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살..살려주십시오. 가진 거 전부 드리겠습니다.”
영수와 최나인은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우린 돈따위에는 관심없다. 너희 목숨만 가져가면 된다.”
아직 해가 넘어가기 전이라 햇빛에 반사되는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가르려는 찰나, 화살이 복면한 남자의 칼을 쥔 오른 손 어깨에 박혔다.
‘윽’
순식간에 두 명이 활을 맞고 쓰러졌다. 그 순간을 틈타 최나인과 영수는 옆에 억새풀로 덮인 들판으로 몸을 던졌다. 돌에 부딪히며 몇번이나 굴렀지만 정신만은 놓치지 않았다. 다행히도 비탈의 경사가 그리 심하지 않아 둘 다 순식간에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등성이 위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숨은 차오르고 넓적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자객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위로 뛰었다. 다행히 자객들도 부상을 입었는지 그들을 추격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최나인과 영수는 자신들의 초가집 지붕이 이내 보이자 그제서야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낼 수 있었다.
“애기씨 마마, 괜찮으십니까? 다친데는 없으신지요?”
내금위장이 먼저 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부를 살피려 오는 길에 두 분이 보여서 인기척을 하려는 찰나, 무장한 자객 두어 명이 보여 급히 몸을 숨기고 미행했습니다. 정말 큰일이 아니어 다행입니다.”
“나으리 아니셨으면 저희 둘 오늘 저승길로 갈 뻔 했습니다.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최나인과 영수는 내금위장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아니오. 애기씨 마마의 옥체를 잘 보존할 수 있어 정말 다행이오. 전하께서도 잘 살피라 명하셨기에 유의하고 있던 중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오. 조정에 마마와 자네가 살아 있는 것을 눈치채고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있소. 극도로 몸조심 해야 할 것이오.”
“그게 누굽니까?”
“지금은 밝히기 곤란하오.”
상처는 곧 아물었다. 큰 부상이 아닌 게 다행이었으나 영수는 자객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네 부모를 원망하거라.’
영수의 기억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없이 자상하고 자신을 품어 주던 분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부모와 자신 모두 운명이 바뀌게 되었으나 따뜻했던 부모님의 기억까지 일부러 지워내고 싶지는 않았다.부모 때문에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영수는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왔다. 이제 꿈에서나 아른한 아바마마와 어머니. 그리고 유모를 어미 삼아 살아온지 십여년, 영수는 잠이 오지 않았다.“아씨 안자요? 상처가 아직도 쓰려요?”
“응 상처는 이제 괜찮은데 잠이 안오네. 유모, 그 자객들은 우리를 아는 사람일까?”
“글쎄요. 아씨, 아무래도 이곳은 안전하지 않을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 우선 내일은 마을에 내려가서 상처에 바를 환약을 구해봐요.그리고 몸보신 할 토종닭이도 한 마리 사야 겠어요. 다음 번 내금위장 나으리가 오시면 어찌 할지 의논해 보아요.”
영수는 그날 밤 꿈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은빛 비녀, 길고 또렷한 눈매, 비단 치마, 영수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살아남아라!’
“어마마마! 어디가세요? 어마마마!”
영수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영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오랫동안의 그리움과 서글픔이 눈물에 담겨 있었다.
“아씨, 무슨 일이에요? 악몽을 꿨어요?”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헛꿈인거 같아.”
“조금만 더 눈을 붙여 놔야 내일 마을에 내려가서 일을 볼 수 있어요.”
“응 유모 그럴게”
지난 십 여년 간 꿈속에서라도 굳이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난 꿈자리에 나타난 것이 영수는 반가움보다는 낯설음이었다. 어머니를 보고 싶다는 천륜의 감정보다 이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이성적 생각이 조금 앞섰다.
지난번 장에서의 일이었다.
“새 임금이 들어서고 정말 태평성대구먼요! 장에 사람이 북적 대니 활기차고 신이 나는 구먼요!”
노리개 장수가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그러게 말이네. 지난 연산군이 아직도 임금이었으면 어쩔뻔했나. 나라가 완전히 거덜이 났을걸세.”
노리개를 이리 저리 고르고 있던 선비 차림의 남자가 맞장구를 쳤다.
“아무렴요. 연산군은 맨날 계집질이나 하고 술에 무희에 나랏일은 하나도 돌보지 않았더랍니다. 그리고 연산군을 홀리던 그 천하의 장녹수는 어떻고요. 정말 하늘도 다 알아 보셔서 다행입니다. 그들을 빨리 데려갔으니 말이죠.”
“유모, 우리 다음에 옵세.”
