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화 닿지 못한 마음“자 여기 모두 모여 봐요!”최대표가 모든 디자이너들과 직원들을 대회의실에 불러 모았다.“우리 회사에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이번 홍콩 서스테이너블 디자인 컴피티션에서 우리 회사 민유나씨가 당당히 우승을 했습니다”.최대표가 트로피를 번쩍 들어 올리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박수 갈채가 터져 나왔다. 회의실이 환호성으로 떠나갈 듯 했다.“우아, 유나씨 들어 온지도 얼마 안되었는데 복덩이가 들어왔네? 대단해 그리고 축하해.”팀장이 밝은 표정으로 유나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유나는 구름 속을 걷는 것 같았다.“그런데 유나씨 국화무늬는 좀 의외였어. 제법인데?”주부본부장이 시크한 표정으로 유나에게 말을 건넸다.“친한 언니랑 기념으로 샀던 핸드폰 케이스에 국화 무늬가 있었던 게 떠올랐어요. 저도 의외여서 얼떨떨해요”“자자 이렇게 회사에 좋은 일이 있는 날은 그냥 지나치면 안되겠죠? 우리 오늘 유나씨 우승 기념으로 회식합시다! 3차까지는 빼기 없기입니다.”대표가 우렁차게 이야기했다.유나는 건네 주는 술잔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다. 자기를 축하해 주기 위해 모두 남아서 시간을 보내 주는데 분위기를 어렵게 하고 싶지 않았다.“잠시 화장실 좀….”유나는 속이 매스껍고 불편하여 밖으로 나왔다. 바깥 찬 공기를 들이 마시니 조금 살 것 같았다.“유나씨 괜찮아요?”같은 팀 동우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예 바깥 공기를 마시니까 조금 나아요. 들어가 보세요.”“유나씨, 오늘 진짜 많이 마시던데 괜찮겠어요? 거절하기가 힘들었죠? 내가 오늘 집에 데려다 줄께요.”“아 선배 저 혼자 갈 수 있어요.”“유나씨, 이미 많이 마셔서 힘들어 보여요. 내가 얼른 짐 챙겨 나올 테니 기다려요.”쏜살같이 들어간 동우가 이내 유나의 가방과 외투를 들고 나왔다.“유나씨 택시 잡아서 내려 주고 갈께요. 집이 어디에요?”“음…. 종로구……..”유나는 다리에 힘이 자꾸 풀렸다.유나의 겨드랑이를 얼른 부축이면서 동우가 택시를 거칠게 불렀다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8화 첫 우승“민유나씨? 대표님 호출이요.”“녜? 대표님이요?”얼떨결에 대표실에 들어간 민유나를 최대표는 반가워했다.“어 유나씨. 오랜만이죠? 자 잠깐 앉아요.”“대표님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나요?입사 후 대표를 독대한 것이 처음이라 유나는 웬지 모를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이번에 홍콩에서 디자이너들끼리 실력을 겨루는 컴피티션이 열리는데 우리 회사 대표로 유나씨가 참가하면 어떨까요?”권유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말에는 거절할 수 없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이제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제가… 그런 큰 행사에…..”말을 주저하며 얼버무리는 유나에게 최대표가 찡긋 웃으며 말했다.“우리 디자이너들이 모두 가을 컬렉션에 묶여 있어요. 그렇다고 이번 컴피티션을 그냥 스킵하기에는 아쉬운 행사에요 유나씨는 오히려 신인이니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잖아요? 유나씨가 한 번 준비해 봐요.”거의 제안이라기보다는 반명령에 가까웠다.“알겠습니다, 대표님.”한숨을 내쉰 유나는 승낙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그렇게 개인 짐을 챙겨 유나는 홍콩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작은 창문 너머 건물들이 점점 장난감처럼 크기가 줄어 들었다. 비행기 특유의 둥근 창에는 지연 언니, 그리고 웬일인지 고향에 두고 온 동생이 문득 떠올랐다. 유나의 가슴이 먹먹해 졌다. 비행기를 처음 타서 인지 아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린 탓인지 확실치 않았다. 첫 출장은 설렘이 가득하기 마련이지만 유나에게는 설렘보다는 부담이 백배인 출국이었다.컴피티션 디렉터의 설명을 놓치지 않기위해 초집중을 했다.“이번 컨셉은 서스테이너블 디자인이에요. 원단의 레프트오버까지 모두 활용한 작품을 출품해 보세요. 기간은 1주일입니다.”유나는 하루 종일 고민을 했다. ‘어떤 디자인이 세계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을까? 