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무리했던 탓에, 봉구안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교무당의 수업이 미시에 있었기에 그녀는 나갈 채비를 해야만 했다.소욱은 그녀에게 오늘은 쉬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끝내 참석하겠다고 고집했다.학생들은 전날 그녀가 남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다. 오늘 수업에서는 제각각 다른 답을 내놓았으나 대부분 일리 있는 이야기들이었다.특히 병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있는 무장들의 의견은 주목할 만했다.“가득 차면 해가 되고, 겸손해야 이익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가득하면 깎아내려야 한다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가장 적절한 사기 비율은, 우리 쪽이 적군보다 1~2할 높을 때입니다. 적으면 우리 사기가 부족하고, 너무 많으면 우리 군이 자만에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견진은 병사를 이끌어 본 경험은 없었지만, 한 마디 거들었다.“황후마마, 제 생각에는 오히려 배수진을 치는 것이 모든 조건이 유리한 상황보다 더 높은 승률을 가져올 때가 많습니다.”봉구안은 잔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보아하니 병법을 잘 익혔구나. 오늘은 실전 연습을 해보겠다.”“실전 연습?”학생들은 궁금해졌다.실제로 전쟁이라도 나가는 건가?봉구안은 그들을 훈련장으로 이끌었다.훈련장에는 100여 명의 인원이 서 있었다.이들은 집을 지키는 하인, 시장 상인, 궁의 호위 등 복장과 차림새가 제각각이었다.봉구안은 명령을 내렸다.“방금 했던 이야기대로 상대를 골라 싸워보거라.”“내 요구는 단 하나다. 반드시 이겨야한다.”학생들은 자신만만했다.방금 내린 결론대로, 대부분 자신보다 약간 약한 상대를 선택했다.그렇게 하면 이기면서도 체면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봉구안은 유연이 가장 강해 보이는 상대를 선택한 것을 발견했다.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선택이었다.한바탕 대련이 끝난 뒤, 유연을 제외한 모든 학생이 패배했다.견진은 믿기 어려워하며 겸손하게 물었다.“마마, 왜 이런 결과가 나온 건가요?”다른 사람들도 납득할 수 없었다.왜 전부 졌단 말인가!봉구안의 눈빛은 차가
동산국.봉구안은 대혼례 전에 자신이 길에서 받았던 적염련이 떠올랐다.스승은 그 적염련이 동산국에서 자라는 것이라고 했었다.적염련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지금도 실마리를 잡지 못했다.이제 약쟁이와 관련된 단서마저 동산국으로 이어지니, 동산국과 관련된 이 점을 깊이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황제가 영화궁으로 왔다.소욱은 익숙한 듯 내전에 들어섰고,봉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그는 살짝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예를 갖추지 말라고 했지 않았느냐.”“그렇게 하겠습니다.”소욱은 곧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보았다.“뭘 하고 있었느냐?”그는 묻는 동시에 지도를 들여다보았다.거기엔 몇 개의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고, 그 경로는 모두 동산국으로 향하고 있었다.“이게 무엇이냐?”봉구안은 차분히 대답했다.“상로입니다.”소욱은 눈살을 찌푸리고 깊이 생각했다.“동산국은 부유한 나라로 문치를 숭상하고 무력을 경시하는 지역이다. 지난 100년 동안 손꼽을 정도의 전쟁에만 참여했으며,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거의 없었지.”“선황 때부터 양국은 사신조차 교환하지 않았다.”“따라서 양국 간의 상로는 개설되지 않았지. 이 동산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무역이 없는데, 이 상로는 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이냐?”당시 남제는 외국 상인들이 정탐꾼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상로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설령 외국과 무역을 시작하더라도, 그들 상인들이 남제 내 모든 도시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는 없었다.남제가 개방한 도시는 극히 몇 곳뿐이었으며, 선양이나 황성 같은 전략적 요충지는 외국 상인들의 출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더욱이 양국 간의 무역이 성립되려면 동맹 관계가 전제되어야 했다.상호 이익이 있어야 비로소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결국 동산국과 남제 간에는 상로가 끊긴 지 오래였고, 그런 상황에서 봉구안이 그린 상로는 소욱을 당혹스럽게 했다.봉구안은 그에게 설명했다.“이것은 비밀 통로입니다. 