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허경빈은 설도윤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이제 설도윤은 허경빈을 완전히 적으로 돌린 셈이었다.허씨 집안을 건드리는 것은 분명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송씨 집안의 신뢰와 지지를 얻고 송지아와 무사히 결혼할 수만 있다면, 설도윤에게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왜 아무 말도 못 하죠? 저지를 용기는 있어도 인정할 용기는 없나요?”진이화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이화야, 이제 그만해.”설도윤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린 뒤 송지아를 바라봤다. 애써 짜낸 미소에는 씁쓸함과 자조가 가득했다.“내가 주제도 모르고 너를 욕심낸 거야. 너와 결혼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아. 그저 네가 나를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해.”그는 송씨 가족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정말 죄송합니다. 괜한 일로 폐를 끼쳤습니다.”인사를 마친 설도윤은 진이화에게 함께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다.그러나 진이화는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허경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당신이 그러고도 남자예요? 뭐라고 말이라도 해 봐요.”허경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무슨 말을 하라는 건데요?”“남을 협박해 놓고 인정도 못 하겠다는 거예요?”허경빈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번졌다.“내가 언제 부정했습니까?”“내가 저 사람을 협박한 건 맞아요. 그래서요?”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거리낌도 없었다. 오히려 누구도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는 듯 오만하고 당당했다.“내가 저 사람에게 욕심이 지나치다고 말한 적은 있어도, 그런 식으로 모욕을 준 적은 없습니다.”허경빈은 설도윤을 힐끗 바라보며 비웃었다.“그런데 자기 주제는 제법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나 보네요. 백조를 탐했다는 것은 알고 있으니.”설도윤은 허경빈이 오만하고 제멋대로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송씨 집안 한복판에서도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할 줄은 몰랐다.“예전에도 당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당신은 인간도 아니었네요.”“
“송지아 씨에게 진실을 말씀드리러 왔어.”“일단 나랑 가.”설도윤은 다급히 진이화의 팔을 붙잡아 밖으로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진이화가 순순히 따라가지 않으면서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허경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저 둘은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지?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황을 살피던 순간, 진이화가 갑자기 설도윤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곧장 송지아의 곁으로 달려갔다.“송지아 씨, 저와 설도윤은 진작 헤어졌어요. 그 사람은 진심으로 지아 씨를 좋아해요.”진이화는 다급히 숨을 고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저희는 헤어진 뒤에도 친구로 지냈어요. 제가 경성에 홀로 지내면서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걸 가엾게 여겨서, 도윤이가 조금씩 챙겨 준 것뿐이에요. 요즘 밖에서 온갖 소문이 돌고 있잖아요. 도윤이는 떳떳하니 굳이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만, 저는 착한 사람이 억울한 오해를 받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저 때문에 두 분의 인연이 어긋난다면 저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릴 거예요.”진이화는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듯 손까지 치켜들었다.“제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맹세할게요. 제가 지금 한 말에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밖에 나가자마자 차에 치여 죽어도 좋아요.”허경빈은 할 말을 잃었다.‘젠장.’이게 대체 무슨 막장 전개야?“이화야, 이러지 마.”설도윤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녀를 말렸다.“이 일은 내가 지아에게 직접 설명할게.”“어떻게 설명할 건데? 밖에서는 이미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질 대로 퍼졌잖아. 내가 너한테 이렇게 큰 피해를 줄 줄 알았다면,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로 너한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거야. 나 때문에 네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됐잖아.”진이화는 울분을 삼키듯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추악한 생각만 할 수 있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으면 무조건 그런 관계인 거야? 심지어 그 일로 너를 협박한 사람까지 있다며. 사람 마음이
