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은 황제의 한 방에 오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내뱉은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최 상궁에게 그 견씨 집안 여인의 일을 듣고 나서야, 그 말이 맞음을 깨달았다.남자의 진심은 한순간에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예전에는 구안 아가씨가 약간 모질다 생각했었다.황제의 진심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황제가 그럴 만한 일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만약 황제가 그렇게 쉽게 놓아줄 수 있었다면, 그토록 구안 아가씨를 가둬두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단 말인가?지금 와서는 또 왜 그녀를 잊지 못하는 모습으로 영화궁에까지 오는가?최 상궁은 다리가 풀려 겁에 질렸다.“폐하, 연상의 뜻은 그저…”“물러가거라.”소욱의 눈빛은 차갑고도 잔혹하여, 마치 격렬히 일렁이는 분노의 바다 같았다.최 상궁은 황제의 노여움을 감히 거스를 수 없었으므로 급히 물러났다.영화궁에 남아 있던 몇몇 궁인들 또한 모두 물러가며, 가까이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뜰 안에는 황제와 연상 둘만이 남았다.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군왕의 위엄을 지녔으며, 용포는 그를 더욱 고고하고 냉혹하게 돋보이게 했다.그런 황제가 한 걸음씩 연상을 향해 다가왔다.“누구를 위해 분노하는 것이냐?”“너의 눈에는, 과인이 폐비에게 무슨 죄를 지은 듯 보이는 것이냐!”“명심하거라. 과인이 비록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다 한들, 폐비를 배신한 것은 아니다!”“폐비가 과인을 떠나고자 한 것이며, 폐비가 결정한 것이다.”“설마 과인이 폐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칠 만큼 천하의 하찮은 사람이란 말이냐!”연상은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은 채로, 황제의 노여움을 묵묵히 견뎌냈다.소욱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문득 그 여인이 떠올랐다.그녀 또한 이렇듯 냉랭하게, 그가 무엇을 말하든 단지 “예” 한 마디만 했었다.황제는 시선 끝에 보이는 썩어 문드러진 나무를 바라보며, 깊은 연못 같은 눈에 서늘한 빛을 띠었다.잡을 수 없다면… 다 흩어져야 하는
영화궁.교지를 전하는 이는 유사양이었으니, 황제가 이 흔비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엿볼 수 있었다.교지를 읽고 난 유사양은 미소를 띠며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마마, 어서 더는 무릎 꿇지 말고 교지를 받으십시오.”“이건 하늘이 내린 큰 은혜입니다! 노비가 궁에 들어온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바로 빈에 봉해지는 사례는 처음 봅니다.”황제가 영화궁을 자주 찾으신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이전 황후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떤 여인이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유사양의 눈에는 감탄과 경외가 어렸다.이 궁중에서는 아무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는 걸 그는 다시금 깨달았다.누가 알았겠는가. 한때 황후마마의 곁을 지키던 궁녀가 이제 신분을 바꾸어 흔비가 되리란 것을.연상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저는… 저는 안 됩니다. 감히 교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그녀가 어떻게 황제의 빈이 될 수 있단 말인가!갑자기 연상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그녀는 무서웠다.황제는 정말 미쳤다!유사양은 난생처음 이런 상황을 보았다.“설마 기뻐서 그러시는 겁니까? 잘못 들으신 거 아닙니다. 이는 비로 봉하는 교지입니다. 어서 일어나시죠…”“아니요! 그럴 수 없습니다.” 연상은 마치 도망치듯 뛰쳐나갔다.유사양은 깜짝 놀라 외쳤다.“여봐라! 흔비마마를 막아라!”연상은 머리를 감싸 쥐고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나는 아니다! 나는 흔비가 아니야! 아아아! 다가오지 말거라…”어전.진한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눈앞의 황제는 짐승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황제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연상을 비로 봉한 일은, 전 황후가 듣는다면 분노하지 않을까?마치 곁에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 같은 심정일 테니 말이다.황제는 왜 이런 일을 하는가? 연상의 실언에 대한 복수인가, 아니면 황후에 대한 복수인가.……견가 저택.견여해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확인했다.“뭐라고? 황제가 궁녀를 비로 봉했다고?”진부인은 견여해의 팔을
