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역관 밖.일행은 짐을 정리하고 출발 준비를 마쳤다.가마는 하나뿐이었고, 이는 당연히 황제의 것이었다.봉구안과 동방세는 말을 타고 이동했다.주국공은 배웅하러 나와 있었고, 소욱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봉구안은 가마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가까이 다가가려 했는데, 갑자기 가마 커튼 사이로 머리가 하나 튀어나왔다.소군주가 가마 안에 앉아있던 것이다.그녀는 분홍빛 보따리를 안고 있었고, 봉구안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오라버니! 나 황제 오라버니랑 황성에 잠시 머물기로 했어요! 같이 가마에 타요!”봉구안은 즉시 뒤로 물러섰다.“소군주, 자고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그녀가 물러서자, 바로 뒤에 서 있던 소욱과 부딪힐 뻔했다.그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괜찮다. 소군주가 자넬 벗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야. 소군주의 명이니 거절할 이유는 없지.”소군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봉구안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오라버니…”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손을 빼내어 뒤로 감췄다.“저는 말을 타는 것이 더 편합니다.”“알겠어요…”소군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아 얌전히 물러섰다.이때, 주국공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소소야, 정말 나도 없이 괜찮겠느냐? 길이 멀고 험한데 시녀가 없으면 어찌하겠느냐.”소군주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저 벌써 여덟 살이에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사실 그녀는 아버지에게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오라버니처럼 협객이 되고 싶었다.협객 곁에 시녀가 있다니, 그것만큼 창피한 일은 없었다.주국공은 그녀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말했다.“간간히 편지 쓰는 것 잊지 말거라.”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문을 닫았다.그의 잔소리를 듣기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그와 동시에, 소욱은 봉구안을 스치듯 흘겨본 뒤 가마에 올라탔다.그 곁에는 진한길 한 명의 호위무사만 있었다.선성을 떠난 뒤, 앞에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더러 그들을 황성까지 호송하라니?”봉구안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동방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직설적으로 물었다.“이 방에 우리 둘뿐이니 솔직히 말해보시오. 폐비 봉씨가 그렇게 떠들썩하게 이혼한 것이 그대와 관련이 있으시오?”소환과 오랜 세월 함께한 동방세는, 그가 어린 혈기왕성한 소년에서 풍채 좋은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소환은 언제나 많은 여인의 사랑을 받았고, 특히 규방에 갇혀 자란 아가씨들에게는 그의 자유로운 성격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동방세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황제가 소환에게 보여주는 특별한 관심을 간파했다.더구나 황제가 굳이 폐비 봉씨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니, 황제가 소환을 견제하는 이유가 폐비 봉씨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봉구안은 그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아니. 나와 폐비 봉씨는 그 어떤 사사로운 관계도 없소.”동방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앞에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연민 어린 표정을 지었다.“그렇다면 황제와 잘 이야기해보시오.”“남자라면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자네도 잘 알겠지...”“만약 황제가 네가 폐비 봉씨와 엮였다고 의심한다면, 아마 널 죽이려할 지도 모르니 말이오.”“겉으로는 호위를 명하지만, 가는 길에 자네를 묻어버릴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봉구안이 눈을 들어 올리자 동방세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그는 어쩐지 그녀가 황제에게 미움받는 것을 즐기는 듯했다.봉구안은 그의 손길을 밀치고 나지막이 말했다.“알겠소. 내 직접 황제와 이야기하겠소.”어쩌면 동방세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그래서인지 황제가 자신을 보는 눈빛이 날카롭고 의심스러운 것 같았다.…황제와 군주는 간이 농가에 머물고 있었다.마당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소욱은 방 안에서 황성에서 온 밀서를 읽고 있었고, 진한길은 그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적막 속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똑똑.“폐하, 신 소환입니다. 안에 계십니까?”소욱은 서신을
