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대 위.소욱의 맞상대는 운산파 제자였다.그 눈빛엔 냉기가 서려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무언의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관중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외쳤다.“전진파의 그 고수야! 어제도 혼자서 전진파 승리를 이끌었다더라!”“맞아, 나도 싸워봤어! 가면만 썼을 뿐, 체격이 어마어마했지. 여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였어!”“은사성이 독을 써서 겨우 이긴 상대야.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도 계속 이겼을걸!”하지만 오늘 소욱에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눈 한 번 깜빡할 틈도 없이, 상대의 검을 튕겨낸 소욱은 곧장 배를 노려 발을 찼다.“푸억!”상대는 땅에 구르며 쓰러졌다.그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내가 졌단 말인가…”운산파 부장문이 벌떡 일어나,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무슨 짓을 한 거지… 단 한 합 만에 끝났다고?’그 이후로도 경기는 속속 이어졌다.하지만… 누가 올라와도, 결과는 같았다.소욱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했고, 폭풍처럼 매서웠다.불과 반 시진 만에 열 판을 내리 이겼다.심지어 피곤한 기색 조차 내비치지 않았다.부장문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이대로라면… 운산파가 패배하고 말 거야!’더는 전진파가 이기게 둘 수 없었다.저 여인을 지금 당장 끌어내려야 했다.운산파 부장문은 부랴부랴 제자들을 내세웠다.그러나 출전하는 자마다, 줄줄이 무대 위에서 나가떨어졌다.“전진파, 승!”심판의 외침이 또다시 울려 퍼지자, 운산파 측은 물론이고, 다른 문파들마저 할 말을 잃었다.“이게 말이 되나… 저 운산파 제자들이 당해내질 못하는군…”“벌써 열한 판째 연속으로 승리하고 있어. 전진파가 이 정도였어?”“차선아가 돌아온 이유, 이제야 알겠네. 저 고수 하나 믿고 온 거야.”“지금쯤 운산파 부장문,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겠지.”무대 위의 소욱은 검이면 검, 권이면 권. 허술한 틈 하나 없었다.이미 운산파 제자들의 버릇과 약점을 완전히 꿰뚫은 듯했다.이제 싸움은 더 이상 ‘승부’가 중요치 않았다.이 싸움은 소욱의
“운산파, 풍고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소욱은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며,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살한 기운을 느꼈다. 풍고는 술에 취한 듯 흐릿한 눈으로 소욱을 노려보았다.“여자군…”그 음흉한 말투에는 분명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풍고의 악명은 이미 다른 문파에도 퍼져 있었다. 수법이 음험하고 독해, 전진파의 제자조차도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했다. 하물며 이번은 그의 첫 시합이기도 했기에 체력 면에서도 절정이었다.그 모습을 본 벽력당 측 인사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이건 너무하잖소! 애초에 싸움이 되겠습니까!”운산파 부장문은 그저 태연하게 웃었다.“풍고도 우리 운산파의 정식 제자입니다. 어찌 출전하지 못하겠습니까?”벽력당 인사가 다시 차선아를 부추겼다.“차 부장문, 이걸 그냥 넘기시려는 것입니까? 운산파, 이건 명백한 갑질이 아닙니까?”다른 문파 사람들도 거들었다.“풍고가 손을 쓰면 죽든 다치든 뻔한 일입니다! 차 부장문, 정말 제자를 아끼신다면 지금이라도 막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무술 대회 하나로 또 사람이 죽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풍고는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소욱을 노려보았다.“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마음에 듭니다.”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미 겁먹고 물러섰을 상황이었다.하지만, 소욱이 누구인가?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수차례 친정했고, 봉구안과 함께 강호를 누비며 구중탑의 흉인, 천룡회 교주, 지하 투기장의 악인들까지 직접 상대해왔다.그런 자들에 비하면 풍고는 그야말로 하찮은 졸개에 불과했다.시합대 아래서 차선아가 걱정스레 소욱을 바라보다가 봉구안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멈출지 묻는 신호였다.봉구안은 소욱의 눈빛을 마주하고, 그 안에 담긴 의지를 읽어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차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전진파는 시합을 계속하겠습니다.”운산파 부장문이 비웃듯 중얼였다.“정말, 승부에 제자들의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여자군.”시합이
