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성.성 안의 적군은 구련산으로 물러난 북연군을 제외하고 모두 포로로 붙잡혔다.포로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나서야 선성을 나설 수 있었다.대하군이 보유했던 다양한 활과 석궁은 선성에 남겨져 남제군의 손에 넘어갔다.단춘은 그 무기들을 파괴하려 했으나, 매번 남제군의 감시를 받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추운 날씨 속에서 연합군 병사들은 얇은 옷만 걸친 채 선성을 떠났다.서로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며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단춘은 마지막으로 선성을 돌아보며 굳게 다짐했다.대군을 이끌고 반드시 이곳에 다시 돌아오겠다고.준비도 없이 기습당하고,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전력이 약해져 이번처럼 참담한 패배를 당하지 않겠다며 이를 악물었다.포로들은 남제군의 군영으로 옮겨져 남제군의 관리를 받았다.포로 생활의 유일한 이점은 마침내 음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한 사람당 흰 죽 한 그릇과 만두 하나뿐이었지만, 선성에 갇혀 있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그러나 단춘처럼 강직한 이는 남제군이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했다.그는 죽이 담긴 큰 솥을 발로 차 뒤집어버렸다.남제군은 즉시 그를 붙잡아 나무 우리에 가뒀다.그는 머리를 들어 대하 병사들이 무릎을 꿇고 흘러내린 죽을 핥는 모습을 보았다.그 모습에 단춘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그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크게 외쳤다.“이 비굴한 자식들아! 적군의 음식을 먹지 마라! 안 들리느냐! 먹지 말라고!”그러나 목숨이 달린 문제 앞에서 많은 연합군 병사들이 굴복했다.단춘처럼 남제군의 음식을 거부하며 굶기를 택한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다.그들마저도 단춘처럼 솥을 뒤엎지는 않고 조용히 앉아 단식으로 저항할 뿐이었다.선성.봉구안은 구련산 방어를 맡아, 황제가 직접 장병들을 위로하며 밤마다 순찰을 돌고 있었다.지휘 막사 안.황제와 황후가 마주 앉아 있었다.진한길이 식사를 담은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꺼냈다.봉구안은 잠시 갑옷을 벗고 편한 옷차림으로 앉아 있었
감옥에서 간수가 전한 말에 담대연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는 벽에 새겨진 거미줄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감정을 지운 듯 멍한 얼굴로 물었다.“바깥 전황은 어떤가?”간수는 돈을 받고 전하는 말인 만큼, 예의를 차려 대답했다.“폐하께서 직접 나서서 선성의 적군을 진압하셨습니다. 각국에서 온 지원군도 모두 생포됐고요.”“현재 조정에서는 북연과 대하를 공격할 준비로 사방에서 징병령을 내리고 있습니다.”“이제 남제는 평온을 되찾았다고 보시면 됩니다.”담대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거미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는가?”간수가 잠시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동방 가문에서 만든 기계 진법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거 참 대단하더군요. 남제 전역에 퍼져 있어서, 적이 어디서 나타나든 바로 막을 수 있답니다.”간수는 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흥이 난 듯했다.그러나 담대연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그는 몸을 돌려 간수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동방 가문의 기계 진법이라고?”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대답했다.“맞습니다. 바로 동방 가문입니다. 동방 공자가 대군을 이끌며 만들었다고 하더군요.”“지하 통로가 각 성을 연결해 적이 방심할 틈이 없도록 만들었답니다. 게다가 다양한 기계 장치들까지…”담대연의 눈빛은 갑자기 싸늘해졌다.‘동방 가문이라니?’‘그럴 리가 없다.’‘이건 분명 담대 가문의 ‘거미줄’ 진법이란 말이다.’그는 속으로 분노를 삼키며 생각했다.‘봉구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담대연의 눈은 깊은 어둠을 담고 있었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속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선성.구련산은 여전히 군사들에게 철통같이 포위당했으나, 다른 지역은 점차 안정되고 있었다.황제와 황후가 떠나는 날, 주국공이 소군주를 데리고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다.소군주는 서운한 표정으로 봉구안의 소매를 붙들며 말했다.“황후마마, 제가 황성에 가서 찾아뵙겠습니다! 저도 무술을 배우고 싶
