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최나인의 손을 잡고 내려온 장터는 소란스러웠다.
낯선 웃음소리, 낯선 냄새, 낯선 사람들.영수는 그저 신기했고 즐거웠다. 궁에서 아버지의 생신을 맞아 강녕전 앞 넓은 뜰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수많은 무희와 손님들이 어우러지던 그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금 흥겨운 웃음소리와 노랫가락이 귀에 스며든 것은 오랜만이었다. 형형색색의 노리개도 구경하고 입에서 부드럽게 녹아 없어지는 호박엿도 맛보았다. 줄타기와 인형극을 보면서 영수는 탄성을 질렀다.
최나인 외에는 마을 그 누구도 영수의 존재를 몰랐다. 한 해가 급류처럼 순식간에 흘러갔다. 조정은 이제 연산군의 흔적은 점점 희미해지고 새로운 임금 아래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
“그래? 찾았느냐?”
“예 대사헌대감. 화성근처 한 초가집에 1년 전쯤 갑자기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여자와 네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여자 아이가 들어와 살고 있다고 합니다. 모녀지간처럼 보이지 않고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다 합니다.”
“그래? 시기랑 나이가 모두 비슷하구나. 그 둘만 시체를 찾지 못했는데 하늘로 솟았을리도 땅으로 꺼졌을리도 없지. 계속 감시하고 더 확실한 증좌를 찾게 되거든 지체 없이 보고하거라. 알겠느냐?”
“예 나으리, 하온데... 그들이 누구이옵니까?”
“아이는 연산의 자식이고 나이든 여자는 그 아이를 보호하는 궁녀이다.”
“예?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그렇다. 도를 멀리하는 임금은 폭군이 되고 그로 인해 백성이 고통을 받고 결국에는 나라가 혼란스러워 진다. 폭군의 씨앗은 자라나 주변을 어지럽게 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숙주가 되느니라. 나는 그것을 애초에 제거하려 한다.”
“그렇다면……”
“확실한 증좌가 있다면 은밀히 처리해도 된다. 나는 아이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대를 위하여는 친족도 내쳐야 하는 법, 나는 오로지 반정을 과거에 묻고 조선이 태평성대를 이루기 원하는 것이니라.”
"나으리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곧 소식 올리겠나이다."
인사를 올린 종길은 물러났다.
조광조의 눈은 매의 그것처럼 매섭게 빛났다.
………………………
장터에서 바느질감을 얻은 최나인은 영수와 나란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유모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어머니로부터 배운 노래 불러줄까?”
“노래요? 한 번 들어 볼까요 애기씨?"
최나인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고운 꽃잎 위에 앉은 나비 한 마리
소곤소곤 속삭이며 꽃을 불러 보네 “나 왔소, 꽃아 나 왔소” ……“다음 가사가 생각이 나질 않네.”
영수가 풀이 죽어 노래를 그쳤다.
“어머니가 곁에 계셨다면 얼른 물어보았을텐데…”
그리움에 어느덧 영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새끼가 어미를 찾는 것이 당연하듯 영수도 아직 어미가 그리울 어린 아이였다.
“애기씨 정말 예쁜 노래네요. 분명 다음 번엔 가사가 모두 생각날 거에요.”
최나인이 영수의 손을 꼭 쥐어 잡았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집에 다다를 참이었다.
그 때 갓을 쓴 남자가 뒤에 수하 두명을 데리고 최나인과 영수에게 거칠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풍채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누구신데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 겁니까?”
최나인과 영수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이고을 좌수다. 나는 이 고을에서 나고 자랐는데 너희들이 낯설어 하는 말이다. 어디 사는지 빨리 답하라. 답하지 않으면 너희를 관아에 발고 하겠다.”
그 때 풀숲에서 뜻밖에 갓을 단정히 쓴 남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오?”
내금위장 최찬호 대감이었다.
“당신이 뭔데 참견이요? 이 사람들을 아시오? 가던 길이나 가시오.”
