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뽀뽀해!”
처음에는 누군가의 장난처럼 들렸다.
그러나 한 사람이 외치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목소리를 보탰고, 순식간에 촬영장 한쪽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뽀뽀해! 뽀뽀해!”
서연은 그 소리에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었다.
윤도운과 강혜원이 사람들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도,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스태프들의 얼굴도.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이곳에 있었다.
촬영이 밀린 배우.
목이 쉬어 제대로 대사도 하지 못하는 배우.
쓸모없는 손이라도 되고 싶어 의상을 나르고 상자를 옮기던 사람.
그리고 지금 저쪽에는 모두가 축하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때 자신이 서 있었던 자리라고 생각하자 가슴 어딘가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오빠.”
강혜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결국 돌아보지 못했다.
혜원은 수많은 사람의 시선 속에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듯 웃으며 윤도운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이러는데 어떡해요?”
“뭘 어떡해.”
도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내버려 둬.”
“그래도 계속 외치잖아요.”
혜원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내밀었다.
주변에서는 다시 웃음이 터졌다.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옷걸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그만 보고 싶었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두 사람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이곳의 모든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장면까지.
그런데도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정말 마지막까지 확인해야 미련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강혜원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제가 해 줄까요?”
순간 주변의 환호가 더 커졌다.
혜원은 윤도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서연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떠민 것처럼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너무 빨리 걸어서인지, 아니면 여전히 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인지 발밑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저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두 사람이 입을 맞췄다면.
그걸 자신의 눈으로 본다면.
앞으로 윤도운을 바라볼 때마다 그 장면까지 함께 떠오를 것 같았다.
서연이 사람들 사이를 벗어난 뒤에야 도운의 시선이 그녀가 사라진 쪽으로 향했다.
혜원의 얼굴은 이미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피할 수도 없는 거리였다.
그런데 도운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혜원의 입술은 그의 뺨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오빠?”
주변에서 아쉬운 탄성이 터졌다.
도운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장난도 적당히 해.”
그가 혜원의 손을 천천히 내리자 주변에서 웃음이 이어졌다.
“에이, 윤도운 배우 너무 진지한 거 아니에요?”
“그러게. 거의 다 됐는데.”
“다음에 다시 갑시다!”
도운은 대충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시선은 좀처럼 사람들 뒤편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박서연이 떠난 방향.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그는 봤다.
그리고 자신이 혜원의 키스를 피한 순간에는 이미 서연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도.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늦었다는 것인지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서연은 촬영장 뒤편으로 돌아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까지 걸었다.
더 이상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이르러서야 벽에 등을 기댔다.
숨이 생각보다 거칠었다.
가슴속에서는 별것 아닌 일이라고 되뇌었지만, 그 말은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윤도운이 누구와 키스를 하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그가 강혜원과 사귀든, 결혼하든.
이제는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지.
서연은 고개를 숙였다.
여섯 해 전 자신이 그를 떠난 순간부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도운에게 다른 사람이 생기는 날.
그 사람이 그의 옆에서 웃고, 자신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는 날.
머리로는 이미 수없이 상상했던 일이었는데 실제로 마주하자 생각보다 훨씬 비참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굳어 있던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
[우리 싱싱이]
서연은 주변을 한 번 살핀 뒤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야.”
목소리가 아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쉰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말끝에는 저절로 부드러운 온기가 묻어났다.
“왜? 보고 싶었어?”
수화기 너머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서연은 벽에서 등을 떼고 조금 더 조용한 곳으로 걸어갔다.
“엄마도 보고 싶어.”
잠시 뒤, 아이가 무언가를 길게 말하는 동안 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정말?”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그래서 선생님한테 뭐라고 했는데?”
아이의 대답을 듣던 서연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생각들이 아주 잠깐만큼은 멀어졌다.
윤도운도.
강혜원도.
촬영장의 환호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 상관없었다.
“알았어. 엄마 끝나면 바로 갈게.”
서연은 아이에게 몇 번이고 약속했다.
“밥 잘 먹고 있어.”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엄마가 미안해.”
그 말을 하는 순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러나 아이가 곧장 무슨 뜻이냐고 묻자 서연은 얼른 웃었다.
“아니야. 그냥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녀가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이었다.