과하지 않으면서 아름다우면 좋을텐데…’ 문득 동대문 봉제 공장에서 헤어질 때 지연 언니와 하나씩 사서 나눠가진 국화무늬의 핸드폰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국화 무늬를 원피스에 새겨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7화 그날의 미소"오늘부터 유나 씨는 아틀리에에서 수석 디자이너와 함께 일하세요.”주부본부장이 건조하게 말했다.“네? 아틀리에에서요?”“네 유나씨 그리고 같은 질문을 두번하는 버릇은 좀 고치세요.”유나는 주부본부장의 차가운 말투에 움추러들었다.“네 알겠습니다.”7층의 아틀리에실은 조인유의 심장부와 같은 곳이었다. 60여평 되는 작업 공간에 10여개의 디피용 마네킹들이 서 있었고 작업용 책상과 미싱들 사이에 원단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유나씨 얘기 잘 들었습니다. 우선 유나씨가 재능이 있든 없든 그건 둘째 문제이고 원단부터 익혀야 합니다. 자 우선….”유나는 수석 디자이너가 가리키는 대로 면, 실크, 모혼방 등 다양한 패브릭을 만져 보고 그리고 노트에 적었다. 수석 디자이너의 말 뿐 아니라 표정과 손짓까지 온 힘을 기울여 집중했다.“원단을 익히고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해야 해요. 즉 머리에서 이미 재단을 해야 하죠. 연습이란 없어요. 스케치를 한 후 원단에 칼을 대는 순간 그 원단은 이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유나씨가 집중하지 않으면 수백만원짜리 원단을 쓰레기통에 넣는 수가 있어요.”유나는 숨을 참으며 들었다.모두가 퇴근한 시각, 밤 10시 유나는 아틀리에에 혼자 남아 원단을 정리하고 눈에 익혔다.유나는 원단 냄새가 좋았다. 원단이 자신을 어서 재단해 달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언젠가 자신의 손끝에서도 이런 원단이 아름다운 옷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랐다. 1시간쯤 원단을 정리하고 아틀리에의 불을 끈 후 유나는 집으로 향했다. 차가운 11월의 밤공기가 유나에게는 시원한 산소처럼 느껴졌다.….유나는 첫 월급 명세서를 받고 기분이 묘했다. 월급 통장을 뚫어지라 들여다 보며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었다. 분명 봉제 공장에서 일하던 시절에 비해 조금 더 나아지긴 했지만 공장 기숙사 비용으로 공제되던 금액은 지금 살고 있는 월세에 비하면 거의 공짜나 다름 없었다. 유나는 이를 더 악물고 저축하기로 했다. 점심값이 아까워 아침마다 눈을 비비며 도시락을 쌌다. 맨밥에 넣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6화 새로운 문이 열리다“유나야 어떻게 됐어? 네가 만든 옷 맘에 든데? 우리 공장으로 발주한데? 반장님이 엄청 기대하고 있던데?”지연이 신발을 벗고 들어 오는 유나를 보고 호돌갑을 떨며 말했다.“응, 그냥 두고 가래.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어.”유나는 조용히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유나가 지치거나 외롭거나 우울할 때 힘을 다시 넣어 주는 감미로운 목소리- H2H의 강도윤 목소리를 들으며 유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유나야 잠시 보자.”김반장이 노크를 다급하게 하며 불렀다.“네?”“사무실로 잠깐 내려와.”저녁조인 유나는 츄리닝에 슬리퍼를 끌고 사무실에 들어갔다.거기에 장실장이 서 있었다.“유나씨, 장실장입니다.”“예, 실장님, 안녕하세요? 그런데 무슨 일로…..”“대표님께서 유나씨가 우리 조인유에 입사를 하는 것이 어떤지 제안하셨어요. 이미 반장님께는 양해와 동의를 구했고요. 유나씨가 만족할 만한 조건은 충분히 제시 될 겁니다.”…..“유나야 그래서 어떻게 할꺼야? 조인유로 갈꺼야? 대한민국 여성복 패션 1위 업체 조인유가 웬말이야? 진짜 부럽다. 나 잊지 않을거지? 계속 연락할꺼지?”“아직 몰라 언니 나도 지금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그때 작업 반장이 유나를 불렀다.“유나 잠깐 나와라.”“예, 반장님.”“무슨 일이세요?”“조인유가 너를 보내 주는 조건으로 우리에게 기존 물량을 2배로 늘려주고 계약기간도 3년까지 자동연장하기로 했어. 그러니 마음 정하고 이번주까지 마무리 해.”“반장님…”“너한테도 훨씬 좋은 기회잖아? 언제까지 여기 동대문 반지하 봉제공장에서 썩을 거니? 너도 꿈이 있을거 아니야. 그리고 넌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수고했어.”대답도 듣지 않고 통보식으로 자기 할 말만 쏟아 부은 김반장이 유나의 어깨를 툭툭치고 사라져버렸다.가족이라고 혼자 착각속에 살다가 마음에 상처를 입고 무작정 연수네서 뛰쳐 나온지 이제 1년, 어렵게 이곳 반지하 봉제 공장에 자리를 잡아 큼큼한 곰팡이 냄새와 빛이라곤 하루에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5화 처음으로 인정받다빌딩 안 로비에 들어서니 평범한 외관과는 달리 눈에 띄는 색채와 고급스러운 향이 가득했다. 