황성에서와 달리, 무림맹에 도착한 후로 오백은 줄곧 가면을 쓰고 다녔다.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오늘 황제가 무림맹에 온다는 소식에 그는 더욱 모습을 숨겼다.게다가 소장군이 황제와 소군주를 호송해 황성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그는 어쩐지 난스러웠다.봉구안은 차분히 말했다.“너는 더 이상 나를 따라다니지 않는 게 좋겠다. 먼저 방성으로 가라.”오백은 명령을 받들며 말했다.“알겠습니다!”…남제의 외진 곳.부하의 보고를 듣고 나서 방 안의 법사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왕수인이 감히 황제를 죽이려고 한다니? 누가 그렇게 몰아가라 하였는가?”이때, 하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린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그는 장막 안쪽의 사람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왕수인을 만났을 때 그는 황제를 죽일 계획 따윈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궁지에 몰린 탓일 것입니다.”장막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분명히 말했을 텐데. 군량을 요구한다는 명목은 핑계일 뿐, 진짜 목적은 선성의 보물이다. 왕수인이 그런 짓을 벌이다니, 제멋대로 일을 그르쳤구나.”흰옷을 입은 이는 냉정하게 말했다.“왕수인은 믿을 수 없는 자입니다. 법사님, 이제 어떻게 교주님께 보고할지 생각해 보셔야겠군요.”“조정이 이 사건을 계기로 우리 천룡회를 조사하게 된다면, 교주께서도 불쾌해하실 겁니다.”“교주께서는 아직 조정과의 정면 충돌을 원치 않으십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그 말을 남기고 흰옷을 입은 이는 방을 나갔다.장막 안쪽의 좌호법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부하에게 물었다.“보물 지도를 찾지 못했나?”부하가 대답했다.“법사님,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소문에 따르면, 보물 지도는 이미 황제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법사님, 황제를 노릴 계획을 세울까요? 지금 황제 곁에는 호위병도 얼마 없습니다.”쾅!장막 안쪽에서 좌호법사가 손을 내려치자 부하는 깜짝 놀랐다.좌호법사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백룡왕의 말을 못 들었느냐? 지금은 조정을
봉구안은 소녀들로부터 깊은 인기를 얻어 이미 술을 몇 잔이나 마신 상태였다.또 한 명의 소녀가 술잔을 건네자, 동방세가 대신 받았다.“여러분, 우리 부맹주는 아주 훌륭하지만, 우리 무림맹 안에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이 많답니다!”사람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맞아요! 맹주님도 아직 장가가지 않으셨잖아요! 아가씨들, 맹주님께도 술 한잔씩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아름다운 이성의 호의를 거절하기란 어려운 법이다.동방세는 차라리 자기가 먼저 몇 잔을 자책하며 마셨다.그는 곧 봉구안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일 길을 떠나야 하니, 일찍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봉구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보였다.오랜만에 이렇게 편안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심가오, 이곳은 무림맹의 보호 아래 존재하는 무릉도원처럼 느껴졌다.이곳에 온 후로 그녀는 전쟁의 살벌함을 잠시나마 씻어낼 수 있었다.그때 누군가 장난스럽게 외쳤다.“맹주님, 부맹주님과 춤 한 번 춰주세요!”“맞아요, 춤 한 번 춰주세요! 어차피 두 분 다 사내지 않습니까!”동방세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벌떡 일어섰다.“좋습니다! 오늘은 좋은 날이니, 내 특별히…”놀이에는 경계가 있지만, 봉구안은 스스로의 선을 넘지 않았다.그녀는 동방세를 거절하려는 순간, 갑작스럽게 거대한 그림자가 앞을 가렸다.고개를 들어 보니,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소욱이었다.소욱은 봉구안 앞에 서서 동방세를 날카롭게 노려보며 말했다.“맹주는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좋아하는 여자가 없어서인가?”동방세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저... 저...”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터뜨렸다.그 큰 남자가 그렇게 울면서 뛰쳐나가다니 소욱은 동방세의 예상 밖의 행동에 적지 않게 당황한 듯했다.그는 고개를 돌려보니, 주변 모든 사람이 책임을 묻는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봉구안은 북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맹주는 젊었을 적 아내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맹
