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뽀뽀해!”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처럼 들렸다.
그러나 한 사람이 외치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보탰고, 순식간에 촬영장 한쪽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뽀뽀해! 뽀뽀해!”
서연은 그 소리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었다.
윤도운과 강혜원이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도,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도.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이곳에 있었다.
촬영이 밀린 배우.
목이 쉬어 제대로 대사도 하지 못하는 배우.
쓸모없는 손이라도 되고 싶어 의상을 나르고 상자를 옮기던 사람.
그리고 지금 저쪽에는 모두가 축하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때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라고 생각하자 가슴 어딘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오빠.”
강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결국 돌아보지 못했다.
혜원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듯 웃으며 윤도운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이러는데 어떡해요?”
“뭘 어떡해.”
도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내버려 둬.”
“그래도 계속 외치잖아요.”
혜원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주변에서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옷걸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만 보고 싶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곳의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장면까지.
그런데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정말 마지막까지 확인해야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강혜원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해 줄까요?”
순간 주변의 환호가 더 커졌다.
혜원은 윤도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서연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떠민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너무 빨리 걸어서인지, 아니면 여전히 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인지 발밑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면.
그걸 자신의 눈으로 본다면.
앞으로 윤도운을 바라볼 때마다 그 장면까지 함께 떠오를 것 같았다.
서연이 사람들 사이를 벗어난 뒤에야 도운의 시선이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혜원의 얼굴은 이미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피할 수도 없는 거리였다.
그런데 도운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혜원의 입술은 그의 뺨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오빠?”
주변에서 아쉬운 탄성이 터졌다.
도운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장난도 적당히 해.”
그가 혜원의 손을 천천히 내리자 주변에서 웃음이 이어졌다.
“에이, 윤도운 배우 너무 진지한 거 아니에요?”
“그러게. 거의 다 됐는데.”
“다음에 다시 갑시다!”
도운은 대충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시선은 좀처럼 사람들 뒤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박서연이 떠난 방향.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그는 봤다.
그리고 자신이 혜원의 키스를 피한 순간에는 이미 서연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늦었다는 것인지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서연은 촬영장 뒤편으로 돌아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까지 걸었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벽에 등을 기댔다.
숨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가슴속에서는 별것 아닌 일이라고 되뇌었지만, 그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윤도운이 누구와 키스를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그가 강혜원과 사귀든, 결혼하든.
이제는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서연은 고개를 숙였다.
여섯 해 전 자신이 그를 떠난 순간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도운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는 날.
그 사람이 그의 옆에서 웃고, 자신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날.
머리로는 이미 수없이 상상했던 일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자 생각보다 훨씬 비참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굳어 있던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우리 싱싱이]
서연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야.”
목소리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쉰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말끝에는 저절로 부드러운 온기가 묻어났다.
“왜? 보고 싶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연은 벽에서 등을 떼고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걸어갔다.
“엄마도 보고 싶어.”
잠시 뒤, 아이가 무언가를 길게 말하는 동안 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아이의 대답을 듣던 서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생각들이 아주 잠깐만큼은 멀어졌다.
윤도운도.
강혜원도.
촬영장의 환호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상관없었다.
“알았어. 엄마 끝나면 바로 갈게.”
서연은 아이에게 몇 번이고 약속했다.
“밥 잘 먹고 있어.”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엄마가 미안해.”
그 말을 하는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아이가 곧장 무슨 뜻이냐고 묻자 서연은 얼른 웃었다.
“아니야.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이었다.
“여기서 시시덕거릴 시간이 있으면.”
서연의 몸이 굳었다.
뒤를 돌아보자 윤도운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휴대전화에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네 상태나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
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온 스태프 진행 지체시키지 말고.”
조금 전까지 아이에게 웃고 있던 얼굴에서 온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손안에 감쌌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한테 하지 말고.”
“네.”
“정식 촬영 들어가서도 오늘처럼 목소리 안 나오면 그때는 정말 답 없으니까.”
그의 말이 하나씩 가슴에 걸렸다.
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관리 잘하겠습니다.”
“그래.”
“다시는 촬영 지체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손끝은 이미 하얗게 질릴 만큼 굳어 있었다.
왜 늘 이렇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억울했다.
목이 망가진 것이 누구 때문인지, 도운 역시 알고 있었다.
어제 그가 몇 번이나 다시 하라고 했는지.
자신이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세워 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데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따지고 싸울 처지가 아니었다.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자신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킨 배우가 될 뿐이었다.
도운은 그런 서연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통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자신 앞에서는 한없이 무덤덤해지는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와 통화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웃으며 보고 싶다고 말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혹시 반지를 준 사람인지.
정말 결혼한 남편인지.
도운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오빠.”
강혜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곧이어 그녀가 자연스럽게 윤도운의 팔에 팔짱을 꼈다.
서연이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저 여자랑 무슨 얘기 해?”
혜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사람처럼.
도운이 팔을 빼려 하자 혜원의 손이 조금 더 단단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촬영 때문에.”