선성, 주국공부.호위병이 다급히 내원으로 들어와 주국공에게 보고했다.“대인, 북연군이 북연 황제를 붙잡아 항복하러 왔습니다.”주국공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런 일이 있었느냐?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나간 주국공은, 땅바닥에 오장으로 묶여 굶주려 야위어버린 북연 황제와 그를 둘러싼 북연군들을 보았다. 북연군들은 갑옷과 무기를 내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애처롭게 고개를 조아렸다.“제발, 먹을 것을 조금만 주십시오... 저희는 항복하겠습니다!”주국공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북연 황제를 힐끔 본 뒤 고개를 저었다.그토록 오만했던 북연 황제가 이토록 비참한 모습으로 잡히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과연 사람의 마음은 끝까지 알 수 없는 법이다.주국공은 단호하게 명령했다.“저들을 모두 잡아들여 수감하라!”“예!”그날 밤, 주국공은 직접 서신을 작성해 황제에게 급히 전하도록 했다.이때, 소욱과 봉구안은 황성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그들이 지나가는 관도 곳곳에 백성들이 나와 군대를 환영하고 있었고, 평화가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모습이었다.그날 밤, 그들은 근처 역관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봉구안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오랜 전투의 피로를 씻어냈고,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소욱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에 깊이 몰두한 모습이었다.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토록 심각하십니까?”소욱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주국공이 서신을 보내왔다. 북연군 일부가 항복하면서 북연 황제를 잡아 그 진정성을 보여주려 했다 하는구나.”북연 황제의 성격상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지만, 예상보다 빠른 전개였다.봉구안은 놀라며 말했다.“그렇다면 이번에는 북연도 북연 황제의 생사에는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겠군요.”소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잡아 자기 무릎 위로 앉혔다.피곤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그건 북연
역관 내 다실.늙은 군의와 그의 제자는 다실로 안내되어 상석에 앉은 황제를 알현했다.소욱은 간단히 세수를 마친 상태로 편안한 옷차림이었지만, 여전히 황제의 위엄을 감출 수 없었다.검은 머리카락은 백옥으로 장식된 비단 끈으로 단정히 묶였으며, 강인하고 당당한 인상을 풍겼다.“군의라 하면서 대군을 따라 행군하지 않고, 왜 여기까지 도망쳐 온 것이냐?”황제의 날카로운 질문에, 늙은 군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폐하, 미천한 신은 위급한 상황에 임명된 사람일 뿐, 본래 군의는 아닙니다.”그의 말이 끝나자, 한 사람이 다실로 들어왔다. 바로 봉구안이었다.“폐하.”소욱은 그녀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지막하게 물었다.“좀 더 자지 않고 무얼 하러 나왔느냐?”봉구안은 그에게 가볍게 예를 표한 뒤,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늙은 군의와 약동을 정식으로 소개했다.“이 일은 제가 부족했음을 탓해야 할 일입니다. 폐하, 당시 천지설산에서 제가 난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바로 이분들에게 도움을 받은 바 있습니다.”소욱의 얼굴에서 다소 날카로웠던 표정이 풀렸다. 그는 곧 명령을 내렸다.“그들이로구나. 앉을 자리를 마련하라.”늙은 군의는 황급히 몸을 숙이며 손사래를 쳤다.“그런 호의를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폐하. 미천한 몸으로 감히 자리를 청하지 못합니다.”하지만 옆에 있던 약동이 순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스승님, 앉으세요. 우리 한참 걸어왔잖아요. 신발도 다 해졌고요.”그는 어릴 적부터 스승을 따라 깊은 산에서 살았기에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자라왔다.황제가 얼마나 고귀한 사람인지, 신분의 높고 낮음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본능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늙은 군의는 약동의 무례를 바로잡으려 황제에게 사죄했다. 하지만 소욱은 그들을 꾸짖지 않았다.“격식을 차리지 마라. 내가 앉으라 했으니 편히 앉아라.”잠시 후, 역관의 하인이 다과를 가져왔다.늙은 군의는 봉구안을 보자 원래 황제에게 전하려 했던 말을 잠시 망설였다.소욱은 그의 마음을 이해한
봉구안은 소욱이 스승과 제자를 만난 이후 며칠 동안 무언가에 깊이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무거웠다.그가 약쟁이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길을 따라 말을 타고 앞장서면서, 봉구안은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는 것을 느꼈다.뒤돌아보니 소욱이었다.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고, 그의 어두운 눈빛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7월 초.승리의 기쁨 속에서 대군이 황성으로 귀환했다.황성의 거리는 인파로 가득 찼고, 백성들은 환호와 박수를 보내며 대군의 승전을 축하했다.“황제 폐하 만세!”“황후마마께서는 정말 대단하셔!”부모들은 아이들을 번쩍 들어 올려, 이 역사적인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폐하께서 친히 출정하셔서 위기를 해결하고, 선성의 적군을 전부 사로잡으셨다지.”“북방과 동방도 다시 방어 체제를 갖추었대. 