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연이를 처리한 뒤, 봉구안은 남자 복장으로 갈아입고 가면을 썼다. 그리고 채월과 함께 봉장미를 만나러 갔다.봉장미는 송려가 돌보고 있었다.그녀는 마치 어린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겁에 질린 얼굴로 구석에 숨어 있었다.봉구안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오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그들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는 영혼 깊숙이 뿌리내려 그녀를 잠식하고 있었다.봉구안은 쓸쓸한 얼굴로 장막을 내려 시선을 가려주었다.그래도 다행인 점은 송려의 약을 먹고 봉장미의 건강 상태는 많이 좋아진 상태였다. 적어도 밤에 잠에 들 수는 있었다.다만 불안정한 정신 상태는 여전했다.약간 소리가 나도 그녀는 불안에 떨었다.봉구안은 채월을 방에 남겨둔 뒤, 송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송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외상은 치료가 가능하나 마음의 병은 어려울 것 같소.”봉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요 며칠 사이에 데리고 이곳을 떠날 생각인데 가능하겠나?”송려는 고개를 저었다.“절대 안 될 소리요! 아까 아가씨가 자네를 보고 기겁하는 걸 보면 아마 가는 길이 쉽지 않을 거요. 하물며 낯선 환경에 낯선 사람은 아가씨의 회복에 좋지 않소. 오히려 병증을 악화시킬 수 있소. 조금 더 기다렸다가 아가씨의 상태가 조금 나아지면….”봉구안이 물었다.“얼마나 기다려야 하지?”“상황을 봐야겠지만 지금으로선 최소 반 년이오.”봉구안의 두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하지만 동생을 위해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능연이의 입에서 들은 내용들도 재조사가 필요했다.결국 돌고 돌아 봉장미가 납치당한 날부터 다시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형씨?”송려의 부름에 그녀는 그제야 생각을 멈추고 정신을 차렸다.“무슨 일이지?”송려는 그녀에게 약알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몽화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약이오. 지난 번에 자네가 가져온 약이 큰 도움을 주어서 겨우 만들어낼 수 있었소.”“원래는 10일에 한 알씩 100일 동안 복용하면 완전히 해독할 수 있
봉구안은 채월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무슨 일인데 이리 요란법석이냐.”오백이 답했다.“장군께서 시키신 대로 그 여자를 벙어리로 만들어 기루에 팔았는데요.”“거기 어멈은 늘 하던 대로 몸을 검사했었죠. 소인이 밖에서 기다리는데 그 어멈이 씩씩거리며 나오더니 소인을 마구 욕하는 거예요.”“장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나 가시나요?”봉구안은 부하를 싸늘하게 바라봤다.오백은 그제야 말실수를 깨닫고 다급히 답했다.“어멈이 하는 말이 그 여자는 완전한 여자가 아니라 석녀라는 거예요!”그 말을 들은 봉구안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석녀라니!사내의 시중을 들 수 없고 아이를 낳을 수도 없으며 달거리도 없는 여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능연이의 달거리 기록도 조작된 것이었을 것이다.오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장군, 그 여자 폐하의 총비 아니었나요? 어떻게 석녀일 수가 있죠? 대체 그 여자는 무슨 수로 귀비의 자리까지 올라간 걸까요?”그는 황제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의심이 갔다.봉구안도 뜻밖의 소식이 당황스러웠다.합방을 할 수조차 없는 여인은 황제의 시중을 들 수가 없었다.아마 능연이는 이 사실을 가장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사실이 들통나면 그녀가 누렸던 과거의 총애와 영광들이 모두 헛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무덤가에서 채월에게 칼부림을 당할 때도 당황하는 티를 안 내다가 기루에 팔려간다는 얘기를 듣고 그렇게 반항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그녀는 아마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을 것이다.봉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능연이는 지금 어디 있지?”아마 기루에서도 석녀는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오백이 이를 갈며 답했다.“처음에 어멈은 절대 안 받는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은화를 건네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받더라고요. 입만 살아 있어도… 괜찮다면서요.”봉구안은 고개를 돌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저 안에 능연이에게 능멸을 당해 미쳐버린 동생이 누워 있었다.용서받을 수 없