“여기서 시시덕거릴 시간이 있으면.”
서연의 몸이 굳었다.
뒤를 돌아보자 윤도운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휴대전화에 잠시 머물렀다가 천천히 그녀에게 향했다.
“네 상태나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
서연의 표정이 굳었다.
“온 스태프 진행 지체시키지 말고.”
조금 전까지 아이에게 웃고 있던 얼굴에서 온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서연은 휴대전화를 손안에 감쌌다.
“죄송합니다.”
“사과는 나한테 하지 말고.”
“네.”
“정식 촬영 들어가서도 오늘처럼 목소리 안 나오면 그때는 정말 답 없으니까.”
그의 말이 하나씩 가슴에 걸렸다.
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관리 잘하겠습니다.”
“그래.”
“다시는 촬영 지체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말은 공손했지만 손끝은 이미 하얗게 질릴 만큼 굳어 있었다.
왜 늘 이렇게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억울했다.
목이 망가진 것이 누구 때문인지, 도운 역시 알고 있었다.
어제 그가 몇 번이나 다시 하라고 했는지.
자신이 제대로 목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까지 그 자리에 세워 둔 사람이 누구인지.
그런데도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따지고 싸울 처지가 아니었다.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자신이 또다시 문제를 일으킨 배우가 될 뿐이었다.
도운은 그런 서연을 바라보다가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 전까지 통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자신 앞에서는 한없이 무덤덤해지는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누구와 통화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렇게 웃으며 보고 싶다고 말할 만큼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지.
혹시 반지를 준 사람인지.
정말 결혼한 남편인지.
도운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으려던 순간이었다.
“오빠.”
강혜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곧이어 그녀가 자연스럽게 윤도운의 팔에 팔짱을 꼈다.
서연이 똑똑히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저 여자랑 무슨 얘기 해?”
혜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다정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 채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사람처럼.
도운이 팔을 빼려 하자 혜원의 손이 조금 더 단단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촬영 때문에.”
“그런데 왜 둘이 이렇게 구석에 있어요?”
서연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모습도.
혜원의 다정한 목소리도.
그리고 윤도운이 자신에게 다가오려다 멈춘 모습까지.
모든 것이 괜히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서연은 두 사람에게 짧게 인사했다.
“다음 촬영 준비하겠습니다.”
도운이 그녀를 불렀다.
“박서연.”
하지만 서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도운이 따라가려 하자 혜원이 다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힘이 분명했다.
“오빠.”
도운이 시선을 내렸다.
혜원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조금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아챘다.
“왜.”
혜원은 잠시 멀어지는 서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도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여자가 옛날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래서 오히려 마지막 말이 더 또렷하게 들렸다.