이제 남제의 위세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거야.”“그들이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테니, 우리가 그들에게 공격을 퍼부을 차례야! 내일 참전 신청을 하러 가야겠어.”“나도 참여하겠어! 폐하께서 몸소 나서셨으니, 우리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야지.”그때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물었다.“그런데 황후마마께서는 회임 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네.”“계산해 보면 벌써 아기가 태어났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아이가 없어진 것 같군.”이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은 눈가가 붉어졌다.“남제를 지키기 위해 마마께서는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신 걸까…”“하늘도 무정하셔서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 슬픔을 안기다니. 우리가 불평할 말이 뭐가 있겠나.”“회임한 몸으로 전장에 나섰는데, 우리 같은 남자들이 숨어 있던 건 정말 부끄럽지 않은가!”대군이 돌아온 뒤 자원병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황궁에서는 대신들이 황제와 황후를 맞이하며 경의를 표했다.소욱은 손을 들어 말했다.“모두 몸을 일으키시오.”
사신들은 며칠 전부터 황성에 도착해 있었다. 모두 남제 황제가 소환하여 정전 배상 문제를 논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이미 전쟁을 지속할 수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남제가 정말 공격해 온다면, 그들의 국가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작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대하 같은 대국조차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대하 사신들은 장공주를 찾아가 양국 간의 조율을 부탁하고 싶어 했다.그러나 공주부의 문턱을 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사신들은 모여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만 내쉬었다.“하아…”“정말 남제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건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영토를 할양할 셈인가?”“다른 선택지가 있겠는가? 우리에겐 별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우리는 북연이 아닐세. 남제와 다시 전쟁을 벌일 만한 병력도 없어. 지금은 정전만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네.”사신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로, 마치 거대한 산을 짊어진 듯 숨도 제대로 쉴 수 없는 모습이었다.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면 애초에 전쟁에 개입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만 남았다.……달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밤이 깊어졌다.궁중의 연회가 끝난 뒤, 대신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봉부.봉 대인은 큰아들 집 앞을 지나가다 잠시 발길을 멈췄다.며느리가 봉 부인을 부축하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봉안진이 마차에서 내리자, 두 사람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봉 부인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구안이는 만나보았느냐? 어땠느냐? 다친 곳은 없더냐?”그녀는 낮에 대군이 개선할 때 직접 나가 보았지만, 사람들 틈에 가로막혀 가까이 가지 못하고 황후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만 멀리서 얼핏 보았다.황후의 아이가 무사하지 못했다는 소문을 들은 뒤로 그녀는 불안감에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봉안진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에게 좋은 말만 전했다.“황후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셨고, 황제께서도 잘 돌보고 계십니다.”“그럼 아이는? 아이는 무사한 거냐
봉구안은 소욱에게 숨길 것이 없었다.그녀는 솔직히 대답했다.“몇 통의 편지입니다.”소욱은 별다른 말 없이 편지 한 통을 집어 들었다.봉투 위에는 ‘구안, 나의 사랑’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것은 단회욱이 쓴 편지인가?”그 순간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만추가 뭔가를 감지한 듯했지만,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다.봉구안은 만추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물러가라.”“네, 마마.”내전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봉구안은 소욱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가며 단호히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폐하께서 깊이 따지실 필요가 없습니다.”