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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연나리
전화의 주인공은 진승호였다.

그는 기천 그룹 강진 지사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이자 매출의 80%를 책임지는 거물이었다. 온진아의 모든 협력사 중에서도 단연 소통하기 제일 편한 상대이기도 했다.

그 당시 온진아에게 강진은 척박한 땅이었다. 가진 것 없는 신출내기였던 시절, 세상의 냉대 속에 웅크려 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바로 진승호였다. 그가 투자를 시작하자 비로소 다른 이들도 온진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진승호는 협상 과정에서 억지를 부리거나 몸값을 깎는 일 없이 늘 호탕하고 진솔했다. 어쩌면 이런 점들이 그가 수년간 온진아의 ‘귀인’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는 빠르게 감정을 추스르고 전화를 받았다.

“승호 씨, 안녕하세요.”

“네, 온진아 씨.”

진승호는 언제나 그랬다. 깍듯하고 겸손한 태도로 갑을 관계의 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온진아가 몇 번이나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는 한결같이 예의를 지켰다.

“부성으로 돌아갔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네, 어젯밤에 도착했어요.”

혹여 일 때문에 걱정할까 봐 온진아가 덧붙였다.

“프로젝트는 양정원 씨한테 인수인계 다 마쳤어요. 궁금한 점 있으시면 그쪽으로 연락하셔도 되고 저한테 직접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일 때문에 연락 드린 건 아닙니다.”

진승호는 그녀가 말을 마치고 나서야 조용히 입을 뗐다.

“급하게 내려가신 것 같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게...”

망설임 끝에 온진아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실은 어머니가 편찮으셔서요.”

“많이 위중하신가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있나요?”

그 말에 온진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머니의 일을 알게 된 후, 처음으로 들은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미처 대답하기도 전, 진승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돈 필요해요 아니면 다른 지원을 해드릴까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쾌했을 질문이었지만 진승호의 어조는 지나치게 따뜻하고 진중했다. 온진아는 알 수 있었다. 이건 계산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벼랑 끝에 몰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진승호라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였을까. 그녀가 홀린 듯 뱉어냈다.

“3억 4천만 원이 더 필요해요.”

진승호가 곧장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계좌 번호 보내주세요.”

“아, 아닙니다.”

찰나의 경솔함이 부끄러워진 온진아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죄송해요. 제가 승호 씨한테 돈을 빌릴 처지가 못 돼요.”

기천 그룹이 아니었다면 진승호를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를 잇는 고리는 오직 기천 그룹뿐, 하지만 온진아는 확신했다. 그녀는 이곳에 계속 남아 있을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잠시 머물 뿐 결국은 떠날 몸이었다.

그러니 진승호와 인연을 이어갈 이유도 없었다.

“기천 그룹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빌려주시는 거라면 사양할게요. 저 이제 회사 그만둘 생각이거든요. 괜히 저 때문에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기천 그룹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녀의 해명에 진승호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나저나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생각 중인가요? 다음 행선지는 정해졌고요?”

“아직요.”

온진아가 솔직하게 답했다.

“그렇다면 우리 회사와 함께하는 건 어떠신가요?”

순간 온진아는 넋을 놓고 말았다.

진승호가 있는 이든 바이오는 국내를 넘어 글로벌 시장을 점유한 생명공학 분야의 1위 기업이다. 기천 그룹과는 아예 격이 다른데 온진아가 발을 들일 기회가 있을까? 기천 그룹이라는 든든한 배경 없이는 이든 바이오 같은 회사 근처에도 못 갈 텐데.

그녀는 혹시나 이 남자가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강조했다.

“승호 씨, 제가 방금 설명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요. 저 이제 곧 기천을 나갑니다. 그러니 회사와 관련된 자원은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돼요.”

“알고 있어요. 다만 우리가 눈여겨본 건 기천 그룹이 아니라 바로 온진아 씨에요.”

