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대본이 손에서 미끄러져 내릴 뻔했다.
서연은 제작자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식 촬영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출연료를 깎겠다는 말은 단순한 경고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 돈이 다시 이름을 알리고 배우로 일어서기 위한 보상이기 전에, 어떻게든 마련해야 하는 삶의 일부였다.
윤도운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젯밤 화장실에서 그가 던진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미움이 자신의 생계까지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자, 서연은 이상하게 화를 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정식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쉰 목소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물을 마셔도 목 안쪽은 계속 따끔거렸고, 짧은 인사 하나를 건네는 데에도 거친 숨이 섞였다.
촬영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감독이 그녀를 찾아왔다.
“박서연 배우님.”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겨우 대답을 꺼내자 조감독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본을 확인했다.
“오늘 오전 촬영은 일단 미루겠습니다.”
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왜요?”
“목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네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아까 대사 한번 해 보셨잖아요.”
조감독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목으로는 어렵습니다. 오후까지 쉬세요.”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촬영을 쉬라는 말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제 제작자가 했던 경고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촬영이 밀리고, 자신의 상태 때문에 현장이 지체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그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그냥 쉬고 있을 수는 없어요.”
“박 배우님.”
“대기하고 있을게요. 혹시 필요한 장면이 생기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감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대기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꾸만 어제 일이 떠오를 것 같았다.
윤도운의 얼굴.
자신을 향해 내뱉던 모욕적인 말.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에게 다시 하라고 지시하던 모습까지.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서연은 의상팀 쪽으로 향했다.
“제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
처음에는 다들 손사래를 쳤다.
배우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서연은 괜찮다며 웃었다.
행거에 걸린 의상을 정리했고, 바닥에 떨어진 소품을 주웠다.
무거운 상자를 옮기다 손등이 긁혔을 때도 대충 휴지로 피를 닦아냈다.
“배우님, 이러시면 저희가 더 곤란해요.”
의상팀 막내가 상자를 빼앗듯 가져갔다.
서연은 민망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는 게 더 눈치 보여서요.”
“그래도 손 다치셨잖아요.”
“카메라에는 안 보일 거예요.”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막내는 웃지 못했다.
서연은 괜히 손등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너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괜찮은 척하고,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이 어쩌면 어제 윤도운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곳에서 다시 밀려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참 뒤에야 서연은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물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낯선 직원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박서연 배우님 맞으시죠?”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직원이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컵에서는 달콤한 유자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저한테요?”
“네. 목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너무 뜨겁지 않게 따로 준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서연은 선뜻 받지 못했다.
누가 자신을 위해 이런 걸 준비했을까.
오늘 아침부터 자신을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종이컵을 받아 들자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 온기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누가요?”
직원이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서연아.”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가 돌아봤다.
강혜원이었다.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화사한 얼굴로 다가온 혜원은 서연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발견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거.”
서연의 시선이 컵으로 내려갔다.
“왜요?”
“그거 내 건데.”
짧은 한마디였지만 손끝의 온기가 순식간에 식는 것 같았다.
서연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혜원을 바라봤다.
“네?”
혜원은 미안한 듯 웃으며 컵을 가리켰다.
“도운 오빠가 내가 며칠 전부터 기침하는 거 보고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따로 유자차도 준비해 준다고 했는데.”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차를 자신에게 가장 먼저 건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말과 혜원의 설명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윤도운이 강혜원을 챙겼다.
그녀가 기침하는 것을 보고 커피차를 준비했고, 그 안에 있던 유자차를 자신이 잘못 받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죄송해요.”
서연은 종이컵을 내밀었다.
“제가 잘못 받은 것 같네요.”
“아니에요.”
혜원이 손을 내저었다.
“서연 씨 목 안 좋다던데 그냥 드셔도…….”
“괜찮아요.”
서연은 컵을 다시 직원에게 건넸다.
“혜원 씨 드리세요.”
마침 그때 촬영장 입구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커피차 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서연도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다.
커다란 서포트 차량 위에는 화려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 혜원이 잘 부탁드립니다.]