육씨 집안의 만월연 이후, 설도윤은 송지아가 의도적으로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분명 허경빈이 송지아에게 무언가를 말한 게 틀림없었다.이대로라면 다 된 밥을 눈앞에서 빼앗기게 생겼다.‘정정당당하게 경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뒤에서 비겁하게 수작을 부려? 허경빈, 그러고도 네가 남자야? 네가 먼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겠어.’*등불 구경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뒤에도 허경빈의 머릿속에는 축제에서 있었던 일이 맴돌았다.지난번에는 그저 잠깐 손을 맞잡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제법 오랫동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작고 부드러운 손.손바닥에 고스란히 닿았던 따스한 감촉을 떠올리는 순간, 전에 꾸었던 그 황당하고도 야릇한 꿈이 불현듯 머리를 스쳤다.허경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경빈아?”갑자기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허경빈은 손에 들고 있던 자동차 열쇠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 금속이 대리석 바닥과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너 왜 그래?”정월대보름이라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려고 본가에 돌아온 참이었다. 거실에 있던 허진강은 당황한 아들을 의아한 얼굴로 바라봤다.“저요? 아무렇지도 않은데요.”허경빈은 황급히 열쇠를 주워 들며 시선을 피했다.“등불 축제는 볼 만했어?”“그럭저럭요. 좀 피곤해서 먼저 방에 들어갈게요.”그는 서둘러 계단 쪽으로 향했다.홀로 남은 허진강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내가 뭐 특별한 걸 물어봤나? 그런데 저 녀석은 대체 왜 얼굴이 빨개진 거야?’다음 날, 허경빈은 송윤재에게서 주말에 집으로 와 식사하자는 연락을 받았다.만월연에서 송윤재는 설에 받은 선물에 대한 답례로 밥을 사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허경빈은 그저 의례적으로 건넨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송윤재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그를 집에 초대한 것이다.기다리던 주말이 되자 허경빈은 유난히 멋진 옷을 골라 입었다. 그것도 모자라 미용실까지 찾아가
송지아가 몸을 돌렸을 때, 어느새 허경빈이 보이지 않았다.주변에는 온통 낯선 얼굴뿐이었다. 어깨와 어깨가 맞닿을 만큼 빽빽한 인파가 끊임없이 밀려들었고, 그녀는 사람들의 흐름에 떠밀려 원치 않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갑자기 혼자 떨어지고 나니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송지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형색색의 등불 아래로 수많은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중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허경빈은 대체 어디로 간 거지?그녀가 애타게 사방을 살피던 순간, 머리 위로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떨어졌다.“나 찾았어?”송지아가 황급히 돌아보자 허경빈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그의 손에는 앙증맞은 토끼 모양 등불이 들려 있었다. 등불 안쪽의 따뜻한 불빛이 정교하게 뚫린 무늬 사이로 새어 나와 그의 손끝까지 은은하게 밝혔다.허경빈이 토끼 등불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네 거야.”“고마워.”송지아는 그가 토끼 등을 사러 간 줄은 미처 몰랐다.허경빈이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자 그녀도 토끼 등불을 손에 든 채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등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황금빛 그림자를 드리웠다.손바닥만 한 크기에 속이 비치도록 섬세하게 조각된 토끼가 제법 귀여웠다.송지아가 토끼 등을 살펴보느라 잠깐 시선을 내린 사이, 거센 인파가 두 사람 사이로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가로막힌 허경빈은 곧바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바짝 따라와.”“등불 축제에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어.”송지아는 이번에는 놓치지 않으려 허경빈을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밀려드는 사람들 탓에 또다시 옆으로 떠밀릴 뻔했다.다행히 이번에는 두 사람이 떨어지지 않았다.그다음 순간, 누군가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이다.송지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자신의 손을 감싼 손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허경빈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손목에 살짝 힘을 주자 송지아의 몸이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와 단숨