“이분은 제 사촌누이이고 어린 소녀는 조카딸이외다. 집에 작년에 화재로 갑작스레 부모님을 잃고 집의 가재도구들도 모두 타버렸지요. 목숨만 겨우 건지고 나와 저의 집에서 지내시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임시 거처를 제가 마련해 드리고 천천히 새로운 거처를 물색하는 중입니다만”
“이보시오. 이 양반의 말이 사실이오?”
좌수가 최나인을 보며 물었다.
“예 저는 지아비를 병으로 잃고 시부모님과 딸 아이 하나와 지내다가 갑작스런 변고로 시부모님 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마침 사촌오라비가 딱한 처지를 듣고 거둬 주셨지만 거기도 저희가 지내기엔 그리 여유롭지 못하여 오라비가 새로운 거처를 알아봐 주시는 중이었습니다.”
“음… 그래요? 실례하게 되었소.”
좌수는 물러나면서도 영수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이목구비 모두를 기억에 간직하려는 것처럼.
의심하던 남자들이 물러간 후 내금위장 최찬호가 최나인에게 말을 건넸다.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 뻔 하였소. 자 올라가 집으로 들어갑시다. 할말이 있소.”
“예 나으리.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나으리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하였사옵니다.”
최찬호는 임금에게 받은 서찰을 최나인에게 내어 보였다.
“전하께서 조카인 영수 마마가 살아서 잘 지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기뻐하셨소. 살아 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쌀과 콩 두 가마니를 하사하셨소. 이정도면 둘이서 1년 지내기에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오. 그리고 옷을 해 입을 명주와 무명과 비단도 한 필씩 주셨소. 그 정도면 당분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오.”
최나인은 최찬호의 말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허나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주의 하시오. 자네와 애기씨 마마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오. 그들의 눈에 띄면 분명 전하께 누가 될 것이오. 무슨 말인지 알겠소?”
“예, 나으리. 저희는 궁으로 돌아갈 마음도 명분도 없사옵니다. 그저 밖에서 조용히 살겠습니다. 걱정 놓으십시오.”
최나인은 자신들을 살피던 좌수에 대한 생각은 까맣게 잊어 버렸다.
계절이 한 바퀴 돌고, 또 돌았다.동산의 강아지풀은 여전히 바람에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봉분의 흙은 이제 단단히 굳어 있었다. 비가 내려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그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영수는 흐트러져 자란 풀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가려 냈다.귀여운 여자 아이가 짧은 다리로 마당을 토끼처럼 뛰어다녔다.“어머니!”영수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나으리랑 마님을 어쩜 반반씩 닮았는지요”영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몇 해가 더 흘렀다.아이는 글자를 배운다. “하늘 천, 따 지…”서툰 손으로 붓을 잡는다.영수가 묻는다.“이름이 무엇이냐.”아이가 또박또박 답한다.“화진.”영수는 잠시 멈췄다.밤이면 아이 팔에 감아 둔 한이 사 왔던 그 낡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보았다. 이제 수놓았던 글씨도 바래서 옅어졌다. 영수는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곱게 접어 함에 다시 넣었다.영수와 화진은 손을 잡고 장터에 내려갔다.누군가 속삭였다.“저 아이가 그 집 딸이라지?”영수는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 손을 더 단단히 잡고 속으로 다짐했다.“이제는 내가 네 이름을 지킬 것이다.”멀리서 병판의 가마가 다가오다가 가마가 잠시 멈추었다.장막이 살짝 들리며 시선이 마주쳤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내 가마가 천천히 움직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영수와 화진은 한이 묻힌 동산에 함께 올랐다. 화진이 꽃 한 송이를 봉분에 조심스럽게 놓아 두었다. 영수는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어머니, 제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빛날 화(華), 보배 진(珍). 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란다.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할 이름이지.”“어머니, 제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네 아버지는…..”영수는 잠시 목이 메였다.“세상에서 이 어미만을 연모하신 분이었다.네가 태어나던 날… 그분이 마지막으로 웃으셨단다.”바람이 두사람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화진
