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이 운산파 장문이 머무는 주실을 향해 날아들었다.문 앞을 지키던 대제자는 익숙한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화살촉에는 짧은 서찰이 매달려 있었다.아직 잠들지 않았던 ‘구학’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직접 화살을 걷어냈다. 서찰에는 역시나 약쟁이 수거 장소가 적혀 있었다.통상대로라면, 이 시점부터 바로 인원을 파견해 약쟁이를 인수하면 되었다.어둠 속, 나무 위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있던 열무신이 문득 눈을 떴다. 방금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그림자는 몸을 숨기며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작은 날렵했고, 무엇보다 운산파의 지형을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듯했다.열무신이 뒤쫓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눈빛에는 차가운 전의가 서려 있었다.머릿속을 스친 건 오래전 실종된 친구, 맹성주의 얼굴이었다.복수하겠다는 그 의지가 지금껏 그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반드시 그들을 잡아내 맹성주를 대신해 복수를 하리라 다짐하였다.스윽! 스윽!어둠 속에서 연달아 화살이 날아들었다. 열무신은 몸을 틀어 회피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림자는 사라진 뒤였다.그가 아쉬움에 이를 악물던 순간, 옆을 스쳐 지나가는 또 다른 그림자가 있었다. 봉구안이었다.그녀의 몸놀림은 열무신보다도 날쎄고, 판단력은 번개처럼 빨랐다. 폭풍처럼 망설임 없이 숲을 가로질렀다.두 시진 후, 숲 한가운데. 봉구안은 마침내 그림자를 따라잡았다.상대는 나무를 이용해 시야를 가리려 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오산이었다. 그의 속도는 둔해졌고, 그 틈을 봉구안이 놓칠 리 없었다.그녀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려쳤다.쿵!그림자는 허공에서 떨어지는 낙엽처럼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봉구안은 몸을 틀며 허리춤에서 암기를 꺼내 날렸다. 화살은 정확히 그의 다리를 꿰뚫었다. 다친 다리로는 경공을 펼칠 수 없었고,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그녀는 정확히 착지하자마자 혈도를 찔
봉 대인은 딸을 핑계 삼아, 강주의 특산 복숭아 누름과자를 들고 궁으로 들어왔다.하지만 봉구안은 소욱보다도 냉담했다. 얼굴엔 미소 하나 없었고, 목소리는 싸늘했다.“왜 오셨어요?”어젯밤 분명히 경고했다.요즘 강주는 어수선하니 조용히 사마부에 머물라고.그런데도 기어코 선물까지 들고 얼굴을 비추다니.봉 대인은 기가 죽은 듯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황제와 황후 앞에 섰다.“저… 아니, 신이… 혹시 무슨 도움이 될까 하여 들렀습니다.”“그래도 한때 강주 사마였으니, 백성들 얼굴쯤은 익숙합니다.”봉구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말투엔 그늘 하나 없이 냉정했다.“쓸데없는 짓 안 하시는 게 제일 큰 도움이에요.”그 말에 봉 대인은 더욱 풀이 죽었다.소욱조차 이번만큼은 봉구안이 지나치게 매정한 것 같았다.“좋은 마음에서 온 게 아니겠느냐. 그만 화 풀어라, 구안아.”소욱이 본인의 편을 들어주자, 봉 대인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그러나 소욱은 곧 공적인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요즘 실종자 수색이 한창이네.”“관아에서도 이 일에 집중하고 있지.”봉 대인은 그제야 눈빛이 살아났다. 곧장 예를 올리며 말했다.“신이 바로 나가 보겠습니다!”돌아서기 전, 그는 봉구안에게 조심스레 덧붙였다.“누름과자는 따뜻할 때 드셔야 제맛이지. 좀 먹어보거라.”봉 대인이 떠나자, 소욱이 조심스레 봉구안을 달랬다.“그래도 부친이지 않느냐. 걱정돼서 온 게 느껴졌다.”봉구안은 냉소를 머금은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그게 느껴지셨어요?”소욱은 탁자 위의 누름과자를 집어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이게 그 누름과자 아니냐.”소욱은 상자를 열며 중얼거리다가, 손을 멈췄다.“근데 이 과자…”봉구안이 고개를 들었다.“왜 그러십니까?”소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차갑지 않느냐. 이걸 어떻게 따뜻할 때 먹으라는 거지?”“게다가 다 부서졌지 않느냐. 대인은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속으로는 공 훈장이나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강주, 관아 내부.관아의 관리들은 끼니도 거른 채, 수년간의 실종자 명단을 정리하느라 분주했다.실종자 관련 신고도 줄줄이 접수되고 있었다.