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그래서 허경빈도 낚싯대를 둘러메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미래의 장인 앞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성실하고 다정하게 행동했다.예전에 함께 식사한 적은 있었지만, 송지아의 아버지는 아직 허경빈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린 시절의 말썽꾸러기가 몰라보게 철이 들어 어른들을 살뜰히 챙기는 청년으로 자랐다고 생각했다.그는 낚싯대를 정리하는 허경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칭찬했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주말이면 집에서 늦잠 자기 바쁜데, 경빈이처럼 어른들과 낚시하러 나와 주는 청년은 흔치 않지.”이날 낚시에는 육진국과 하정현도 함께했다.허진강은 송지아의 아버지만 따로 초대하면 서로 어색할 수 있다고 생각해 두 사람까지 불렀다.그러나 육진국과 하정현은 허경빈이 자라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지켜본 사람들이었다. 평소와 달리 지나치게 싹싹하고 부지런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일찌감치 무언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세상에 아무런 이유도 없는 친절은 존재하지 않았다.허경빈이 저토록 애써 환심을 사려는 데에는 분명 노리는 바가 있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답은 뻔했다.허경빈이 노리는 것은 바로 송씨 집안의 딸이었다.두 사람이 혹시라도 송지아의 아버지에게 눈치를 줄까 걱정된 허진강은 입막음용으로 자신이 아끼던 한디 고량주를 꺼냈다.워낙 귀한 술이라 육진국과 하정현은 그 자리에서 마시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 병씩 품에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그 모습을 지켜보는 허진강은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다.만약 아들이 끝내 송지아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자신만 애지중지하던 술 두 병을 고스란히 잃은 셈이었다.반면 송지아의 아버지는 정작 가까이에 있는 진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그는 허경빈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청년이라고 여겼다.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아내에게 한참 동안 허경빈을 칭찬했다.돌이켜 보면 자신은 아직도 어린 시절의 일을 들먹이며 그를 나무라곤 했다. 어른인 자신이 너무 속이 좁았던 것 같아 은근히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
허경빈은 술기운까지 오른 탓에 평소보다 한층 더 들떠 있었다.허진강은 끊임없이 떠들어 대는 아들을 한참이나 달랜 끝에 겨우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마침 허경빈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전화를 건 사람은 송지아였다.무사히 집에 도착했는지 확인하려고 연락한 것이었다.허진강은 아들이 휴대폰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실실 웃는 모습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응, 집에 잘 도착했어.”“나도 방금 짐을 다 챙겼어. 이번 출장은 조금 길어질 것 같아. 일주일 정도 예상하고 있어.”허진강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아들이 통화하는 바로 옆에 태연히 앉아, 조금도 숨길 생각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달콤한 목소리로 한참이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허진강의 얼굴에는 어느새 자애로운 아버지의 미소가 번졌다.속으로는 은근히 어깨까지 으쓱해졌다.예전부터 송씨 집안에 송지아처럼 똑똑하고 훌륭한 딸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자신은 그런 딸을 낳지 못했지만, 그녀가 며느리가 된다면 사정은 달라졌다.어딜 가든 자랑하고 다녀도 모자랄 일이었다.“그냥 내가 같이 출장 갈까?”허경빈의 말에 송지아가 되물었다.“넌 회사에 안 나가도 돼?”“우리 아버지도 계시잖아. 아직 정정하시니까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일하실 수 있어.”허진강의 입가에서 흐뭇한 미소가 그대로 사라졌다.정말이지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었다.처음에는 거실에서 통화하던 허경빈은 이내 휴대폰을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아버지가 조금도 눈치껏 자리를 피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바로 옆에 앉아 통화 내용을 하나하나 엿듣고 있었기 때문이다.허경빈도 평소에는 낯이 두꺼운 편이었지만, 아버지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앞에서 연인과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부끄러웠다.한참 통화하다 다리가 아파진 그는 마당 한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송지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에 잡히는 풀을 한 포기씩 뽑기 시작했다.그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던 허진강은 문득 생각했다.저 녀석이 저런 식으로 연애
그에게 정식으로 남자 친구라는 자리를 내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았다.“시간이 늦었어. 너 내일 출장도 가야 하잖아. 이제 집에 데려다줄게.”허경빈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전했다.당장이라도 송지아의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더는 재촉하거나 부담을 주지 않았다. 그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그 순간, 송지아가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붙잡는 힘은 아주 약했다.그런데도 그 작은 힘이 허경빈의 심장을 부드럽게 움켜쥔 듯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조여 오고, 숨을 쉬는 법조차 잊은 것처럼 아찔해졌다.뒤에서 송지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허경빈…”허경빈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우리… 한번 만나 볼래?”그 말이 떨어진 순간, 온 세상이 갑자기 고요해진 듯했다.허경빈이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 걸음 다가서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주변에서는 바람이 풀잎과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잘게 흩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송지아의 귀에는 서로에게 닿을 듯 얕고 뜨거워진 두 사람의 숨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너… 방금 뭐라고 했어?”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려는 듯 허경빈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그의 눈동자에는 뜨거운 바람이라도 일렁이는 듯했다.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면 피부까지 달아오를 만큼 열기가 가득했다.“못 들었어?”송지아가 부끄러운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들었는데,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우리 한번 만나 보자고…”송지아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허경빈이 갑자기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기 때문이다.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포옹이었다.이번에는 품에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두 팔에 힘을 주어 단단히 끌어안았다. 너무 세게 안은 탓에 송지아는 순간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허경빈의 가슴에 뺨을 기댔다.옷감 너머로 거칠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은은한 술 향과