정말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녀의 입술, 그녀의 손, 술을 마시는 그 동작, 무심코 드러내는 모든 자세, 말투의 습관까지... 그 모든 것이 익숙한 법이다.소장군… 그는 그의 황후 봉구안이었다. 그는 확신하였다.달빛 아래, 소욱은 쓴웃음을 지었다.그녀는 그를 철저히 속였다.그녀는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는 맹 소장군일 뿐만 아니라, 무림을 평정한 부맹주 소환이기도 했다.그 면죄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가 자신을 위해 구한 것이었다.그러니 어찌 궁에 머무르길 좋아했겠는가?그녀가 보아온 세상은 광활한 북방뿐만 아니라, 끝없는 강호이기도 했다.그녀는 열세 살에 이미 강호를 누볐다.황궁은 그런 그녀에게 너무도 작았다.마치 강과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를 작은 수조에 가두는 것과 같으니, 답답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어젯밤 그녀가 심가오의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그녀가 어떤 삶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가까이에 그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욱은 점점 더 혼란스럽고 괴로웠다.그는 그녀의 정체를 폭로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떠나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이다.그녀가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로 마음먹었다면, 그는 모르는 척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다시는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터였다.다음 날 아침.소군주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그녀는 봉구안의 방 문을 두드리며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라버니, 우리 이제 황성으로 가요!”봉구안이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어젯밤, 아마 술을 마신 탓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눈을 감으면 소욱의 그 아련한 눈빛과 자신이 그립다는 말이 떠올랐다.동방세는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했고, 봉구안은 그에게 편지 한 통을 남기고 떠났다.그리하여 일행은 심가오를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봉구안은 선성의 난 이후, 천룡회가 반드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을 것이라 직감했다.그래서 더 평범한 가면을 쓰고, 말을 타는 대신 가마에 올랐다. 황제와 소군주에게 화를 불러올 위험을 줄
앞쪽 산체가 무너져 더는 길을 갈 수 없게 되었다.관아에서 사람을 보내 돌멩이와 나무더미를 치우고 있었으나, 시간이 걸릴 터라, 봉구안과 일행은 근처에서 잠시 쉬기로 하였다.소군주는 마음이 큰 아이인지라, 잠시 후에는 다시 활짝 웃으며 “황제 오라버니!”를 연발하였다.“황제 오라버니, 여기서 쉬어가는 건가요? 오늘 밤엔 소환 오라버니랑 함께 잘 수 있나요?”비록 소욱이 허락한다 하여도, 봉구안은 결코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근처에 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어, 소군주가 물고기가 먹고 싶다 하자, 소욱은 진즉 진한길에게 가서 물고기를 잡아오라 명하였다.진한길은 솜씨가 제법 있어, 잠시 뒤 크고 싱싱한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왔다.봉구안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불을 피워 간단한 나뭇가지로 만든 구이 틀을 설치하였다.소욱은 조금 떨어진 바위에 앉아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소군주는 그의 곁에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괴고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소환 오라버니는 참 좋으십니다. 황후마마가 되신다면 더 좋을 텐데요!”소욱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그녀의 마음엔 이미 자신이 없을뿐더러, 그녀는 황궁의 삶 또한 좋아하지 않았다.그와 그녀는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는 이미 그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었으며, 더는 억지로 붙잡지 않을 터였다.다만 지금은 그녀를 몇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단지 몇 번만이라도...마치 꿈처럼, 황궁으로 돌아가면 이 꿈은 깨어나고 말리라.소욱은 그런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만이라도 그 꿈 속에 머물고 싶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봉구안의 곁으로 가, 함께 준비를 거들기 시작했다.그는 능숙한 손길로 나뭇가지를 물고기 몸에 꿰었다.“부맹주는 아마 물고기를 구워보신 적이 없을 터, 이 일은 짐이 하겠소.”봉구안은 실로 물고기를 구워본 적이 없었다.그녀는 번거로운 일을 싫어하였고, 물고기 구이는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차라리 마른 빵을 먹거나 들에서 과일을 따먹