황후가 강주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오직 봉 대인뿐이었다.나머지 관리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몇몇은 봉 대인을 슬쩍 떠보았다.“봉 대인, 황후마마께서 서여국으로 가셨다던데요.”“그쪽에서 황제가 되셨다… 그런 이야기가 돌던데, 사실입니까?”봉 대인의 표정은 단호했다.“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소!”그러자 한 관리가 더 나섰다.“봉 대인, 이쯤 되면 숨기실 것도 없지 않습니까?”“다들 아는 얘기예요. 들은 바로는, 대인의 전부인 되시는 분께서 서여국 선황의 친동생이라던데요.”그 말에 봉 대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그 역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 있었다.예전 봉구안에게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당시 그녀의 반응만 보면 다 헛소문이라 여겼다.하지만 이렇게 또 다시 거론되자, 어쩌면 단순한 유언비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그럼에도 ‘유씨’가 서여국 황실의 혈통이라는 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봉 대인은 발걸음을 곧장 봉구안에게로 옮겼다.유씨와 서여국의 관계… 이제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대청에는 부녀 둘만이 남았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낮고 무거웠다.“말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소문은 사실이에요.”이미 온 세상이 다 알아버린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도 없었다.봉 대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뭐라고…? 네, 네 어미가… 정말 서여국 전 황제의 여동생이었다는 말이냐?”“그럼, 유씨 댁 두 어른은… 너희 외가 말이다. 그분들이 친부모가 아니었던 것이냐?”봉구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봉 대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자신이 외면했던 그 여인이… 황실 혈통이라니.그제야 떠올랐다.과거 유씨 댁 두 어른들은 유독 봉 부인에게 박했다.지금 생각해보니, 그녀가 친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봉 대인은
봉 대인은 소욱의 속마음을 알지 못했다.황제가 죄를 묻지 않으니 그저 안도의 한숨이 나왔을 뿐이다.다만 의외였던 건, 황후를 향한 황제의 애정이었다.이런 황당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눈 감아주는 걸 보면, 딸을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이 갔다.자신 같았으면?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터였다. 아내가 제멋대로 나랏일에 얽혀드는 일이라니, 그에게 있어서는 절대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폐하의 너그러운 아량에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봉가에서 비롯된 것이온데… 신이… 신이 어찌 면목이 있겠습니까…”하지만 소욱은 봉 대인 앞에서도 봉구안을 향한 깊은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황후는 내게 더 많은 것을 참아주었다.”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꿀이라도 묻어 있는 듯, 다정함이 묻어났다.봉구안은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 대인에게 말했다.“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돌아가시지요.”“폐하와 저는 정사로 논의할 것이 있어 바쁩니다.”지금은 강주의 약쟁이 사건을 샅샅이 조사해야 할 시기였다.사마 신분으로 이토록 한가하게 돌아다니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봉구안은 봉 대인을 마주할 때조차 한 점의 온기도 비치지 않았다.친부녀 사이라기보다는 낯선 이와 응대하는 듯했다.봉 대인은 이제 그런 태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했다.그는 뭔가 떠오른 듯 무심히 물었다.“서여국 일 말이다… 맹건은 알고 있느냐?”봉구안은 특별히 숨길 이유도 없다는 듯 덤덤히 답했다.“사부님은 북방에 계십니다. 아직 편지를 드리진 않았습니다.”그러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사부와 사모의 사람 보는 눈이라면,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도 남을 터였다.그 말을 들은 봉 대인은 눈에 띄게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곧 들키지 않으려 애써 눌렀다.‘허허, 결국 그 늙은 맹가 장군보다 내가 먼저 알았다는 거지. 역시 구안이는 나를 더 가깝게 여기는 게야.’‘말은 저래도, 속은 참 여린 아이라니까.’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흡족한 듯 대청을 나섰다.그