소욱은 그녀의 손목을 붙들며 말했다.“내가 보고 싶다.”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그 자가 쓴 편지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그리고 네가 그 자에게 무슨 답을 보냈는지 알고 싶다.”봉구안은 잠시 주저하다 말했다.“폐하…”소욱은 그녀의 말을 끊고, 복잡한 눈빛으로 되물었다.“안 되느냐? 내가 보면 안 되는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봉구안의 시선이 서늘해졌다.“폐하께서 무슨 의도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소욱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는 그대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걸 알지만, 단회욱을 잊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봉구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맞섰다.“폐하께서 제가 과거의 정을 잊지 못할까 의심하시는 겁니까?”소욱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그는 오늘 술을 많이 마셨고, 그 취기를 빌려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그 약동이 나를 단회욱으로 착각하지 않았느냐? 네가 혼수상태였을 때 부른 이름이 바로 그 사람이었겠지. 내 생각이 틀렸느냐?”“위기 속에서 진심이 드러난다는데, 아마 너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가장 절박한 순간 네가 떠올린 사람은 나도 아닌 단회욱이었다.”봉구안은 시선을 떨구며 주먹을 꽉 쥐었다.“결국 그것이었군요.”소욱이 오랜 시간 깊
다음 날 이른 아침, 소욱은 봉구안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아마도 그녀는 또 일찍 일어나 무술을 연습하러 갔을 것이다.그는 궁인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었다.그때 유사양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폐하, 황후마마께서 아침 일찍 천옥에 가셨습니다.”소욱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천옥에 갔고?”천옥.봉구안과 담대연은 단 하나의 철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담대연은 벽에 기대 앉아 있었고, 그의 뒷벽에는 ‘거미줄’이라 새겨진 글자가 어렴풋이 보였다.빛이 비칠 때마다, 그의 모습은 한층 더 쓸쓸해 보였다.담대연은 봉구안을 보자마자 가볍게 입을 열었다.“황후마마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대체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봉구안의 눈빛은 날카로웠다.“동산국이 사신을 파견한 이유가 바로 너를 구하기 위해서다.”담대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구하든 죽이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이미 모든 것을 놓아버렸습니다.”“담대연, 남제에 남아 충성을 다할 생각은 없는가?”봉구안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담대연의 눈이 약간 흔들렸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았다.그러나 그녀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담대연은 다시 고개를 떨구며 비웃듯 말했다.“어찌 된 일입니까? 혹시 저를 죽이기엔 아깝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봉구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너의 재능을 알고 있으니 동산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어리석은 선택이다.”“남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그러니 너의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남제에 충성하거나, 아니면 죽거나.”담대연은 요지부동이었다.“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니까요.”“죽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자. 담대 가문의 명예까지 상관없다는 것이냐?”봉구안의 한마디에, 담대연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제 한 몸의 죽음으로 가문의 명예가 훼손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봉구안은 단념하지 않았다.“너
세상일이란 참 아이러니했다. 열무신은 한 발 늦게 도착했다. 그가 천옥에 도착했을 때, 모용길은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모용길의 시신을 바라보며 열무신은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고, 낮은 포효를 내뱉었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은 일찍 죽고 재앙은 천 년을 간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모용길 같은 자는 200살이 넘게 살다가 죽었는데, 맹성주 같은 이는 관례도 치르기 전에 죽임을 당했다. 이를 생각하니 열무신의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지만, 이 빚을 누구에게 갚아야 할지 알 길이 없었다.