소욱은 어두운 얼굴로 앞으로 나아갔다.마음속은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마치 그가 무엇을 하든, 저 여인은 결코 만족하지 않는 듯했다.단회욱이 구운 생선이 자신이 구운 것보다 맛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갑자기, 그는 뒤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폐하!”걸음을 멈추며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무슨 일이냐.”“황제 오라버니! 소환 오라버니가 폐하께 사과드리러 왔답니다!”뒤돌아보니 소군주도 함께 있었다.그녀는 봉구안의 곁에 서서 한 손에는 구운 생선을 들고 있었는데, 입가에는 검은 그을음이 한 바퀴 둘러져 있었다.또 다른 손으로 봉구안의 팔을 흔들며 말했다.“맞죠? 오라버니? 황제 오라버니가 생선을 굽느라 얼마나 힘드셨는데요. 그런데 안 드시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렇죠? 맞죠?”봉구안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소욱은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가 곧 표정을 풀며 태연하게 말했다.“짐이 그 정도로 유치한 줄 아느냐. 짐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소군주는 황제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황제 오라버니, 적당히 하셔야죠! 소환 오라버니가 이렇게 와서 사과까지 하시는데, 왜 자꾸 빼고 그러세요? 어서 가서 구운 생선을 먹으러 가요!”소욱은 여덟 살짜리 꼬마에게 훈계를 받을 줄은 몰랐다.그렇지만, 그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그러나 셋이 다시 불가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본 것은 생선뼈 더미와 배부른 표정을 짓고 있는 진한길이었다.진한길은 무덤덤하게 말했다.“폐하, 부맹주... 두 분이 배가 고프지 않다고 하셨으니, 신하가 보기에 이 구운 생선을 버리는 것이 아까워서 먹었습니다.”소군주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너는 정말 큰 식충이구나! 흥!”소욱 역시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그러나 봉구안은 태연히 말했다.“제가 가서 마른 양식을 가져오겠습니다.”그녀가 돌아서자, 소욱은 차갑게 진한길을 바라보며 물었다.“맛있더냐.”진한길은 진심으로
그날 저녁 소욱 일행은 객잔에 입주했다. 봉구안은 소군주의 방 지붕 위를 지켰다.밤바람이 차가워서 추위가 느껴지자 그녀는 허리춤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 객잔에서 소욱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폐하, 서왕 전하의 밀서입니다.”진한길이 다가와서 아뢰었다.그는 황제와 지붕 위의 검은 인영을 보고 당황스러웠다.‘폐하께서 지나치게 소환을 신경 쓰는 것 같은데.’그는 소환이 사내를 좋아한다던 술 취한 동방세의 말이 떠올랐다.진한길은 신속히 고개를 저었다.소환이 그런 취향이 있다고 해도 황제는 아니었다.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복잡한 감정이 싹틀 리 없었다.소욱은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진한길의 손에서 밀서를 받아들었다.서왕은 서신에서 천용회를 언급했다.감옥에서 천용회의 기호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그렇다는 건 흑포가 감옥을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천용회의 도움이 있었다는 얘기였다.소욱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일정을 앞당겨야겠군. 속히 황성으로 복귀한다.”“예!”진한길은 공손히 답했다.진작에 이랬어야 할 일이었다.하지만 상황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소군주가 갑자기 앓기 시작한 것이다.그녀는 그날 밤부터 고열에 시달리며 의식을 잃었다.진한길은 현지 의원을 불러왔다.의원은 그녀의 맥박을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했다.“이건 극한의 병입니다!”밖에서 기다리던 소욱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소군주의 병증에 대해 그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사정을 아는 진한길은 의원을 보낸 후에 조심스레 말했다.“폐하, 군주의 병을 일반 의원은 치료가 힘든 것 같습니다.”소욱은 침상으로 다가가 파리하게 질린 소군주의 입술과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소환을 불러오거라!”“예!”잠시 후, 봉구안이 안으로 들어왔다.그녀는 어두운 곳에 숨어 있었기에 의원이 소군주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은 보았지만 그냥 일반 병증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소녀의 창백하게 질린 안색을 보자 그녀는 불길한 느낌이