양국이 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다음 날, 봉구안은 호위들과 함께 도관으로 향해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이 통로는 소욱이 이전에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했지만, 지금까지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봉구안은 횃불을 들고 좁고 긴 통로를 걸었다.이곳은 복잡하게 설계된 함정이 숨겨져 있어, 각 길목이 모두 감춰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녀가 탐색하던 중, 앞서 가던 호위들이 갑자기 소리쳤다.“화약이 있습니다! 마마를 보호하라, 철수하라!”쾅!!어떤 구간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터널이 붕괴되었다.돌들이 아래로 쏟아져 내리며 모든 길을 막아버렸다.봉구안은 흙먼지 속에서 눈을 들어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아꼈다.만약 진상을 밝히기도 전에 죽는다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터였다.확실한 준비가 없었기에, 그녀는 즉시 명령을 내렸다.“철수하라.”바로 그때, 도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앞에 선 사람은 평소 교무당에서 보던 모습과는 달랐다.그는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있었고, 차가운 귀족의 분위기를 풍겼다.봉구안 일행이 도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본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갔군. 우리도 가자.”뒤에 있던 부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예.”황궁.소욱은 지하 통로가 폭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봉구안의 안위가 매우 걱정되었다.그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직접 궁문으로 나가 그녀를 맞았다.그녀가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어 그는 그녀에게 더는 그곳에 가지 말라고 설득하고 싶었다.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봉구안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먼저 말했다.“저는 괜찮습니다. 오늘의 일이 증명하듯, 저 숨어있는 자들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실수하고 흔적을 남길 것입니다.”그녀는 곧이어 말했다.“전문가는 전문적인 일을 맡는 법이죠. 그 지하 통로에 설치된 함정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동방세를 불러
비록 중매였지만, 사내들은 자신의 재능을 뽐내고자 칼을 휘두르며 무예를 선보였다.녕비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아직 세상 이치를 모르는 그녀는 깊은 밤마다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후궁의 다른 비빈들이 가끔 호위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궁에 들어온 뒤로 그녀는 한 번도 평범한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공연이 끝난 후 녕비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짝을 지어 꽃놀이를 하라 명했다.이 말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했다.누군가 마음에 든다면 직접 나서 초대할 수 있었다.궁중의 중매는 한창 흥겨웠다. 마침 장공주가 태후를 찾아 궁에 들어오다가 웃음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구경하게 되었다.멀리 나무 아래,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여자는 단아한 행동과 온화한 말투로 남자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얼굴을 붉혔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유 공자, 교무당에 들어가셨다니 참 재능 있는 분이시군요. 장차 멋진 장군이 되시길 바랍니다.”남자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고맙다고 말했다.그 모습을 본 여자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손수건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유 공자는 준수한 외모에 교무당의 제자로, 황후의 가르침을 받는 인물이었다.여자는 용기를 내어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렇다면, 저희 집으로 청혼하러 오기를 기다릴게요.”그 말을 남기고 여자는 자리를 떠났다.장공주는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다. 여자가 떠난 뒤, 유 공자가 손수건을 내던지는 모습까지도.곁에 있던 궁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공주마마, 저 사람 참 보기와는 다르게 겉과 속이 다르네요. 그 여인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손수건을 받았을까요? 관가의 집안을 두려워해 자기 출세에 해가 될까 염려한 걸까요?”장공주는 그가 교무당의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는 속으로 다짐했다.“저 사람의 이름과 품행을 알아보도록 하거라.”“예, 공주마마.”그녀는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봉구안이 장공주의 교무당 입학 요청을 거
