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너 결혼했어?”
그 질문이 떨어진 뒤에도 서연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윤도운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고, 화장실의 밝은 조명 아래 반지는 쓸데없이 선명했다.
그가 무엇을 오해했는지 알면서도 입을 열 수 없었던 것은, 진실을 말하는 순간 더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왜.”
겨우 입술을 떼자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결혼했으면 뭐가 달라져?”
도운의 얼굴이 굳었다.
“달라지는 게 없다고?”
그는 헛웃음을 삼키듯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여섯 년 만에 나타난 전여친 손가락에 반지가 있는데,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야 해?”
“우린 헤어진 사이야.”
“그렇게 헤어진 사이였어?”
서연은 더 말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너무 많은 시간이 비어 있었고, 자신은 그 빈칸을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도운은 그녀의 손을 한 번 더 바라봤다.
그러다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더 아팠다.
“누구랑 결혼했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서연은 한참 뒤에야 벽에서 등을 뗐다.
붙잡혔던 손목보다 가슴 한가운데가 더 오래 저렸다.
결혼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되는 일이었다.
반지는 결혼반지가 아니라고, 그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라고 말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끝내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거짓말 하나를 감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말을 꺼내는 순간, 언젠가는 반드시 싱싱이에게까지 닿게 될 것 같았다.
그날 밤, 서연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몸은 술기운에 지쳐 있었지만 눈을 감을 때마다 화장실에서 마주했던 도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자신을 미워하는 눈이었는데, 반지를 바라보던 순간만큼은 그 안에 미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잠이 들었고, 이상하게도 꿈속에서 다시 윤도운을 만났다.
그것은 오래전의 윤도운이었다.
지금처럼 날카로운 말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남자가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웃던 시절의 윤도운.
따뜻하게 달아오른 피부 위로 그의 손길이 천천히 지나갔다.
숨이 가까워질 때마다 가슴이 저절로 조여 들었고, 입술이 맞닿을 듯 가까워질 때면 서연은 늘 먼저 눈을 감았다.
“서연아.”
귓가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연은 꿈속에서도 그를 붙잡았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아도 됐고, 내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됐다.
도운의 품 안에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생겨도 함께 견딜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그녀를 밀어냈다.
꿈속의 얼굴이 서서히 지금의 윤도운으로 바뀌었다.
“너 결혼했어?”
서연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떴다.
한동안 천장만 바라봤다.
뺨을 타고 흐른 것이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아침이 밝기도 전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매니저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들떠 있었다.
“서연아, 됐어.”
서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뭐가요?”
“어제 말한 그 역할. 너로 확정됐대.”
잠이 덜 깬 머릿속에서 한동안 말뜻이 이어지지 않았다.
“정말요?”
“그래. 오늘 오후에 바로 대본 리딩하고 테스트 촬영 들어간대. 정신 차리고 나와.”
전화를 끊은 뒤에도 서연은 한참 휴대전화만 내려다봤다.
어젯밤 그 열 잔을 끝까지 마신 것이 떠올랐다.
속이 다시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그 고통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도 역할은 얻었다.
그 사실 하나로 오늘만큼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서연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깨달았다.
대본을 받아 들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윤도운이 보였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그는 다른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연이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잠깐 마주친 시선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서연은 어젯밤의 꿈이 다시 떠올라 괜히 손끝을 움켜쥐었다.
“다 왔으면 시작하겠습니다.”
연출부의 말과 함께 리딩이 시작됐다.
오늘 테스트할 장면은 극 중 여주인공이 오랫동안 참아 왔던 감정을 터뜨리는 신이었다.
상대를 사랑했지만 버림받았다고 믿었던 여자가 모든 상처를 쏟아 낸 뒤, 남자가 그녀의 입을 막듯 거칠게 키스하는 장면.
서연은 대본을 내려다봤다.
하필이면.
윤도운과 헤어진 뒤 처음으로 함께 서는 장면이 이런 내용이라니.
“준비됐죠?”
서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가 돌아갔다.
처음에는 생각보다 잘 풀렸다.
상대 배우를 바라보며 대사를 뱉어 내는 동안, 서연은 극 중 인물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림받았다는 원망과, 그래도 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마음이 뒤엉키면서 대사는 점점 거칠어졌다.