가로등 아래 세워진 차 안에서 허경빈의 비서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입은 떡 벌어졌고, 두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만큼 커졌다.허경빈은 평소 직접 운전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접대 자리에서 술을 마신 탓에 비서에게 운전대를 맡겼을 뿐이었다.비서는 자신의 상사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저 요즘 허경빈이 한껏 들떠서 온종일 싱글벙글 웃고 다닌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상사의 기분이 좋으면 사소한 일로 자신을 괴롭힐 일도 없었다. 그래서 비서는 동료들과 농담 삼아 허경빈에게 분명 여자가 생긴 것 같다고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그 상대가 송씨 집안의 공주님일 줄이야!두 사람이 사이가 나빠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앙숙이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널리 퍼져 있지 않았던가?세상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실을 알아 버렸다.일단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잠시 후 허경빈과 송지아는 저택 단지 안쪽의 작은 정원으로 들어갔다.허경빈의 비서와 송씨 집안의 운전기사, 경호원은 나란히 정원 입구의 계단에 걸터앉았다.세 사람은 두 사람을 기다리는 동시에 주변을 살피며 망을 보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송씨 집안의 경호원이 비서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 웃었다.“아니, 당신 표정을 보니까 두 사람 사이를 오늘 처음 안 모양이네요.”비서는 어색하게 마른웃음을 흘렸다.“두 분이… 만난 지 오래됐습니까?”“보름 조금 넘었을걸요.”“저는 매일 대표님과 붙어서 일하는데도 전혀 몰랐어요.”비서는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제가 꼭 바보가 된 기분이네요.”“모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당신만 몰랐던 게 아닙니다.”“두 분, 지금 비밀 연애라도 하시는 겁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유행을 앞서가실 필요가 있나요?”*그 시각, 허경빈과 송지아는 달빛이 내려앉은 정원 산책로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계절이 바뀌려는 듯 바람에서는 한겨울의 매서운 냉기가 한결 옅어지고, 부드러운 온기가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맑은 달빛은 흐르는
허경빈은 온몸이 쑤시는 꼴을 송지아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멋진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던 그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를 기다렸다가, 출장 전날이 되어서야 만나자고 연락했다.하지만 송지아에게는 이미 선약이 있었다.“미안해. 오늘은 친구 몇 명과 저녁 약속이 있어.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 만나자.”그녀는 오랜만에 친구들과 쇼핑도 하고 식사도 할 예정이었다.*송지아와 약속을 잡지 못한 허경빈은 그날 저녁 고객들과 접대 자리를 가졌다.곁에서 대신 술을 받아 주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 분위기상 몇 잔은 피할 수 없었다. 잔이 오가고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허경빈은 틈틈이 휴대폰을 확인했다.그러다 송지아가 올린 게시물을 발견했다.친구들과 식사하며 찍은 사진들이었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경빈도 아는, 학창 시절 동창들이었다. 사진 속 송지아는 편안하게 웃고 있었고,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허경빈은 자연스럽게 ‘좋아요’를 누른 뒤 그녀에게 개인 메시지를 보냈다.[내일 출장도 가야 하잖아. 너무 늦게까지 놀지 마.]몇 분쯤 지났을까.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송지아에게서 답장이 왔다.[보고 싶어.]그 문장이 나타나는 순간, 채팅창 안으로 반짝이는 작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허경빈은 숨을 순간적으로 들이켰다.술자리에서 오가던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화면 속 문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확인했다.하지만 설레는 감정을 채 느끼기도 전에 메시지가 돌연 삭제되었다.곧이어 송지아가 다시 설명을 덧붙였다.[친구들이랑 게임 중이야.]허경빈의 숨결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지금 자신을 놀리는 건가?한편 송지아는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오늘 모인 친구들 가운데 두 명은 송지아와 허경빈 모두의 메신저 친구였다. 허경빈이 그녀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자마자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발견했다.친구들은 기다렸다는 듯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게임에서 진 사람은 친구들이 지
입맞춤을 나눈 뒤로 허경빈은 하루 종일 기분이 들떠 있었다.혼자 있을 때도 실실 웃었고, 이따금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허진강은 아들이 송지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요 며칠 눈에 띄게 들뜬 모습을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진전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물었다.“송씨 집안 아가씨와는 잘되어 가고 있냐?”“나쁘지 않아요.”“네 성격이라면 여자 친구가 생기는 순간 온 세상에 떠들고 다닐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의외로 조용하구나.”허경빈은 순간 멈칫하더니 아버지를 바라보았다.“아빠, 지아는 아직 제 여자 친구가 되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어요.”“관계를 확실히 정하고 공개까지 했다가 헤어지면 서로 귀찮아질 수 있으니까, 일단 너를 좀 더 지켜보려는 거겠지.”허진강은 지극히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그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널 차 버릴 수도 있고.”“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아가씨가 널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허경빈은 어이가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빠, 정말 제 친아버지 맞아요? 저 이제 아빠 아들 안 할래요.”“솔직히 나도 너 같은 아들은 낳고 싶지 않았다.”허진강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받아쳤다.“내 아들이 남혁이나 강민이, 아니면 이석이 같은 녀석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걱정할 일도 없었을 텐데.”그는 세상 모든 근심을 홀로 짊어진 사람처럼 길게 탄식했다.“어떤 자식은 부모에게 은혜를 갚으러 태어난다는데, 너는 빚 받으러 온 게 분명해.”허경빈은 더 이상 집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방주헌은 지난번 일을 계기로 일방적으로 그와 ‘절교’를 선언한 상태였다. 육씨 집안은 아이들이 여럿이라 언제나 시끌벅적할 것 같았다.결국 별다른 목적도 없이 하씨 집안으로 향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집에는 온유란만 있었다.온유란은 방 안에서 전문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요가를 하는 중이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