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안은 초왕부로 돌아오자마자 먼저 모친을 안전한 곳에 모셔두고, 직접 소막을 찾아갔다.“전하,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젠 저도 전하의 대업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때라 여깁니다. 황좌를 얻고자 하신다면, 우선 그 자리를 비워야 합니다. 지금 폐하께서 변경에 계시니, 제가 나서서 그 걸림돌을 치우겠습니다.”늘 유순하기만 하던 구도안이기에, 소막은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흥미로이 웃으며 물었다.“구 선생, 그 말은 곧… 폐하를 죽이겠단 뜻인가?”구도안은 냉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들었다.“폐하께서 참된 명군이 아니시라면, 폐하라 부를 이유가 없지요. 그런 자를 없앤다 하여,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미 전하 문하에 든 몸, 대의를 따르는 것이 당연하옵니다. 훗날 아무리 크신 은혜를 입는다 하여도, 오늘을 외면하고 어찌 감히 그 은혜를 받을 수 있겠사옵니까. 제게 이 기회를 주시길, 간절히 청하옵니다.”소막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좋다. 내 그대의 진심을 믿어보지. 허나, 그 약쟁이들이 두렵진 않느냐?”구도안은 잠시 침묵했으나, 곧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두렵지 않다면 거짓일 겁니다. 하지만 제 삶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옵니다. 다만 제게 걱정되는 이는 어머님뿐이니, 부디 돌아오기 전까지 안온히 지켜주시옵소서.”소막은 통쾌하게 웃었다.“그 말이야말로 인지상정이지. 염려 마라. 네가 설령 죽는다 해도, 내 친히 그대의 모친을 지극히 모실 것이니.”구도안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깊이 절을 올렸다.“감사하옵니다.”“가보거라. 나는 여기서 그대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겠노라.”구도안이 떠나자, 잠시 뒤 원탁이 등장했다. 두 사람은 스치듯 마주쳤고, 구도안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앞뜰에서 소막은 직접 일어나 원탁을 맞이했다.“원탁, 어서 들게.”원탁은 자리에 앉자마자 구도안 이야기를 꺼냈다. 소막은 구도안의 말과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했다.“그 사람을 정말 믿으시는
범려성.초왕 소막은 왕부에 편안히 몸을 뉘인 채 안락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왕부의 부인들과 첩들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자 몹시 기뻐하며 그를 에워싸고 울먹였다.아직 그들은 모두 초왕이 약쟁이와 한패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아니, 알 수가 없었다.그녀들은 초왕에게 하나같이 달려들며 하소연하기 시작하였다.“전하, 이 며칠 정말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 약쟁이들은 정말이지 너무 끔찍했어요!”“전하, 이 성 안에도 약쟁이들이 들끓어요. 저희는 죽기 살기로 대문을 지켜 간신히 막아냈어요. 이 범려성에선 더는 못 살겠어요!”소막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그들의 말을 끊었다.“됐어, 됐어! 그만 울거라! 내가 돌아왔으니 약쟁이 따위, 감히 들이닥치지 못할 것이다.”이윽고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왕부는 별일 없었지?”초왕비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전하, 모두 무사합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다들 마음이 놓입니다.”소막은 다시금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구도안은 어디 갔느냐?”그는 곧 황위를 차지할 계획이었고, 자신을 따를 인물을 등용해야 했다. 구도안이 눈치가 빠르다면 아낌없이 기용할 생각이었다.마침 사람을 찾으려던 참에, 구도안이 스스로 나타났다.“전하를 뵙습니다.”구도안은 초췌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반면 소막은 얼굴빛이 혈색 좋고 당당했으며, 난리통에서 돌아온 사람이라기엔 도무지 믿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구도안의 마음에 의심이 싹텄다.“전하, 이원서은 이미 약쟁이들에게 점령당했다고 들었습니다. 물린 자는 누구든 약쟁이가 된다던데… 전하께선 어찌하여 무사하신 겁니까?”진심 어린 물음에 소막은 아무 의심 없이 호탕하게 웃었다.“하하! 구 선생, 걱정 마라. 나는 끄떡없으니! 오늘 이 자리에 만난 김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다.”구도안은 곧장 예를 갖추었다.“신은 본래 전하의 사람입니다 무엇이든 물으시옵소서.”소막의 눈동자에 서늘한 기색이 스쳤다.“자네는 날 따라 저 황좌에 오를 뜻이 있는가?