봉구안은 장공주의 속셈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다.“공주마마, 오늘 보신 일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습니다.”“설령 그 일이 사실이라 해도, 저는 유연의 행동이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계략이 없다면 어떻게 군대를 지휘하겠습니까?”“궤변에 능하지 않으면 어떻게 적을 속이겠습니까?”“저는 이 일로 인해 유연의 능력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장공주는 실망하며, 봉구안이 자신에게 그 정도로 신뢰를 주지 않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황후, 제 말을 믿어주세요. 그 유연이라는 사람은 속셈이 좋지 않습니다.”“비록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제 감으로는 그는 제어하기 어려운 자입니다.”장공주의 말을 봉구안은 어느 정도 귀담아들었지만, 그녀 앞에서 그것을 드러내진 않았다.그도 그럴 것이, 유연을 내보내는 것보다 장공주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더 꺼렸기 때문이다.황후가 된 이상, 경중을 잘 따져야 했다.장공주가 떠난 뒤, 봉구안은 시녀 만추에게 명령을 내렸다.“유연의 고향에 사람을 보내, 그 사람의 품행을 철저히 알아보도록 해라.”군대를 이끄는 이는 계략이 필요하지만, 속임수에 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중매가 끝난 뒤, 완부옥의 자매 동맹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그들 중에는 흥미를 느끼는 남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궁에 들어가길 원치 않았다.그 이유는 궁중의 엄격한 규칙과 화려한 궁궐의 공허함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었다.그들은 확신했다.이 황궁은 소환이 오래 머무르지 못할 곳이란 걸 말이다.그렇다면, 그들은 왜 자신들까지 끌려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게다가, 이성적으로 생각해본 후 그들 역시 차선아처럼 완부옥의 음흉한 속내를 감지했다.그들 중 누구도 완부옥만큼 소환에게 집착하는 이는 없었다.만약 궁에 들어가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면, 왜 완부옥 자신은 들어가지 않았을까?진실은 단 하나뿐이었다.완부옥은 소환이 머지않아 궁을 떠날 것이라 확신했고, 차라리 궁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동방세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번쩍 뜨며 무너진 한 구역을 가리키더니 짐작했다.“이건 자폭의 흔적이오. 대개 추격병을 막고 통로를 차단하려고 이런 일을 벌이지.”그는 말하는 동안에도 손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다.봉구안은 그가 그린 거미줄 같은 그림을 보고 잠시 고심했다.“이게 뭔가?” 범진은 좌우를 살펴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동방세는 그림을 다 그린 후, 그들에게 설명했다.“내가 보기에 이 비밀 통로는 ‘거미줄’ 구조일 가능성이 크오.”“거미줄이라니?”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동방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덧붙였다.“기계술에서 이런 비밀 통로를 거미가 거미줄을 치듯 설계해 중심점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퍼뜨리며 연결하오. 더욱 복잡한 경우엔 음양의 방위를 포함해 방정 방향까지 모두 얽어 놓아 거대한 거미줄 형태를 만들지.”범진은 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당신 말은 천간지지의 원리를 따른다는 뜻인가?”동방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소. 그래서 일종의 ‘가짜 팔괘진’이라 불리기도 하오.”봉구안은 총명한 성정 덕분에 동방세의 설명을 곧바로 이해했다.그녀는 동방세의 그림을 가리키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이 비밀 통로가 바로 거미줄 같군.”“중심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세로 줄, 즉 남북과 동서를 연결하는 축이오.”“이 세로 줄을 둘러싸며 점점 바깥으로 확장되는 원형의 가로 줄도 있소.”동방세는 눈을 가늘게 웃으며 말했다.“역시 명성이 자자한 맹 소장군답소. 한 번 듣고 바로 이해했구려.”그는 이어 말을 이었다.“이런 완벽한 ‘거미줄’ 진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오.”“나는 서책에서만 보았는데, 실제로 완성한 사람은 없었소. 이건 선대 고인들의 창의적인 발상일 뿐이오. 그들은 거미가 줄을 치는 모습을 보고 교훈을 얻은 것이지.”범진이 끼어들며 말했다.“그런데 보지도 못한 진을 어떻게 이 비밀 통로와 연결지을 수 있소?”동방세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건 자네