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열무신은 천옥을 나서자마자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기절해버렸다.황궁. 봉구안은 임시로 자진궁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임 중이었고, 점차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회임이 실감 났다.정말로 아이가 서서히 자라고 있었다. 소욱이 정해준 태의는 매일 그녀에게 와서 맥을 짚었다. 최근 그녀의 태상은 안정되어, 더 이상 안태약을 마실 필요가 없고 그저 조용히 쉬기만 하면 되었다.아이의 일에 대해서, 봉구안은 걱정하지 않았다. 약쟁이 사건도 이미 해결되어, 그녀의 큰 근심을 덜어주었다. 현재 유일하게 장미에 대해서만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장미의 옛 병이 재발할까 걱정되었다.그것이 만약 재발한다면, 그녀의 몸과 마음에 좋지 않을 터였다.봉구안이 이 일을 생각하고 있을 때, 황제가 도착했다. 소욱은 약쟁이 사건의 최신 진전을 가져왔다. 그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열무신이 붙잡은 그 사람들이 증명할 수 있다는구나. 이미 200년 전에 태조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하엿다. 모든 것이 모용길의 환상이었던 거야.”“짐은 이 사건의 모든 세부 사항을 대중에게 공개할 생각이다. 모용길이 남긴 큰 돈은 모두 약쟁이 매매로 얻은 것이야. 짐은 이 돈을 피해자들과 그 친척들을 위로하는 데 쓸 것이다.”“이에 대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그는 걱정이 가득했다.봉구안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이 조치는 백성
마지막으로 태조를 다시 보았을 때, 그는 이미 병석에 누워 숨이 끊어질 듯했다. [모용길... 내 아우야, 너는 내 마음을 알지. 짐에겐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많다. 새 정치를 세우지 못했고, 태자는 아직 어리지. 난 단지 하늘이 인색해서 짐에게 몇 년을 더 주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단 일 년이라도 짐이 일 년만 더 산다 해도 좋을 텐데... 남쪽의 수해, 북쪽의 기근, 남제는 사방에서 적에 둘러싸여 있고, 북연은 우리를 업신여기며, 내부에는 반적이 있는데... 어찌할까, 염라대왕이 목숨을 거두어 가니, 짐은... 그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구나. 아우야, 나라의 일을 모두 네 손에 맡기노니, 너는 태자를 보필하라. 너는 그의 고모부이자, 또한 그의 상부이니. 아우야, 짐은 오직 너만 믿는다.]기억 속의 태조가 눈앞의 그와 겹쳐졌다. 모용길은 낮은 목소리로 흐느꼈다. 그의 눈에 태조의 뒷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했다."형님! 형님께서 원하던 것을 제가 마침내 이루어냈습니다! 형님께서는 불로장생할 것이고, 이 남제는 반드시 형님의 통치 아래 번영하며, 장차 천하를 통일하여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당초 남제가 새로 세워졌을 때 태조는 약속대로 그에게 강산의 절반을 주려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태조의 뜻이 천하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태조와 계속해서 사방을 정벌하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태조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는 마침내 모든 짐을 내려놓고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다.모용길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팔을 뻗어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었다.여인은 몸을 숙여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에 대고, 그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인, 남은 길은 제가 당신과 함께 걸을게요." 모용길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함께..."
열무신은 이번에도 큰 공을 세웠다.그가 아니었다면, 또 누군가 새로운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그는 사로잡은 자객들을 직접 데리고 돌아와 천옥에 넘긴 뒤, 단 한숨도 쉬지 않고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자객들은 처음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하지만 모용길이 이미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그들의 희망도 이미 무너진 셈이었다.이내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저희는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폐태자를 노린 건 그 분의 ‘혈’ 때문이었습니다.”그들은 태조 황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불로장생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태조 황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백골이었습니다. 이백 년 전, 모용길이 시신을 도굴해갔을 때부터 이미 시체에 불과했습니다. 살려낼 수 있을 거라는 건, 망상이었어요!”“애초에 죽은 자였다고요!”