“벌써 잊은 거야?”
오디션장 문을 열자 서연은 가장 먼저 자기 이름을 확인했다.박서연.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누구의 연인도, 누구의 아이 엄마도 아닌 이름 세 글자.서연은 접수대에 대본을 내밀었다.“박서연입니다.”직원이 명단을 확인하다가 잠깐 멈췄다.“아… 네. 알고 있습니다.”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귀에 걸렸다.서연은 모르는 척 의자에 앉았다.대기실에는 이미 배우 여섯 명이 와 있었다.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누군가는 대본을 중얼거렸고, 누군가는 거울을 보며 표정을 고쳤다.서연도 대본을 펼쳤다.이번 배역은 아이를 잃은 뒤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였다.감정을 터뜨리는 장면보다 참는 장면이 더 많았다.서연이 하고 싶었던 역할이었다.오디션 전날에도 도윤은 딱 한 번 물었다.“제작사 대표 이름은 알아도 돼?”서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알아도 되는데 연락은 하지 마.”“안 해.”“비서한테 확인시키는 것도 안 돼.”“그것도 안 해.”“내가 떨어져도.”그때 도윤은 잠깐 말이 없었다.“그건 내가 제일 싫겠지만, 그래도 안 해.”서연은 그 대답을 믿고 왔다.그래서 더 예민해졌다.도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이미 그의 그림자를 먼저 보고 있었다.자기 실력으로 들어온 자리인지, 누군가가 미리 깔아둔 자리인지 남들이 의심하는 순간부터 증명할 몫은 전부 서연에게 돌아왔다.그녀는 대본 모서리를 엄지로 눌렀다.오늘만큼은 단 한 장면이라도 박서연으로 기억되고 싶었다.휴대폰이 울렸다.도윤이었다.-도착했어?서연은 짧게 답했다.-응.곧바로 답장이 왔다.-끝나면 연락해.그게 전부였다.누구를 만나겠다는 말도, 제작사에 확인하겠다는 말도 없었다.서연은 화면을 끄고 다시 대본을 봤다.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배우 둘의 대화가 들렸다.“쟤 맞지?”“누구?”“윤도윤.”목소리는 작았지만 이름만큼은 정확히 들렸다.서연의 손끝이 멈췄다.“진짜 여기 오디션을 보네.”“이미 정해진 거 아니야?”서연은 고
일요일 저녁.식탁에는 다섯 사람 몫의 그릇이 놓여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찌개를 퍼 담았고, 서미란은 밥그릇을 하나씩 밀어줬다.도윤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웃었다.“왜.”서연이 물었다.“그냥.”“뭐가 그냥이야.”도윤은 식탁을 한번 둘러봤다.처음에는 이 집에 자기 칫솔 하나 두는 것도 조심스러웠다.이제는 장모가 살고, 어머니가 거의 매일 드나들고, 유나는 두 할머니 사이에서 반찬을 골라 먹고 있었다.“사람 많아졌네.”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싫어?”“아닙니다.”서미란도 물었다.“불편하니?”도윤은 고개를 저었다.“이제 익숙해요.”유나가 숟가락을 들고 말했다.“아빠 이제 안 도망가.”도윤의 얼굴이 굳었다.“아빠가 언제 도망갔어.”서연이 웃었다.“시장 갈 때 회사 간다고 했잖아.”“회의 있었어.”“욕실 순서 정할 때도 회사 가고 싶다고 했고.”“그건 말만 한 거야.”서미란이 피식 웃었다.“이사회가 제일 편하다고도 했지.”도윤은 어머니를 봤다.“그걸 아직 기억하세요?”“네가 얼마나 억울한 얼굴이었는데.”서연의 어머니까지 웃었다.“사위가 밖에서는 그렇게 무섭다는데 여기서는 제일 약해.”“제가 약한 게 아니라 두 분이 강하신 겁니다.”“말은 잘해.”식탁에 웃음이 번졌다.식사가 끝나자 유나는 그림책을 들고 거실 바닥에 앉았다.“할머니 둘 다 여기 앉아.”서미란이 소파를 가리켰다.“할머니는 여기 앉으면 안 돼?”“안 돼. 바닥.”“왜?”“가족은 같이 앉아야 돼.”서연의 어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바닥에 앉았다.서미란도 잠깐 망설이다 그 옆에 앉았다.도윤이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이젠 자연스럽네.”서연이 그의 팔을 툭 쳤다.“당신도 앉아.”“나까지?”“가족이라며.”도윤도 결국 바닥에 앉았다.유나는 다섯 사람을 한 줄로 앉혀놓고 만족스럽게 웃었다.“됐다.”“뭐가?”“우리 집.”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유나를 봤다.“할머니도?”“응.”“외할머니도?”“응.”
