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너 결혼했어?”
그 질문이 떨어진 뒤에도 서연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윤도운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고, 화장실의 밝은 조명 아래 반지는 쓸데없이 선명했다.
그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면서도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은, 진실을 말하는 순간 더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왜.”
겨우 입술을 떼자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결혼했으면 뭐가 달라져?”
도운의 얼굴이 굳었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그는 헛웃음을 삼키듯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여섯 년 만에 나타난 전여친 손가락에 반지가 있는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야 해?”
“우린 헤어진 사이야.”
“그렇게 헤어진 사이였어?”
서연은 더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너무 많은 시간이 비어 있었고, 자신은 그 빈칸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운은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러다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더 아팠다.
“누구랑 결혼했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서연은 한참 뒤에야 벽에서 등을 뗐다.
붙잡혔던 손목보다 가슴 한가운데가 더 오래 저렸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반지는 결혼반지가 아니라고, 그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 하나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꺼내는 순간, 언젠가는 반드시 싱싱이에게까지 닿게 될 것 같았다.
그날 밤, 서연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몸은 술기운에 지쳐 있었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화장실에서 마주했던 도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자신을 미워하는 눈이었는데, 반지를 바라보던 순간만큼은 그 안에 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잠이 들었고,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다시 윤도운을 만났다.
그것은 오래전의 윤도운이었다.
지금처럼 날카로운 말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남자가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웃던 시절의 윤도운.
따뜻하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그의 손길이 천천히 지나갔다.
숨이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저절로 조여 들었고,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워질 때면 서연은 늘 먼저 눈을 감았다.
“서연아.”
귓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연은 꿈속에서도 그를 붙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됐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도운의 품 안에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함께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그녀를 밀어냈다.
꿈속의 얼굴이 서서히 지금의 윤도운으로 바뀌었다.
“너 결혼했어?”
서연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한동안 천장만 바라봤다.
뺨을 타고 흐른 것이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매니저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들떠 있었다.
“서연아, 됐어.”
서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어제 말한 그 역할. 너로 확정됐대.”
잠이 덜 깬 머릿속에서 한동안 말뜻이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 오늘 오후에 바로 대본 리딩하고 테스트 촬영 들어간대. 정신 차리고 나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서연은 한참 휴대전화만 내려다봤다.
어젯밤 그 열 잔을 끝까지 마신 것이 떠올랐다.
속이 다시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그 고통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도 역할은 얻었다.
그 사실 하나로 오늘만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았다.
대본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윤도운이 보였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다른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연이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잠깐 마주친 시선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서연은 어젯밤의 꿈이 다시 떠올라 괜히 손끝을 움켜쥐었다.
“다 왔으면 시작하겠습니다.”
연출부의 말과 함께 리딩이 시작됐다.
오늘 테스트할 장면은 극 중 여주인공이 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정을 터뜨리는 신이었다.
상대를 사랑했지만 버림받았다고 믿었던 여자가 모든 상처를 쏟아 낸 뒤, 남자가 그녀의 입을 막듯 거칠게 키스하는 장면.
서연은 대본을 내려다봤다.
하필이면.
윤도운과 헤어진 뒤 처음으로 함께 서는 장면이 이런 내용이라니.
“준비됐죠?”
서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가 돌아갔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잘 풀렸다.
상대 배우를 바라보며 대사를 뱉어 내는 동안, 서연은 극 중 인물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그래도 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이 뒤엉키면서 대사는 점점 거칠어졌다.
“당신은 늘 그랬어.”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묻지도 않았잖아. 왜 떠났는지,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 단 한 번이라도 물어봤어?”
대사가 끝날 무렵 서연의 눈에는 실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상대 배우가 다가왔다.
정해진 동선대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고,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입술이 닿기 직전.
“컷.”
윤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멈췄다.
무대 아래에 앉아 있던 그가 대본을 내려놓았다.
“다시.”
연출부 직원이 눈치를 보며 그를 바라봤다.
“어떤 부분이요?”
“대사가 너무 빨라요. 감정도 안 살아 있고.”
서연은 아무 말 없이 처음 위치로 돌아갔다.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대사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었다.
“컷.”
또다시 도운이었다.
“눈물이 너무 빨라요.”
세 번째.
“컷.”
“손동작이 부자연스러운데.”
네 번째.
“컷.”
“다시.”
다섯 번째가 끝났을 때, 서연의 숨은 이미 거칠어져 있었다.
“윤 배우.”
연출부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도운의 시선이 서연에게 향했다.
“박서연 씨도 괜찮죠?”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묻는 얼굴이었다.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다시 시작됐다.
그녀는 같은 대사를 또 쏟아냈다.
사랑했고.
미워했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는 역할 속 여자의 마음이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과 뒤섞였다.
그런데 매번 상대 배우의 입술이 가까워질 때마다 도운이 끊었다.