봉구안은 서신을 열고 대강 훑어보았다.그중 하나가 그녀의 미간을 깊게 찌푸리게 했다.유연이 군 복무를 했으며, 바로 북대영 출신이라는 것이다.다른 기록들은 아무리 봐도 특별한 문제가 없었다.만추가 제안했다.“마마, 교무당에서 학자를 선발할 때 이미 철저히 조사했으니, 유연이 입학한 것은 관청의 기록에 오류가 없다는 뜻입니다.”“하지만 저의 생각으로는, 마음만 먹으면 많은 것들이 조작될 수 있다고 봅니다.”“마마께서 정말 이 사람을 의심하신다면 다시 철저히 조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봉구안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유연이 북대영에 있었으니, 스승에게 부탁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한 번 더 확인해도 나쁠 건 없었다.다음 날, 교무당에서는 무시험이 열렸다.이 시험은 단순한 대련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두 팀으로 나뉘어 적의 손에 붙잡힌 동료를 구출하는 방식이었다.시험 장소는 성외 연래산이었다.봉구안은 이 시험을 통해 유연의 실력을 확인하고자 했다.시험이 시작되었다.봉구안은 산 아래에 머물며, 산 위의 상황을 직접 알 수 없었다.다만 은육을 보내 상황을 은밀히 지켜보게 했다.한 시진이 지났을 무렵, 산속에서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이는 봉구안이 정한 구조 신호로, 비상 상황에서 울리게 한 것이었다.시위들은 곧바로 소리를 따라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연이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봉구안은 그의 얼굴이 피투성이로 물들고, 기절한 모습을 보고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그의 실력으로 어떻게 첫 번째로 부상을 입을 수 있단 말인가?동행한 의원이 즉시 그의 상처를 치료했다.은육이 봉구안에게 보고했다.“마마, 유연과 그의 팀은 적을 기습하다가 발각되었습니다.”“결정적인 순간에 유연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 다른 이들을 구했습니다.”봉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손짓으로 은육을 물러가게 했다.두 시진이 지나고, 유연의 희생 덕분에 그의 동료들은 몸을 숨기고 기회를 노려 결국 인질을 구출했다.결국 유연의 팀이
봉구안의 예감은 정확했다. 문제가 생긴 곳은 바로 북연이었다. 소욱이 자세히 설명했다. “북연 태자가 궁을 강제로 점거해 왕위를 차지했다. 지금은 이미 즉위했지.” 봉구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새로 즉위한 황제는 반드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과감히 행동할 것입니다. 하물며 태자에서 황제로 오른 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폐하, 북연은 마치 폭발할지 모를 진천뢰와 같습니다.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소욱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누군가 남제와 북연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이번 태자가 왕위를 찬탈한 것도 그 배후에 누군가가 조력했을 가능성이 크지.”“이미 밀지를 작성해서 변방 장수들에게 보냈다. 어떤 움직임이 있더라도 신중히 대응하라고하였다.”…한편, 북연. 몇 번이나 폐위되었던 태자는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늙은 북연 황제는 동화대에 갇혀 있었다. 백관들은 하나같이 새 황제를 치켜세우며 조정의 분위기는 살얼음과도 같았다. 북연 황제의 병든 듯한 눈빛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며 웃으며 물었다. “남제가 우리 장병들을 죽였으니, 출병하여 응징하겠노라. 이의가 있는가?” 한 관료가 즉각 반대했다. “폐하께서는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남제는 이미 양 나라를 병합했으며, 북연은 남제를 직접 공격하기 어려운 처지입니다.” “또한 지금의 남제는 병력이 막강하고 명장이 많아 쉽게 얕볼 상대가 아닙니다.” “게다가 최근 북연은 잦은 전쟁으로 병력을 많이 잃었으니, 이제는 휴식을 취하며 재정비해야 할 때입니다. 더구나 남제가 만든 화룡 병기는 저희에게 승산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또 다른 문관이 나와 이를 거들었다. “폐하, 태상황께서 재위 중 남제와 10년간 불가침을 약속하셨습니다.”새 황제를 지지하던 신하들이 즉각 반박했다. “약속을 깬 것은 태상황이지, 황제가 아니십니다! 태상황이 양연삭의 꾐에 빠져 남제를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