그들이 그 이야기를 꺼낼 때, 말투에는 모용길을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이백 년이라는 세월 동안 쓸모없는 일에 목숨을 건 그를 그들은 미련한 바보로 여겼다.같이 심문을 진행하던 관리가 물었다.“너희는 어떻게 아는 것이냐?”“태조 황제께서 살아난 적이 없다는 걸 말이다.”“모용길이 그렇게까지 집착한 이유가 뭐였지?”자객들 중 한 명이 비웃듯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모용길이 약쟁이를 만든 건, 그들로 실험해 불로장생의 약을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을 제조한 의원들은 손수 기록을 남겼고, 그 손책들엔 분명히 쓰여 있었죠. 이백 년 동안 그들이 상대한 건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은 ‘시체’였다고요.”“아무리 약을 먹여도 살아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입니다.”다른 자객 하나는 공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모용길은… 이미 오래전에 미쳐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었어요. 마치… 마치 그 자리에 태조 황제가 서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에요.”또 다른 자객이 덧붙였다.“그 자는 단지 태조 황제를 살리려 한 게 아닙니다. 자신도 불로장생 하고 싶었던 거에요.”“그리고 그게… 그 자는 정말로 성공했
태황태후는 직접 선조를 만나기 위해 천옥으로 향하려 했다.하지만 황제의 명이 내려져 있었다.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모용길을 접견할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태황태후는 궁으로 전갈을 보냈다.하지만 설령 황제가 허락하더라도 모용길이 누구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그는 오직 태조는 아직 살릴 수 있다는 집념 하나에 사로잡혀 있었다.그런 그가 천옥에 갇힌 지금, 마음은 타들어가듯 초조했다.“그 어린 황제놈은 어딨느냐! 어서 나를 뵈러 오라 하지 못할까!”모용길에게 후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그는 생각했다.이 나라 남제는, 태조와 자신이 함께 세운 나라였다.그런 자신을 막고 있는 소욱 따위가 어찌 감히 군림한단 말인가.천옥에 갇힌 날부터,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소리쳤다.“태조를 살려야 한다! 어서 황제를 데려와라!”하지만 그는 몰랐다.그의 그 모든 고함과 분노는 소욱이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그를 흔들기 위한 계략이었단 사실을 말이다.그리고 다섯째 날.천옥의 간수가 냉정한 얼굴로 명을 전했다.“폐하의 어명이십니다.”“모든 죄를 자백하고 문서에 서명하지 않는 한, 이곳을 나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죽을 때까지 말입니다.”모용길은 두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허튼소리 마라! 그 어린놈이 과연 알기나 한단 말이냐, 내가 이 모든 짓을 왜 해왔는지를 말이다!”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나으리, 뭐가 그리 두렵습니까?”“자백했다고 당장 목을 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태조께서 하사하신 면사금패는 아직도 가지고 계시잖아요?”그 말에 모용길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그렇다.면사금패만 있으면, 그는 죽지 않는다.황제 따위가 그를 처형할 권한은 없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조를 다시 살려내는 것이었다.결심이 선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두 시진 후.모용길이 쓴 자백서가 궁으로 들여졌다.그 문서는 곧장 어전으로 올라갔다.문서를 넘겨받은 소욱은 한 장, 또 한 장 페이지를 넘길수
염 신의가 모용길의 상태를 진찰한 결과, 그의 몸은 웬만한 노인들보다 훨씬 건장했고, 외견상으로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폐하, 이 자가 망언을 일삼는 이유는… 실성, 즉 정신 착란 증세로 보입니다.”“나는 미치지 않았다! 미친 건 너희들이다!”모용길이 즉각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그리고 소욱을 향해 고함쳤다.“어서 저놈들을 다 내쫓아라! 나는 태조 폐하를 반드시 살려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모두 다 목이 날아갈 줄 알아라!”하지만 소욱은 모용길의 광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그저 곁에 있던 병사들에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붙잡아 두거라. 절대 도망 못 치게 해야 한다.”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모용길의 움직임을 단단히 제압했다.염 신의는 환자의 행동에 개의치 않으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실성이란 곧, 마음의 병입니다.”“이 병은 뇌와 정신의 균형이 무너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죠.”“예컨대, 저희는 백골을 보지만 이 자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그만큼 이 자의 마음속 집착이 깊고, 오래도록 그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이미 병이 뿌리 깊게 자리 잡았으니, 소인으로선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의술이란 외상이나 내상은 다스릴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속 병, 특히 집착이라는 건 손쓸 수 없는 법이다.