“마님 승철이옵니다.”“그래 승철아, 알아낸 것이 있느냐?”“예, 마부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이사한 지 한 석달 되었다 하옵니다. 아마 마부가 밀반출한 화약을 싣고 떠난 직후인 듯 하옵니다.”“그렇구나. 그래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갔다더냐?”“그건 이웃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갔다 하옵니다. 하온데…”영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마님… 화약 인계를 맡았던 군관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며칠 전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합니다.”“화약이 사라졌는데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이냐.”“오히려 공을 세웠다 하더이다. 변방 화약 유통 체계를 정비했다는 명목이라 합니다.”“그래 승철아 네가 이번에도 크게 수고를 했구나. 계속 사라진 마부 주변을 잘 감시하거라. 분명히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예 마님.”‘분명 화약을 내주고 승진한 사람은 필시 뭔가가 있을 것이야. 반드시 알아내야 겠다!’영수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병조좌랑! 자제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지?”“아닙니다 대감!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그래 술 한잔 하세나. 자 받게”“예, 대감!”“마지막 뒤처리까지 잘 부탁하네 흔적이 남으면 나중에 귀찮아 질걸세. 그날 기록은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예 대감, 명심하겠사옵니다.”“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참으로 기쁘이. 자. 한 잔 더 받게”병조판서의 집에서 나온 병조좌랑은 골목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수였다.“아이고 깜짝이냐 뭐냐! 이런.”“나으리, 어디를 다녀 오시는지요?”“넌 누구냐? 네따위가 뭐길래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게냐? 썩 물러나라.”“나으리, 제가 병판대감 댁에서 나으리가 나오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사옵니다. 이번에 승진하셨다지요?”“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냐?”다소 겁에 질린 듯한 좌랑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저는 지난 화약 밀
봉분에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붉은 채로 있었다.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열어라. 관에서 나왔다.”영수는 아이를 안은 채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섰다.문이 열리자, 푸른 도포를 입은 군관 둘과 아전 하나가 서 있었다.“이 집에 거하는 한수의 처가 누구냐.”“접니다.”영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전이 서책을 펼쳤다.“한수는 국경 인근에서 불온한 물건을 나른 혐의가 있다.죽었다 하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가산과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최나인이 분개했다.“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무슨 물건이라 하셨습니까.”군관이 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관의 화약이다.”아이를 안은 영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증좌가 있습니까?”잠시 공기가 멈췄다.아전이 눈을 치켜올렸다.“지금 따지는 것이냐.”“따지는 것이 아닙니다.”영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억울한 자의 집을 뒤지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터.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이미 눈을 감은 자에게 죄를 더 씌우는 것이 관의 도리입니까.”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조심하라.”“저는 조심하고 있습니다.”영수는 아이를 고쳐 안았다.“호구를 보시려거든 보십시오.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역적으로 꾸미려 하신다면… 그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군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연산의 피.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집 안을 훑던 아전이 낮게 속삭였다.“이 아이도 기록에 올려야겠군.”그 순간, 영수의 눈이 달라졌다.슬픔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아이의 이름은 제 입으로 올릴 것입니다.”조용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군관은 한참을 바라보다 서책을 덮었다.“오늘은 기록만 하겠다. 그러나 다시 부를 것이다.”문이 닫혔다.잠시 후, 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영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
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
1506년 가을,임금이 폐위되던 밤, 그의 핏줄도 함께 사라져야 했다.후.후. 거친 숨결이 턱밑까지 올라왔다.최나인은 생전 이토록 큰 불을 본적이 없었다. 자시인데도 번지는 불길에 사방은 대낮처럼 빛났고 뒤엉킨 고함소리에 궁궐은 쑥대밭이었다.자선당(연산군의 침소)을 벗어나니 다행히도 금군의 고함소리는 조금씩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강보에 싸인 채 겁에 질려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는 아이를 안고 뛰다보니 더 이상 맏다리(허벅지)에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조금만 더 제발, 조금만 더...’그때였다.“거기 누구냐?”수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