소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봉구안을 바라보았다.그녀와 자신 사이에 아이가 생기다니.그녀의 난임을 치료하겠다고 무애산까지 다녀왔고, 스승이 내려준 약도 꾸준히 복용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이미 단념했던 터였다.그런데 지금… 그녀가, 그의 구안이가… 아이를 품었다.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경사입니다. 태동은 아직 없으나 맥을 보건대, 한 달 남짓 된 태아의 맥이 맞습니다.”소욱의 눈빛이 반짝이며 환하게 빛났다.“좋다! 상을 주마! 여봐라, 어서 포상 준비를 해라!”진한길이 황제의 손짓에 따라 금화를 꺼내 의원 손에 쥐어주자, 의원은 그 자리에서 그만 다리가 풀릴 뻔했다.맥 하나 짚었을 뿐인데, 황금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린 횡재였다.의원이 물러간 뒤, 소욱은 참지 못하고 봉구안을 덥석 안아 올렸다.“구안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다. 우리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봉구안은 미소 지으며 그의 입술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조용히 하십시오. 아이가 놀랍니다.”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하지만 태는 3개월이 지나야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괜한 기대에 들떠 방심했다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그래서일까. 봉구안은 들뜬 감정을 애써 누르며 담담히 반응했다.소욱은 그녀를 침상에 조심스레 눕히고, 이불을 배 위로 덮었다.작은 한기라도 스며들까, 손끝까지 세심했다.그녀의 손을 가만히 감싸쥐고, 입꼬리를 간신히 누르며 중얼거렸다.“이 아이는 강할거야. 우리를 닮아서 말이다.”한 달 전, 함께한 밤이 떠올랐다.그때 이미 그녀의 몸이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소욱은 자책하듯 고개를 떨궜다.“내가 좀 더 일찍 의원을 불렀어야 했는데… 미안하구나.”무애산의 스승은 치료에 시간이 걸릴 거라 했고, 그는 그 말대로 될 거라 믿었다. 아니, 사실상 기대를 내려놓았던 게 더 가까웠다.하지만 오늘, 모든 걸 뒤엎는 기적이 일어났다.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배에 손을 얹었다.이 감정은 황위에 올랐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벅참이었
남제 전역이 술렁였다.황성에서 내려온 어명이 번개처럼 각지로 퍼지며, 온 나라가 약쟁이 사건 수사에 돌입한 것이다.무림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전진파가 앞장서고, 각 문파가 연대하여 ‘약쟁이’ 소탕을 모의하자 강호 역시 깊은 물결이 이는 듯 긴장감이 팽팽해졌다.겉은 평온해 보였지만 물밑에선 이미 암류가 소용돌이쳤다.조정에서 내건 포고문은 거리마다, 골목마다 붙었다.그 앞엔 구경꾼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세상에, 약쟁이이라니, 도대체 뭡니까?”“듣자하니 사람을 납치해선 독약을 먹이고,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괴물로 만든다더이다.”“관아에서 외진 데는 피하고, 외출할 땐 여럿이 함께 다니라 하지 않소. 허나, 도둑놈 마음 먹으면 우린 당해낼 재간이 없지요…”“에이, 이젠 집 밖이 제일 위험한 거 아니오.”“근데 이거 봐요. 제보만 잘하면 상금도 나온다 하오!”조정은 단호했다.약쟁이를 뿌리째 뽑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고, 백성들 또한 생존이 걸린 일이라면 앞장서 도울 각오였다.이건 단순히 나라의 체면이나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바로 그들 자신의 가족과 생명을 지키는 일이었으니 말이다.가족을 잃은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관아로 찾아와 울부짖었다.“대감, 제 딸은… 대체 언제 돌아옵니까?”“대감, 저희 상인은 두 해 전 떠난 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혹 약쟁이방에 끌려간 건 아닌지… 부디 찾아주십시오.”“대감! 저희 아버지도 실종된 지 두 해가 넘었사옵니다… 제발요…”강주 관아.황제는 친히 어전에 앉아, 각지에서 모여든 보고를 듣고 있었다.그 얼굴엔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았다.물론, 봉구안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 마음을 뺏고도 남았지만… 지금 이 자리만큼은 남제의 군주로서 천하 만백성의 안위를 짊어진 사람이었다.그 역시 한 아내의 지아비이자, 곧 아이를 맞이할 아버지였으나, 그 누구보다 냉정하게 나라를 바라보는 눈이 되어야 했다.소욱의 시선은 차갑고도 날카로웠다.“즉시 조사하라.”“실종자들
