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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살아 남은 아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06 17:29:34

반시가량 걸었을까? 드디어 어렴풋이 집의 형태가 보였다. 만석이 말한 그 집으로 보였다. 최나인이 조심스레 사리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말 단촐한 초가집이었다. 방문을 열어 보니 텅 비어있었다. 부엌에 나와보니 다행히 한켠에 해 놓은 뗄감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우선 불을 피우자. 불을 피워야 애기씨가 고뿔이 들지 않을 거야!’

생각시 시절 배워둔 기술로 최나인은 금방 불을 피울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강보를 안은 채 몸을 움츠렸다.

새벽 암탉이 울고 동이 틀 무렵 유모는 우선 은신하고 있는 초가집 뒤편 나물 거리가 있는지 둘러 보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등성이는 잡풀과 가시가 달린 나무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그래도 맏다리(허벅지)에 힘을 주고 감다리(종아리)가 후들 거리며 등성이를 조금 오르니 참취가 살포시 돋아 있는 곳이 있었고 머루도 보였다.

‘그래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이거라도 뜯어가서 오늘 요기를 떼우고 내일은 마을로 내려가 먹을 것도 얻어오고 일감도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희망이 생기니 몸에 힘이 들어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최나인은 아직 쎄근거리며 자고 있는 영수를 뒤로 한 채 마을로 내려갔다.

“저 죄송하지만 밥알이라도 좀 나눠 주실 수 있을까요?”

“뭐야 이거, 아침부터 재수없게.”

집집마다 문을 두드렸지만 녹록치 않았다.

“휴우, 장터 쪽으로 가는게 나으려나.”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함에 배고픔도 잊고 있을 때 한 아낙이 말을 걸어 왔다. 

 “이 동네 사시우?”

“아. 저는 저 위쪽에 조카랑 살고 있어요.”

“보아하니 동냥을 하는 중인 거 같은디 내가 부엌에서 누룽지를 좀 가져올 테니 잠시만 기다리시게.”

“예? 아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 밤 제사 때 올렸던 수육도 몇 점 가져왔소. 조카에게 가져다 주시구려. 조카는 몇살이요?"

“네? 다섯살이요.”

“아이고 아직 젖먹이구만. 그래, 부모가 일찍 죽었소?”

“아 예? 예예 저.. 혹시 제가 삯을 받을 만한 곳이 필요한데... 예전에 빨래랑 바느질을 좀 했거든요. 혹시 아시는 곳 있으실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고 저짝으로 내려가면 장터유. 그리 가서 함 물어보면 좋을 듯 헌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최나인은 온기 남은 음식 앞에 불현듯 속이 허기져 오는 것을 느꼈다. 아낙에게 고개 숙여 인사 한 후 집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홀로 있을 영수가 마음에 걸렸다.

“애기씨… 애기씨? 어디갔지?”

“애기씨?”

“응 유모”

“애기씨 이렇게 밖에 돌아다니면 큰일 나요. 어서 들어가요.”

“너무 심심해. 저기 나비랑 풀을 보고 있었어. 나비가 얼마나 몸이 가벼운지 자기가 가고 싶은 데로 가더라고. 나도 나비로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애기씨, 자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시고 이리 와서 드셔봐요. 아직 따뜻해요.”

최나인은 얻어 온 음식을 함께 먹으며 영수에게 불쑥 말했다.

“애기씨 저 내일은 삯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으러 아래 장터에 갔다 와야 해요. 어려워도 혼자 지내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낯선 인기척이 느껴지면 윗목 이불 안에 일단 숨으셔야 돼요. 알겠죠? 할 수 있죠?”

“금방 돌아 올거지? 나 심심해.."

“네 애기씨 일이 구해지면 바로 돌아올께요.”

………………………………

최나인이 다음 날 장에 바느질 일감을 얻으러 간 사이, 지게를 진 남자가 영수가 지내는 집을 이리저리 들여다 보고 있었다.

“음. 이 집은 석달 전 노부부가 돌아가시고 비어 있는 집이었는데 왜 불을 핀 흔적이 남아 있지? 누가 지내고 있나?”

그 지게꾼은 집안을 흘끔흘끔 보며 이리 저리 살피다 도포를 입은 한 남자에게 제지를 당했다.

“웬 놈이냐?”

“예? 아. 아닙니다”

지게꾼을 쫓아 보내고 그 도포 입은 남자가 집에 들어가 여기 저기 살폈다. 마침 바느질거리를 머리에 이고 온 최나인이 도포 입은 남자를 보고 놀라며 물었다.