“도우미 아주머니예요?”거실 공기가 한순간 멎었다.앞치마를 두른 서연의 어머니는 과일 접시를 들고 있었고, 현관에는 서미란의 지인인 최명희가 서 있었다.서미란의 표정이 먼저 굳었다.“아니.”짧은 한마디였다.최명희가 당황해 웃었다.“아, 내가 실수했나 봐. 집안일을 하고 계셔서.”서미란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우리 사돈이야.”도윤은 소파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멈췄다.서연도 대본을 내려놓았다.서연의 어머니는 잠시 최명희를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과일 접시를 식탁에 놓았다.“앉으세요. 차 드릴게요.”“죄송해요. 제가 정말 몰라서.”“모를 수도 있죠.”대답은 담담했지만 도윤은 장모의 입가가 조금 굳은 걸 봤다.최명희는 자리에 앉고도 계속 주변을 둘러봤다.“미란이가 요즘 여기 자주 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소박하게 사시네요.”도윤의 눈썹이 움직였다.서연의 어머니는 차를 따르며 물었다.“소박하다는 게 어떤 뜻이에요?”“아니, 좋은 뜻이에요. 요즘은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집도 드물잖아요.”말은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거슬렸다.서미란이 컵을 내려놓았다.“명희야.”“응?”“말 이상하게 하지 마.”최명희의 표정이 굳었다.“내가 뭘.”“지금 계속 평가하고 있잖아.”“평가라니. 그냥 다른 생활이 신기해서—”“다르다고 위아래가 생기는 건 아니야.”도윤은 어머니를 바라봤다.서미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더 이상 물러설 생각이 없는 얼굴이었다.최명희가 헛웃음을 냈다.“미란아,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그래.”그 말에 서미란이 잠깐 멈췄다.도윤도 숨을 죽였다.“맞아.”서미란은 의외로 쉽게 인정했다.“전에는 나도 그랬어.”최명희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돈 많이 쓰고, 좋은 집 살고, 사람 쓰는 게 당연히 더 나은 생활이라고 생각했지.”서연의 어머니도 조용히 그녀를 봤다.“근데 아니더라.”“갑자기 왜.”서미란은 주방을 한번 봤다.싱크대 옆에는 직접 씻어 말려둔 그릇이 있었고, 냉장
토요일 아침.도윤은 거실에서 노트북을 보다가 주방 쪽을 흘끗 봤다.이상했다. 너무 조용했다.평소라면 벌써 한 번쯤 말이 붙었어야 했다.도윤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두 분 뭐 하세요?”식탁에 마주 앉은 두 어머니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서연의 어머니 앞에는 장보기 영수증이 놓여 있었고, 서미란 앞에는 작은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회의.”“무슨 회의요?”서미란이 수첩을 넘겼다.“집안일.”“그걸 두 분이 왜 회의해요?”“같이 있으니까 정해야지.”도윤은 불안한 얼굴로 서연을 봤다.소파에서 대본을 읽던 서연은 이미 웃고 있었다.“이거 알아?”“응.”“왜 나만 몰라.”“당신은 회사 회의하잖아.”“여기도 내 집인데.”서미란이 바로 말했다.“그래서 너도 앉아.”도윤은 괜히 물었다는 얼굴이 됐지만 결국 식탁에 앉았다.서미란이 읽었다.“첫 번째. 장보기.”서연의 어머니가 말했다.“나는 일주일에 두 번 시장.”“저는 필요한 건 배송.”“그건 안 돼요. 또 냉장고 터져요.”“먹을 만큼만 시키면 되죠.”“사돈이 먹을 만큼을 모르잖아요.”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도윤은 웃음을 참았다.“그럼 시장 한 번, 배송 한 번.”서연의 어머니가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도윤이 놀랐다.“벌써 합의됐어요?”두 사람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두 번째. 청소.”“거실이랑 욕실은 청소하는 분 부르고.”“주방은 내가 해요.”“네.”“유나 방은 유나도 같이.”“좋아요.”도윤은 점점 이상해졌다.“왜 이렇게 잘 맞아요?”서연의 어머니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맨날 싸우면 좋겠어?”“그건 아닌데.”“그럼 조용히 있어.”도윤은 정말 조용히 했다.세 번째는 식사였다.서미란이 말했다.“아침은 꼭 먹이는 걸로.”“유나는 그렇죠.”“도윤이도.”도윤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저요?”“넌 아침 거르잖아.”서연의 어머니까지 거들었다.“그건 안 좋지.”“저는 배 안 고프면 안 먹어도 됩니다.”두