“네 아씨”
영수의 눈치를 살피던 촤나인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부모에게 변고가 있어 궁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급박했던 기억 외에 영수는 사리를 분별하기에는 그당시 너무 어렸다. 이제 영수는 자신이 왜 궁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최나인이 부모에 대해서 함구하도록 신신당부한 이유를 깨닫을 나이가 되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보고 싶사옵니다. 부디 하늘에서 천년만년 해로(偕老)하시고 제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봐주시옵소서’
영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가 왜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는지도 이제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 때 궁에서 타죽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이 살아난 것이 분명 하늘의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영수는 마음 속으로 부모에게 큰 절을 올렸다. 자신이 열심히 사는 것이 오히려 나라에 큰 죄를 지은 부모를 속죄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다시금 힘이 솟았다.
영수가 어머니 장녹수를 꿈에서 재회한 다음날, 영수와 유모는 자객의 공격을 피해 달아나다 입은 상처에 바를 환약과 몸보신 할 토종닭을 사려고 장에 내려갔다.
“살이 잘 오른 놈으로다가 한 마리만 주세요.”
“아. 미안한데 이것들은 팔 게 아니고 우리가 집에 가서 잡아먹을 거에요.”
닭주인이 영수와 촤니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래요? 할 수 없죠.”
영수와 촤나인이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영수에 귀에 스치듯 닭주인의 말이 들렸다.
“저 볼에 상처 난 여자 아이가 연산군 딸이라네. 시장에 소문이 다 퍼졌어.”
“참말이가?”
“맞당께. 지난 병인년 변고 때 연산군과 장녹수 사이 태어난 어린 옹주와 궁녀 하나가 사라졌다고 하던데. 저 위 초가집에 남편 없는 여자랑 어린 여자 아이 둘이 살고 있다지 않는가. 게다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데.”
"그럼 저들이 바로?"
"그렇다네. 저들이 바로 연산의 여식과 사라진 궁녀인게 확실하구먼"
최나인은 가슴이 바닷속으로 꺼지듯, 철렁 내려 앉았다. 그제서야 영수와 최나인은 그날 따라 장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을 힐끗거리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얼굴의 상처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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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헌 나리 정말 송구하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달이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대사헌 조광조의 사랑채 안에 종길이 얼굴을 땅에 대며 말했다.
“참으로 실망이로구나. 내 그리도 실수하지 말라 일렀건만.”
희미한 등잔불에 비친 조광조의 눈매는 매섭기 그지 없었다.
“네 대감 정말 송구하옵니다. 갑자기 시야 밖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바람에….”
“그래 누구 소행 같으냐?”
“아무래도 내금위 쪽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임금이 움직이는 것 같사옵니다.”
“음. 전하께서? 그럼 정말 더 좋지 않은 징조로구나.”
조광조가 서안(書案)을 손가락으로 두 세번 두드렸다.
“종길아, 이번에는 소란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이틀이다. 흔적도 없이 처리하거라.”
“예! 명심 또 명심하겠사옵니다.”
“마님 승철이옵니다.”“그래 승철아, 알아낸 것이 있느냐?”“예, 마부의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습니다. 이웃의 말로는 이사한 지 한 석달 되었다 하옵니다. 아마 마부가 밀반출한 화약을 싣고 떠난 직후인 듯 하옵니다.”“그렇구나. 그래 혹시 어디로 이사를 갔다더냐?”“그건 이웃도 모른다고 하옵니다. 갑자기 소문도 없이 이사를 갔다 하옵니다. 하온데…”영수는 귀를 쫑긋 세웠다.“마님… 화약 인계를 맡았던 군관이 있었습니다. 그 자가 며칠 전 병조 좌랑으로 승진했다 합니다.”“화약이 사라졌는데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말이냐.”“오히려 공을 세웠다 하더이다. 변방 화약 유통 체계를 정비했다는 명목이라 합니다.”“그래 승철아 네가 이번에도 크게 수고를 했구나. 계속 사라진 마부 주변을 잘 감시하거라. 분명히 단서가 더 있을 것이다.”“예 마님.”‘분명 화약을 내주고 승진한 사람은 필시 뭔가가 있을 것이야. 반드시 알아내야 겠다!’영수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렸다.………………………..“병조좌랑! 