유사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폐하, 황후마마께서는 태후마마를 보살펴 드리고 계시온데… 혹시 태후께서….”소욱은 고개를 들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태후는 현명하신 분이다. 막무가내로 황후를 감싸고 돌진 않을 거다.”소욱은 이틀이면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했다.자녕궁.봉구안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풀었다.이때, 다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황후마마, 폐하의 부름이 있습니다.”반 시진 후.봉구안은 장신구를 최대한 덜어내고 소백한 궁복을 입은 채, 황제의 서재를 방문했다.딱 봐도 용서를 구하러 온 모습이었고 사실도 그랬다.그녀는 공손히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죄 많은 신첩이 폐하를 뵙습니다.”소욱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스스로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면, 황궁의 법도대로 어떤 벌을 받을지 생각은 해보았느냐.”봉구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답했다.“폐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유사양은 조심스럽게 황제의 옆에 가서 섰다.그는 황제가 폐후 첩지를 쓴 것을 직접 보았기에 황제가 무조건 황후를 내칠 거라고 생각했다.원칙대로라면 폐후와 같은 중대사는 태후의 동의가 있어야 했다.하지만 원래 독단적인 황제이니 딱히 그렇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소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매정한 눈빛으로 봉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달리 해명할 것은 없느냐.”봉구안은 고개를 들고 동요 없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신첩은 자신이 중궁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나이다.”소욱이 차갑게 말했다.“너는 항상 분수를 아는 여인이었지.”봉구안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스쳤다.드디어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소욱이 입을 열려는 순간 대전 밖에서 급보가 들려왔다.“폐하, 남부 변경에 이변이 생겼다고 합니다!”봉구안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북방의 양나라도 아직 미지수인데 남부에 또 일이 생겼다니!소욱은 싸늘한 목소리로 봉구안에게 명령했다.“일단 영화궁으로 돌아가거라.”“예.”서재를
춘화는 능연이의 심복으로 조검처럼 능연이를 위해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그러니 봉구안이 그녀를 풀어줄 리 만무했다.잘못을 하였으면 벌을 받는 게 마땅했다.그렇게 춘화는 형자사에 갇히게 되었다.“황후가 날 속였어! 황후가 날 속였다고!”그녀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영화궁.봉구안은 봉장미가 납치된 수림에 다시 가보기로 했다.밤이 찾아오자 그녀는 몰래 궁을 빠져나갔다.그녀는 오백을 남겨 봉장미를 돌보게 하고 채월과 함께 그 수림을 찾았다.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채월뿐이었다.채월은 그날 있었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그녀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곳입니다, 마마! 그때 저희의 마차가 산적들의 공격을 받고 호위들이 싸우고 있을 때, 소인과 요랑은 아가씨와 함께 마차에서 뛰어내려 저쪽으로 들어갔습니다.”밝은 달빛이 채월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쓸쓸히 비추었다.수림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채월이었기에 다시 그곳으로 들어가려니 두려움이 앞섰다.봉구안은 횃불을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채월은 곧추 그녀의 뒤를 따랐다.음산한 바람이 그들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채월은 설명을 계속했다.“그때 얼마 못 가서 여기쯤에서 소인이 넘어졌던 것 같아요. 요랑은 아가씨와 함께 저 방향으로 뛰었고요.”“나중에 아가씨께서 소인을 구하러 돌아오셨는데 소인은 이미 걸을 수 없는 상태였고 요랑이 아가씨를 끌고 다시 도망쳤어요.”봉구안은 횃불을 들고 수림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산적들의 자백을 회상했다.그들의 자백과 채월의 진술은 거의 흡사했다.마차가 가는 길을 가로막고 호위와 싸움을 벌였고 나중에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이 도망가니 그들도 쫓아서 수림으로 들어갔다.아마 기껏해야 일각 정도 시간이 지체되었을 것이다.곧이어 그들은 순조롭게 이미 쓰러진 봉장미를 발견했을 것이다.봉구안은 보통 여인의 보폭을 모방하여 채월이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가며 말했다.“넌 그 자리에서
