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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Author: 루니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26 11:25:47

대본이 손에서 미끄러져 내릴 뻔했다.

서연은 제작자가 떠난 뒤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정식 촬영에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출연료를 깎겠다는 말은 단순한 경고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 돈이 다시 이름을 알리고 배우로 일어서기 위한 보상이기 전에, 어떻게든 마련해야 하는 삶의 일부였다.

윤도운이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젯밤 화장실에서 그가 던진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 미움이 자신의 생계까지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자, 서연은 이상하게 화를 낼 기운조차 나지 않았다.

다음 날, 정식 촬영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녀는 몇 번이나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쉰 목소리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물을 마셔도 목 안쪽은 계속 따끔거렸고, 짧은 인사 하나를 건네는 데에도 거친 숨이 섞였다.

촬영장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조감독이 그녀를 찾아왔다.

“박서연 배우님.”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겨우 대답을 꺼내자 조감독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본을 확인했다.

“오늘 오전 촬영은 일단 미루겠습니다.”

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왜요?”

“목 상태가 생각보다 안 좋네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아까 대사 한번 해 보셨잖아요.”

조감독은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목으로는 어렵습니다. 오후까지 쉬세요.”

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촬영을 쉬라는 말이 지금의 자신에게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어제 제작자가 했던 경고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촬영이 밀리고, 자신의 상태 때문에 현장이 지체되는 일이 반복된다면 결국 그 책임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그냥 쉬고 있을 수는 없어요.”

“박 배우님.”

“대기하고 있을게요. 혹시 필요한 장면이 생기면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조감독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은 대기실로 돌아가지 않았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자꾸만 어제 일이 떠오를 것 같았다.

윤도운의 얼굴.

자신을 향해 내뱉던 모욕적인 말.

그리고 마지막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에게 다시 하라고 지시하던 모습까지.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편이 나았다.

서연은 의상팀 쪽으로 향했다.

“제가 뭐 좀 도와드릴까요?”

처음에는 다들 손사래를 쳤다.

배우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서연은 괜찮다며 웃었다.

행거에 걸린 의상을 정리했고, 바닥에 떨어진 소품을 주웠다.

무거운 상자를 옮기다 손등이 긁혔을 때도 대충 휴지로 피를 닦아냈다.

“배우님, 이러시면 저희가 더 곤란해요.”

의상팀 막내가 상자를 빼앗듯 가져갔다.

서연은 민망하게 웃었다.

“가만히 있는 게 더 눈치 보여서요.”

“그래도 손 다치셨잖아요.”

“카메라에는 안 보일 거예요.”

농담처럼 꺼낸 말이었지만, 막내는 웃지 못했다.

서연은 괜히 손등을 소매 안으로 감췄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너무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괜찮은 척하고, 필요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이 어쩌면 어제 윤도운이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곳에서 다시 밀려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한참 뒤에야 서연은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물을 찾으려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때, 낯선 직원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박서연 배우님 맞으시죠?”

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직원이 종이컵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드세요.”

컵에서는 달콤한 유자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저한테요?”

“네. 목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너무 뜨겁지 않게 따로 준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서연은 선뜻 받지 못했다.

누가 자신을 위해 이런 걸 준비했을까.

오늘 아침부터 자신을 챙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끝에 종이컵을 받아 들자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그 온기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누가요?”

직원이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서연아.”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가 돌아봤다.

강혜원이었다.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화사한 얼굴로 다가온 혜원은 서연의 손에 들린 종이컵을 발견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거.”

서연의 시선이 컵으로 내려갔다.

“왜요?”

“그거 내 건데.”

짧은 한마디였지만 손끝의 온기가 순식간에 식는 것 같았다.

서연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혜원을 바라봤다.

“네?”

혜원은 미안한 듯 웃으며 컵을 가리켰다.

“도운 오빠가 내가 며칠 전부터 기침하는 거 보고 걱정했거든요. 그래서 오늘 따로 유자차도 준비해 준다고 했는데.”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 차를 자신에게 가장 먼저 건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말과 혜원의 설명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윤도운이 강혜원을 챙겼다.

그녀가 기침하는 것을 보고 커피차를 준비했고, 그 안에 있던 유자차를 자신이 잘못 받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잘 어울리는 이야기였다.

“죄송해요.”

서연은 종이컵을 내밀었다.

“제가 잘못 받은 것 같네요.”

“아니에요.”

혜원이 손을 내저었다.

“서연 씨 목 안 좋다던데 그냥 드셔도…….”

“괜찮아요.”

서연은 컵을 다시 직원에게 건넸다.

“혜원 씨 드리세요.”

마침 그때 촬영장 입구 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커피차 왔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서연도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다.

커다란 서포트 차량 위에는 화려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 혜원이 잘 부탁드립니다.]

[윤도운 배우가 전 스태프에게 쏩니다.]

잠시, 서연은 그 문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리 혜원이.

짧은 글자 몇 개가 생각보다 오래 눈에 남았다.

주변에서는 곧 환호가 터져 나왔다.

“윤도운 배우가 직접 보낸 거야?”

“강혜원 배우님 진짜 부럽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야?”

“이 정도면 거의 공개 고백 아니에요?”

서연은 그 웃음소리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커피차 쪽으로 향하는 동안 그녀는 조금 떨어진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윤도운의 곁에는 강혜원이 있었고, 사람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같은 작품의 중심에 서 있었고, 누구나 아는 집안의 사람들이었으며, 무엇보다 지금의 서연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때 자신도 윤도운의 옆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믿기지 않을 만큼.

“오빠.”

강혜원이 사람들 사이에서 윤도운을 향해 다가갔다.

서연은 그제야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도운은 주변의 시선을 받는 데 익숙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혜원이 가까이 다가가자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 이거 다 오빠가 준비한 거예요?”

“별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고마워요.”

혜원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이 장난스럽게 웃기 시작했다.

“둘이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야?”

“혜원 씨 얼굴 빨개졌는데?”

“윤도운 씨,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면 책임져야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혜원은 부끄러운 척 고개를 숙였고, 서연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기 힘들어졌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뽀뽀해!”

서연의 발이 멈췄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장난이었다.

그러나 곧 다른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뽀뽀해!”

“뽀뽀해!”

“뽀뽀해!”

순식간에 촬영장 한쪽이 떠들썩해졌다.

서연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아무도 자신을 붙잡지 않기를 바라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등 뒤에 남겨 둔 채 천천히 그 자리에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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