토요일 오전.서연의 어머니는 주방 바닥에 큰 대야를 내려놨다.배추, 무, 쪽파, 고춧가루까지 줄줄이 나오자 도윤이 거실에서 고개를 들었다.“오늘 뭐 하세요?”“김치 좀 담그려고.”도윤은 대야 크기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좀?”“이 정도면 조금이지.”그때 현관문이 열렸다.서미란이 들어오다가 주방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이게 다 뭐예요?”“김치요.”“직접 담그시게요?”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그럼 김치를 어떻게 먹어요.”“사면 되잖아요.”도윤은 바로 눈을 감았다.서연도 입술을 깨물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손을 멈췄다.“사지 않고 담가 먹을 수도 있죠.”“물론 그렇지만, 이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나 해서요.”“김치 담그는 게 왜 힘들어요.”“손도 많이 가고 시간도 오래 걸리잖아요.”“그래서 맛있는 거죠.”서미란은 대야를 한참 바라봤다.“좋은 데서 주문하면 일정한 맛으로 오는데.”“집마다 김치 맛이 다른 게 좋은 거예요.”“매번 맛이 달라도 괜찮아요?”“그게 집 김치지.”둘의 대화는 시작부터 평행선이었다.유나가 주방으로 달려왔다.“외할머니 뭐 해?”“김치.”“나도 할래.”서연의 어머니가 작은 앞치마를 꺼냈다.“손 씻고 와.”서미란이 바로 말했다.“유나는 매울 텐데.”“장갑 끼면 돼요.”“옷에 묻으면?”“빨면 되죠.”서미란의 입이 다물어졌다.요즘 자주 듣는 대답이었다.유나는 고무장갑까지 끼고 돌아왔다.“할머니도 해.”서미란이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나도?”“응.”“할머니는…”거절하려던 말이 멈췄다.유나는 이미 장갑 한 켤레를 들고 있었다.“이거.”서미란은 결국 받아 들었다.“어떻게 하는데요?”서연의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배추를 하나 내밀었다.“양념 여기 넣고.”“얼마나요?”“적당히.”서미란의 표정이 굳었다.“또 적당히예요?”“김치에 계량컵 들이댈 거예요?”“그래도 기준은 있어야죠.”“배추마다 크기가 다른데 무슨 기준.”서미란은 한숨을 쉬었다.“진짜 사는
아침부터 현관 앞에 상자가 세 개 쌓였다.도윤은 출근하려다 멈췄다.“이게 뭐예요?”서미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유나 겨울옷.”“겨울옷 있어요.”주방에서 나오던 서연의 어머니가 바로 말했다.“작년에 입던 거 아직 맞아요.”서미란이 상자를 열었다.코트와 패딩, 원피스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서연의 어머니가 옷 하나를 집어 가격표를 확인하더니 손을 멈췄다.“애 옷이 왜 이렇게 비싸요?”서미란의 표정도 미묘해졌다.“좋은 옷이니까요.”“애들은 한철 입으면 작아지는데.”“그래도 따뜻하고 좋은 걸 입히면 좋죠.”“놀이터에서 흙 묻히면 아까워서 어떻게 입혀.”“옷은 입으라고 있는 거예요.”“그렇게 비싼 걸 막 입혀요?”“비싸다고 모셔둘 건 아니잖아요.”도윤은 넥타이를 만지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 순간 유나가 방에서 나왔다.“우와!”상자를 발견하고 달려왔다.분홍색 코트를 꺼내 몸에 대봤다.“예뻐!”서미란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입어봐.”유나는 코트를 입었다.도윤도 잠깐 놀랄 만큼 잘 어울렸다.“예쁘네.”서연의 어머니도 인정했다.“예쁘긴 예쁘네.”서미란이 만족스럽게 웃었다.“그렇죠?”그런데 유나가 팔을 몇 번 움직이더니 얼굴을 찌푸렸다.“불편해.”“왜?”“팔이 안 올라가.”서미란이 단추를 다시 정리해줬다.“코트는 원래 조금 그래.”“이거 입고 놀이터 못 가.”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거봐요.”서미란이 난처한 얼굴이 됐다.“놀이터 갈 때는 다른 거 입으면 되지.”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그럼 이건 언제 입어?”“좋은 데 갈 때.”“좋은 데가 어디야?”“할머니랑 어디 갈 때.”유나는 별로 흥미가 없는 얼굴이었다.코트를 벗자마자 의자 위에 놓인 낡은 점퍼를 집었다.“난 이게 좋아.”서미란의 시선이 점퍼로 향했다.소매 끝이 조금 해졌고 지퍼 장식도 한쪽이 벗겨져 있었다.“그건 이제 바꿔야 하지 않니?”“왜?”“오래됐잖아.”“편한데.”서연의 어머니가 웃었다.“저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