묘원 주변은 스산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오백은 연장을 들고 묘한 표정으로 봉구안에게 물었다.“장군, 여기가 확실한가요?”이곳은 봉가의 조상님들이 잠든 곳이기도 했다.오백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봉구안은 말없이 앞으로 걸었다.요랑의 이름이 새겨진 묘비 앞에 도착하자 그녀가 명을 내렸다.“여기야. 시작해.”요랑과 같이 잠든 호위들도 근처에 묻혀 있어서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오백은 봉구안의 지시에 따라 무덤을 팠다.한 시진 후.바닥에는 심각하게 부패된 시체가 드러났다.아무리 전장을 누비고 다닌 오백이지만 참을 수 없는 악취에 구역질이 올라올 정도였다.봉구안은 옷섶을 찢어 코를 막았다.그리고 지니고 다니던 비수를 꺼내 시체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시신은 부패단계에 들어갔지만 어디에 치명상을 입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산적들은 훈련된 병사가 아니었기에 두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체 제작한 도끼를 사용했다고 한다.호위들 몸에서는 도끼에 맞은 흔적들이 발견되었다.하지만 요랑은 그들과 달랐다.그녀의 치명상은 가슴에 있었는데 상처가 이미 부패되었지만 주변의 피부 절단면으로부터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장군, 이건 비수에 찔린 상처 같네요.”가까이 다가온 오백이 말했다.봉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산적들이 비수를 들고 살인을 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백에서 시녀를 살해했다는 진술은 듣지 못했다.부검을 통해 봉구안은 요랑은 산적들에게 살해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였다.하지만 그녀가 누구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장미를 기절시킨 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장군, 저기 뭔가 있어요!”눈썰미 좋은 오백이 횃불로 요랑의 시체를 밝히며 말했다.부패된 복부 근처로 딱딱한 무언가가 보였다.“옥패입니다!”오백이 놀라며 말했다.시체에 왜 옥패가 숨겨져 있었던 걸까?봉구안은 침착하게 그것을 손수건으로 감싸서 집어들었다.크기가 크지 않고 나뭇잎처럼 얇은 모양의 옥패였다.겉에 묻은 이물질을 거두어내니 위에 새겨진 글
소욱이 이 늦은 시간에 그녀의 처소를 찾은 것은 예상밖이었다.예민한 소욱과 그의 시위들은 강력한 내력을 가진 무림고수들이고 그 어떤 소리나 움직임도 그들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봉구안은 신속히 밀서를 감추고 비둘기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았다.지금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소욱의 주의를 돌리는 게 우선이었다.봉구안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자객이다!연상도 그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같이 소리쳤다.“여봐라! 당장 와서 마마를 호위하라!”곧이어 소욱과 그의 시위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소욱은 곧장 내전으로 걸어들어왔다.물론 황후인 봉구안의 안위가 걱정돼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자객은 어디 있느냐!”그는 자객이란 소리를 듣는 순간 여자객이 또 무슨 짓을 꾸민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열린 창가를 가리키며 말했다.“창문을 통해 도망쳤습니다.”“어떻게 발견했지? 자객은 남자였어? 아니면 여자였어?”“제대로 보진 못하고 검은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봉구안은 애매모호하게 답했다.소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진길을 호령했다.“가서 살펴보거라.”“예, 폐하!”봉구안은 공손히 예를 취했다.“폐하께서 납신 줄도 모르고 마중도 못 나갔으니 송구합니다.”소욱은 자객의 출현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황후는 원래부터 이 정도로 대담한 사람이었나?”봉구안은 침착하게 답했다.“아니요. 다만 무서운 일을 겪고 난 후로는 두려운 감정이 사라졌습니다.”소욱이 의자에 앉자 연상은 조심스럽게 차를 대령했다.그는 찻잔은 쳐다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짐은 폐후를 고민했었다.”봉구안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희비가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담담하고 고요히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너를 내치고 새로운 황후를 들이기에는 시간이 필요하지.”“하필이면 변방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후궁을 다스릴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잠시는 너를 폐하지 않기로 하였다.”그는 황후에게서 기쁨의 표정을 기대했지만 그녀는 여전
