 하지 마.”최명희의 표정이 굳었다.“내가 뭘.”“지금 계속 평가하고 있잖아.”“평가라니. 그냥 다른 생활이 신기해서—”“다르다고 위아래가 생기는 건 아니야.”도윤은 어머니를 바라봤다.서미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최명희가 헛웃음을 냈다.“미란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래.”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멈췄다.도윤도 숨을 죽였다.“맞아.”서미란은 의외로 쉽게 인정했다.“전에는 나도 그랬어.”최명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돈 많이 쓰고, 좋은 집 살고, 사람 쓰는 게 당연히 더 나은 생활이라고 생각했지.”서연의 어머니도 조용히 그녀를 봤다.“근데 아니더라.”“갑자기 왜.”서미란은 주방을 한번 봤다.싱크대 옆에는 직접 씻어 말려둔 그릇이 있었고, 냉장
토요일 아침.도윤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보다가 주방 쪽을 흘끗 봤다.이상했다. 너무 조용했다.평소라면 벌써 한 번쯤 말이 붙었어야 했다.도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분 뭐 하세요?”식탁에 마주 앉은 두 어머니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서연의 어머니 앞에는 장보기 영수증이 놓여 있었고, 서미란 앞에는 작은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회의.”“무슨 회의요?”서미란이 수첩을 넘겼다.“집안일.”“그걸 두 분이 왜 회의해요?”“같이 있으니까 정해야지.”도윤은 불안한 얼굴로 서연을 봤다.소파에서 대본을 읽던 서연은 이미 웃고 있었다.“이거 알아?”“응.”“왜 나만 몰라.”“당신은 회사 회의하잖아.”“여기도 내 집인데.”서미란이 바로 말했다.“그래서 너도 앉아.”도윤은 괜히 물었다는 얼굴이 됐지만 결국 식탁에 앉았다.서미란이 읽었다.“첫 번째. 장보기.”서연의 어머니가 말했다.“나는 일주일에 두 번 시장.”“저는 필요한 건 배송.”“그건 안 돼요. 또 냉장고 터져요.”“먹을 만큼만 시키면 되죠.”“사돈이 먹을 만큼을 모르잖아요.”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도윤은 웃음을 참았다.“그럼 시장 한 번, 배송 한 번.”서연의 어머니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도윤이 놀랐다.“벌써 합의됐어요?”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두 번째. 청소.”“거실이랑 욕실은 청소하는 분 부르고.”“주방은 내가 해요.”“네.”“유나 방은 유나도 같이.”“좋아요.”도윤은 점점 이상해졌다.“왜 이렇게 잘 맞아요?”서연의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맨날 싸우면 좋겠어?”“그건 아닌데.”“그럼 조용히 있어.”도윤은 정말 조용히 했다.세 번째는 식사였다.서미란이 말했다.“아침은 꼭 먹이는 걸로.”“유나는 그렇죠.”“도윤이도.”도윤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저요?”“넌 아침 거르잖아.”서연의 어머니까지 거들었다.“그건 안 좋지.”“저는 배 안 고프면 안 먹어도 됩니다.”두
토요일 오전.서연의 어머니는 주방 바닥에 큰 대야를 내려놨다.배추, 무, 쪽파, 고춧가루까지 줄줄이 나오자 도윤이 거실에서 고개를 들었다.“오늘 뭐 하세요?”“김치 좀 담그려고.”도윤은 대야 크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좀?”“이 정도면 조금이지.”그때 현관문이 열렸다.서미란이 들어오다가 주방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이게 다 뭐예요?”“김치요.”“직접 담그시게요?”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그럼 김치를 어떻게 먹어요.”“사면 되잖아요.”도윤은 바로 눈을 감았다.서연도 입술을 깨물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사지 않고 담가 먹을 수도 있죠.”“물론 그렇지만, 이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나 해서요.”“김치 담그는 게 왜 힘들어요.”“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잖아요.”“그래서 맛있는 거죠.”서미란은 대야를 한참 바라봤다.“좋은 데서 주문하면 일정한 맛으로 오는데.”“집마다 김치 맛이 다른 게 좋은 거예요.”“매번 맛이 달라도 괜찮아요?”“그게 집 김치지.”둘의 대화는 시작부터 평행선이었다.유나가 주방으로 달려왔다.“외할머니 뭐 해?”“김치.”“나도 할래.”서연의 어머니가 작은 앞치마를 꺼냈다.“손 씻고 와.”서미란이 바로 말했다.“유나는 매울 텐데.”“장갑 끼면 돼요.”“옷에 묻으면?”“빨면 되죠.”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요즘 자주 듣는 대답이었다.유나는 고무장갑까지 끼고 돌아왔다.“할머니도 해.”서미란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나도?”“응.”“할머니는…”거절하려던 말이 멈췄다.유나는 이미 장갑 한 켤레를 들고 있었다.“이거.”서미란은 결국 받아 들었다.“어떻게 하는데요?”서연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배추를 하나 내밀었다.“양념 여기 넣고.”“얼마나요?”“적당히.”서미란의 표정이 굳었다.“또 적당히예요?”“김치에 계량컵 들이댈 거예요?”“그래도 기준은 있어야죠.”“배추마다 크기가 다른데 무슨 기준.”서미란은 한숨을 쉬었다.“진짜 사는
아침부터 현관 앞에 상자가 세 개 쌓였다.도윤은 출근하려다 멈췄다.“이게 뭐예요?”서미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유나 겨울옷.”“겨울옷 있어요.”주방에서 나오던 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작년에 입던 거 아직 맞아요.”서미란이 상자를 열었다.코트와 패딩, 원피스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옷 하나를 집어 가격표를 확인하더니 손을 멈췄다.“애 옷이 왜 이렇게 비싸요?”서미란의 표정도 미묘해졌다.“좋은 옷이니까요.”“애들은 한철 입으면 작아지는데.”“그래도 따뜻하고 좋은 걸 입히면 좋죠.”“놀이터에서 흙 묻히면 아까워서 어떻게 입혀.”“옷은 입으라고 있는 거예요.”“그렇게 비싼 걸 막 입혀요?”“비싸다고 모셔둘 건 아니잖아요.”도윤은 넥타이를 만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 순간 유나가 방에서 나왔다.“우와!”상자를 발견하고 달려왔다.분홍색 코트를 꺼내 몸에 대봤다.“예뻐!”서미란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입어봐.”유나는 코트를 입었다.도윤도 잠깐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예쁘네.”서연의 어머니도 인정했다.“예쁘긴 예쁘네.”서미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그렇죠?”그런데 유나가 팔을 몇 번 움직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불편해.”“왜?”“팔이 안 올라가.”서미란이 단추를 다시 정리해줬다.“코트는 원래 조금 그래.”“이거 입고 놀이터 못 가.”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거봐요.”서미란이 난처한 얼굴이 됐다.“놀이터 갈 때는 다른 거 입으면 되지.”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이건 언제 입어?”“좋은 데 갈 때.”“좋은 데가 어디야?”“할머니랑 어디 갈 때.”유나는 별로 흥미가 없는 얼굴이었다.코트를 벗자마자 의자 위에 놓인 낡은 점퍼를 집었다.“난 이게 좋아.”서미란의 시선이 점퍼로 향했다.소매 끝이 조금 해졌고 지퍼 장식도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그건 이제 바꿔야 하지 않니?”“왜?”“오래됐잖아.”“편한데.”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저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