잠시 주춤거리고 있는 유나에게 1층 안내 도우미가 인사를 하며 말을 건넸다.“혹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아네, 저… 13층 대표실에 가려고 하는데요.”“혹시 약속은 되어 있으신가요?”몸에 벤 형식적인 친절한 말투로 안내 도우미가 되물었다.“약속은 안되어 있는데…. “도우미가 조금 난처해 하는 눈치를 보이자 유나는 최사장의 명함을 꺼내 보였다.“사장님께서 저희 공장에 오셔서 이 명함을 주시고 옷이 다 만들어 지면 찾아오라고 하셔서…”안내 도우미가 명함을 흘끗 보고는 프론트에서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1층에 손님이 오셨는데 올려 보내드릴까요? 옷을 다 완성하면 찾아오라고 했다고 하십니다.”전화를 끊고 안내 도우미가 말했다.“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엘리베이터는 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 올라가는 순간, 유나는 살짝 어지러웠지만 참을 만 했다. 서울의 빌딩숲을 보는 것이 연수네 집에서 나온 후로 오랜만이었다.대표실은 넓었다. 가운데를 가르는 투명 유리 너머로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통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고, 티크 원목 앤티크 책상 위에는 패션 잡지와 재단 도면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그 어수선함마저 디자이너의 작업실처럼 자연스러웠다. 반대편 햇살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는 스포트라이트 등 여러 개가 박혀 있는 쇼룸에 의상을 입힌 마네킹 몇 개와 준비 중인 마네킹 하나가 보였다.“안녕하세요?”“어서와요. 그 때 작업장에서 내가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군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민유나라고 합니다.”“반가워요. 유나양. 여기 이 분은 주민주 부본부장이에요. 우리 회사 수석 디자이너이기도 하죠.”“반가워요. 주민주라고 해요.”검은색 타이트한 스커트에 흰색 블라우스를 입은 40대초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유나에게 악수를 청했다.“저번에 동대문 공장에 들렀을 때 유나양이
Last Updated: 2026-08-07
Chapter: 4화 새로운 시작유나가 뛰쳐나온 도시는 다시 삭막한 곳이었다. 아는 사람도 갈곳도 없는 황무지보다 더 외로운 서울이었다. 고모 한 분이 경기도 시흥 어디쯤 산다는 말을 얼핏 들었지만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복지시설만큼은 갈 수가 없었다. 자칫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안녕하세요?”유나가 한 옷가게 문을 열며 주인에게 인사를 했다.“어? 넌 유나 아니니? 그런데 오늘은 왜 혼자야?”연수 엄마를 따라 두 번 정도 옷가게를 따라 온 적이 있었다. 옷가게 주인은 연수엄마의 친구이자 연수의 단골 가게였다 유나는 우아하면서도 친절이 묻어 있던 옷가게 주인에게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을 느꼈다.“혹시 제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할 수는 없나요?”유나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왜? 너 연수네서 나왔니?”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에휴 그랬구나. 그래 남의 집 더부살이가 어디 쉽겠니? 그런데 유나야 미안한데 너도 알다시피 아줌마 가게는 그냥 혼자 할 정도의 규모야. 누구를 직원으로 채용할 정도가 아니라서. 게다가 넌 미성년자잖니?”유나는 이내 시무룩해졌다. 물에 떠 있던 지푸라기가 급물살에 쓸려 내려간 것 같았다.“대신 여기 전화번호 적어줄 테니 한번 찾아가 볼래? 동대문에서 봉제공장을 하는 친척이 계시거든? 내가 연락해 놓을 테니 한번 찾아가 봐.”“감사합니다.”유나는 옷가게 주인이 건네 주는 쪽지를 조심스럽게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안녕히 계세요.”구십도 가깝게 인사를 한 유나는 밖으로 나왔다.…..“그래, 너 혹시 미싱 다룰 줄 아니?”“예, 조금 알아요. 손바느질도 많이 해봤고요.”“집은 어디냐? 집에서는 알고 있고?”“갈… 집이 없어요.”“흠. 그럼 가출 했다는 말이야? 그럼 곤란한데..”“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사장님 한 번만 도와 주세요.”유나가 울먹이며 말했다.“하 딱하긴 한데…”사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래, 그럼 다음주부터 나와 보거라”“혹시 오늘부터 해도 되나요