그건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손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소욱은 여전히 ‘태조를 살려야 한다’며 중얼거리는 모용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그는 수많은 악행을 저질러 온 자였다.그러나 유일하게 태조에 대해서만은 지극한 충성과 집착을 드러내고 있었다.“저 자를 별실에 따로 가둬라. 아무도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명 받들겠습니다!”……자진궁.봉구안은 모용길이 실성 증세를 보였다는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가 본 그 백골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그 말인즉, 모용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단 얘
봉구안의 한마디가, 마침내 모용길의 본모습을 드러나게 만들었다.그는 쇠창살을 움켜쥐고, 당장이라도 눈앞의 사람을 갈가리 찢어놓고 싶다는 듯이 이를 갈았다.“이놈이! 감히 태조 폐하를 저주하다니!”“태조 황제 폐하께서 이 강산을 개척하지 않으셨다면, 너희 같은 것들이 무슨 자격으로 오늘날을 누리겠느냐!”“특히 너! 소가의 자식! 네놈이 정말 태조께서 살아계시길 바란다면 당장 본좌를 풀어라!”소욱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태조 황제께선 지금 어디 계시느냐.”모용길은 그를 믿지 않았다.“당장 날 풀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소욱은 억눌린 분노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태조께서 정말 살아계신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일이겠지.”“하지만… 그 전에 말해보거라.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반드시 밝혀야겠다.”모용길은 한참이나 소욱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그리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한 곳의 지명을 내뱉었다.“육지산.”그곳은 황성 내부에 있는 산이었다.소욱은 그 말을 듣자마자 직접 병사를 이끌고 현장으로 향했다.봉구안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모용길이 함정을 파놓았을 가능성, 또는 산속에 기관 장치를 숨겨놓았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녀도 소욱을 따라나섰다.한 시진이 지나, 일행은 육지산에 도착했다.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구름이 몰려들어 햇빛을 가리며, 마치 용이 잠든 연못을 둘러싼 기운처럼 음침한 기색이 피어올랐다.거센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키며 시야를 가렸다.소욱의 옷자락은 세차게 펄럭였고, 그는 고개를 들어 육지산을 올려다보았다. 눈빛은 칼날처럼 매서웠다.“산에 오른다. 태조를 찾아라!”“예!”그는 봉구안이 회임 중인 것을 고려해, 줄곧 옆에서 손을 뻗어 부축했다.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넘어질까 봐서였다.그러나 봉구안은 전혀 허약하지 않았다.오히려 그녀는 날쌘 걸음으로 병사들보다 먼저 앞서 나갔다.해가 저물 무렵, 마침내 병사들이 한 구덩이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폐하!
봉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둘째는 황실의 혈족을 해한 죄이다.”모용길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허, 무지한 계집이구나. 헛소리도 정도껏 하거라.”“폐하께서 절 죽이고 싶으시다 해도, 이렇게까지 억지로 죄를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그 얼굴에는 오히려 당당함이 어려 있었다.그러나 봉구안의 시선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네가 해한 이는 바로 태조 황제 곁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그 말에 소욱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모용길이… 태조의 측근들을?그녀는 어떻게 그런 것을 알고 있단 말인가?모용길의 웃음은 사라졌고, 시선은 무겁게 봉구안에게 꽂혔다.봉구안은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소욱이 언젠가 말했던 ‘옥비석의 재앙’.남제가 건국된 직후, 태조 황제를 지키던 측근들이 하나둘 기이하게 목숨을 잃어갔다.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옥비석의 반작용 때문이라 여겼지만… 봉구안은 단정했다.“그 죽음들은 전부 너 모용길이 꾸민 짓이 아니더냐.”그 말이 떨어지자, 모용길의 눈동자가 매섭게 떨렸다.봉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날카롭게 울렸다.그녀는 시선을 한 치도 피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내 짐작이 맞다면, 그 시절의 태조는 이미 병세가 깊었던 상태였을 거야.”“너는 불로장생의 방법을 찾기 위해 사술을 익혔고, 그 실험 대상으로 태조 곁에 있던 이들의 피를 썼지.”“다만 수많은 이들의 피를 말려 죽였는데도 아무런 효험이 없었을 거야.”“그러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옛 서왕, 지금의 서왕의 부친이셨던 거지.”그녀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그 피만이 태조의 몸에 반응을 보였을 거야. 그렇게 태조께서는 ‘살아 있는 시체’가 됐고, 넌 그때부터 계속해서 약쟁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 진짜 목적은 태조를 살리는 거였지.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다시 인간으로 되돌리는 것. 바로 그게 너의 최종 목표였을 거야.”모용길은 냉소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러나 봉구안은