“당신은 늘 그랬어.”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묻지도 않았잖아. 왜 떠났는지, 왜 아무 말도 못 했는지…… 단 한 번이라도 물어봤어?”
대사가 끝날 무렵 서연의 눈에는 실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상대 배우가 다가왔다.
정해진 동선대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고, 두 사람의 거리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입술이 닿기 직전.
“컷.”
윤도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이 멈췄다.
무대 아래에 앉아 있던 그가 대본을 내려놓았다.
“다시.”
연출부 직원이 눈치를 보며 그를 바라봤다.
“어떤 부분이요?”
“대사가 너무 빨라요. 감정도 안 살아 있고.”
서연은 아무 말 없이 처음 위치로 돌아갔다.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대사 하나하나에 감정을 실었다.
“컷.”
또다시 도운이었다.
“눈물이 너무 빨라요.”
세 번째.
“컷.”
“손동작이 부자연스러운데.”
네 번째.
“컷.”
“다시.”
다섯 번째가 끝났을 때, 서연의 숨은 이미 거칠어져 있었다.
“윤 배우.”
연출부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도운의 시선이 서연에게 향했다.
“박서연 씨도 괜찮죠?”
거절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묻는 얼굴이었다.
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다시 시작됐다.
그녀는 같은 대사를 또 쏟아냈다.
사랑했고.
미워했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는 역할 속 여자의 마음이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과 뒤섞였다.
그런데 매번 상대 배우의 입술이 가까워질 때마다 도운이 끊었다.
“컷.”
“다시.”
“처음부터.”
한 번.
두 번.
열 번이 넘어가자 목 안이 따갑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서연은 대사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이러는지 이해하려고 했다.
정말 연기가 부족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윤도운이 개인적인 감정을 일에 섞을 사람은 아닐 거라고.
하지만 열다섯 번째 재촬영이 끝났을 때는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든지.
그리고 일부러 그러고 있었다.
“다시.”
서연은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윤도운 씨.”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이번에는 뭐가 문제였는데요?”
도운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목소리.”
서연의 눈썹이 움직였다.
“목소리가 안 좋네요.”
“그래서요?”
“배우면 다시 해야죠.”
그 말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서연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표시된 자리로 돌아갔다.
대사를 시작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당신은…….”
거기까지였다.
쉰 소리만 새어 나왔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더 힘껏 소리를 냈다.
“당신은 늘…….”
끝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도운은 대본을 넘기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서연은 허탈하게 웃을 뻔했다.
여기까지.
그 말을 듣기 위해 몇 시간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장비를 정리하기 시작한 뒤, 제작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서연 씨.”
그는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윤도운 씨한테 무슨 미움을 산 거예요?”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대로 정식 촬영 들어가서도 계속 이러면 곤란해요.”
제작자의 시선이 그녀의 쉰 목소리와 대본을 번갈아 훑었다.
“아무리 계약을 했어도 촬영을 제대로 못 하면 출연료, 대폭 깎일 수 있어요.”