아침 식사 후, 최 상궁은 잠시 영화궁에 들렸다.최 상궁은 눈에 띄게 피곤한 모습의 연상을 보며 환심을 사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소인, 흔비마마를 뵙사옵니다!”“어젯밤 수고가 많으셨으니, 이는 제가 직접 고아온 보양탕이옵니다. 부디 몸 보하시옵소서...”최 상궁은 속으로 생각했다.‘이 계집아이를 내가 너무 우습게 봤구나.’‘아무리 말려도 영화궁을 떠나려 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높은 가지에 오르려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높은 가지가 되려 했구나!’최 상궁은 연상의 얼굴을 재차 훑어보았다. 그녀는 경국지색이라 할 수는 없었으나, 단정하고 깨끗한 이목구비는 제법 이 황궁과 어울리는 듯했다.남자들이 그녀를 보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그녀에게 눈길을 줄 만도 했다.최 상궁은 자신의 의도를 드러내며 말했다.“마마, 신첩은 옛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마마께서는 이제 믿을 만한 사람도 곁에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신첩을 다시 곁에 두시어 모시게 하심이 어떠실지요?”그러나 연상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필요 없다!”최 상궁은 연상의 이러한 태도에 불쾌감을 느끼며, 날카로운 말투로 은근히 그녀를 찔렀다.“마마께서는 처음의 처지를 잊으셨나이까?”“타인들이 마마를 어떻게 보는지 아시옵니까? 폐비마마께서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미 용상을 차지했다며, 주인을 배신한 노예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다 하옵니다.”“이 궁궐은 홀로 싸워나가는 곳이 아니옵니다. 마마 곁엔 사람이 필요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 새로운 것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실 때, 영화궁은 다시 냉궁이 될 것이옵니다!”연상은 두 주먹을 꽉 쥔 채, 모든 억울함을 꾹꾹 눌러 참았다.“당장 나가거라!”그들은 전혀 몰랐다. 황제가 폐비 봉씨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핑계로 정당하게 영화궁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또 그녀는 어젯밤 황제의 승은을 받아들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단지 황제의 계획에 협조했을 뿐이었다.그녀의 마음속 고통은, 누구에게도 말
선성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원인은 장졸들이 조정에서 내린 미미한 양식과 삯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한 탓이었다. 이에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고, 이로 인해 주국공부가 화를 입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성을 빠져나왔다.이곳 선성은 남제의 중요한 길목으로, 양식을 운반하고 군대를 이동시키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요충지였다. 이처럼 전략적으로 중요한 땅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과 민간은 큰 충격에 빠졌다.봄날의 찬란한 햇살 아래, 본디 맑고 청명해야 할 하늘은 선성 위로 겹겹이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성문 밖, 오백은 마차를 몰고 가던 중 고삐를 잡아 세웠다. 이윽고 그는 마차 안으로 들리도록 청하며 말했다.“소장군, 선성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마차 안, 봉구안은 그간의 눈병이 이미 나았으나, 며칠 동안 강한 빛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길을 돌아 동쪽으로 가자구나.”세작의 고변에 따르면, 천룡회의 잔당 일부가 방성에 숨어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원래 계획은 곧바로 남하하여 방성으로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러한 전술은 지나치게 수동적이었다.천룡회의 잔당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방성의 무리를 제거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곳에 남아 있는 세력이 있었다. 특히 교주가 은신한 곳은 지금껏 밝혀지지 않았으니, 그녀의 이러한 전략은 효과가 크지 않을 터였다.이에 그녀는 우선 무림맹을 찾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천룡회 같은 집단을 소멸시키려면 무림의 동도들과 함께 논의하여 정파의 힘을 모아야만 완전한 소탕이 가능하리라 판단한 것이다.“비키시오!”밖에서 오백의 격렬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마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봉구안이 마차 커튼을 들어올리니 방금 전 마차가 어린 소녀와 부딪힐 뻔한 상황이었음을 알게 되었다.