“누..누구십니까?"

“여기가 영수 애기씨가 계신 곳이오?"

“누구신데 영수 애기씨를 물으시는지요?”

“저는 임금께서 보낸 최찬호라 하오. 영수 애기씨가 잘 계신지 살펴보라는 어명이 있어 왔소.”

“예 애기씨는 저랑 잘 있습니다.”

“그럼 자네가 최나인이오?”

“예 그렇사옵니다.”

“그래… 먹을 것은 좀 있소?”

". . . "

“알겠소. 내가 우선 쌀 두 말과 콩 석 되를 보내 줄 터이니 그리 알고 계시오.”

“은혜 참으로 감사합니다.”

“애기씨를 잠깐 보고 가도 되겠소?”

“예 들어 오시지요.”

최찬호가 영수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입을 열었다. 

“애기씨 안녕하시옵니까? 저는 한양에서 온 최찬호라 하옵니다. 이렇게 무사하시고 또 건강하시니 다행이옵니다. 한양에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한양에서 오셨어요? 혹시 저희 어머니랑 아버지랑 언니들도 보셨나요?”

“애기씨.  그것이....”

내금위장 최찬호가 난감해 하며 말을 잇지 못하자 최나인이 얼른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나으리, 날이 저물어 갑니다. 돌아가시려면 어서 서두르시는 편이 나을 듯 합니다.”

“그럼, 잘 부탁하오.”

“애기씨 오늘 만난 저 분을 혹시 다음에 만나더라도 부모님이나 언니 오라비들에 대해 물으시면 안됩니다 아셨죠?”

“왜요? 한양에서 오셨으니 소식을 알 수도 있잖아요?”

“애기씨 글쎄 안된다니까요. 묻고 싶어도 참으셔야 돼요. 알았죠?”

최나인은 다시 영수에게 연민을 느끼며 목이 매였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바느질감을 꺼내며 옷을 만질 준비를 했다.

“애기씨 이제 우리 동냥은 안해도 될 거 같아요.”

“왜요?”

“아까 한양에서 우리를 찾아오신 나으리께서 우리에게 곡식을 주신대요.”

다음날 여럿 장정의 짐꾼들이 쌀 두 가마니와 다른 잡곡들을 가지고 초가집에 내려 놓았다.

………………………………………………………………

중종은 어린 영수의 소식이 매우 궁금했다. 비록 형님(연산군)과 장녹수는 응당한 벌을 받았지만 죄 없는 어린 조카에 대한 측은지심은 남아 있었다.

“그래 어찌되었느냐? 아이는 찾았느냐? 잘 있더냐?”

중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전하 찾았습니다. 화성 근처에 한 흉가에 탈출한 나인이랑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래? 어디 아파 보이지는 않고?”

“좀 야위어 보이긴 했으나 특별히 병색이 들어 보이진 않았습니다. 끼니를 떼우는 것이 쉽지 않아 보여 일단 쌀과 곡식을 보냈습니다.”

“그래 잘 했구나. 계속 해서 그 아이를 잘 보살피거라. 조정의 신하들이 모르도록 아주 은밀히 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전하 명심 하겠사옵니다.”

……..

내금위장이 다녀 간 후로 최나인은 다시 삶의 희망을 찾게 되었다. 중종이 영수의 존재를 알았고 영수를 해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이제는 그저 힘써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마치 상쾌한 공기가 허파 깊숙이 스며드는 듯했다. 좌절과 무력감이 켜켜이 쌓인 어둠의 굴에서 벗어나 밝은 빛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삶과 존재는 이미 누군가에게는 칼끝 위에 놓인 명분이었고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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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29화 꽃샘 바람이 지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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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28화 꽃샘바람

    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27화 돌아갈 수 없는 강

    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26화 죄인이 된 밤

    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4화 연등 아래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3화 심장에 꽃씨가 내려 앉다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2화 그날, 이름 하나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1화 마지막 충성

    정적을 가르는 것은 승덕 어멈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불이야! 안부엌에 불이 났다!"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인시의 끝자락에 모두들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안채 뒤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둔 마른 짚단에 불씨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부뚜막을 타고 올라와 나무 기둥을 핥기 시작했다. 승덕어멈은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당황해 멈춰 선 종들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호통을 쳤다."멍하니 서서 무엇들 하시오! 어서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오시오! 어서!"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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