"공자님,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곧 다 됩니다!" 연상은 즐겁게 부산을 떨며, 자신의 이런 행동이 소탁에게는 부담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곧, 음식들이 다 되었다. 연상은 미역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기대에 찬 표정으로 소탁을 바라보았다. "소 공자님, 오래도록 장수하시길 기원합니다. 모용길처럼...""아, 이런! 제 입이 이렇게 험합니다. 모용길 같은 악인과 소 공자님은 전혀 다르시죠." 소탁은 국을 먹지 않고 연상에게 물었다."너는 행복하니?" 연상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저야 당연히 행복하죠. 나쁜 사람들이 인과응보로 벌을 받지 않았습니까.""게다가 오늘 의원께서 말씀하시길, 공자님의 눈이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였어요.""전 공자님께서 곧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연상아, 너와 나는 이뤄질 수 없는 사이야."소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도 결국에는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연상은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담담하게 웃었다. "공자님, 저도 알고 있어요. 공자님은 황실의 귀한 분이시고, 저는..." "네 신분 때문이 아니야. 연상아, 난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다."이 말을 듣자마자 연상의 눈에 갑자기 한 줄기 빛이 어렸다. "단지 절 걱정하시는 것 뿐이지, 절 싫어하시는 건 아니군요?" 소탁의 목이 갑자기 조여들었다. "나는..." 그의 일생은 큰 기복이 있었고, 혼자 살아가게 될 운명이었다. 한 번도 인연을 찾을 생각을 해본 적 없었고, 누군가와 평생을 함께할 생각도 해본 적 없었다. 연상이란 아이는 그에게 있어 더 과분한 존재였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이 시간 동안 그녀가 곁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난 너에게 남녀 간의 사랑을 품고 있지 않아. 설령 내가 여자를 찾는다 해도, 그건 아내지 시녀가 아니야." 연상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이 크게 떠졌다. 시녀? 소탁은 선의로 그녀에게 일깨워주었다
완부옥은 예로부터 여자를 좋아했다. 남자를 대할 때조차도, 가볍게 희롱하거나 농을 던질 뿐이었다.그런 그녀 앞에 서왕이 호의를 드러내자, 그녀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게다가… 분명 그도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가.서왕은 그녀의 반응이 예상보다 격해 당황하며 서둘러 설명했다.“우리는 비슷한 처지가 아니더냐? 같이 사는 건… 서로에게 나쁘지 않지 않느냐.”“네가 떠나면, 난 또 다른 이와 혼인해야 할 텐데… 너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여인은 없을 것이다.”“또다시 나 자신을 숨기며 살아야 할 테니… 차라리 그냥 이렇게 지내는 게 낫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완부옥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그 말씀이셨군요.”그가 정말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건만…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한편 모용길의 죄행이 세상에 밝혀지자, 남제 전역이 발칵 뒤집혔다.백성들 또한 믿기 어려워했다.“그 자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고? 분명 불로장생의 술법이 있었던 게지. 폐하께서 그걸 두려워해 제거한 거야.”“약쟁이 사건도 정말 복잡하군. 처음엔 모용욱이 범인이라더니… 이번엔 왜 모용길이 나와? 설마 이번에도 헛다리 짚은 건 아니겠지?”“뭐가 어쨌든 간에 약쟁이는 전부 모용가 짓이란 말이잖아. 그런 집안은 몰아내야지!”분노한 백성들은 결국 모용가로 몰려가 돌과 썩은 달걀을 던지며 고함쳤다.“남제에서 당장 꺼져라!”“모용가 놈들은 천벌 받아야 마땅해! 죄 없는 사람들 고통받게 했잖아!”며칠째 모용가는 백성들의 소란에 시달려, 누구 하나 문밖을 나서지 못했다.……성 외곽의 한 촌락.낡은 농가 안, 여인이 낮은 목소리로 다급히 말했다.“들었어? 약쟁이 사건 피해자한텐 조정에서 보상금을 준다더라. 장순이네도 그랬잖아. 우리도 당장 관청 가자고, 장대복! 내 말 듣고 있는 거야?”장대복은 장순의 친삼촌이었다. 어린 조카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앞섰다.“형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그 모자 둘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당신도 알잖아.”