자제가 이번에 큰 공을 세웠다지?”“아닙니다 대감! 이렇게 불러 주시니 감읍할 따름이옵니다.”“그래 술 한잔 하세나. 자 받게”“예, 대감!”“마지막 뒤처리까지 잘 부탁하네 흔적이 남으면 나중에 귀찮아 질걸세. 그날 기록은 남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예 대감, 명심하겠사옵니다.”“자네가 내 사람이 되어 참으로 기쁘이. 자. 한 잔 더 받게”병조판서의 집에서 나온 병조좌랑은 골목에서 쓰개치마를 입고 갑자기 나타난 여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영수였다.“아이고 깜짝이냐 뭐냐! 이런.”“나으리, 어디를 다녀 오시는지요?”“넌 누구냐? 네따위가 뭐길래 어디서 왔는지 묻는 게냐? 썩 물러나라.”“나으리, 제가 병판대감 댁에서 나으리가 나오는 걸 이 두 눈으로 똑바로 보았사옵니다. 이번에 승진하셨다지요?”“넌 도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내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냐?”다소 겁에 질린 듯한 좌랑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저는 지난 화약 밀
봉분에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아 붉은 채로 있었다.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칠게 울렸다.“열어라. 관에서 나왔다.”영수는 아이를 안은 채 문 앞으로 걸어 나갔다. 최나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따라 나섰다.문이 열리자, 푸른 도포를 입은 군관 둘과 아전 하나가 서 있었다.“이 집에 거하는 한수의 처가 누구냐.”“접니다.”영수의 목소리는 담담했다.아전이 서책을 펼쳤다.“한수는 국경 인근에서 불온한 물건을 나른 혐의가 있다.죽었다 하나, 사실 여부를 밝히기 위해 가산과 호구를 조사할 것이다.”최나인이 분개했다.“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영수가 조용히 손을 들어 막았다.“무슨 물건이라 하셨습니까.”군관이 영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관의 화약이다.”아이를 안은 영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증좌가 있습니까?”잠시 공기가 멈췄다.아전이 눈을 치켜올렸다.“지금 따지는 것이냐.”“따지는 것이 아닙니다.”영수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억울한 자의 집을 뒤지려면, 그에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할 터.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었습니다.이미 눈을 감은 자에게 죄를 더 씌우는 것이 관의 도리입니까.”군관의 눈이 가늘어졌다.“말조심하라.”“저는 조심하고 있습니다.”영수는 아이를 고쳐 안았다.“호구를 보시려거든 보십시오.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역적으로 꾸미려 하신다면… 그 일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그 말에 군관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연산의 피.그 사실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집 안을 훑던 아전이 낮게 속삭였다.“이 아이도 기록에 올려야겠군.”그 순간, 영수의 눈이 달라졌다.슬픔은 사라지고,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아이의 이름은 제 입으로 올릴 것입니다.”조용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군관은 한참을 바라보다 서책을 덮었다.“오늘은 기록만 하겠다. 그러나 다시 부를 것이다.”문이 닫혔다.잠시 후, 최나인이 속삭였다.“마님… 어찌 그리 담담하십니까.”영수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
대청 마루에는 밤마다 서늘한 바람이 드나들었다. 한은 멍하니 초점을 잃은 채 앉아 있었다. 한은 말이 없어졌고 점점 야위어 갔다. 최나인은 한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했고 영수는 소리를 내지 못한 채 가슴으로 울었다.“부인”“예, 서방님”“우리 아가를 이리 주시오. 한 번 안고 싶소.”“예”이제 제법 무거워 진 아이를 한의 품에 안겼다.“이 아비를 용서해 다오.”아이를 안고서 한참을 가만히 있자 아이는 답답한지 몸을 비틀었다. 한은 아이를 다시 영수에게 건네 주었다“서방님…?”다음 날 아침 영수가 그의 손을 흔들었다.“서방님, 제발… 눈 좀 떠 보세요.”대답은 없었다.눈은 반쯤 열린 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는 어미 옆에서 무슨 일인지 모른채 몸을 좌우로 한들고 있었다.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한의 손을 가슴에 끌어안았다.그 손이,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 영수는 아이를 안고 동산에 올랐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던 언덕이었다.혼인을 약조하던 날 강아지풀이 바람에 너풀 거리던 그곳, 길을 떠나던 날,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던 그곳, 영수에게는 추억이 많은 그 동산을 한을 묻고 난 뒤 다시 올랐다. 