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제7화
한셀 사모님의 손길은 헬레나의 피부에 닿는 순간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심 어린 온기를 전했다. "고맙구나, 헬레나." 중년 여성이 깊은 감정이 담긴 목소리로 부드럽게 속삭였다. 헬레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멈칫했다. "무엇이요, 어머니?" "내 아들의 공포를 치료해 줘서." 한셀 사모님은 감사가 가득한 눈빛으로 헬레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헬레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공포증이요?" 그 순간 헬레나는 옆에 서 있던 카엘의 몸이 갑자기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사랑하는 것도, 사랑받는 것도 두려워한단다." 아들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고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8년 전 그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카엘은 모든 여자와 자신 사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벽을 쌓았어. 나는 거의 희망을 잃었단다. 평생 혼자 살면서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 헬레나는 곁눈질로 카엘을 바라봤다. 남자는 병실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고, 눈빛은 어느새 어둡고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헬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5년 동안 그를 위해 일했음에도 그녀가 전혀 알지 못했던 거대한 비밀이 이 잔혹한 남자의 과거에 숨겨져 있었다. "아... 그렇군요." 헬레나는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애써 다잡으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한셀 사모님이 감정이 북받친 듯 미소 지었다. "카엘을 잘 부탁하마, 헬레나. 카엘은 세상 사람들에게 강하고 강력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아주 여린 면이 있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헬레나의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카엘 윌리안이? 여리다고? "최선을 다할게요, 어머니." "내 하나뿐인 아들을 네게 맡기마. 그리고 이제 정식으로 내 며느리가 되었으니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고 부르렴." 연상의 여인이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카엘이 조용히 헛기침을 하며 점점 깊어지는 두 사람의 친밀한 분위기를 끊으려 했다. "어머니까지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잖아요." "쉿!" 한셀 사모님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조용히 하렴, 카엘. 며느리와 이야기하고 있잖니." 헬레나는 피식 웃을 뻔했다. 평소 비즈니스 업계 전체가 두려워하는 폭군 같은 CEO가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는 완전히 힘을 쓰지 못하는 모습이라니. 한셀 사모님은 다시 한 번 헬레나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였다. "너희 둘은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하렴." "최선을 다할게요, 어머니." 헬레나가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한셀 사모님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에 기대고 있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이제 마음 놓고 쉴 수 있겠구나. 적어도 내가 눈을 감기 전에 네가 네 가정을 꾸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카엘." "죽음 같은 말씀은 하지 마세요, 어머니." 카엘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쾌감이 묻어났다. 어머니는 그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로 대답했다. 병실 안의 분위기는 잠시 따뜻해졌다. 그러다 갑자기 한셀 사모님의 눈에 또 다른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 결혼 문제도 해결됐으니." 그녀는 천천히 말을 꺼내며 카엘과 헬레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언제쯤 내가 손주를 품에 안아 볼 수 있을까?" "콜록!" 헬레나와 카엘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카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어머니..." "너희가 1년 동안 이 관계를 숨겨 왔잖니?" 한셀 사모님이 의미심장하게 양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우리 가문의 다음 후계자를 꼭 보고 싶구나." 순간 헬레나의 얼굴이 귓불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풍만한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카엘은 점점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곧바로 대화를 이어받았다. "아직 그 정도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지금은 어머니의 회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왜 안 되니?" 어머니가 순진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이미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잖니. 좋은 일을 미루는 건 현명하지 못한 일이란다." 헬레나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구두 끝만 바라봤다. 심장은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신체적인 접촉 금지. 감정적인 개입 금지. 그 두 가지 절대적인 규칙은 그들의 계약서에 검은 잉크로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이제 정반대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카엘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어머니를 바라봤고, 턱이 살짝 굳어졌다. 