소욱은 미소를 지었다.“부창부수라 하지 않느냐. 함께 손잡고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황부도 결국 한 여자의 지아비이지 않겠느냐.”그 말을 들은 서왕은 한껏 조이던 가슴이 결국 힘없이 내려앉았다.그는 즉시 두 손을 모아 절하며 간언했다.“폐하, 그건 절대 안 됩니다!”“폐하께서는 일국의 군주이십니다. 어찌 여인의 그늘 아래 계시겠습니까?”“이 일이 만에 하나라도 세상에 알려진다면, 조롱과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평소 성정이 온화한 서왕이지만,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은근히 고집이 세지는 성격이었다.소욱은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였다.“그래서 말이지.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서왕은 속으로 중얼거렸다.‘폐하도 이게 창피한 줄은 아시는구나…’“황후 마마께서는 폐하께서 황부가 되겠다는 걸 허락하셨습니까?”소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황후가 왜 반대하겠느냐? 설마 다른 사내를 맞이해야한단 말이냐?”서왕은 잠시 헷갈려 그 말에 말려들 뻔했다.“그런 뜻이 아니라, 황후마마께서도 이 일이 폐하께 불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신지 여쭈려는 것입니다.”소욱은 눈을 좁히며 말했다.“내 너를 형제로 생각하니까 이런 말도 하는 것이다.”“이미 내가 결정한 일이야. 누구도 바꿀 수 없어.”“너는 그저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거라. 내가 황후와 함께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그러자 서왕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하지만 폐하 신도 이번에는 휴가를 청하려 했습니다.”매번 국정을 떠맡는 것도 지치는 일이었다.아무리 가까운 형제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겠는가.‘이 나라는 분명 소씨 가문의 일국이지 않는가.’ ‘잠깐…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서왕은 방금 스쳐간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감히 황제에게 이런 불만을 품다니. 마음으로도 짜증을 내다니, 감히 내가?’소욱은 인내심을 다잡으며 물었다.“휴가를 내겠다고? 무슨 연유냐?”서왕은 몇 초간 머뭇거리다, 정색하며 대답했다.“왕비와 함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소욱은
서왕의 심문이 시작되자, 손추의 수하였던 자객은 결국 모든 사실을 고백했다.“그… 그 일은 저희가 꾸민 일입니다.”“모용길이 왕가의 피를 원했고, 손추가 직접 그 일을 맡았습니다.”“하지만 그분은 왕이셨고, 무공도 출중하셨습니다. 손추는 선제를 이간질해 부친을 의심하게 만들었고, 결국 모반의 증거를 조작했습니다.”그 뒤의 이야기는 서왕도 이미 알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조정에 충성을 다했다.군주의 명이 떨어지면, 신하는 죽는 수밖에 없었다.유배길에 올라서도 그의 아버지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그는 끝까지 선제가 자신의 결백을 밝혀주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약쟁이단이 아버지의 목숨을 노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진실이 드러났을 때, 서왕은 마치 천근 무게의 짐을 내려놓은 듯 가슴이 후련해졌다.그러나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사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쓰라림으로 번져왔다.그가 정원으로 돌아오자, 멀리 나무 아래서 완부옥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서왕은 한 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와락 안아 올렸다.“이번 일을 해결해줘서… 정말 고맙다!”“드디어 모두가 알게 되었어. 부친께서 얼마나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선제도 진범을 찾고자 했었지만, 결국 오늘에서야 제대로 밝혀졌어. 정말, 정말 고맙다…”서왕은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완부옥은 조금은 지겨워하며 그를 말렸다.무엇보다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그녀를 직접 껴안을 줄은 몰랐다.조금 불편한 표정이었지만, 완부옥은 조용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토닥였다.“됐습니다. 됐어요. 그렇게 큰일도 아닌걸요.”“정말 제게 보답하고 싶다면, 폐하께 소환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서왕은 그녀를 놓고,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아직도 포기 못 한 것이냐?!”완부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런 게 아닙니다.”“그저 소환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은 것뿐입니다.”“정인이 아니더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