“컷.”
“다시.”
“처음부터.”
한 번.
두 번.
열 번이 넘어가자 목 안이 따갑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서연은 대사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이러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정말 연기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윤도운이 개인적인 감정을 일에 섞을 사람은 아닐 거라고.
하지만 열다섯 번째 재촬영이 끝났을 때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
“다시.”
서연은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윤도운 씨.”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이번에는 뭐가 문제였는데요?”
도운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목소리.”
서연의 눈썹이 움직였다.
“목소리가 안 좋네요.”
“그래서요?”
“배우면 다시 해야죠.”
그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표시된 자리로 돌아갔다.
대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거기까지였다.
쉰 소리만 새어 나왔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더 힘껏 소리를 냈다.
“당신은 늘…….”
끝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도운은 대본을 넘기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서연은 허탈하게 웃을 뻔했다.
여기까지.
그 말을 듣기 위해 몇 시간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한 뒤, 제작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연 씨.”
그는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윤도운 씨한테 무슨 미움을 산 거예요?”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대로 정식 촬영 들어가서도 계속 이러면 곤란해요.”
제작자의 시선이 그녀의 쉰 목소리와 대본을 번갈아 훑었다.
“아무리 계약을 했어도 촬영을 제대로 못 하면 출연료, 대폭 깎일 수 있어요.”
그 말이 끝난 순간, 서연의 손에서 대본이 천천히 내려갔다.
오디션장 문을 열자 서연은 가장 먼저 자기 이름을 확인했다.박서연.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아이 엄마도 아닌 이름 세 글자.서연은 접수대에 대본을 내밀었다.“박서연입니다.”직원이 명단을 확인하다가 잠깐 멈췄다.“아… 네. 알고 있습니다.”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서연은 모르는 척 의자에 앉았다.대기실에는 이미 배우 여섯 명이 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누군가는 대본을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거울을 보며 표정을 고쳤다.서연도 대본을 펼쳤다.이번 배역은 아이를 잃은 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였다.감정을 터뜨리는 장면보다 참는 장면이 더 많았다.서연이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다.오디션 전날에도 도윤은 딱 한 번 물었다.“제작사 대표 이름은 알아도 돼?”서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알아도 되는데 연락은 하지 마.”“안 해.”“비서한테 확인시키는 것도 안 돼.”“그것도 안 해.”“내가 떨어져도.”그때 도윤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건 내가 제일 싫겠지만, 그래도 안 해.”서연은 그 대답을 믿고 왔다.그래서 더 예민해졌다.도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그의 그림자를 먼저 보고 있었다.자기 실력으로 들어온 자리인지, 누군가가 미리 깔아둔 자리인지 남들이 의심하는 순간부터 증명할 몫은 전부 서연에게 돌아왔다.그녀는 대본 모서리를 엄지로 눌렀다.오늘만큼은 단 한 장면이라도 박서연으로 기억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렸다.도윤이었다.-도착했어?서연은 짧게 답했다.-응.곧바로 답장이 왔다.-끝나면 연락해.그게 전부였다.누구를 만나겠다는 말도, 제작사에 확인하겠다는 말도 없었다.서연은 화면을 끄고 다시 대본을 봤다.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우 둘의 대화가 들렸다.“쟤 맞지?”“누구?”“윤도윤.”목소리는 작았지만 이름만큼은 정확히 들렸다.서연의 손끝이 멈췄다.“진짜 여기 오디션을 보네.”“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서연은 고
일요일 저녁.식탁에는 다섯 사람 몫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찌개를 퍼 담았고, 서미란은 밥그릇을 하나씩 밀어줬다.도윤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웃었다.“왜.”서연이 물었다.“그냥.”“뭐가 그냥이야.”도윤은 식탁을 한번 둘러봤다.처음에는 이 집에 자기 칫솔 하나 두는 것도 조심스러웠다.이제는 장모가 살고, 어머니가 거의 매일 드나들고, 유나는 두 할머니 사이에서 반찬을 골라 먹고 있었다.“사람 많아졌네.”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싫어?”“아닙니다.”서미란도 물었다.“불편하니?”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익숙해요.”유나가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아빠 이제 안 도망가.”도윤의 얼굴이 굳었다.“아빠가 언제 도망갔어.”서연이 웃었다.“시장 갈 때 회사 간다고 했잖아.”“회의 있었어.”“욕실 순서 정할 때도 회사 가고 싶다고 했고.”“그건 말만 한 거야.”서미란이 피식 웃었다.“이사회가 제일 편하다고도 했지.”도윤은 어머니를 봤다.“그걸 아직 기억하세요?”“네가 얼마나 억울한 얼굴이었는데.”서연의 어머니까지 웃었다.“사위가 밖에서는 그렇게 무섭다는데 여기서는 제일 약해.”“제가 약한 게 아니라 두 분이 강하신 겁니다.”“말은 잘해.”식탁에 웃음이 번졌다.식사가 끝나자 유나는 그림책을 들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할머니 둘 다 여기 앉아.”서미란이 소파를 가리켰다.“할머니는 여기 앉으면 안 돼?”“안 돼. 바닥.”“왜?”“가족은 같이 앉아야 돼.”서연의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바닥에 앉았다.서미란도 잠깐 망설이다 그 옆에 앉았다.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이젠 자연스럽네.”서연이 그의 팔을 툭 쳤다.“당신도 앉아.”“나까지?”“가족이라며.”도윤도 결국 바닥에 앉았다.유나는 다섯 사람을 한 줄로 앉혀놓고 만족스럽게 웃었다.“됐다.”“뭐가?”“우리 집.”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유나를 봤다.“할머니도?”“응.”“외할머니도?”“응.”