이 급작스러운 일에 오백의 가면마저 거의 떨어질 뻔하였다. 그는 불쾌한 기색으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림성을 벗어나 동남으로 향하면 동신성에 이르게 된다.무림맹의 본거지는 바로 동신성 내의 심가오에 자리 잡고 있었다.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시골 마을일 뿐이었으나, 그 안에는 강호의 고수들이 즐비하여 그 위세를 가늠하기 어려웠다.마을 어귀에는 큰 돌이 하나 서 있었고, 그 위엔 수많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가면을 쓴 두 남자와 어린 소녀가 함께 등장하자 마을 입구의 수비병들은 즉시 길을 막아섰다.그중 한 수비병이 세 사람을 주시하며 물었다.“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정체를 밝혀라!”오백은 이를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분명 암호를 요구하는 거겠지.’그러자마자 그는 주군을 바라보았다.봉구안은 한 발 물러서더니, 강호의 예를 다하여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이어 중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오는 길은 황천길, 돌아가는 길도 황천길! 의로 맺은 형제는 영욕을 함께하고, 강호를 손잡고 전설을 쓴다! 뵙소서! 부맹주 만세!”“풉…”오백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암호가 이렇게 촌스럽다니! 도대체 주군 같은 분이 어떻게 이런 걸 받아들이신 거야?’그의 시선이 닿은 봉구안의 표정에는 미세한 굳음이 엿보였다.‘젠장…! 이래서 내가 무림맹을 오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지.’봉구안이 암호를 마치자, 옆의 소녀 ‘소소’ 역시 흉내를 내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뵙소서! 부맹주 만세!”수비병들은 이를 듣고, 즉시 길을 내주었다.…마을 내부는 겉보기엔 여느 평범한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무림맹의 위세를 상상했던 오백은, 막상 이러한 모습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이게 정말 강호 최강의 본거지란 말인가? 산속 깊숙한 대저택에, 위엄 있는 무자들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구안은 앞장서며 한 농가의 문을 두드렸다.문을 연 이는 덩치 큰 사내로, 그를 보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형제여! 너의 서신을 받고부터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어서 들어와!”오백은 나중에서야 알게
한 사내가 있었다. 거칠게 만든 청색 옷과 짧은 저고리를 입고, 온몸에 흙이 묻은 채였다. 한 손으로는 닭을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실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엔 풍작의 기쁨이 가득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막 씨를 뿌렸는데, 마침 날씨가 도와주는군.”그 사내는 동방세라 불리며, 준수한 외모와는 달리 검게 그을린 얼굴은 마치 학자 같아 보였으나, 별다른 위협은 느껴지지 않았다.오백은 막 일어나 예의로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살기를 느끼고 멈칫했다.그 순간, 무리 속에서 소환을 발견한 동방세의 눈빛이 번뜩이며 날카로워지더니, 손에 들고 있던 닭을 냅다 내던졌다.그 닭은 마치 주인을 알아보듯 날개를 퍼덕이며 봉구안을 향해 날아들었다.“꼬꼬꼬!”동시에 동방세는 바구니 속 과실을 집어 들고는 마치 암기처럼 봉구안을 향해 내던졌다.오백은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 있을 뿐, 피할 생각조차 못했다.고개를 돌려 보니, 다른 이들은 이미 방비를 갖춘 듯 모두 재빠르게 피했고, 심지어 소소조차 날렵하게 탁자 밑으로 숨어들었다.다시 보니, 소장군은 어느새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이를 방패처럼 사용하여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우산을 거둔 후에도 추호의 흠집조차 보이지 않았다.그런 와중에 과실에 머리를 맞고 닭의 배설물까지 뒤집어쓴 오백은 속으로 탄식했다.‘결국 당하는 건 나뿐인가?’동방세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어이쿠, 실수했네. 다들 무사한가?”봉구안은 평온한 모습으로 우산을 옆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무사하다.”그녀는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언제나 식사에 목숨을 거는 동방세가 그들을 먼저 먹게 둘 리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는 분명 그녀의 경계를 풀게 한 후 기습을 가하려는 계략이었다.동방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다른 이들에게도 권했다.“모두 앉아들 먹게. 소환이 무려 4년 10개월 12일 5시간 만에 돌아왔으니, 참으로 귀한 자리 아닌가.”