그 말이 끝난 순간, 서연의 손에서 대본이 천천히 내려갔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서연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촬영장이 점점 멀어졌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윤도운의 손도.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강혜원의 얼굴도.모두 뒤로 사라지고 있었지만, 손목에는 아직도 손가락이 조여 오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서연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그러자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조정우가 뒤를 돌아봤다.“아파?”“괜찮아.”“네가 괜찮다는 말 할 때마다 더 불안해지는 거 알아?”서연이 작게 웃었다.“그 정도로 호들갑 떨 일 아니야.”“얼굴이 저렇게 부었는데?”정우는 곧장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서연은 싱싱이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정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리듯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서연은 연신 싱싱이 걱정만 했다.“이제 가도 되지?”“안 돼.”정우가 대답했다.“아직 붓기도 안 빠졌어.”“싱싱이가 기다려.”“그럼 같이 가.”서연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정우는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서연은 문득 웃음이 났다.“너 진짜 사람 피곤하게 한다.”“그래도 네가 나 없으면 더 피곤하게 살잖아.”그 말에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싱싱이의 병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아이가 태어난 뒤였다.혼자 아이를 키우겠다고 버텼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정했다.병원 기록 하나.보호자 서명 하나.아이에게 필요한 서류 하나를 만들 때마다 자신에게는 없는 자리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때 조정우가 말했다.‘내가 해 줄게.’서연은 웃으며 거절했다.‘뭘.’‘남편.’그 말에 그녀가 굳어 버리자 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어차피 명의만 빌려주는 거야.’그때도 그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서연은 알고 있었다.그 일이 단순히 이름 하나 빌려주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는 걸.그래서 더 미안했다.그럼에도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았다.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누가 내 와이프 괴롭혀?”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가르자, 강혜원이 들고 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서연 역시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비켜섰다.그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윤도운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낯선 사람일 리 없었다.며칠 전 자신이 받아 본 조사 자료 속 사진.박서연의 곁에 서 있던 남자였다.아이가 가운데에 있었고, 세 사람이 마치 오래전부터 한 가족이었던 것처럼 웃고 있던 바로 그 사진 속 남자.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서연에게 향했다.서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정우야?”남자의 표정이 굳었다.“이게 뭐야.”그는 서연의 뺨을 바라보다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서연은 얼른 손을 내렸다.“아무것도 아니야.”“아무것도 아닌데 얼굴이 이 모양이야?”조정우가 손을 뻗으려 하자 서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이미 그의 시선은 강혜원에게 향해 있었다.“저 사람이야?”혜원이 당황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뭐라고요?”“몇 번이나 때렸길래 사람 얼굴이 저렇게 부어.”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감독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조정우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촬영이랍시고 사람 하나 붙잡아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그 말에 감독이 황급히 나섰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오해요?”정우는 짧게 웃었다.“그럼 설명해 보시죠.”그는 다시 서연의 얼굴을 바라봤다.“저렇게 될 때까지 누가 뭘 했는지.”감독의 입이 굳었다.그때 조정우가 무심한 듯 덧붙였다.“제가 이 작품에 투자하면.”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강혜원 씨는 여기서 빠지는 걸로 합시다.”혜원의 얼굴이 굳었다.“지금 저보고 나가라고 하시는 거예요?”“그렇게 들렸으면 맞겠네요.”“제가 뭘 잘못했는데요?”혜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촬영하다가 NG 좀 낸
“박서연.”윤도운은 통화를 끊기 직전 다시 이름을 불렀다.“그 여자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알아봐.”상대가 잠시 말을 멈췄다.“어디까지요?”도운의 눈앞으로 조금 전 병실에서 마주했던 서연의 얼굴이 스쳤다.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순간 무너져 내리던 모습.자신을 향해 피가 필요 없다고 소리치던 모습.그리고 끝내, 당신 아이는 아니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던 얼굴까지.“전부.”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그런데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박서연이 다시 나타난 뒤부터 이상한 일뿐이었다.분명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아이를 두고 있었고,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다.그 사실만으로 무언가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세상에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자신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도운은 두 눈을 감았다.자꾸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그 아이가 몇 살인지.박서연이 언제 아이를 낳았는지.그리고 그 시간들이 자신이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의 세월과 어떻게 겹치는지.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숨이 막혔다.“설마.”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곧 사라졌다.그는 곧바로 스스로를 비웃었다.박서연이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자신 앞에 나타났을 리 없었다.아니.그럴 리 없다는 생각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더 무서웠다.서연은 싱싱이의 병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문을 열면 아이가 보일 텐데, 이상하게도 손잡이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이제 겨우 위기를 넘겼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서연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침대 위에는 싱싱이가 평소처럼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서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의 손을 감쌌다.따뜻했다.그것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엄마.”작은 목소리에 서연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안 잤어?”싱싱이는 힘없이 웃었다.