“도우미 아주머니예요?”거실 공기가 한순간 멎었다.앞치마를 두른 서연의 어머니는 과일 접시를 들고 있었고, 현관에는 서미란의 지인인 최명희가 서 있었다.서미란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아니.”짧은 한마디였다.최명희가 당황해 웃었다.“아, 내가 실수했나 봐. 집안일을 하고 계셔서.”서미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우리 사돈이야.”도윤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멈췄다.서연도 대본을 내려놓았다.서연의 어머니는 잠시 최명희를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과일 접시를 식탁에 놓았다.“앉으세요. 차 드릴게요.”“죄송해요. 제가 정말 몰라서.”“모를 수도 있죠.”대답은 담담했지만 도윤은 장모의 입가가 조금 굳은 걸 봤다.최명희는 자리에 앉고도 계속 주변을 둘러봤다.“미란이가 요즘 여기 자주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소박하게 사시네요.”도윤의 눈썹이 움직였다.서연의 어머니는 차를 따르며 물었다.“소박하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아니, 좋은 뜻이에요. 요즘은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집도 드물잖아요.”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거슬렸다.서미란이 컵을 내려놓았다.“명희야.”“응?”“말 이상하게 하지 마.”최명희의 표정이 굳었다.“내가 뭘.”“지금 계속 평가하고 있잖아.”“평가라니. 그냥 다른 생활이 신기해서—”“다르다고 위아래가 생기는 건 아니야.”도윤은 어머니를 바라봤다.서미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최명희가 헛웃음을 냈다.“미란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래.”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멈췄다.도윤도 숨을 죽였다.“맞아.”서미란은 의외로 쉽게 인정했다.“전에는 나도 그랬어.”최명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돈 많이 쓰고, 좋은 집 살고, 사람 쓰는 게 당연히 더 나은 생활이라고 생각했지.”서연의 어머니도 조용히 그녀를 봤다.“근데 아니더라.”“갑자기 왜.”서미란은 주방을 한번 봤다.싱크대 옆에는 직접 씻어 말려둔 그릇이 있었고, 냉장
토요일 아침.도윤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보다가 주방 쪽을 흘끗 봤다.이상했다. 너무 조용했다.평소라면 벌써 한 번쯤 말이 붙었어야 했다.도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분 뭐 하세요?”식탁에 마주 앉은 두 어머니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서연의 어머니 앞에는 장보기 영수증이 놓여 있었고, 서미란 앞에는 작은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회의.”“무슨 회의요?”서미란이 수첩을 넘겼다.“집안일.”“그걸 두 분이 왜 회의해요?”“같이 있으니까 정해야지.”도윤은 불안한 얼굴로 서연을 봤다.소파에서 대본을 읽던 서연은 이미 웃고 있었다.“이거 알아?”“응.”“왜 나만 몰라.”“당신은 회사 회의하잖아.”“여기도 내 집인데.”서미란이 바로 말했다.“그래서 너도 앉아.”도윤은 괜히 물었다는 얼굴이 됐지만 결국 식탁에 앉았다.서미란이 읽었다.“첫 번째. 장보기.”서연의 어머니가 말했다.“나는 일주일에 두 번 시장.”“저는 필요한 건 배송.”“그건 안 돼요. 또 냉장고 터져요.”“먹을 만큼만 시키면 되죠.”“사돈이 먹을 만큼을 모르잖아요.”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도윤은 웃음을 참았다.“그럼 시장 한 번, 배송 한 번.”서연의 어머니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도윤이 놀랐다.“벌써 합의됐어요?”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두 번째. 청소.”“거실이랑 욕실은 청소하는 분 부르고.”“주방은 내가 해요.”“네.”“유나 방은 유나도 같이.”“좋아요.”도윤은 점점 이상해졌다.“왜 이렇게 잘 맞아요?”서연의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맨날 싸우면 좋겠어?”“그건 아닌데.”“그럼 조용히 있어.”도윤은 정말 조용히 했다.세 번째는 식사였다.서미란이 말했다.“아침은 꼭 먹이는 걸로.”“유나는 그렇죠.”“도윤이도.”도윤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저요?”“넌 아침 거르잖아.”서연의 어머니까지 거들었다.“그건 안 좋지.”“저는 배 안 고프면 안 먹어도 됩니다.”두