소탁은 죽산진에 머무르며, 붉은 연초초의 유통 경로를 샅샅이 추적하고 있었다.소욱은 그가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용한 조력자 몇을 붙여주었고, 마침내 중요한 실마리를 쥐게 되었다.처음부터 그는 붉은 연초초가 일반 약재처럼 거래되지는 않았을 거라 의심하고 있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을 리 없었다.결국 그는 연초초를 사료 삼아 기른 닭을 추적하게 되었고, 그 닭들이 매달 일정 수량씩 인근 고을로 팔려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그런데 그 닭 장수들은 모두 행적은 불분명하고, 입도 무거워 매우 수상했다.“폐하, 폐태자께서 닭 장수들을 붙잡았다 하나, 그 자들이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답니다.”소욱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입을 열든 말든, 진실은 이미 떠올랐다”오늘은 봉구안의 생일이었다.심문 따위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그는 봉구안의 손을 가만히 잡아 이끌며 부드럽게 말했다.“가자. 오늘은 네 탄신일이지 않느냐.”“오늘만은 그 시름을 잊게 해주고 싶다.”봉구안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곁에 나란히 마차에 올랐다.객잔 안.강림과 동방세는 객잔 마당 한켠에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이야… 사람 둘이 저리 정답게 나가는 걸 보니, 괜히 속이 허해지는구려.”“자넨 언제 혼인할 작정이오?”동방세는 입꼬리조차 들지 않고 술만 넘겼다.강림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여인은 이미 떠났소.”“죽은 사람에 갇혀 사는 삶이란, 결국 스스로를 묶는 것이오.”잠시 침묵을 삼키던 동방세는 되레 반문했다.“나야 한 번은 혼례도 올린 몸이오.”“자네는 어찌 아직도 총각이오?”강림은 턱을 괴며, 익살스럽게 웃었다.“나 같은 미남자와 어울릴 자가 천하에 몇이나 되겠소?”“그만한 인물이 아니면 난 혼자 살리이다.”동방세는 말없이 술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허, 입만 살아선…”교외, 호숫가.소욱은 오래 전부터 봉구안의 탄신일을 위해 비밀리에 준비를 마쳐두고 있었다.이날 햇살
화선 안에는 이미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소욱은 별다른 예를 갖추지 않았다.그저 조용한 집안 연회처럼, 봉구안과 소욱, 그리고 맹건 부부 네 사람은 하나의 상에 둘러앉았다.화선 한 척 통째로 소욱이 빌린 터였다.외부인의 발길은 끊긴 채, 오직 이 순간을 위한 자리였다.봉구안은 잔을 들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사부님, 사모님. 멀고도 고단한 길 오시느라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한 잔, 두 분께 올립니다.”어린 시절부터 그들 곁에서 자란 봉구안이었다.그러나 세상 속으로 나간 후론, 정작 곁에서 효도 한 번 하지 못했다.그 죄스러움이 술잔 속에 고이 담겨 있었다.근래엔 약쟁이 사건이며 조정 일로 하루하루를 쫓기듯 보냈다.편지 한 장 못 띄운 자신이 더없이 부끄러웠다.그녀가 잔을 들고 입술에 가져가려는 찰나… 소욱이 조용히 그녀의 손목을 눌렀다.그리고 말없이 잔을 건네받은 뒤, 한 번에 들이켰다.“이 술은 내가 너대신 마시도록 하마.”맹건과 맹 부인은 동시에 눈이 커졌다.의아한 시선이 오가고, 곧 맹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마마… 혹,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맹건 역시 얼굴이 굳어지며 덧붙였다.“설마, 약쟁이 사건을 쫓다 다친 것입니까?”그는 예전부터 봉구안이 이 사건에 발을 담그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무림에서든 조정에서든, 위험한 일에 몸을 담가선 안 된다고 여러 차례 당부했던 터였다.하지만 소욱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다. 다친 것은 아니다. 염려 말거라.”그는 봉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 눈빛은 전과 달리 유순하고 부드러웠으며, 그녀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구안이가… 아이를 가졌다.”“아이를요?!”맹건 부부의 얼굴에 일순 기쁨이 번졌다.맹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가를 훔쳤다.“하늘이 도우셨구나… 정말로…!”맹 부인은 봉구안 옆으로 바짝 다가와, 조심스레 그녀의 맥을 짚었다.잠시 후, 그녀의 눈에도 금방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정말입니다.”“태기가 단단히 자리를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