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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11:27:52

“그 여자가 옛날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

강혜원의 말이 끝나자 윤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갔다.

조금 전까지 박서연이 사라진 계단 아래만 바라보던 눈이었다.

혜원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운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기다렸다.

화를 내든, 아니면 부정하든.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지금 윤도운이 박서연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으니까.

“잊은 적 없어.”

도운의 손이 자신의 팔에 얹힌 혜원의 손을 떼어 냈다.

짧은 말이었지만 혜원의 표정은 순간 굳었다.

“그런데 왜 계속 따라가?”

“확인할 게 있으니까.”

“뭘 확인해?”

혜원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걸렸다.

“또 어떤 거짓말로 오빠를 붙잡는지 확인하려고?”

도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연이 사라진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확인할 게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

결혼했다는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태도.

그리고 조금 전, 누군가와 통화하며 그렇게 환하게 웃던 얼굴까지.

머릿속에서 하나씩 이어지는 것들이 모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에게 정말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이미 자신도 모르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불편해졌다.

그러나 도운은 더 이상 계단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박서연을 붙잡아 세운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섯 해 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사람은 박서연이었다.

그녀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결혼하든.

이제 와서 자신이 따질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

“오빠.”

강혜원이 다시 불렀다.

도운은 뒤늦게 시선을 거뒀다.

“촬영 가야지.”

그 말만 남긴 채 먼저 돌아섰다.

혜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금 전 자신의 말을 듣고도 박서연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치 자신이 막아 세워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멈추기로 결정한 사람처럼.

그게 더 불안했다.


오후 촬영 장소는 병원이었다.

드라마의 주요 배경 중 하나가 되는 병원 장면을 위해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동하면서, 서연 역시 대기 차량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에도 조금 전 일이 계속 떠올랐다.

윤도운과 강혜원.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자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밀려나던 순간.

생각하지 않으려 할수록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결국 서연은 눈을 감았다.

지금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오늘 촬영을 무사히 끝내는 것.

출연료를 깎이지 않는 것.

그리고 촬영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싱싱이에게 돌아가는 것.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병원 건물 앞에 도착하자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해졌다.

익숙한 냄새 때문이었다.

복도를 가득 채운 소독약 냄새.

휠체어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보호자의 다급한 발걸음.

서연에게 병원은 단순히 촬영 장소가 아니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견뎌 낸 곳이었다.

아이의 손을 붙잡고 밤을 새웠던 복도.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야 했던 날들.

그리고 매번 의사의 표정 하나에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서야 했던 시간들까지.

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꺼냈다.

싱싱이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도 통화했으니까.

지금쯤이면 병실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던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이—!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경보음이 병원 전체를 울렸다.

촬영 준비를 하던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서연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잠시 뒤, 복도 천장에 설치된 방송 스피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Rh 음성 희귀 혈액형 긴급 수급합니다.”

순간 서연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Rh 음성 혈액이 급히 필요합니다.”

두 번째 방송이 이어졌지만 서연은 이미 제대로 듣고 있지 못했다.

싱싱이.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이었다.

아이 역시 그 희귀 혈액형이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서연은 늘 두려웠다.

혹시라도 급하게 피가 필요한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자신이 아무리 뛰어다녀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생기면.

그날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손에 들고 있던 대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서연 씨?”

누군가 그녀를 불렀지만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송이 다시 한번 반복됐다.

그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싱싱이.”

입술 사이로 아이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서연은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박서연 배우님!”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촬영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온 병원이었기에 자신이 찾는 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혹시.

정말 싱싱이 때문이라면.

서연의 숨이 거칠어졌다.

복도를 지나며 사람들과 몇 번이나 부딪힐 뻔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귓가가 울렸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병원에는 자신 말고도 Rh 음성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는 몇 년 동안 서연은 너무 많은 응급 상황을 겪었다.

그 방송이 들린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할 정도로.

그녀는 그 단어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싱싱아.”

이번에는 소리 내어 불렀다.

응급실 앞에 도착했을 때, 서연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의료진의 얼굴은 하나같이 급박했고, 보호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서연은 사람들 사이를 밀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기요!”

의사를 발견하자마자 달려갔다.

“선생님!”

의사가 돌아보기도 전에 서연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방금 방송한 거요.”

목소리가 떨렸다.

“Rh 음성 혈액이 필요하다고…… 그게 누구예요?”

의사의 얼굴이 굳었다.

“보호자분, 진정하시고요.”

“누구냐고요.”

서연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혹시 아이예요?”

의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짧은 침묵이 서연을 더 미치게 만들었다.

“제 아이 이름이 박싱이에요.”

서연은 의사의 팔을 놓지 못했다.

“싱싱이요. 혹시 박싱이…….”

그 순간, 안쪽에서 간호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보호자분!”

서연의 몸이 굳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이었다.

“박싱이 보호자분 맞으세요?”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서연은 그대로 의사에게 매달렸다.

“싱싱이가 왜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에요?”

“일단 진정하세요.”

“어떻게 진정해요!”

참고 있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서연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촬영도.

윤도운도.

출연료도.

지금까지 자신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아이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피가 필요하면 구할게요.”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졌다.

“제가 어떻게든 구할 테니까…….”

서연은 의사의 손을 붙잡았다.

“제발.”

목소리가 완전히 무너졌다.

“제 아이 좀 살려주세요.”

조금 떨어진 복도 끝.

윤도운이 그대로 멈춰 섰다.

촬영팀을 따라 이동하던 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들린 희귀 혈액형 방송에 잠시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자신 역시 Rh 음성이라는 사실이 떠오른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병원에서 희귀 혈액을 찾는 일이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박서연이었다.

처음에는 촬영을 앞두고 무슨 소란을 피우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음에 젖어 거의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

그리고 도운의 발걸음을 완전히 멈추게 만든 한마디.

“제 아이 좀 살려주세요.”

아이.

윤도운의 눈빛이 멀리 서 있는 서연에게 고정됐다.

주변의 소리가 한순간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누군가와 통화하며 웃던 모습.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

그리고 자신이 결혼했냐고 물었을 때 끝내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얼굴.

그 모든 장면이 너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도 가장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방금 들은 단어 하나였다.

아이.

도운은 움직이지 못한 채 서연을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의사의 손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처럼.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윤도운의 입술 사이로 믿기지 않는 숨이 새어 나왔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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