토요일 오전.서연의 어머니는 주방 바닥에 큰 대야를 내려놨다.배추, 무, 쪽파, 고춧가루까지 줄줄이 나오자 도윤이 거실에서 고개를 들었다.“오늘 뭐 하세요?”“김치 좀 담그려고.”도윤은 대야 크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좀?”“이 정도면 조금이지.”그때 현관문이 열렸다.서미란이 들어오다가 주방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이게 다 뭐예요?”“김치요.”“직접 담그시게요?”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그럼 김치를 어떻게 먹어요.”“사면 되잖아요.”도윤은 바로 눈을 감았다.서연도 입술을 깨물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사지 않고 담가 먹을 수도 있죠.”“물론 그렇지만, 이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나 해서요.”“김치 담그는 게 왜 힘들어요.”“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잖아요.”“그래서 맛있는 거죠.”서미란은 대야를 한참 바라봤다.“좋은 데서 주문하면 일정한 맛으로 오는데.”“집마다 김치 맛이 다른 게 좋은 거예요.”“매번 맛이 달라도 괜찮아요?”“그게 집 김치지.”둘의 대화는 시작부터 평행선이었다.유나가 주방으로 달려왔다.“외할머니 뭐 해?”“김치.”“나도 할래.”서연의 어머니가 작은 앞치마를 꺼냈다.“손 씻고 와.”서미란이 바로 말했다.“유나는 매울 텐데.”“장갑 끼면 돼요.”“옷에 묻으면?”“빨면 되죠.”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요즘 자주 듣는 대답이었다.유나는 고무장갑까지 끼고 돌아왔다.“할머니도 해.”서미란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나도?”“응.”“할머니는…”거절하려던 말이 멈췄다.유나는 이미 장갑 한 켤레를 들고 있었다.“이거.”서미란은 결국 받아 들었다.“어떻게 하는데요?”서연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배추를 하나 내밀었다.“양념 여기 넣고.”“얼마나요?”“적당히.”서미란의 표정이 굳었다.“또 적당히예요?”“김치에 계량컵 들이댈 거예요?”“그래도 기준은 있어야죠.”“배추마다 크기가 다른데 무슨 기준.”서미란은 한숨을 쉬었다.“진짜 사는
아침부터 현관 앞에 상자가 세 개 쌓였다.도윤은 출근하려다 멈췄다.“이게 뭐예요?”서미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유나 겨울옷.”“겨울옷 있어요.”주방에서 나오던 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작년에 입던 거 아직 맞아요.”서미란이 상자를 열었다.코트와 패딩, 원피스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옷 하나를 집어 가격표를 확인하더니 손을 멈췄다.“애 옷이 왜 이렇게 비싸요?”서미란의 표정도 미묘해졌다.“좋은 옷이니까요.”“애들은 한철 입으면 작아지는데.”“그래도 따뜻하고 좋은 걸 입히면 좋죠.”“놀이터에서 흙 묻히면 아까워서 어떻게 입혀.”“옷은 입으라고 있는 거예요.”“그렇게 비싼 걸 막 입혀요?”“비싸다고 모셔둘 건 아니잖아요.”도윤은 넥타이를 만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 순간 유나가 방에서 나왔다.“우와!”상자를 발견하고 달려왔다.분홍색 코트를 꺼내 몸에 대봤다.“예뻐!”서미란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입어봐.”유나는 코트를 입었다.도윤도 잠깐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예쁘네.”서연의 어머니도 인정했다.“예쁘긴 예쁘네.”서미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그렇죠?”그런데 유나가 팔을 몇 번 움직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불편해.”“왜?”“팔이 안 올라가.”서미란이 단추를 다시 정리해줬다.“코트는 원래 조금 그래.”“이거 입고 놀이터 못 가.”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거봐요.”서미란이 난처한 얼굴이 됐다.“놀이터 갈 때는 다른 거 입으면 되지.”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이건 언제 입어?”“좋은 데 갈 때.”“좋은 데가 어디야?”“할머니랑 어디 갈 때.”유나는 별로 흥미가 없는 얼굴이었다.코트를 벗자마자 의자 위에 놓인 낡은 점퍼를 집었다.“난 이게 좋아.”서미란의 시선이 점퍼로 향했다.소매 끝이 조금 해졌고 지퍼 장식도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그건 이제 바꿔야 하지 않니?”“왜?”“오래됐잖아.”“편한데.”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저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