“그런데 왜 둘이 이렇게 구석에 있어요?”
서연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도.
혜원의 다정한 목소리도.
그리고 윤도운이 자신에게 다가오려다 멈춘 모습까지.
모든 것이 괜히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서연은 두 사람에게 짧게 인사했다.
“다음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도운이 그녀를 불렀다.
“박서연.”
하지만 서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도운이 따라가려 하자 혜원이 다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힘이 분명했다.
“오빠.”
도운이 시선을 내렸다.
혜원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조금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아챘다.
“왜.”
혜원은 잠시 멀어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도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가 옛날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오히려 마지막 말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벌써 잊은 거야?”
차 문이 닫히자마자 서연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촬영장이 점점 멀어졌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윤도운의 손도.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강혜원의 얼굴도.모두 뒤로 사라지고 있었지만, 손목에는 아직도 손가락이 조여 오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서연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그러자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조정우가 뒤를 돌아봤다.“아파?”“괜찮아.”“네가 괜찮다는 말 할 때마다 더 불안해지는 거 알아?”서연이 작게 웃었다.“그 정도로 호들갑 떨 일 아니야.”“얼굴이 저렇게 부었는데?”정우는 곧장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서연은 싱싱이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정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리듯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서연은 연신 싱싱이 걱정만 했다.“이제 가도 되지?”“안 돼.”정우가 대답했다.“아직 붓기도 안 빠졌어.”“싱싱이가 기다려.”“그럼 같이 가.”서연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정우는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서연은 문득 웃음이 났다.“너 진짜 사람 피곤하게 한다.”“그래도 네가 나 없으면 더 피곤하게 살잖아.”그 말에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싱싱이의 병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아이가 태어난 뒤였다.혼자 아이를 키우겠다고 버텼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정했다.병원 기록 하나.보호자 서명 하나.아이에게 필요한 서류 하나를 만들 때마다 자신에게는 없는 자리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때 조정우가 말했다.‘내가 해 줄게.’서연은 웃으며 거절했다.‘뭘.’‘남편.’그 말에 그녀가 굳어 버리자 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어차피 명의만 빌려주는 거야.’그때도 그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서연은 알고 있었다.그 일이 단순히 이름 하나 빌려주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는 걸.그래서 더 미안했다.그럼에도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았다.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누가 내 와이프 괴롭혀?”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가르자, 강혜원이 들고 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서연 역시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비켜섰다.그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윤도운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낯선 사람일 리 없었다.며칠 전 자신이 받아 본 조사 자료 속 사진.박서연의 곁에 서 있던 남자였다.아이가 가운데에 있었고, 세 사람이 마치 오래전부터 한 가족이었던 것처럼 웃고 있던 바로 그 사진 속 남자.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서연에게 향했다.서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정우야?”남자의 표정이 굳었다.“이게 뭐야.”그는 서연의 뺨을 바라보다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서연은 얼른 손을 내렸다.“아무것도 아니야.”“아무것도 아닌데 얼굴이 이 모양이야?”조정우가 손을 뻗으려 하자 서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이미 그의 시선은 강혜원에게 향해 있었다.“저 사람이야?”혜원이 당황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뭐라고요?”“몇 번이나 때렸길래 사람 얼굴이 저렇게 부어.”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감독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조정우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촬영이랍시고 사람 하나 붙잡아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그 말에 감독이 황급히 나섰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오해요?”정우는 짧게 웃었다.“그럼 설명해 보시죠.”그는 다시 서연의 얼굴을 바라봤다.“저렇게 될 때까지 누가 뭘 했는지.”감독의 입이 굳었다.그때 조정우가 무심한 듯 덧붙였다.“제가 이 작품에 투자하면.”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강혜원 씨는 여기서 빠지는 걸로 합시다.”혜원의 얼굴이 굳었다.“지금 저보고 나가라고 하시는 거예요?”“그렇게 들렸으면 맞겠네요.”“제가 뭘 잘못했는데요?”혜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촬영하다가 NG 좀 낸
“박서연.”윤도운은 통화를 끊기 직전 다시 이름을 불렀다.“그 여자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알아봐.”상대가 잠시 말을 멈췄다.“어디까지요?”도운의 눈앞으로 조금 전 병실에서 마주했던 서연의 얼굴이 스쳤다.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순간 무너져 내리던 모습.자신을 향해 피가 필요 없다고 소리치던 모습.그리고 끝내, 당신 아이는 아니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던 얼굴까지.“전부.”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그런데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박서연이 다시 나타난 뒤부터 이상한 일뿐이었다.분명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아이를 두고 있었고,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다.그 사실만으로 무언가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세상에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자신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도운은 두 눈을 감았다.자꾸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그 아이가 몇 살인지.박서연이 언제 아이를 낳았는지.그리고 그 시간들이 자신이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의 세월과 어떻게 겹치는지.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숨이 막혔다.“설마.”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곧 사라졌다.그는 곧바로 스스로를 비웃었다.박서연이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자신 앞에 나타났을 리 없었다.아니.그럴 리 없다는 생각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더 무서웠다.서연은 싱싱이의 병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문을 열면 아이가 보일 텐데, 이상하게도 손잡이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이제 겨우 위기를 넘겼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서연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침대 위에는 싱싱이가 평소처럼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서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의 손을 감쌌다.따뜻했다.그것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엄마.”작은 목소리에 서연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안 잤어?”싱싱이는 힘없이 웃었다.