누구 하나 먼저 물러나지 못했다.서연의 손은 윤도운의 가슴께에 닿아 있었고, 도운의 팔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옆을 막고 있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아이를 두고 상처가 되는 말만 골라 내뱉었다.그런데도 몸이 이렇게 가까워지자, 이상할 만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움이 아니었다.서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향했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똑똑.“도운 형.”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안에 있어요?”서연이 화들짝 윤도운을 밀어냈다.도운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너무 늦었다.방금까지 서로의 숨이 섞일 만큼 가까웠던 감각이 몸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왜.”도운이 문 쪽을 향해 대답했다.“촬영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요. 다들 찾고 있어요.”“알았어.”매니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서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얼굴이 뜨거웠다.방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닫자 더 견딜 수가 없었다.윤도운 역시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듯했다.서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스쳤다.“왜.”“뭐가요.”“뭘 그렇게 봐.”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안 봤어요.”“그래?”“착각하지 마요.”도운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서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방금 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떠올랐다.오래전.아직 윤도운이 지금처럼 누구나 알아보는 배우가 아니었을 때였다.좁은 집에서 둘만 남아 서로를 바라보던 밤.서연은 그때도 지금처럼 그에게 화를 냈다.“맨날 나 놀리기만 하지?”도운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누가 놀렸어.”“방금도.”“네가 먼저 봤잖아.”“뭘.”“뭘 보긴.”그가 장난스럽게 몸을 가까이하자 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윤도운.”“왜.”“그만해.”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결국 도운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서연은 그가 자신
“…아이?”윤도운의 입술 사이에서 낮게 새어 나온 한마디는 박서연에게 닿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의사 앞에 매달린 채 아이의 상태만 확인하려 했다.“혈액은 확보됐습니다.”의사의 말에 서연의 다리가 풀릴 듯 흔들렸다.“다행히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혈액 팩이 들어와서 처치는 진행됐습니다.”그제야 숨을 들이켰다.목이 막혀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그럼…… 싱싱이는요?”“일단 안정시키고 있습니다.”서연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살았다.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아이의 피가 부족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은 넘겼다는 뜻이었다.눈물이 뒤늦게 쏟아졌다.서연은 급히 얼굴을 가리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한참 뒤, 아이가 잠든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누군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그러나 익숙한 구두 소리가 침대 가까이 멈추자 손끝이 굳었다.“내가 피 줄 수 있는데.”서연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윤도운이었다.그는 문가에 기대지도,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마치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Rh 음성이라면서.”서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나도 그래.”그 말이 끝나자 병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도운은 서연의 반응을 살폈다.놀랄 줄 알았다.적어도 당황하거나, 도움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 정도는 기대했다.하지만 서연은 뜻밖에도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이미 혈액 팩 들어왔어.”도운의 눈썹이 움직였다.“그래?”“그러니까 됐어.”서연은 아이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직계 존비속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수혈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그리고 지금 윤도운의 피를 아이에게 쓸 수 없다는 사실도.그런데 이상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를 보는 순간 가슴속에 다른 감정이 먼저 치밀었다.분노였다.싱싱이가 이 희귀한 혈액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험
“그 여자가 옛날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강혜원의 말이 끝나자 윤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갔다.조금 전까지 박서연이 사라진 계단 아래만 바라보던 눈이었다.혜원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히려 도운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기다렸다.화를 내든, 아니면 부정하든.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지금 윤도운이 박서연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으니까.“잊은 적 없어.”도운의 손이 자신의 팔에 얹힌 혜원의 손을 떼어 냈다.짧은 말이었지만 혜원의 표정은 순간 굳었다.“그런데 왜 계속 따라가?”“확인할 게 있으니까.”“뭘 확인해?”혜원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걸렸다.“또 어떤 거짓말로 오빠를 붙잡는지 확인하려고?”도운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서연이 사라진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확인할 게 있었다.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결혼했다는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태도.그리고 조금 전, 누군가와 통화하며 그렇게 환하게 웃던 얼굴까지.머릿속에서 하나씩 이어지는 것들이 모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녀에게 정말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인지.아니면 이미 자신도 모르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인지.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불편해졌다.그러나 도운은 더 이상 계단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박서연을 붙잡아 세운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무엇보다 그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여섯 해 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사람은 박서연이었다.그녀가 누구를 만나든.누구와 결혼하든.이제 와서 자신이 따질 일은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오빠.”강혜원이 다시 불렀다.도운은 뒤늦게 시선을 거뒀다.“촬영 가야지.”그 말만 남긴 채 먼저 돌아섰다.혜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금 전 자신의 말을 듣고도 박서연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