동이 틀 무렵, 봉구안과 은칠은 무사히 밀실로 돌아왔다.소욱은 속이 타들어가듯 그녀를 기다렸고, 그 사이 소무는 한숨 푹 자고 깨어난 듯했다. 봉구안이 무사한 걸 확인한 뒤에야 그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왜 이렇게 늦었느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소욱은 그간 걱정했던 마음들을 입밖으로 쏟아내었다.봉구안은 허리춤의 물주머니를 풀었다. 이번 외출은 외부 상황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식수를 구해오는 것이 목적이었다. 사람은 물 없이는 살 수 없기에 그녀는 음식보다 식수를 우선적으로 탐색하였다.그녀가 가져온 물주머니 중 하나에는, 어젯밤 천막 안에서 몰래 챙긴 약이 담겨 있었다.소무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이제 이 약만 있으면 저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건가요?”그러나 봉구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약이 이 많은 인원을 감당하기엔 부족하고, 무엇보다 이 약은 매일 마셔야 효과가 있다지 않느냐.”소무는 곧장 제안을 내놨다. “그럼 사형께서 먼저 나가시는 게 맞죠!”그러나 소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봉구안과 함께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그럼에도 봉구안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먼저 나가겠습니다.”소무는 눈이 휘둥그레져 믿을 수 없다는 듯 봉구안을 쳐다보다가, 다시 소욱을 바라봤다.'부부란 본디 한 나무 아래서 나는 새라 하지 않던가. 위기 앞에서는 함께 날아야지…'소무는 그저 그들이 끝까지 함께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사형이 먼저 버림받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혼란스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던 중, 소욱은 아무 말도 없이 봉구안을 바라보며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만약 봉구안이 혼자 살겠다고 마음먹었다면 굳이 이곳으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터. 무엇보다, 그녀는 그를 목숨처럼 사랑하지 않는가.봉구안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이 많은 사람들이 계속 이곳에 갇혀 있는 건,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그녀는 한 호흡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게다가 북부
밤이 되자, 봉구안은 몰래 지하 밀실을 빠져나와 바깥 정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은칠은 황제의 분부를 마음에 새기며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봉구안을 지켜야 했다.하지만 막 밀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은칠은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소리에 근처에 있던 약쟁이 하나가 고개를 홱 돌렸다.은칠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려다, 소리를 내면 더 많은 약쟁이를 부를까 염려되어 망설였다. 그때, 봉구안이 은빛 바늘 하나를 날렸다.바늘은 약쟁이의 목덜미에 정확히 꽂혔고, 약쟁이는 마치 정지된 인형처럼 그 자리에 멈췄다.은칠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폐하께서는 분명 제가 마마를 지켜야 한다 하셨는데, 오히려 마마께서 절 지켜주셨습니다…’봉구안은 은칠을 탓하지 않았다. 이 약쟁이들은 움직임이 익숙하지 않으면 누구든 당황하기 마련이었다.그녀는 손짓으로 은칠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한 뒤, 주변을 더 살폈다.이상하게도 밤이 깊었는데도 근처는 조용했다. 약쟁이 몇 명만 어슬렁거릴 뿐, 역참 안팎에 인간의 흔적은 없었다. 혹시 이곳 수색을 포기한 것일까.봉구안은 방심하지 않고 지붕 위로 올라가 넓게 조망했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 달빛만이 희미한 빛을 주었다.‘이런 어둠 속에서 약쟁이들이 돌아다니는 건, 빛이 필요 없다는 뜻이겠지… 그럼, 먹는 건? 잠은 자는 걸까?’고민하던 그녀는 다음 목적지인 성문 쪽으로 몸을 날렸다.성문은 열려 있었다. 수비 병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그들도 약쟁이로 변한 게 틀림없었다.‘다른 변방 성들도… 괜찮을까.’성문이 함락된 것은 약쟁이들이 사방으로 도망쳐다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다른 변방 성들까지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컸다.그녀는 서태상이 자신의 서신을 받고 다른 성문들을 잘 잠궜는지 걱정스러웠다.한편, 지하 밀실 안.소욱은 전혀 잠들지 못한 채 몸을 뒤척였다. 봉구안도 걱정됐고, 도성의 백성들도 걱정됐다.옆에선 소무가 안심하라며 호언장담하더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그의 코고는 소