[윤도운 배우가 전 스태프에게 쏩니다.]
잠시, 서연은 그 문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 혜원이.
짧은 글자 몇 개가 생각보다 오래 눈에 남았다.
주변에서는 곧 환호가 터져 나왔다.
“윤도운 배우가 직접 보낸 거야?”
“강혜원 배우님 진짜 부럽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이 정도면 거의 공개 고백 아니에요?”
서연은 그 웃음소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커피차 쪽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윤도운의 곁에는 강혜원이 있었고, 사람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작품의 중심에 서 있었고, 누구나 아는 집안의 사람들이었으며, 무엇보다 지금의 서연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자신도 윤도운의 옆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기지 않을 만큼.
“오빠.”
강혜원이 사람들 사이에서 윤도운을 향해 다가갔다.
서연은 그제야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운은 주변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혜원이 가까이 다가가자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이거 다 오빠가 준비한 거예요?”
“별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고마워요.”
혜원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둘이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혜원 씨 얼굴 빨개졌는데?”
“윤도운 씨,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면 책임져야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혜원은 부끄러운 척 고개를 숙였고, 서연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뽀뽀해!”
서연의 발이 멈췄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장난이었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순식간에 촬영장 한쪽이 떠들썩해졌다.
서연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자신을 붙잡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등 뒤에 남겨 둔 채 천천히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서연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촬영장이 점점 멀어졌다.조금 전까지 자신을 붙잡고 있던 윤도운의 손도.그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강혜원의 얼굴도.모두 뒤로 사라지고 있었지만, 손목에는 아직도 손가락이 조여 오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서연은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바라봤다.그러자 운전석 옆에 앉아 있던 조정우가 뒤를 돌아봤다.“아파?”“괜찮아.”“네가 괜찮다는 말 할 때마다 더 불안해지는 거 알아?”서연이 작게 웃었다.“그 정도로 호들갑 떨 일 아니야.”“얼굴이 저렇게 부었는데?”정우는 곧장 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서연은 싱싱이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지만, 정우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결국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리듯 진료실로 들어갔다.의사가 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서연은 연신 싱싱이 걱정만 했다.“이제 가도 되지?”“안 돼.”정우가 대답했다.“아직 붓기도 안 빠졌어.”“싱싱이가 기다려.”“그럼 같이 가.”서연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정우는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얼굴이었다.서연은 문득 웃음이 났다.“너 진짜 사람 피곤하게 한다.”“그래도 네가 나 없으면 더 피곤하게 살잖아.”그 말에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싱싱이의 병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아이가 태어난 뒤였다.혼자 아이를 키우겠다고 버텼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냉정했다.병원 기록 하나.보호자 서명 하나.아이에게 필요한 서류 하나를 만들 때마다 자신에게는 없는 자리가 너무 선명하게 드러났다.그때 조정우가 말했다.‘내가 해 줄게.’서연은 웃으며 거절했다.‘뭘.’‘남편.’그 말에 그녀가 굳어 버리자 정우는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어차피 명의만 빌려주는 거야.’그때도 그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서연은 알고 있었다.그 일이 단순히 이름 하나 빌려주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는 걸.그래서 더 미안했다.그럼에도 결국 그의 도움을 받았다.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누가 내 와이프 괴롭혀?”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가르자, 강혜원이 들고 있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서연 역시 얼얼하게 부어오른 뺨을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양옆으로 비켜섰다.그 사이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윤도운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낯선 사람일 리 없었다.며칠 전 자신이 받아 본 조사 자료 속 사진.박서연의 곁에 서 있던 남자였다.아이가 가운데에 있었고, 세 사람이 마치 오래전부터 한 가족이었던 것처럼 웃고 있던 바로 그 사진 속 남자.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서연에게 향했다.서연 역시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정우야?”남자의 표정이 굳었다.“이게 뭐야.”그는 서연의 뺨을 바라보다 그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누가 이렇게 만들었어?”