한셀 사모님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다시 헬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그저 윌리안 가문의 혈통이 올바른 여자에게서 이어지기를 바랄 뿐이란다." 헬레나는 심장마비라도 일어날 것 같았다. 이 미친 화제를 끝내 달라는 듯 카엘의 팔을 팔꿈치로 살짝 건드렸다. 마침내 카엘이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연약한 상태를 지키기 위해 그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외교적인 대답이었다. 한셀 사모님은 그 대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듯했다. "좋아. 그 약속, 반드시 지키렴. 카엘." 헬레나는 어색한 미소를 억지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몇 분 후,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들어와 다음 진료가 곧 시작되기 때문에 VIP 환자의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정중하게 알렸다. 카엘은 어머니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회사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셀 사모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 잊지 마렴, 카엘.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내 후계자에 대한 좋은 소식도 가져오렴." 마지막 말에 헬레나는 자신의 침까지 잘못 삼킬 뻔했다. 두 사람은 병실에 들어올 때보다 훨씬 빠른 걸음으로 VIP 병실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나무문이 등 뒤에서 닫히는 순간, 헬레나는 곧바로 카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손주라니?" 헬레나의 목소리가 당황과 긴장으로 떨렸다. "어떻게 어머니께서 그런 걸 요구하실 수 있어요?" 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엘리베이터 홀을 향해 계속 걸었고, 차가운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헬레나는 그의 옆을 따라가며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진정시키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전 방금 대표님에게 그런 공포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건 네 업무 범위를 벗어난 일이야, 헬레나. 그리고 네가 상관할 일도 아니고." 카엘이 날카롭게 대답하며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벽을 세웠다. 전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차임 소리와 함께 열렸고,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좁은 밀폐 공간 안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오늘부터." 로비 층에 가까워질 무렵 카엘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거울 벽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우리가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라는 걸 보여 줘. 네가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즉흥적인 연기도 더 자연스럽게 할 필요가 있어." 헬레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받아들인 100만 유로에 따르는 대가를 잘 알고 있었다. "네, 대표님." "그리고 어머니가 손주를 원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카엘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려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계약 조항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다른 의학적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지." 헬레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눈이 충격으로 크게 뜨였다. 손주 문제를 위한 의학적 방법? 그녀의 머릿속에는 인공 수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의료 시술이 순식간에 떠올랐고, 심장 박동은 더욱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이 계약 결혼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는 걸까?제87장카엘의 오른손 마디에서 붉고 진득한 피가 계속해서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옅게 물들였다. 남자는 피부를 파고드는 쓰라린 통증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경직된 발걸음으로 텅 빈 침실을 나온 그는 정적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 어둡고 넓은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후원 테라스로 향했다.가랑비가 그친 뒤, 젖은 흙냄새를 머금은 밤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카엘은 테라스 구석에 놓인 라탄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눈앞의 작은 유리 탁자 위에는 반쯤 비어 있는 레드 와인 한 병과 높다란 크리스털 잔이 놓여 있었다.잔을 사용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카엘은 왼손으로 와인병 목을 잡아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대었다. 쓰디쓴 알코올의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뜨겁게 타올랐지만, 가슴속을 집어삼킨 압도적인 공포와 공허를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남자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별 하나 없는 밤하늘을 무심히 바라보았다."내 나이에..." 밤바람에 실려 퍼진 카엘의 저음이 지독히도 쉰 소리를 냈다. 그의 입술 사이로 자조 섞인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트라우마라는 차가운 감옥 속에 수년간 나를 가두고 살다가... 마침내 내 안의 모든 두려움을 녹여주고 대책 없이 사랑에 빠지게 만든 여자를 만났는데... 왜 결말이 이 모양이어야만 하는 거지?"카엘은 눈을 감았다. 헬레나의 진심 어린 미소, 자신을 놀릴 때마다 터뜨리던 밝은 웃음소리, 그리고 조금 전 식당 밖에서 보였던 눈물겨우면서도 단호한 표정이 제어할 수 없이 뇌리를 스쳤다. 그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이 다시금 그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죄어왔다.테라스로 이어지는 복도의 어둠 속에 저택의 늙은 집사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수십 년간 스미스 가문의 저택을 지켜온 노인은 깊은 우려가 담긴 눈빛으로 도련님의 넓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집사의 날카로운 시선에 카엘의 오른손등에서 바지 위로 연신 떨어지는 붉은 피가 포착되었다.집사는 느리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도