그 노도사는 봉구안이 데려온 가짜 도사였다.사실 그는 타국의 평범한 백성일 뿐이지만, 실제로 삼백 년을 살아온 인물이기도 했다.이번 계책은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쓰였다.약쟁이 사건의 진짜 배후를 꾀어내기 위해서였다.봉구안은 확신하고 있었다.그 자의 진짜 목적은 불로장생.그렇기에 이번에는 반드시… 단번에 끝을 내야 했다.하지만 마음 한켠엔 조바심이 일었다. 그녀의 표정을 살핀 소욱이 조용히 말했다.“약이 식겠다. 먼저 약부터 마시거라.”……밤이 깊은 시각, 궁 밖에서 전갈이 날아들었다. 노도사를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소욱과 봉구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눈빛을 교환했다.그리고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폐하, 은이와 그 일행이 도사를 납치한 자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천옥으로 이송 중입니다!”소욱은 심장이 요동쳤다.진실을… 진실을 확인해야만 했다.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그는 봉구안과 함께 곧장 천옥으로 향했다.반 시진쯤 지나, 천옥.두 사람은 마침내 그 사내와 마주했다.노도사를 납치했던 자이자, 어쩌면 약쟁이단의 진짜 주모자일지도 모를 인물이었다.봉구안은 호위복으로 변장한 채 소욱 옆에 서 있었다.언제 어떤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기에, 그녀는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다.감옥 안의 남자는 매우 늙어 보였다.눈은 푸르스름하게 흐려졌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확실히 동방세가 그려낸 인물과 유사했다.그는 소욱을 바라보더니, 마치 이미 모든 결말을 알고 있다는 듯 두려움이라고는 없었다.“절 잡기 위해, 아주 큰 판을 짰다던데 과연 사실이었군요.”소욱은 감방 너머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네 정체가 무엇이냐.”그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모용길입니다.”소욱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직접 듣는 순간 잠시 멍해졌다.정말로… 이 남자가 그 전설의 모용길이란 말인가.이백 년을 살아온 그 인물이 맞다고?모용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당당한 눈빛으로 말했다.“
사월 하순, 약쟁이 사건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진범은 모용욱. 모용가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죄 방면되었고, 약쟁이단의 전원은 형장에서 참수당할 예정이라는 조서가 내려졌다.소식이 퍼지자 백성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입을 모았다.“아이고, 이 일도 드디어 끝났구먼!”“대리사에서 어지간히 수사를 잘했나 봐!”“모용가는 원래부터 수상했지. 다른 사람들은 몰랐다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그러게 말이야. 혹시 그 모용욱이라는 자, 그냥 바람막이 아니었을까?”이유야 어쨌든, 사건이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백성들은 안도했다.이제 다시는 길에서 납치당해 약쟁이로 끌려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해가 높이 뜬 봄날, 도성은 어느새 예전의 활기를 되찾았다.오월 초, 황성에 또다시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술집과 찻집, 사람들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같은 이야기가 나왔다.“그거 들었어? 얼마 전에 도성에 도사가 나타났는데, 불로장생의 비법이 있다며. 사람들이 그 집 문턱을 닳도록 찾아간다더라!”“거짓말이지. 세상천지에 불로장생이 어디 있어.”“근데 말이야, 그 도사 무려 삼백 살이 넘었대.”“두 왕조를 거치며 살아온 살아 있는 신선이라잖아!”“그래, 나도 들었어. 요새는 대신들이며 귀족들까지 줄줄이 찾아간대.”“오늘은 심지어 궁에까지 불려 들어갔다더라고.”“폐하께서도 믿고 계신다는데… 그럼 뭔가 있긴 있는 거 아냐?”그때, 누군가 문 밖을 가리키며 외쳤다.“저기 봐! 도사님 오신다!”거리 끝에서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이 보였다.작은 가마에 올라타 있었고, 네 명의 제자들이 앞뒤로 가마를 들고 있었다.그 뒤를 수십 명의 도사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따르고 있었고, 그가 지나가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도사님! 제발 불로장생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도사님, 전 장생은 바라지 않아요. 제 딸 좀 살려주세요. 병이 너무 깊어요.”“도사님은 백병을 다스리신다던데, 제발…”모두가 각자의