소욱은 봉구안의 생각을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방금 전까진 분명 모용길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태조 황제 묘까지 들먹이는 것일까?그래도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답해 주었다.“태조께서는 동릉에 묻혔다.”도굴을 막기 위해 태조의 능은 총 열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고, 각각의 무덤엔 무거운 병력이 배치되어 있었다.허나 그 열세 곳 모두가 가짜였다.진짜 묘는 오직 역대 황제만이 그 위치를 알고 있었다.봉구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곧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능을… 잠시 열어볼 수 있겠습니까?”소욱의 눈썹이 즉시 찌푸려졌다.“안 된다.”태조 황제는 이미 서세를 마친 성조였다.그분의 안식을 함부로 깨뜨릴 순 없었다.봉구안도 그가 이 요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 일은 약쟁이 사건의 진상에 직결되는 문제였다.그녀는 침착히 입을 열었다.“진정 불로장생을 원한 사람은 모용길이 아니라 태조 황제였을 수도 있습니다.”소욱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구안아, 지금 네 말은… 너무 황당하구나.”“설마 이 모든 약쟁이 사건의 배후가 태조 황제라는 것이냐?”도무지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동방세가 그린 그 인물은 모용길과 닮았을 뿐, 자신들의 소씨 가문과는 단 한 점도 닮은 데가 없었다.봉구안도 이건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라 단정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이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모용길이 연막을 치고 모용욱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운 뒤, 모용가 전체를 끌어들인 것만 봐도… 그 자는 모용가의 존망 따윈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그렇다면 그 자가 진정으로 지키고자 한 건, 다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폐하, 이백 년 전의 일은 저희가 직접 본 게 아닙니다.”“하지만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 황제께서는 남산왕, 서왕, 그리고 모용길과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사이였다고 합니다.”“남산왕은 태조의 명을 따라 세세손손 봉맥을 지켜왔고, 서왕가는 동부를
봉구안은 이전에 모용가의 선조에 대해 조사하면서, 그들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다.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태조 황제가 천하를 개척할 당시,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군량과 보급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승상에 올랐지만 불과 세 해 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향년, 마흔.그런데 지금 동방세가 그려낸 배후 인물의 얼굴이 그 모용길과 너무도 흡사했다.소욱 역시 그림을 비교해보았다.한 손엔 방금 받은 초상화, 다른 한 손엔 책에 실린 옛 그림이 들려있었다.똑같다고 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십중팔구 정도 닮은 듯했다!그는 봉구안과 눈을 마주쳤다.“얼굴이 닮은 거겠지. 아니면 모용가 어딘가에 숨어 있던 서자일지도 몰라.”소욱은 분명히 선을 그었다.그 모용길이라는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리 없다는 것이었다.하지만 봉구안은 강호를 누비며 별의별 기이한 일을 겪은 사람이었다.“충북에는 삼백 살 넘은 노인이 있다 들었습니다.”“신무파 장문도 이백십칠 년을 살았다죠.”“남제가 건국된 지 이제 겨우 이백 년 남짓입니다.”“만일 정말 불로장생이 가능하다면, 모용길이 살아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봉구안은 담담히 말했다.게다가, 그녀를 더욱 확신에 가까운 의심으로 이끄는 단서가 하나 더 있었다.“폐하, 서왕께선 납치 당시에 그들이 피를 원했다고 했습니다.”“그 피를 마시면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요.”“이건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소욱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서왕 말로는, 그 자가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 하던데... 횡설수설하는 미치광이였다고.”봉구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들을 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 몰라도, 저는 오히려 모용길이 이번 일의 진짜 배후라 생각합니다.”“모용가의 조상사당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 독초를 재배하려면 내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지요.”“그리고 모용욱의 검거도 너무 순조로웠습니다.”“모든 것이… 너무 ‘그럴듯’했어요.”“어쩌면, 모든 건 모용길이 준