태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약쟁이라니? 변성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장공주의 심장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궁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변성에 약쟁이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변성을 순시하셨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돌아오지 않아 전조의 대신들 모두 발을 동동 구르며 인원을 급파하고 있다 합니다…”장공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정말이라면, 이는 나라가 뒤흔들릴 대형 참사였다.변성은 원래 북연에서 남제로 할양한 성이었고, 민심 또한 남제와 마음을 같이하지 않았다. 그곳 백성과 관료들이 남제 황제를 지켜줄 거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 이번 약쟁이 사태는 분명 북연 쪽에서 사전에 꾸민 음모일 터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친 그물에 황제가 걸려들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제 군이 쉽게 입성할 수 있을 리 없었다.장공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머릿속은 이미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임원표국과 서진의 일은 일단 뒤로 미루자 다짐하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황제와 황후를 무사히 데려오는 일이었다.“소기야?” 태후가 몇 번이나 그녀를 불렀다.정신을 되찾은 장공주가 고개를 돌렸다. “어마마마,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태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소기야, 변성은 남제와는 딴판인 곳이란다. 백성들도 우리를 싫어한다고 들었다. 너만은 절대 무모한 짓 하지 마라. 알겠느냐?”“황상을 구하겠다는 뜻은 대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너는 궁에 있는 게 낫다. 괜히 나서서 화를 입지 말고.”장공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궁을 나섰다.태후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근심에 잠겼다.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계 상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태후마마, 공주마마께서는 분별 있으신 분이십니다.”태후는 고개를 저었다. “소기는 평소 말이 험해 보여도 사실 누구보다 황사을 아낀다. 어릴 적부터 황상을 친동생처럼 여기며 돌봤지. 그땐 다른
“장군님, 최근 며칠 사이에 갑작스럽게 수많은 약쟁이들이 출현해, 여러 변성들이 순식간에 함락되었습니다!”척후의 보고에 맹건은 등골이 서늘해졌다.약쟁이 사건은 이미 종결된 줄로만 알았는데, 어떻게 다시 나타날 수 있는가? 설마 동산국이 개입한 것인가?“폐하와 황후 마마의 소식은 들은 바 없느냐?” 맹건은 즉시 척후에게 물었다.“폐하와 황후 마마께서는 현재 약쟁이들의 포위 속에 계십니다. 각 성문이 폐쇄되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장막 안에 모인 장수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게 쏟아졌다.“맹 장군, 군을 파견하여 폐하와 황후 마마를 구해야 합니다!”“장군, 폐하께서는 호위들이 지키고 계시니 무사히 탈출하셨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우리는 북방을 수비하는 자들로서, 국경을 사수하는 것이 본분입니다!”“그렇습니다, 장군. 약쟁이들의 확산 속도를 감안하면 머지않아 북방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우선 순찰 병력을 증강하고, 약쟁이를 발견하면 즉시 사살하라 명하셔야 합니다!”척후가 다시 나서서 경고했다.“장군, 이번에 나타난 약쟁이들은 과거와는 다릅니다. 그들에 물리기만 해도 독에 감염되어,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뛴다고 합니다.”장수들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이건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약쟁이 하나만이라도 진영에 침입하면, 그 피해는 가늠할 수 없게 됩니다!”맹건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전 병력에 하달하라. 진영을 철통같이 지키고, 망루를 증설하여 감시를 강화하라. 약쟁이 접근은 절대 허용치 말라!”“명 받들겠습니다, 장군!”이어 맹건은 장수들과 회의를 이어갔다.“대영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하지만 폐하와 황후 마마의 안위 또한 등한시할 수 없다. 모두 의견을 내보아라.”장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말이 엇갈렸다.“약쟁이들이 도시를 점령한 상황에서 무작정 돌입하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우선 내부 정보를 파악해야 합니다.”“하지만 폐하는 남제의 근간이십니다! 만에 하나라도 폐하께서 경각에 처하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