송씨 집안.집으로 돌아온 송민정은 욕실의 작은 발판 위에 올라서서 이를 닦았다. 보송보송한 포메라니안이 꼬리를 흔들며 아이의 발치 주변을 쉴 새 없이 맴돌았다.송윤재는 세면대 옆에 기대어 두 팔을 가슴 앞에 포갠 채 딸을 바라봤다.“말해 봐. 도윤 삼촌이 왜 싫은 거야?”송민정은 입안 가득 치약 거품을 문 채 웅얼거렸다.“그냥 싫어요.”“그래도 이유는 있을 거 아니야.”아이는 칫솔질을 멈추고 거울 너머로 아빠를 빤히 바라봤다.“아빠는 직감을 믿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의 직감이 제일 정확하대요.”여자라니.고작 다섯 살인 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니 송윤재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날 것 같았다.“아, 맞다. 오늘 육씨 가문 어른들이…”송민정은 입을 헹군 뒤 발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욕실 밖으로 쪼르르 달려가 자신의 작은 가방을 찾아 지퍼를 열었다.“저한테 세뱃돈을 엄청 많이 주셨어요.”송윤재가 가방 안을 들여다보니 실제로 적지 않은 돈이 들어 있었다.그런데 봉투의 액수를 하나하나 확인하던 그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멈췄다. 붉은 실로 정교하게 엮은 팔찌 사이에 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작은 토끼가 매달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평범한 장신구가 아니었다.“이건 또 누가 줬어?”“육씨 집안 둘째 숙모요.”서은주가 준 건가?그렇다면 틀림없이 강씨 집안에서 나온 물건일 터였다. 평범한 팔찌일 리 없었다.“너…”송윤재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송민정이 얼른 해명했다.“둘째 숙모는 제가 너무 귀엽고 좋대요. 앞으로 자주 놀러 오라고도 했어요. 이거 주실 때는 분명히 안 받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어요.”아이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란 눈을 깜빡였다.송윤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분명 아이가 잠든 사이에 서은주가 몰래 넣어 둔 것이었다.그는 만월연에 참석하며 분명 축의금을 냈다. 그런데 정작 집으로 돌아올 때는 딸이 돈과 금붙이로 가득 찬 가방을 메고 왔다.가치를 따져 보면 그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설도윤은 화들짝 놀라 손가락을 떨었고, 들고 있던 휴대폰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쾅 하는 둔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허경빈은 벽에 비스듬히 기대 선 채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통화 내용을 얼마나 들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입가에는 의미심장한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딘가 거만하면서도 거리낌 없는 분위기, 제멋대로인 듯 자유분방한 기색이 묘하게 사람을 압도했다.원래도 허경빈은 나이에 비해 소년 같은 인상이 강했다. 얼핏 보면 사회에 갓 나온 대학 졸업생처럼 보일 정도라 사람을 방심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하지만 그가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순간, 설도윤은 숨이 턱 막혔다.“허경빈 씨?”허경빈은 아무 대답 없이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화면에는 거미줄처럼 금이 가 있었다.그가 손끝으로 갈라진 액정을 천천히 쓸어보며 물었다.“제 때문에 많이 놀랐어요?”“아닙니다.”“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요.”허경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웃고는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어딘가 사악하고도 위험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찔리는 게 없으면 제가 귀신이었어도 놀라지 않았겠죠. 그런데 당신 표정을 보니까 꼭 남들한테 들켜선 안 될 짓이라도 한 사람 같네요.”“그럴 리가요. 그냥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랐을 뿐입니다.”“겁이 그렇게 많아요?”설도윤은 허경빈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그래서 더더욱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없었고, 긴장감은 갈수록 짙어졌다.허경빈은 그런 설도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도윤 씨.”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남이 모르게 하려면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죠.”한 글자, 한 글자. 일부러 또박또박 들으라는 듯 느리게 내뱉었다.“당신이 한 일을 아무도 모를 거라고 착각하지 마세요.”설도윤의 심장이 쿵쿵 거세게 뛰었다.역시. 이 사람은 알고 있었다.“사람들을 전부 바보로 보지 마세요. 아직 되돌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