Last Updated: 2026-08-06
Chapter: 31화 사랑을 담다.계절이 한 바퀴 돌고, 또 돌았다.동산의 강아지풀은 여전히 바람에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봉분의 흙은 이제 단단히 굳어 있었다. 비가 내려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그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영수는 흐트러져 자란 풀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가려 냈다.귀여운 여자 아이가 짧은 다리로 마당을 토끼처럼 뛰어다녔다.“어머니!”영수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나으리랑 마님을 어쩜 반반씩 닮았는지요”영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몇 해가 더 흘렀다.아이는 글자를 배운다. “하늘 천, 따 지…”서툰 손으로 붓을 잡는다.영수가 묻는다.“이름이 무엇이냐.”아이가 또박또박 답한다.“화진.”영수는 잠시 멈췄다.밤이면 아이 팔에 감아 둔 한이 사 왔던 그 낡은 비단 손수건을 꺼내 보았다. 이제 수놓았던 글씨도 바래서 옅어졌다. 영수는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곱게 접어 함에 다시 넣었다.영수와 화진은 손을 잡고 장터에 내려갔다.누군가 속삭였다.“저 아이가 그 집 딸이라지?”영수는 들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 손을 더 단단히 잡고 속으로 다짐했다.“이제는 내가 네 이름을 지킬 것이다.”멀리서 병판의 가마가 다가오다가 가마가 잠시 멈추었다.장막이 살짝 들리며 시선이 마주쳤다.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수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내 가마가 천천히 움직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영수와 화진은 한이 묻힌 동산에 함께 올랐다. 화진이 꽃 한 송이를 봉분에 조심스럽게 놓아 두었다. 영수는 뒤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어머니, 제 이름은 무슨 뜻입니까.”“빛날 화(華), 보배 진(珍). 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란다.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할 이름이지.”“어머니, 제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네 아버지는…..”영수는 잠시 목이 메였다.“세상에서 이 어미만을 연모하신 분이었다.네가 태어나던 날… 그분이 마지막으로 웃으셨단다.”바람이 두사람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화진
Last Updated: 2026-07-04
Chapter: 30화 남겨진 이름“마님 승철이옵니다.”“그래 승철아, 알아낸 것이 있느냐?”“예, 마부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이사한 지 한 석달 되었다 하옵니다. 아마 마부가 밀반출한 화약을 싣고 떠난 직후인 듯 하옵니다.”“그렇구나. 그래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갔다더냐?”“그건 이웃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갔다 하옵니다. 하온데…”영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마님… 화약 인계를 맡았던 군관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며칠 전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합니다.”“화약이 사라졌는데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이냐.”“오히려 공을 세웠다 하더이다. 변방 화약 유통 체계를 정비했다는 명목이라 합니다.”“그래 승철아 네가 이번에도 크게 수고를 했구나. 계속 사라진 마부 주변을 잘 감시하거라. 분명히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예 마님.”‘분명 화약을 내주고 승진한 사람은 필시 뭔가가 있을 것이야. 반드시 알아내야 겠다!’영수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병조좌랑! 자제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지?”“아닙니다 대감!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그래 술 한잔 하세나. 자 받게”“예, 대감!”“마지막 뒤처리까지 잘 부탁하네 흔적이 남으면 나중에 귀찮아 질걸세. 