진승호가 말을 이었다.

“섣불리 대답하실 필요 없어요. 천천히 고민해 보세요, 진아 씨.”

이 정도까지 배려해 주는데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정말 제 능력을 높게 사주신다면 감사히 고민해 보겠습니다. 다만 기천 쪽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모든 건 진아 씨 스케줄에 맞출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 순간, 온진아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말은 이 한마디뿐이었다.

“저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라.”

진승호가 나지막이 답했다. 하지만 그 말은 강진 방언이라 온진아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가 종료되자 진승호는 서둘러 다른 번호를 눌렀다. 상대는 보통 인물이 아닌 듯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진승호가 긴장한 기색으로 허리를 꼿꼿이 폈다.

“대표님.”

“일은 다 처리했어?”

수화기 너머로 차분하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말씀하신 대로 처리 마쳤습니다.”

진승호가 깍듯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는 제 상관인 도하준 대표가 여간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대표님은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풍기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전 세계 생명공학 기술의 핵심을 쥐고 권력의 정점에 선 남자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그는 늘 단호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스타일이었다. 사적인 감정이나 풍류와는 거리가 멀어 업계에서 그를 ‘냉혈한’ 혹은 ‘차가운 저승사자’라고 부르곤 했다. 사실 온진아의 일만 아니었다면 진승호는 평생 대표님에게 이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상세히 보고해.”

한편, 전화를 끊은 온진아는 다시 인사팀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담당자는 그녀가 이제야 상황을 깨닫고 한 달치 급여와 연말 보너스 삭감까지 감내하며 사직서를 제출하려는 줄로만 알았다. 곧이어 비웃음 섞인 말투로 온진아에게 쏘아붙였다.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주제 파악이 좀 됐나 봐요? 뚱뚱하고 늙어 빠진 주제에 무슨 유세라고! 본인이 기 상무님라도 되는 줄 알았어요? 대표님 눈에 들어서 회사 전체가 진아 씨를 중심으로 돌아갈 거로 생각한 건 아니죠? 대체...”

온진아는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차갑게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죠! 똑똑히 들어요. 저 이제 사직했어요!”

방금까지 오만방자하던 인사팀 담당자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라고요?”

“귀먹었어요? 사직했다고요. 못 알아들으시겠어요?”

온진아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말 섞을 가치도 없다는 듯 시스템에서 이미 승인된 자신의 사직 관련 기록을 보여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태우의 결재까지 포함된 온진아의 사직 절차가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그녀가 퇴사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지만, 기 대표님의 승인이 떨어졌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이 여자가 기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려서 눈도장이 찍혔고 그래서 급여와 상여금이 몰수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담당자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

“퇴사가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고 유난을 떨어요?”

그러더니 서류 한 장을 뽑아 온진아에게 휙 던졌다.

“사인하세요. 30일 업무 인수인계 기간이니 알아서 잘 계산하시고요.”

온진아는 말없이 서류에 서명하고는 사진을 찍어 증거를 남겼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담당자가 옆 사람과 함께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꼴좋네. 강진에서 얼마나 긁어모았길래 저렇게 살쪘대? 그래도 똑똑하긴 해. 스스로 퇴사한다잖아. 언젠가 꼬리 밟혀서 조사받게 되면 그냥 퇴사로 끝나지 않을 거야.”

사실 방금 온진아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인사팀 담당자는 대표님께 다시 한번 전화해볼까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대표님이 이미 퇴사 신청을 승인했고 전에도 ‘온진아 관련 건은 보고하지 말고 매뉴얼대로 처리하라’라고 지시했던 터라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담당자는 온진아의 퇴사 서류를 대충 서류 더미에 던져 넣고는 이 일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기천 그룹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순간, 온진아는 굳게 다짐했다. 이제 기태우와 관련된 것이라면 업무든 사람이든 인생의 그 어떤 부분도 더는 엮이지 않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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