서연은 얼른 손을 내렸다.“아무것도 아니야.”“아무것도 아닌데 얼굴이 이 모양이야?”조정우가 손을 뻗으려 하자 서연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그러나 이미 그의 시선은 강혜원에게 향해 있었다.“저 사람이야?”혜원이 당황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뭐라고요?”“몇 번이나 때렸길래 사람 얼굴이 저렇게 부어.”주변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감독은 물론이고 스태프들까지 누구 하나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조정우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촬영이랍시고 사람 하나 붙잡아 놓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그 말에 감독이 황급히 나섰다.“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오해요?”정우는 짧게 웃었다.“그럼 설명해 보시죠.”그는 다시 서연의 얼굴을 바라봤다.“저렇게 될 때까지 누가 뭘 했는지.”감독의 입이 굳었다.그때 조정우가 무심한 듯 덧붙였다.“제가 이 작품에 투자하면.”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강혜원 씨는 여기서 빠지는 걸로 합시다.”혜원의 얼굴이 굳었다.“지금 저보고 나가라고 하시는 거예요?”“그렇게 들렸으면 맞겠네요.”“제가 뭘 잘못했는데요?”혜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촬영하다가 NG 좀 낸
“박서연.”윤도운은 통화를 끊기 직전 다시 이름을 불렀다.“그 여자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전부 알아봐.”상대가 잠시 말을 멈췄다.“어디까지요?”도운의 눈앞으로 조금 전 병실에서 마주했던 서연의 얼굴이 스쳤다.아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순간 무너져 내리던 모습.자신을 향해 피가 필요 없다고 소리치던 모습.그리고 끝내, 당신 아이는 아니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던 얼굴까지.“전부.”그 말과 함께 통화가 끊겼다.그런데도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박서연이 다시 나타난 뒤부터 이상한 일뿐이었다.분명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아이를 두고 있었고, 그 아이는 자신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지고 있었다.그 사실만으로 무언가를 단정할 수는 없었다.세상에 같은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 자신 하나뿐인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은 달랐다.도운은 두 눈을 감았다.자꾸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그 아이가 몇 살인지.박서연이 언제 아이를 낳았는지.그리고 그 시간들이 자신이 그녀에게 버림받은 뒤의 세월과 어떻게 겹치는지.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숨이 막혔다.“설마.”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곧 사라졌다.그는 곧바로 스스로를 비웃었다.박서연이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자신 앞에 나타났을 리 없었다.아니.그럴 리 없다는 생각보다,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더 무서웠다.서연은 싱싱이의 병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문을 열면 아이가 보일 텐데, 이상하게도 손잡이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아이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이제 겨우 위기를 넘겼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가슴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다.서연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침대 위에는 싱싱이가 평소처럼 작은 몸을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서연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아이의 손을 감쌌다.따뜻했다.그것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엄마.”작은 목소리에 서연이 얼른 고개를 들었다.“안 잤어?”싱싱이는 힘없이 웃었다.
누구 하나 먼저 물러나지 못했다.서연의 손은 윤도운의 가슴께에 닿아 있었고, 도운의 팔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양옆을 막고 있었다.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아이를 두고 상처가 되는 말만 골라 내뱉었다.그런데도 몸이 이렇게 가까워지자, 이상할 만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미움이 아니었다.서연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아래로 향했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똑똑.“도운 형.”문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안에 있어요?”서연이 화들짝 윤도운을 밀어냈다.도운 역시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너무 늦었다.방금까지 서로의 숨이 섞일 만큼 가까웠던 감각이 몸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왜.”도운이 문 쪽을 향해 대답했다.“촬영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요. 다들 찾고 있어요.”“알았어.”매니저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서연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얼굴이 뜨거웠다.방금 자신이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깨닫자 더 견딜 수가 없었다.윤도운 역시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듯했다.서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그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스쳤다.“왜.”“뭐가요.”“뭘 그렇게 봐.”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안 봤어요.”