비무대회가 끝난 뒤, 각 문파는 남아 약쟁이 토벌 방안을 의논했다.한편, 봉구안과 소욱은 조용히 객잔으로 돌아왔다.가는 길에 소욱은 다시 본래 본인의 옷으로 갈아입었다.이번 비무대회를 위해 그가 감수한 고생이 적지 않았다.봉구안은 그의 수고를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어깨를 주물러주었다.“오늘 정말 대단하셨어요.”그 한마디에 소욱은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그는 팔을 뻗어 봉구안을 품 안으로 끌어안고, 그녀를 무릎 위에 앉혔다.“널 위해 애쓴 보람이 있구나. 자, 어떻게 보답해줄 것이냐?”봉구안은 그의 목을 감싸 안고, 살며시 얼굴을 가까이했다.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고개를 살짝 돌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오늘은 제가 직접 요리할게요. 맛있는 걸로 보답해드리죠.”소욱은 한 번도 그녀의 요리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하지만, 그녀의 요리 실력이 어떤지는… 동방세가 누구보다 잘 알 터였다.갑자기 소욱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굳이 그럴 필요 없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지금 나한테 필요한 게 무엇인지…”그의 눈빛은 뜨겁고, 의미는 명확했다.마침 강림의 객잔에는 아무도 없었고, 이 둘만의 시간이 허락된 상황이었다.봉구안이 대꾸할 틈도 없이, 소욱은 그녀를 안은 채 내실로 향했다.장막은 그의 발끝에 걷혀지고, 몇 벌의 옷가지가 문밖으로 던져졌다.방 안에서는 봉구안의 작고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열다섯 판이나 싸우고도 또 힘이 남아도십니까? 일단 뭐라도 먹고…”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내 그의 입맞춤에 막혔다.그 뒤로는, 오직 달뜬 숨결만이 조용한 방 안을 채웠다.……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두 사람은 마침내 전투를 멈췄다.봉구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소욱은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잡았다.“어디 가려는 것이냐?”어디선가 불안한 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봉구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말했잖아요. 오늘은 제가 요리하겠다고요.”그 말에 소욱은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아직도 요리할 기
열무신은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운산파에 잠입했을 당시엔, 별다른 수상한 움직임이 없었습니다.”“하지만 오늘, 구 장문으로 가장하고 있던 엄 장로가 정체불명의 밀서를 받았죠.”“그가 저에게 밀서를 맡기며, 이 일을 어찌할지 논의해 달라 전하더군요.”봉구안의 계획은 명확했다.밀서에 응해 약인 운송을 허락하는 척하며, 약쟁이들을 끌어들이는 것.가능하다면 사람과 물증을 함께 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다.하지만 약쟁이들은 극도로 조심스러운 집단이었다.물건을 가로채는 건 몰라도 실체를 붙잡는 건 쉽지 않다.더구나, 봉구안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비무대회가 끝나자마자 전진파가 조정과 협력해 약쟁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그런데 곧바로 운산파에 밀서가 도착했다는 건, 약쟁이들이 소식을 아주 빠르게 파악했다는 뜻이죠.”동방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 속도라면, 이미 강주 안에 내통자가 있다고 봐야 하오.”“아니면…”그는 말을 흐리며 봉구안을 바라봤고, 그녀는 곧장 받아 말했다.“아니면 이번 비무대회에 참가했던 자들 중, 이미 약쟁이들 인물이 끼어 있었을 수도 있겠죠.”순간, 주위의 공기가 묵직해졌다.섬뜩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다.봉구안은 소욱을 돌아보았다.그는 즉시 명을 내렸다.“진한길, 인원을 모두 소집해라.”“이번 대회 참가자 전원의 신원을 철저히 조사할 것이다.”“예, 폐하!”열무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저도 동행하겠습니다.”동방세 역시 발을 내디뎠다.“나도 빠질 수 없지.”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나자, 봉구안은 강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객잔은 자네에게 맡기겠소.”강림은 물을 들이켜다 혀끝을 쿡 찌르는 짠맛에 찡그렸다가, 이내 익숙한 웃음을 지었다.“여긴 내 집이오. 걱정 말고 다녀오시오.”적극적으로 나설 마음은 없는 듯, 그는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이번 수사는 백성의 불안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진행됐다.소욱은 관아