봉구안은 소욱이 자신을 다시 궁으로 데려온 진짜 이유가, 자신이 서여국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듣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욱은 조심스레 사과할 말을 고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문득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소욱은 놀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봉구안은 다시금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동작엔 위로와 다정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이번 일은 폐하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 저를 의심하신 건 제가 드린 믿음이 아직 부족했기 때문이겠지요.”“담대연은 말재주가 뛰어납니다. 누구라도 한 번쯤은 흔들릴 만합니다.”그녀는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제 마음속에서 가족이 있는 곳이, 진짜 ‘집’입니다.”“폐하께서는 저의 지아비이십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저의 여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이지요.”“서여국이 아무리 좋아도, 폐하만큼 소중하진 않습니다.”소욱의 손끝이 떨렸다.“너… 그 말이 진심이냐?”그는 여전히 확신이 없는 듯한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내가 정말 네 마음속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야?”봉구안은 오히려 되물었다.“폐하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그러자 소욱은 손가락을 접으며 셈을 하기 시작했다.“사부랑 사모, 그리고 봉장미, 게다가… 네 뱃속에 있는 이 녀석.”“세상 사람들 다 그러더라. 자식은 어미의 인생 그 자체라고… 지금도 내 순위가 그리 높진 않은데, 아이가 태어나면 내 자리는 더 밀려나겠지.”봉구안은 어이없으면서도 웃음이 나왔다.그녀는 진지하게 설명했다.“사부님과 사모님은 저에게 산처럼 큰 은혜를 주신 분들이지만, 그분들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혈육’일 뿐입니다.”“저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아이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폐하를 마음에 두었기에 생긴 아이인데, 어떻게 그 아버지를 제쳐둘 수 있겠습니까?”“폐하야말로 제가 앞으로 비바람을 함께할 사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유
아침 조회.조정에는 분노가 들끓었다. 신료들은 하나같이 모용가를 엄하게 조사하겠다며 격분한 목소리로 외쳤다.“폐하 모용가 사당에서 이상한 점이 드러났고, 모용욱의 저택에서는 약쟁이 소굴이 발견되었습니다. 반드시 모용 일가 전체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신도 동의합니다! 모용욱 혼자만의 짓일 리 없으며, 모용가의 다른 이들도 직접 연루되진 않았더라도 방조하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조묘 사건 이후, 모용가는 이미 추락할 대로 추락하였다.이번 약쟁이 사건은 수많은 무고한 관리까지 연루되며 사람들의 불신과 공포를 증폭시켰고,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민심을 수습하려면, 이참에 반드시 철저히 죄를 묻고 엄벌해야 했다.결국 모용 일가는 또다시 전원 구금되었다.이전엔 모용선의 아버지, 모용렴이 자신을 희생해 가문을 구했지만… 이번에는 그럴 틈조차 없었다.옥양산.태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동요했다.더 이상 모용가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은 너무나도 중대했다.“약쟁이라니... 어떻게 모용가가 그런 일에 휘말릴 수 있단 말이냐…”수십 년을 모신 상궁이 다급히 물었다.“태황태후마마, 이제 어찌해야 할지…”태황태후는 부처상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떨구었다.“모용가가 정말 죄를 지었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구하겠느냐. 죄가 없다고 해도 나는 이제 황제 얼굴조차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말을 전하겠느냐.”“이건… 하늘이 우리 모용가를 멸하려는 것이 분명하다…”태황태후는 그날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황궁, 자녕궁.태후는 태황태후의 병세를 전해 듣고 즉시 태의를 보냈다.곁에 있던 계 상궁이 조심스레 속삭였다.“태후마마, 태황태후께서는 예전에 천룡회와 손잡고 폐하를 몰아내려 하셨고, 이번엔 모용가가 약쟁이 일로 큰 소란을 일으켰으니 굳이 정성을 들이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태후는 눈썹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감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 것이냐! 입을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말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