“주국공의 딸이라면, 곧 소군주, 지금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란 말인가?!”범진이 크게 놀라 외쳤다.강호의 사람들은 대개 조정, 특히 황실과 얽히는 것을 가장 싫어하는 법.소군주가 이곳에서 사고라도 나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다른 이들 또한 궁금해하며 물었다.“부맹주, 그 아이가 스스로 인정하였소?”“단지 내 추측일 뿐이오.” 봉구안이 솔직히 대답했다.“그럼 어찌 알아내셨소?”이때 동방세가 나섰다.“그 아이의 옷차림은 소박하나, 신발은 바꾸는 것을 잊었소.”“황금 실로 짠 비단과 은은히 빛나는 자수… 이는 황실에서만 쓰는 특수한 신발이라오.”“아이의 발은 금세 자라기에, 이렇게 호화롭게 장만해 줄 이는 주국공밖에 없을 것이오.”그가 말을 마치고 봉구안을 바라보며,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봉구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맞다고 했다.사실 그녀는 처음 소군주를 보았을 때부터 소녀의 눈썹과 눈매가 소욱과 닮았다는 것을 느꼈다.범진이 자청하여 말했다.“제가 저 아이를 데려다 주겠소! 내 발은 빠르고 힘도 좋아, 충분히 아이를 업고도 뛸 수 있소.”동방세는 이를 막지 않았다.“그럼 그렇게 하겠소. 그럼 이제 적을 물리칠 방도를 의논하도록 하지.”“그나저나, 구호 몇 마디를 정해 사기를 북돋는 것이 어떻겠소?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소. ‘마귀를 베고 용을 수호하라, 무림맹의 영광이다. 바람이 일고 구름이 몰아치니, 오직 우리 무림맹이 주인이다…’”그녀는 옆에 있던 걸레를 집어 동방세의 입을 향해 던졌다.이마에 몇 가닥의 검은 선이 내려앉은 그녀는 냉랭하게 경고했다.“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소?”입구에 세운 암호 정도가 이미 그녀의 인내심 한계였다.동방세는 살짝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내 구호가 별로였소?”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억지로 다른 데를 바라보았다.좋고 나쁨을 떠나, 맹주님은 정말로 눈치가 없구나…그 촌구석에서 접선할 때마다 주고받는 암호… 우리 모두가 얼마나 오래 참아 왔는가…!
동방세는 비록 봉구안이 무림맹을 떠났던 과거를 못내 섭섭히 여겼으나, 그녀가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것을 차마 묵인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마디 내뱉었다.“변했소. 예전엔 누구보다 자기 목숨을 귀히 여겼었는데... 자네 입으로도 말했지 않소.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고.”봉구안은 팔찌를 단단히 묶으며 담담히 대답했다.“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소.”동방세는 그녀를 막아서며 단호히 말했다.“그러니 모든 일을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시오. 자네는 성이 소씨가 아니지 않소.”봉구안은 그의 말을 무심히 흘려듣는 듯 바라보았으나, 동방세는 그녀를 향해 확고히 선언했다.“소환, 자네는 천룡회 일을 조사하는 데 전념하도록 하시오. 선성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봉구안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네가 어떤 방도로 해결할 셈이오?”동방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황제로 변장하는 방책은 나도 자네 생각과 같소. 그리고 그 역할을 맡을 사람은 아무래도 나보다 적합한 이가 없겠지.”봉구안은 순간 멈칫했다. “자네가 그 일을 하겠다고?”그녀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동방세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건 내가 맹주로서 해야 할 일이오. 그러니 더 이상 말리지 마시오. 이런 공훈은 내가 양보할 수 없거든...”농담조로 던진 말이었으나, 그의 태도는 결연했다. 봉구안은 그의 확고한 의지를 깨닫고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방세는 평소 유순해 보였으나 무공 실력과 폭발력만큼은 그녀에 뒤지지 않았다. 게다가 체격상으로도 남자인 동방세가 황제와 더 흡사해 변장에도 유리했다.…보름 뒤, 조정에서 보낸 사자가 무림맹에 도착했다. 동방세는 연회를 준비해 환대했으나, 사자는 연회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황제 폐하께서는 귀하들의 제안을 찬성하시어, 황제로 변장해 반군과 담판을 짓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다만, 폐하께서는 이 일에 있어 서왕 전하를 주관자로 삼으셨습니다. 전하께서 약 열흘 후 동신성에 도착할 것입니다.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