강주 관아는 황제의 명을 받자마자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조용히 무림 인사들에 대한 체포에 착수했다.봉 대인 역시 수행을 이끌고 나섰으나, 도리어 무림인들에게 제압당해 부상을 입고 말았다.때마침 그 길을 지나던 봉구안이 나서서 사태를 정리했다.그녀와 황제를 마주친 봉 대인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폐하, 황후마마… 신하로서 면목이 없습니다.”“강주에 이토록 많은 일이 벌어졌건만, 모두 신의 직무유기 탓입니다…”하지만 봉구안은 차갑게 그를 바라보다 말을 잘랐다.“이제 그만하시죠.”“지금은 관아의 일부터 처리해야 할 때입니다. 수행들을 데리고 어서 돌아가십시오.”“괜히 발만 더 묶지 말고.”목소리는 냉정했고, 눈길은 무심했다.딸이 무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매몰찰 줄은 몰랐다.그래도 자신은 그녀의 아버지였다.진심으로 돕고 싶었고, 노력도 했건만… 왜 그 마음은 전혀 닿지 않는 걸까.그때, 소욱이 낮게 한마디를 던졌다.“황후가 돌아가라 했다.”“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예, 폐하… 다만, 두 분께서 강주까지 오셨으니, 외진 객잔보다 사마부에 머무르시는 게…”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말을 돌려 떠나버렸다.그 자리에 남겨진 봉 대인은 이를 악물고 속으로 분을 삭였다.‘이런 딸을 낳아봤자 무슨 소용이람…’‘도움을 바라진 않았지만,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니냐!’그날 밤, 조정은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속아서 끌려온 자도 있었고 정체가 들켜 도망치다 잡힌 자도 있었으며 전진파처럼 자진해서 관아로 향한 경우도 있었다.관아는 이들의 신원을 하나하나 철저히 확인했다.조사 과정은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날카로웠다.강주 관아 내부.소욱은 상좌에 앉아 있었고, 대신들은 한 줄로 선 채 땀을 흘리며 바닥에 무릎 꿇고 있었다.“폐하, 신들 또한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강주에서 약쟁이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반드시 조속히 수습하여 폐하와 백성들 앞에 죄를 씻겠습니다!”소욱의
화살이 운산파 장문이 머무는 주실을 향해 날아들었다.문 앞을 지키던 대제자는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화살촉에는 짧은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구학’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화살을 걷어냈다. 서찰에는 역시나 약쟁이 수거 장소가 적혀 있었다.통상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바로 인원을 파견해 약쟁이를 인수하면 되었다.어둠 속, 나무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열무신이 문득 눈을 떴다. 방금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림자는 몸을 숨기며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작은 날렵했고, 무엇보다 운산파의 지형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듯했다.열무신이 뒤쫓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눈빛에는 차가운 전의가 서려 있었다.머릿속을 스친 건 오래전 실종된 친구, 맹성주의 얼굴이었다.복수하겠다는 그 의지가 지금껏 그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반드시 그들을 잡아내 맹성주를 대신해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였다.스윽! 스윽!어둠 속에서 연달아 화살이 날아들었다. 열무신은 몸을 틀어 회피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그가 아쉬움에 이를 악물던 순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봉구안이었다.그녀의 몸놀림은 열무신보다도 날쎄고, 판단력은 번개처럼 빨랐다. 폭풍처럼 망설임 없이 숲을 가로질렀다.두 시진 후, 숲 한가운데. 봉구안은 마침내 그림자를 따라잡았다.상대는 나무를 이용해 시야를 가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산이었다. 그의 속도는 둔해졌고, 그 틈을 봉구안이 놓칠 리 없었다.그녀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려쳤다.쿵!그림자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봉구안은 몸을 틀며 허리춤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다리를 꿰뚫었다. 다친 다리로는 경공을 펼칠 수 없었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그녀는 정확히 착지하자마자 혈도를 찔