그날 기록은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예 대감, 명심하겠사옵니다.”“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참으로 기쁘이. 자. 한 잔 더 받게”병조판서의 집에서 나온 병조좌랑은 골목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수였다.“아이고 깜짝이냐 뭐냐! 이런.”“나으리, 어디를 다녀 오시는지요?”“넌 누구냐? 네따위가 뭐길래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게냐? 썩 물러나라.”“나으리, 제가 병판대감 댁에서 나으리가 나오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사옵니다. 이번에 승진하셨다지요?”“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냐?”다소 겁에 질린 듯한 좌랑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저는 지난 화약 밀
Last Updated: 2026-06-20
Chapter: 29화 꽃샘 바람이 지난 뒤봉분에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붉은 채로 있었다.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열어라. 관에서 나왔다.”영수는 아이를 안은 채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섰다.문이 열리자, 푸른 도포를 입은 군관 둘과 아전 하나가 서 있었다.“이 집에 거하는 한수의 처가 누구냐.”“접니다.”영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전이 서책을 펼쳤다.“한수는 국경 인근에서 불온한 물건을 나른 혐의가 있다.죽었다 하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가산과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최나인이 분개했다.“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무슨 물건이라 하셨습니까.”군관이 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관의 화약이다.”아이를 안은 영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증좌가 있습니까?”잠시 공기가 멈췄다.아전이 눈을 치켜올렸다.“지금 따지는 것이냐.”“따지는 것이 아닙니다.”영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억울한 자의 집을 뒤지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터.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이미 눈을 감은 자에게 죄를 더 씌우는 것이 관의 도리입니까.”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조심하라.”“저는 조심하고 있습니다.”영수는 아이를 고쳐 안았다.“호구를 보시려거든 보십시오.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역적으로 꾸미려 하신다면… 그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군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연산의 피.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집 안을 훑던 아전이 낮게 속삭였다.“이 아이도 기록에 올려야겠군.”그 순간, 영수의 눈이 달라졌다.슬픔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아이의 이름은 제 입으로 올릴 것입니다.”조용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군관은 한참을 바라보다 서책을 덮었다.“오늘은 기록만 하겠다. 그러나 다시 부를 것이다.”문이 닫혔다.잠시 후, 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영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
Last Updated: 2026-06-03
Chapter: 28화 꽃샘바람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Last Updated: 2026-06-03
Chapter: 27화 돌아갈 수 없는 강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Last Updated: 2026-05-30
Chapter: 26화 죄인이 된 밤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Last Updated: 2026-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