차가운 꽃샘바람이 가슴을 꿰뚫었다. 그렇게 영수는 한을 가슴에 묻었다.‘아가야 아버지는 널 정말 사랑했단다. 그리고 하늘에서도 늘 너를 지켜 주실 거야.’영수는 한을 목놓아 불렀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 숲은 빽빽하게 울창하여 낮인데도 마치 밤처럼 느껴졌다. 새 지저귐이 나무 사이에 울려 퍼져 메아리로 갈라졌다.“이제 이 숲만 빠져나가면 마지막 성문이 보일게요. 거기 지나서 강이 보이면 거기가 바로 국경이오. 거기까지만 가면 되오.”본진 마차를 모는 마부가 말고삐를 바짝 당겨 쥐었다. 한이 뒤를 바짝 따랐다. 한 식경쯤지나니 빽빽했던 숲이 조금씩 헐거워 지며 빛이 드러났다. 햇빛을 받으니 짐을 덮은 천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휘익’흑마를 탄 십여 명의 무리들이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한이 활을 쏘기엔 이미 너무 가까웠다. 한은 검을 꺼냈다. 검을 들고 경계하며 본진 마차로 접근하는 순간, 마부가 별안간 단도로 한의 옆구리를 찔렀다.‘욱’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한은 발로 마부의 정강이를 걷어 찼다.‘악’마부는 엉덩방아를 찧자마자 얼른 일어나더니 앞쪽으로 물러섰다.“살아서 돌아갈 수 있으면 돌아가 보아라.”“처음부터 속일 속셈이었던 게요?”한이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어차피 돌아가 봐야 너는 변명조차 못할 신세 아니더냐. 짐승 밥이 되지 않길 빈다. 놓아주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왜 나를 끌어 들인 것이오?”한이 물었다.“여기까지 무사히 오는 데 보호해 줄 호위무사가 필요했다. 이제 네 역할은 끝났으니 당장 꺼져라.”한은 분노가 들끓었으나 더 이상의 싸움은 무의미했다. 마부와 숲에서 나타난 검은 무리들이 마차 두 대를 자신들이 데려 온 말에 연결시켜 유유히 사라지는 모습을 한은 분노를 삼키며 뒤에서 지켜 볼 수 밖에 없었다..”서방님! 얼굴이 대체… 서방님”영수가 한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몸이 얼었다.‘퍽’영수를 보자마자 한이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얼른 안으로 모셔라 얼른!”최나인이 옆에 같이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승철이에게 소리쳤다.한은 이틀을 사경을 해맸다. ‘악 으악’식은땀을 흘리는 한은 계속 허공에 헛소리를 질러 댔다.“서방님, 정신 차리세요! 서방님!”
그날 이후 조정에서는 그 누구도 영수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명분을 앞세워 권력을 탐하고 숙적을 제거하는 데 능숙한 신하들은 영수가 그들의 먹이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알아 차렸다. 조정에서 영수의 이름은 이미 의미 없는 존재 였으나 밖에서는 달랐다. 밖의 여론은 더 느리고 집요했다. 영수가 연산의 자식이며 게다가 서자와 비밀 혼인을 한 사실이 연기처럼 서서히 퍼져 나갔다.“이보게 한수 나 좀 잠깐 보시게나.”행수가 창고에서 짐관리를 하는 한수를 불렀다.“예 행수 어른. 무슨 일이시온지요?”“자네 우리 가게에서 일한 게 얼마나 되었지?”“이제 일년 넘은 것 같사옵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음. 그게 흠흠.”행수가 뜸을 들였다.“사실 우리 숙부가 당신의 아들을 우리 상단의 호위 무사로 좀 써달라 하시네. 물론 그 아이보다 자네가 뛰어나다는 걸 잘 알지. 자네를 계속 두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닐세. 허나 나 세상이라는 게…. 혼자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예”“이번 달 말까지만 일해 주면 될걸세. 미안하게 되었네 자 그리고 이건 좀 챙겨 두게 내 자네 처와 자네를 생각해서 좀 더 쳐줬네.”동전 꾸러미를 한에게 거의 떠넘기듯 건네 준 행수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한수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너무 괘념치 마시어요. 나으리”이 소식을 들은 최나인이 한수에게 부드럽게 위로했다.“아마도 나으리와 우리 마님과의 혼인, 그리고 우리 마님의 출생 때문에 행수 어른도 부담이 되셨나 봅니다.”“서방님, 제가 서방님 만나기 전에 유모랑 밭도 갈고 옷도 만들고 해서 생계를 유지 했습니다. 그때 처럼 살면 됩니다. 걱정마세요. 서방님.”“….고맙소 부인”영수의 양손을 다정하게 잡은 한수의 표정이 내내 어두웠다.………………… 그날 밤, 한수는 집을 나섰다.최나인과 영수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숨결이 고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문을 닫았다.골목 끝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한수.”달빛을 등진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편전 안에서 1시간 째 백인걸은 상소를 올린 후 무릎을 꿇고 움직이지 않았다. 편전 밖에서 수십명의 유생들이 영수와 한을 벌하라고 되풀이하고 있었다. 백인걸이 입을 열었다.“전하, 왕실 가문이 서자와 결혼하는 것은 국법에 어긋나옵니다. 