제86장빗길을 질주하는 택시는 밤이 남겨놓은 참혹한 비극의 침묵하는 목격자가 되었다. 헬레나는 차가운 습기가 서린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얼어붙은 듯 서 있던 카엘의 잔상은 유리창 외벽을 타고 흐르는 빗물 속으로 천천히 번지며 사라져 갔다.카엘은 거칠게 몰아쉬는 숨의 마지막 파편을 모아 택시를 쫓아 수려하게 몇 걸음을 달려왔었다. 하지만 속도를 올리는 택시의 가속은 남자의 희망을 완벽하게 산산조각 내버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카엘은 걸음을 멈추고, 텅 빈 보도블록 한가운데에 길쭉한 체구를 우두커니 방치했다.가랑비 속으로 그의 무거운 숨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카엘은 택시가 사라져 버린 빈 도로를 똑바로 응시하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적어도... 아직은 내 비서로 남아주겠다고 했으니까." 카엘이 지독히 쉰 저음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창백한 입술 위로 공포에 찬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내일 아침이면 회사로 출근할 거야. 여전히 그녀를 볼 수 있고, 매일 곁에 있을 수 있어... 비록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지만."남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듯한 길고 무거운 숨을 내쉬며,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죄책감의 상처를 차가운 밤바람에 내맡겼다.한편, 택시는 도시 외곽의 밀집 주거 지역에 마침내 차를 세웠다. 헬레나는 요금을 지불한 뒤, 몇 달 전 떠났던 2층짜리 임대 건물 쪽으로 여행 가방을 끌며 내렸다.소박한 건물이 으스스한 정적 속에서 그녀를 맞이했다. 헬레나는 가방에서 낡은 열쇠를 꺼내 약간 삐걱거리는 나무 문고리를 돌린 뒤, 자신의 낡고 좁은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희미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크리스털 샹들리에도, 부드러운 킹사이즈 침대도, 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키던 카엘의 냄새도 이 방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평범한 이불이 깔린 소박한 원목 침대 하나와 구석진 곳에 놓인 작은 책상만이 있을 뿐이었다.헬레나는 희미한 노란색 전구를 켜고,
제85장젖은 보도블록 위로 여행 가방을 끌고 가던 헬레나의 발걸음이 뒤에서 황급히 달려오는 소리에 툭 멈춰 섰다. 그녀가 돌아서기도 전에, 강인한 두 팔이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몸을 거칠게 감싸 안았다. 절박함과 소유욕이 한데 얽힌 격정적인 포옹이었다.카엘은 온몸을 심하게 떨며 뒤에서 그녀를 껴안았다. 그는 헬레나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가슴을 집어삼키는 압도적인 공포를 토해냈다. 그 포옹이 어찌나 가혹하고 절망적인지, 헬레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이것 놓으세요, 사장님! 숨을 못 쉬겠어요!" 헬레나는 목구멍에 걸린 목소리로 소리치며, 남편의 억센 팔을 풀어내려 발버둥 쳤다.숨이 턱 막힌 그녀의 애원을 들은 카엘은 즉시 팔을 가다듬었다. 그는 헬레나를 돌려세워 자신을 바라보게 한 뒤, 마치 손을 놓으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까 두려워하듯 그녀의 양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쥐었다.가랑비에 젖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카엘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지친 눈가에 눈물이 차올라, 언제나 범접할 수 없는 존재 같았던 대표이사로서의 위엄과 자존심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제발... 내 설명부터 들어줘, 응? 제발... 딱 한 번만 내 말 좀 들어줘." 카엘이 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깊은 저음이 떨리고 있었다.헬레나는 눈물로 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차갑고 느릿한 손길로 카엘의 손을 자신의 손목에서 털어냈다. 그녀는 평복을 정돈한 뒤 고개를 돌려버렸다. 방금 자신의 심장을 부숴버린 남자의 눈을 직시하기를 거부한 것이다."좋아요. 말씀하세요." 헬레나가 감정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은 5분입니다, 사장님."카엘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길고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약간 젖은 얼굴을 문지른 그는, 그 귀중한 몇 분이 허망하게 흘러가 버릴까 봐 가능한 한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어제... 어머니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셨어." 카엘이 목소리에 서린 패닉을
제84장점차 잦아든 가랑비가 살끝을 파고드는 차가운 한기를 남긴 채 밤이 깊어갔다. 헬레나가 탄 택시는 야외 야시장 식당가 앞에 차를 세웠다. 밤하늘 아래 늘어선 노란 알전기 불빛들이 정갈하게 놓인 나무 탁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헬레나는 다른 손님들과 떨어진 가장 조용한 구석 자리를 찾아, 중간 크기의 여행 가방을 끌며 택시에서 내렸다.자리에 앉자마자 헬레나는 손을 들어 셰프나 서빙 직원을 불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메뉴판의 여러 요리를 지목했다. 꿀을 발라 구운 큼직한 소갈비 구이, 매콤한 양념의 바삭한 치킨, 따뜻한 소고기 스튜 한 그릇,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두 공기, 그리고 시원한 음료까지. 헬레나에게 무너진 마음을 달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든 고통을 음식 밑으로 묻어버리는 것이었다. 속을 갉아먹는 빈집 같은 허기짐을 채워, 배라도 부르면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가라앉기를 바랐다.오래 지나지 않아 주문한 모든 요리가 나무 탁자 위를 가득 채웠다. 