누구 하나 먼저 물러나지 못했다.서연의 손은 윤도운의 가슴께에 닿아 있었고, 도운의 팔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옆을 막고 있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아이를 두고 상처가 되는 말만 골라 내뱉었다.그런데도 몸이 이렇게 가까워지자, 이상할 만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움이 아니었다.서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향했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똑똑.“도운 형.”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안에 있어요?”서연이 화들짝 윤도운을 밀어냈다.도운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너무 늦었다.방금까지 서로의 숨이 섞일 만큼 가까웠던 감각이 몸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왜.”도운이 문 쪽을 향해 대답했다.“촬영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요. 다들 찾고 있어요.”“알았어.”매니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서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얼굴이 뜨거웠다.방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닫자 더 견딜 수가 없었다.윤도운 역시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듯했다.서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스쳤다.“왜.”“뭐가요.”“뭘 그렇게 봐.”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안 봤어요.”“그래?”“착각하지 마요.”도운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서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방금 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떠올랐다.오래전.아직 윤도운이 지금처럼 누구나 알아보는 배우가 아니었을 때였다.좁은 집에서 둘만 남아 서로를 바라보던 밤.서연은 그때도 지금처럼 그에게 화를 냈다.“맨날 나 놀리기만 하지?”도운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누가 놀렸어.”“방금도.”“네가 먼저 봤잖아.”“뭘.”“뭘 보긴.”그가 장난스럽게 몸을 가까이하자 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윤도운.”“왜.”“그만해.”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결국 도운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서연은 그가 자신
“…아이?”윤도운의 입술 사이에서 낮게 새어 나온 한마디는 박서연에게 닿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의사 앞에 매달린 채 아이의 상태만 확인하려 했다.“혈액은 확보됐습니다.”의사의 말에 서연의 다리가 풀릴 듯 흔들렸다.“다행히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혈액 팩이 들어와서 처치는 진행됐습니다.”그제야 숨을 들이켰다.목이 막혀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그럼…… 싱싱이는요?”“일단 안정시키고 있습니다.”서연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살았다.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아이의 피가 부족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은 넘겼다는 뜻이었다.눈물이 뒤늦게 쏟아졌다.서연은 급히 얼굴을 가리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한참 뒤, 아이가 잠든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누군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그러나 익숙한 구두 소리가 침대 가까이 멈추자 손끝이 굳었다.“내가 피 줄 수 있는데.”서연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윤도운이었다.그는 문가에 기대지도,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마치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Rh 음성이라면서.”서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나도 그래.”그 말이 끝나자 병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도운은 서연의 반응을 살폈다.놀랄 줄 알았다.적어도 당황하거나, 도움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 정도는 기대했다.하지만 서연은 뜻밖에도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이미 혈액 팩 들어왔어.”도운의 눈썹이 움직였다.“그래?”“그러니까 됐어.”서연은 아이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직계 존비속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수혈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그리고 지금 윤도운의 피를 아이에게 쓸 수 없다는 사실도.그런데 이상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를 보는 순간 가슴속에 다른 감정이 먼저 치밀었다.분노였다.싱싱이가 이 희귀한 혈액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험
“그 여자가 옛날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강혜원의 말이 끝나자 윤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갔다.조금 전까지 박서연이 사라진 계단 아래만 바라보던 눈이었다.혜원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히려 도운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기다렸다.화를 내든, 아니면 부정하든.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지금 윤도운이 박서연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으니까.“잊은 적 없어.”도운의 손이 자신의 팔에 얹힌 혜원의 손을 떼어 냈다.짧은 말이었지만 혜원의 표정은 순간 굳었다.“그런데 왜 계속 따라가?”“확인할 게 있으니까.”“뭘 확인해?”혜원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걸렸다.“또 어떤 거짓말로 오빠를 붙잡는지 확인하려고?”도운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서연이 사라진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확인할 게 있었다.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결혼했다는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태도.그리고 조금 전, 누군가와 통화하며 그렇게 환하게 웃던 얼굴까지.머릿속에서 하나씩 이어지는 것들이 모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녀에게 정말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인지.아니면 이미 자신도 모르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인지.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불편해졌다.그러나 도운은 더 이상 계단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박서연을 붙잡아 세운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무엇보다 그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여섯 해 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사람은 박서연이었다.그녀가 누구를 만나든.누구와 결혼하든.이제 와서 자신이 따질 일은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오빠.”강혜원이 다시 불렀다.도운은 뒤늦게 시선을 거뒀다.“촬영 가야지.”그 말만 남긴 채 먼저 돌아섰다.혜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금 전 자신의 말을 듣고도 박서연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