게다가 폐위된 연산의 자식이옵니다. 그들을 벌하시어 정도를 세우셔야 합니다.”. 백인걸이 입을 열었다. “처벌이 두려워 숨어 살다가 비밀 혼인까지 하였습니다. 본인들이 떳떳하다면 비밀리에 혼인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혼인이 불가함을 알면서도 끝내 혼인을 한 것입니다. 국법과 임금을 능멸한 것을 두고 보는 것은 의가 아니옵니다. 그들을 처벌해야 합니다.”병조판서가 거들며 왕을 압박했다.백인걸은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무릎이 저려 왔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전하, 연산의 여식은 죄인의 자식입니다. 죄를 지은 이는 이미 죽었으니 그 핏줄은 무고하다고 하신다면, 이는 군왕의 도를 사사로운 인정으로 허무는 것이옵니다. 부자(父子)란 본디 한 몸이라 하였사온데, 어찌 한쪽의 죄만 베어내고 다른 한쪽은 깨끗하다 할 수 있겠사옵니까?”“그렇사옵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부모의 공으로 자식이 은전을 입는 일 또한 있어서는 아니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조정은 늘 공과 죄를 함께 물어 가문을 세우고 또 벌하여 왔사옵니다. 이 일을 전하께서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시면 태조께서 이 나라 조선의 기틀을 세우고 일백년이 넘도록 유지해온 근본을 무너뜨리는 일이옵니다. 부디 성군의 도에서 벗어나지 마소서.”중종이 어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그대들은 들으라. 영수는 이미 충분히 고통을 겪었다. 지난 세월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 들며 죄에 대한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 죄는 사람에게 있다 하였고 이미 그 죄를 지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죽은 죄를 살려내어 살아 있는 자의 목을 누르는 것이 성리의 도란 말이냐?”신하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벌을 치른 자에게 죄를 되
그날 밤 영수는 꿈을 꾸었다.자신이 냇가를 건너려 하는 데 불어난 물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을 디디는 순간 미끄러져 물살에 떠내려 갈 것 같았다. 산나물을 가득 뜯은 광주리를 양손에 붙들고 어떻게 해서든 물을 건너 보려 했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돌아갈 길도 없었고 거기서 밤을 지샐 수도 없었다.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만 동동 구르던 찰나, 한 사내가 뒤에서 오더니 말을 건넸다.‘업히시오. 얼른 업히시오. 내가 저쪽으로 낭자를 데려다 주겠소.’익숙한 목소리와 풍채, 그리고 체취, 그 사내는 한이었다. 영수는 놀라
“유모 쇠스랑의 모가지 부분이 덜렁거려 아무래도 곧 탈이 날 거 같아. 내가 오늘 장에 내려가서 새것으로 사와야겠어.”“아씨. 저는 기옥이네 김매는 밭에 품앗이 해주러 가기로 되어 있는데 어쩌죠?”“응. 나 혼자 얼른 다녀 올 수 있어. 유모 이따 봐”영수는 엽전 몇닢을 귀주머니에 넣고 채비를 했다. 웬지 장에 가는 마음이 가볍고 설렜다. …… 영수가 장에 노리개에 잠시 한눈을 팔고 있었다.“낭자, ...영수 낭자?”영수가 사뭇 놀라 위를 올려다 보았다. 한도령이었다.“어. 도련님. 한 도련님 아니신지요?”그 이름이
악 아-악’지나가는 마차의 바퀴가 갑자기 빠져 굴러 왔다. 놀란 말이 앞발을 크게 치켜 들었다. 말 위의 사내가 다급하게 고삐를 채 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은 그대로 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사내가 고삐를 놓으며 몸을 날렸다. 영수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렀다. 먼지가 일고 숨이 서로 맞닿았다. 영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싼 채 영수가 몸을 서서히 일으킬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난전의 주인인 듯한 여자가 나와 소리 질렀다.“아이고 내 물건. 아이고.”말이 발버둥을 치다 가게의 좌판을 건드려 물
정적을 가르는 것은 승덕 어멈의 날카로운 비명이었다."불이야! 안부엌에 불이 났다!"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인시의 끝자락에 모두들 깜짝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왔다. 안채 뒤편에서 매캐한 연기가 솟구쳤다. 아궁이 근처에 쌓아둔 마른 짚단에 불씨가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불길은 부뚜막을 타고 올라와 나무 기둥을 핥기 시작했다. 승덕어멈은 두 손을 걷어 부치고, 당황해 멈춰 선 종들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며 호통을 쳤다."멍하니 서서 무엇들 하시오! 어서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길어 오시오! 어서!"그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