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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첫번 째 칼날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15 22:05:35

그렇게 또 다섯해가 흘렀다. 영수는 이제 어엿한 아씨의 모습으로 자라고 있었다. 최나인이 바느질할 때 이제 같이 동무도 되어 주고 틈틈히 서책도 근실히 읽으며 영수는 몸과 정신이 모두 성장하고 있었다. 최나인이 양견을 손으로 주무르는 모습을 보고 영수가 말했다.

“유모 어깨아파? 내가 주물러 줄까?”

“아씨 아니에요. 괜찮아요.”

손사레를 치면서도 유모는 이제 자신도 예전 같은 힘과 패기가 없다는 것이 서서히 느껴졌다.

“아니야 유모 내가 주물러 줄께. 오늘 장에 옷감을 맡기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뒷뜰에 누군가 인기척이 있었어. 내가 들어오니까 바람처럼 사라지던데 유모는 혹시 못느꼈어?”

“글쎄요. 전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저희 둘이 살기에 이곳은 많이 외지지요? 다음에 내금위장 나으리가 오시면 한 번 여쭤 볼까요?”

.........................

"종길아, 어찌 되었느냐?"

“나으리. 신이 쭉 살펴본즉, 사십이 넘은 듯한 아낙 하나와 열다섯 안팎으로 보이는 소녀 하나가 외진 초가에서 몸을 의탁하고 있었사옵니다. 마을 사람들과 왕래도 거의 없어 보이는데다 몸을 아주 낮추고 조심하고 있사옵니다. 시기로 보건데 병인년 이후 자취를 감춘 연산군의 여식과 그를 모시던 궁인이 분명하옵니다.”

“그래 과연 내 짐작이 그르지 않았구나. 이제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너는 군사 서넛만 거느리고 움직이거라. 소란을 일으키지 않고 은밀히 말이다. 달 안에 끝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예 나으리, 확실하게 처리하겠사옵니다.”

“비록 여인의 몸이라고하나, 장성하여 장부와 같은 나이가 되면 전하의 성심을 어지럽힐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의 조선은 연산의 그늘과 모든 잔재에서 벗어나야 태평성대를 이를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임을 새기고 온마음을 다해 행하도록 하라.”

“신, 골수에 새겨두겠사옵니다. 염려 놓으소서.”

조광조의 입가에 머금은 엷은 미소가 타고 있는 양초의 불빛에 반사되고 있었다.

………………………………………………………………

최나인은 궁에서 까다로운 상궁들과 옹주, 공주의 옷을 담당하는 침방나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만든 적삼이나 민저고리는 장에서 금방 동이 나기 일쑤였다.

“이보시게, 자네가 만드는 옷들은 오전이면 금방 다 팔리는 바람에 오후에 오는 손님은 허탕치기 일쑤네. 옷을 좀 더 만들어 줄 수는 없겠는가? 내 적삼 한벌 당 한닢, 민저고리 한벌 당 두닢을 더 쳐주겠네.”

장에서 제법 큰 규모의 포목전의 대주(大主)가 최나인에게 나긋하게 말했다.

“행수어른.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헌데, 제가 옷을 더 많이 만들 상황이 못되어서요. 제가 살림도 다 도맡아 하고 땔감도 해야 하고 할일이 많아 옷을 만드는 일에만 전념할 시간이 없습니다. 옷을 더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습니다.”

 최나인이 미안해 하며 대주(大主)에게 대답했다.

“딸아이가 있지 않은가? 아이에게 잔심부름을 좀 시켜 가며 하면 좀 더 겨를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대주가 영수를 보며 못내 아쉬운 듯 말을 이었다.

“어르신, 이 아이는……”

최나인은 영수와 대주를 번갈아 바라보다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이 길이지다 상황이 더 난처해 질까봐 불안했다. 

“어르신, 대신 다음 번엔 제가 민저고리에 동정을 빳빳하게 달아 오겠습니다. 아마 이문을 좀 더 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옷을 더 만들어 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울 듯 해요.”

최나인은 이제 대주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얼른 포목전을 나서려고 영수의 손을 잡았다. 그때였다.

“허허.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잠깐만 기다리시게.”

포목전 대주가 안에 들어가서 자줏빛 영롱한 옷감을 가지고 나왔다.

“자. 비단 한필이네. 다음 번 올 때 적삼을 만들지 말고 대신 이 비단으로 치마를 한 번 만들어 주게. 내 사례는 닷냥을 주겠네.”

“치마를요?”

“그렇네. 내 자네 솜씨가 뛰어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네. 그럼 조심히 가게.”

포목전 주인은 인사를 하자마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유모, 색깔이 정말 곱다. 그치?”

영수가 최나인 팔에 살포시 안긴 비단을 보면서 감탄하며 말했다.

“예? 예”

최나인은 조금 얼떨떨한 마음으로 영수의 손을 잡고 포목전을 나왔다.

“아씨, 우리 집에 가는 길에 강정이랑 엿 좀 사가지고 갈까요?”

유모와 영수는 마치 마음이 통한 동무처럼 서로를 보며 활짝 웃었다.

손에 옷감과 장에서 산 물건 몇가지들을 들고 영수와 최나인은 집으로 가는 외골목에 접어 들었다. 다리를 건너고 느티나무를 지나면 집까지 일각이 채 안되는 거리였다. 약간의 오르막이고 집이 없어 으슥하긴 했으나 바람에 산들거리는 동산의 억새풀을 보며 최나인과 영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아씨, 아까 먹은 시루떡은 정말 고소하고 강정도 참 달콤했지요?”

“맞아 유모, 정말 맛있었어.”

그때였다.

“당장 무릎을 꿇거라”

‘누.. 누-구 십니까? 어찌 이러십니까?”

최나인이 당황하며 말했다.

“알 필요 없다. 그저 네 부모를 원망하거라. 잘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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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28화 꽃샘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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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26화 죄인이 된 밤

    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4화 연등 아래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3화 심장에 꽃씨가 내려 앉다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2화 그날, 이름 하나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

  • 폭군의 딸, 사랑을 담다.    11화 마지막 충성

    정적을 가르는 것은 승덕 어멈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불이야! 안부엌에 불이 났다!"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인시의 끝자락에 모두들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안채 뒤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둔 마른 짚단에 불씨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부뚜막을 타고 올라와 나무 기둥을 핥기 시작했다. 승덕어멈은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당황해 멈춰 선 종들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호통을 쳤다."멍하니 서서 무엇들 하시오! 어서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오시오! 어서!"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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