봉 대인은 딸을 핑계 삼아, 강주의 특산 복숭아 누름과자를 들고 궁으로 들어왔다.하지만 봉구안은 소욱보다도 냉담했다. 얼굴엔 미소 하나 없었고, 목소리는 싸늘했다.“왜 오셨어요?”어젯밤 분명히 경고했다.요즘 강주는 어수선하니 조용히 사마부에 머물라고.그런데도 기어코 선물까지 들고 얼굴을 비추다니.봉 대인은 기가 죽은 듯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황제와 황후 앞에 섰다.“저… 아니, 신이… 혹시 무슨 도움이 될까 하여 들렀습니다.”“그래도 한때 강주 사마였으니, 백성들 얼굴쯤은 익숙합니다.”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투엔 그늘 하나 없이 냉정했다.“쓸데없는 짓 안 하시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그 말에 봉 대인은 더욱 풀이 죽었다.소욱조차 이번만큼은 봉구안이 지나치게 매정한 것 같았다.“좋은 마음에서 온 게 아니겠느냐. 그만 화 풀어라, 구안아.”소욱이 본인의 편을 들어주자, 봉 대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그러나 소욱은 곧 공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네.”“관아에서도 이 일에 집중하고 있지.”봉 대인은 그제야 눈빛이 살아났다. 곧장 예를 올리며 말했다.“신이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돌아서기 전, 그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덧붙였다.“누름과자는 따뜻할 때 드셔야 제맛이지. 좀 먹어보거라.”봉 대인이 떠나자, 소욱이 조심스레 봉구안을 달랬다.“그래도 부친이지 않느냐. 걱정돼서 온 게 느껴졌다.”봉구안은 냉소를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그게 느껴지셨어요?”소욱은 탁자 위의 누름과자를 집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이게 그 누름과자 아니냐.”소욱은 상자를 열며 중얼거리다가, 손을 멈췄다.“근데 이 과자…”봉구안이 고개를 들었다.“왜 그러십니까?”소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차갑지 않느냐. 이걸 어떻게 따뜻할 때 먹으라는 거지?”“게다가 다 부서졌지 않느냐. 대인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속으로는 공 훈장이나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강주, 관아 내부.관아의 관리들은 끼니도 거른 채, 수년간의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실종자 관련 신고도 줄줄이 접수되고 있었다.황후가 강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봉 대인뿐이었다.나머지 관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몇몇은 봉 대인을 슬쩍 떠보았다.“봉 대인, 황후마마께서 서여국으로 가셨다던데요.”“그쪽에서 황제가 되셨다… 그런 이야기가 돌던데, 사실입니까?”봉 대인의 표정은 단호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소!”그러자 한 관리가 더 나섰다.“봉 대인, 이쯤 되면 숨기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다들 아는 얘기예요. 들은 바로는, 대인의 전부인 되시는 분께서 서여국 선황의 친동생이라던데요.”그 말에 봉 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 역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예전 봉구안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당시 그녀의 반응만 보면 다 헛소문이라 여겼다.하지만 이렇게 또 다시 거론되자, 어쩌면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그럼에도 ‘유씨’가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봉 대인은 발걸음을 곧장 봉구안에게로 옮겼다.유씨와 서여국의 관계… 이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대청에는 부녀 둘만이 남았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무거웠다.“말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소문은 사실이에요.”이미 온 세상이 다 알아버린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도 없었다.봉 대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 네, 네 어미가… 정말 서여국 전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는 말이냐?”“그럼, 유씨 댁 두 어른은… 너희 외가 말이다. 그분들이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이냐?”봉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봉 대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자신이 외면했던 그 여인이… 황실 혈통이라니.그제야 떠올랐다.과거 유씨 댁 두 어른들은 유독 봉 부인에게 박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친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봉 대인은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