양념 구이의 먹음직스러운 향을 품은 하얀 김이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 헬레나는 숟가락과 포크를 들고 왕성한 식욕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과 경주라도 하듯 고기 조각을 빠르게 씹어 넘기며 밥을 크게 한 술씩 퍼 넣었다.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넘기려 애써도, 혀 끝에 감도는 씁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늘 위안을 주던 밥맛조차 무미건조하게 느껴졌고, 부드러운 고기마저 퍽퍽해서 삼키기가 힘들었다.그녀의 손길이 점차 느려졌다.들려 있던 숟가락이 공중에서 멈춰 섰다.바로 그 순간, 그녀의 모든 의연함이 무너져 내렸다.헬레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 전체를 감싸쥐었다.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어깨가 격렬하게 떨렸다. 밤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야외 식당 한구석에서 그녀는 소리 없이 오열했다. 눈물만으로는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고통이 깊었다. 마치 가슴속에서 심장이 강제로 꺼내어져 수많은 사람 앞에서 무참히 짓밟힌 것만 같았다. 실망과 수치심, 그리고 가장 잔
제83장헬레나가 나선형 계단을 따라 1층 거실로 내려오자, 긴 소파에 한가롭게 앉아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한셀 부인과 비비안 휠러는 여전히 파티 때 입었던 우아한 드레스 차림으로 차분하게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었다.헬레나의 경직된 발소리가 두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비비안이 먼저 돌아서더니, 헬레나의 손에 들린 가방을 발견하자마자 얼굴 가득 승리감에 도취된 미소를 지어 보였다."어머나...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네." 비비안이 온 거실에 울려 퍼지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비꼬았다. "그래도 아직 염치는 조금 남아 있나 봐? 드디어 이 집에서 나가는 걸 보니 말이야."한셀 부인은 유리 탁자 위에 도자기 찻잔을 내려놓고는, 한때 늘 감싸고 아껴주던 시어머니로서의 따스함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딱딱한 표정으로 헬레나를 바라보았다."드디어 자각했다니 다행이구나." 한셀 부인이 가슴 앞에 팔짱을 끼며 차갑게 말했다. "카엘이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미래에 맞는 여자를 선택했어. 이곳은 너 같은 여자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단다."헬레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글래머러스한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퍼져나갔지만, 그들 앞에서 조금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들의 조롱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적은 기력마저 낭비하는 일일 뿐이었다. 헬레나는 평온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욕을 무시한 채 현관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헬레나! 기다려!"거친 목소리가 거실의 팽팽한 정적을 깨뜨렸다. 흰 셔츠가 약간 어지럽혀지고 뺨에는 여전히 희미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카엘이 계단을 달려 내려왔다. 현관문 손잡이에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둔 헬레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패닉으로 크게 흔들렸다.그는 아내를 따라잡아 막아서려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지만, 한셀 부인이 즉시 소파에서 일어나 아들의 건장한 팔을 낚아채 잡았다."카엘! 멈춰라!"
제82장스미스 가문 저택의 마스터 베드룸 안으로 헬레나가 발을 들여놓았을 때, 방 안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적막하고 차갑게 느껴졌다. 창밖의 보슬비는 한층 더 세차어져, 마치 통통한 여인의 산산조각 난 심장을 함께 슬퍼해 주기라도 하듯 창문 유리창을 부드럽게 두드렸다.헬레나는 약간 젖어버린 네이비 벨벳 드레스 자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침실 불을 켰다. 여전히 파르르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려한 이브닝드레스를 벗어던지고, 자신이 가진 가장 단순한 평복인 헐렁한 면 티셔츠와 무난한 긴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화장의 흔적도, 진주 귀걸이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붉게 부어오른 동그란 두 눈을 한 창백한 얼굴뿐이었다.헬레나는 옷장에서 중간 크기의 캐리어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수수한 옷가지들을 하나씩 접어 캐리어 안에 차곡차곡 담았다. 지난 몇 달 동안 카엘이 사주었던 그 많은 사치품이나 고급 드레스, 보석류에는 단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옷장 안에 있던 그 모든 옷과 장신구들을 그대로 남겨두었다."이제 떠날 시간이야." 헬레나가 적막한 방을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체념이 깔려 있었다. "사장님과의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를 끝내야겠어."견딜 수 없을 만큼 씁쓸하고 옅은 미소가 헬레나의 입술 위로 번졌다. 캐리어 안에 쌓인 옷가지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 위로 다시금 눈물이 억제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카엘 말이 맞았어... 내가 정말 너무 멍청했지." 그녀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이내 슬픔으로 가득 찬 텅 빈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 위에서 속삭이던 그 달콤한 말들, 따뜻한 속삭임, 사치스러운 약속들을 그렇게 쉽게 믿어버리다니. 내가 무슨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잠깐 가지고 놀다 버리는 장난감에 불과했던 거야."헬레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비록 심장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의 이성은 여전히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