연상은 봉장미 납치 사건의 진실을 알고 한참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마마, 정말 무섭네요. 범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잖아요.”“요랑으로 변장하고 장미 아가씨의 신변에 숨어 있었다니. 너무 무서운 자예요! 어떻게 하면 놈을 잡을 수 있을까요? 하물며 마마는 황성을 떠나 북경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잖아요?”연상은 황후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봉구안이 담담히 말했다.“가지 않기로 했어.”배후에서 이 판을 짠 자를 무조건 찾아낼 것이다.어차피 봉장미는 지금 여정을 떠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급할 건 없었다. 걱정되는 점이라면 북경의 안녕이었다.황후는 한가한 비빈들과는 달리 할 일이 무척 많았다.이어지는 며칠동안 봉구안은 영소전에서 받은 뇌물을 일일이 기록하고 국고로 보냈다.영소전 소속 궁인들 중 죄질이 심각한 자들은 춘화처럼 행자사에 보내졌고 좀 덜한 자들은 신행사에 노역을 보냈다.나머지 무고한 궁인들은 각 궁에 충원을 보냈다.대대적인 정돈을 통해 영소전은 예전의 부패함을 씻어버리고 광명을 되찾았다.그러나 후궁의 비빈들은 영소전을 지나갈 때마다 한마디씩 불만을 터뜨리고는 했다.“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과거에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었던 곳인데 지금은 아무도 없는 냉궁이 되어버리다니. 어휴, 재수없어.”“돌 들어 제 발등을 깐 거지! 능연이는 폐하의 총애를 등에 업고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데! 황후께서 후궁을 정돈하려고 나섰으면 능연이부터 처치하는 게 당연하지.”비빈들은 능소전 앞에서 한바탕 불만을 토로한 뒤에 영화궁에 문안을 올리러 갔다.처음에 황후를 그토록 무시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정반대로 바뀌었다.아무리 이 사건이 비밀에 부쳐졌다고 해도 능연이의 죄증을 지목한 사람이 황후라는 사실은 궁 안에서 조용히 퍼져나갔다.황후는 보기에 아무런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절대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태후는 요즘 갈수록 봉구안이 마음에 들었다.태후
모용선이 하루가 멀다하게 태후궁에 드나들 수 있다는 건 태후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뜻이고 이는 모용선이 다른 수녀들과는 완전히 다른 입지에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조카딸인 녕비마저도 요즘 태후에게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녕비는 불만을 가득 가지고 자녕궁으로 향했다.계 상궁이 대문 앞에서 그녀에게 말했다.“마마, 지금은 모용가의 아가씨께서 태후마마를 위해 불경을 읽어드리고 있어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후쯤에 다시 오시지요.”녕비는 불만을 참으며 억지미소를 지었다.“고모가 모용가의 아가씨를 무척 마음에 두셨나 보군. 그럼 이만 물러가겠다.”계 상궁은 실망감이 가득한 녕비의 얼굴을 보고는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마마, 태후께서 하는 모든 것은 마마와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태후마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마마밖에 없습니다.”녕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그건 나도 알아. 고모께 건강 잘 챙기라고 전해드리거라.”밖으로 나온 후, 녕비의 시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모용가의 셋째 아가씨가 수완이 좋나 봐요. 한번 만나본 사람은 다 마음에 들어한다는데 태후마저도 그 아가씨에게 이리도 잘해주시니 나중에 입궁하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할까 봐 두렵습니다.”녕비가 하찮다는 듯이 코웃음쳤다.“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그년의 입궁을 막을 수도 없지 않느냐.”그녀는 영비를 닮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탓했다.하지만 그녀가 아는 태후라면 진심으로 모용선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다.영화궁.연상은 봉구안의 필묵 시중을 들며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마마, 모용선 아가씨는 좋은 인품에 영비를 똑 닮은 얼굴을 갖고 있다고 다른 비빈마마들이 긴장하고 계신 건 이해하겠는데 마마도 그 아가씨를 신경 쓰고 계신 건가요?”봉구안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내가 모용선을 왜 신경 쓰지?”“아닌가요? 그런데 아침부터 마마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셔서….”봉구안은 붓대를 내려놓고 싸늘한 표정으로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