“그래?”“착각하지 마요.”도운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서연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방금 전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이 떠올랐다.오래전.아직 윤도운이 지금처럼 누구나 알아보는 배우가 아니었을 때였다.좁은 집에서 둘만 남아 서로를 바라보던 밤.서연은 그때도 지금처럼 그에게 화를 냈다.“맨날 나 놀리기만 하지?”도운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누가 놀렸어.”“방금도.”“네가 먼저 봤잖아.”“뭘.”“뭘 보긴.”그가 장난스럽게 몸을 가까이하자 서연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를 밀었다.“윤도운.”“왜.”“그만해.”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결국 도운은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고, 서연은 그가 자신
“…아이?”윤도운의 입술 사이에서 낮게 새어 나온 한마디는 박서연에게 닿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의사 앞에 매달린 채 아이의 상태만 확인하려 했다.“혈액은 확보됐습니다.”의사의 말에 서연의 다리가 풀릴 듯 흔들렸다.“다행히 바로 사용할 수 있는 혈액 팩이 들어와서 처치는 진행됐습니다.”그제야 숨을 들이켰다.목이 막혀 제대로 숨도 쉬어지지 않았다.“그럼…… 싱싱이는요?”“일단 안정시키고 있습니다.”서연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살았다.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아이의 피가 부족해서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은 넘겼다는 뜻이었다.눈물이 뒤늦게 쏟아졌다.서연은 급히 얼굴을 가리고 병실 쪽으로 향했다.한참 뒤, 아이가 잠든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서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누군가 잘못 들어온 줄 알았다.그러나 익숙한 구두 소리가 침대 가까이 멈추자 손끝이 굳었다.“내가 피 줄 수 있는데.”서연의 눈이 천천히 올라갔다.윤도운이었다.그는 문가에 기대지도,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마치 자신이 이곳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얼굴이었다.“Rh 음성이라면서.”서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나도 그래.”그 말이 끝나자 병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았다.도운은 서연의 반응을 살폈다.놀랄 줄 알았다.적어도 당황하거나, 도움을 받아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 정도는 기대했다.하지만 서연은 뜻밖에도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이미 혈액 팩 들어왔어.”도운의 눈썹이 움직였다.“그래?”“그러니까 됐어.”서연은 아이의 이불을 조심스럽게 정리했다.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직계 존비속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수혈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그리고 지금 윤도운의 피를 아이에게 쓸 수 없다는 사실도.그런데 이상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를 보는 순간 가슴속에 다른 감정이 먼저 치밀었다.분노였다.싱싱이가 이 희귀한 혈액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위험
“그 여자가 옛날에 오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강혜원의 말이 끝나자 윤도운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 돌아갔다.조금 전까지 박서연이 사라진 계단 아래만 바라보던 눈이었다.혜원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히려 도운의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기다렸다.화를 내든, 아니면 부정하든.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지금 윤도운이 박서연에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으니까.“잊은 적 없어.”도운의 손이 자신의 팔에 얹힌 혜원의 손을 떼어 냈다.짧은 말이었지만 혜원의 표정은 순간 굳었다.“그런데 왜 계속 따라가?”“확인할 게 있으니까.”“뭘 확인해?”혜원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걸렸다.“또 어떤 거짓말로 오빠를 붙잡는지 확인하려고?”도운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서연이 사라진 계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확인할 게 있었다.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결혼했다는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태도.그리고 조금 전, 누군가와 통화하며 그렇게 환하게 웃던 얼굴까지.머릿속에서 하나씩 이어지는 것들이 모두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녀에게 정말 다른 남자가 생긴 것인지.아니면 이미 자신도 모르는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인지.생각하면 할수록 속이 불편해졌다.그러나 도운은 더 이상 계단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박서연을 붙잡아 세운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무엇보다 그녀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여섯 해 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버리고 사라진 사람은 박서연이었다.그녀가 누구를 만나든.누구와 결혼하든.이제 와서 자신이 따질 일은 아니었다.그런데도 마음은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았다.“오빠.”강혜원이 다시 불렀다.도운은 뒤늦게 시선을 거뒀다.“촬영 가야지.”그 말만 남긴 채 먼저 돌아섰다.혜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조금 전 자신의 말을 듣고도 박서연의 뒤를 따라가지 않은 것이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